우크라이나 사태가 오리무중이다. 지난 5월 임시 대선을 통해 당선된 친서방 성향의 포로셴코 대통령은 국민 통합을 추진하기는커녕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자치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있다. 이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우크라이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 4개국 외무장관이 7월 2일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휴전 재개 조치에 합의했지만, 이마저도 신임 포로셴코 대통령에 의해 묵살된 분위기다.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내전 상태나 다름없다.
겉으로 보기에 우크라이나 사태는 친러 정권이 축출되고 친서방 정권이 수립되는 등 미국과 유럽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로, 미국이 동유럽에서 러시아에게 완전히 망신당하고 만 것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동유럽 우위 확보하고픈 미국
우크라이나 사태가 벌어진 구조적 원인은 미국과 유럽이 과거 소비에트 시절과 같이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로 재정난에 빠져있는 미국은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동유럽에서 러시아를 효율적으로 견제할 필요가 있다. 미국 오바마는 2011년, 아시아 중시의 “오바마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재정 문제로 국방비를 삭감할 계획이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방예산은 결코, 거듭 말하지만, 결코 줄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림 1> 우크라이나 현황(자료 : 세계일보)
다만 국가재정이 바닥난 미국이 아태지역에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미군 무력을 아태지역으로 집중시켜야 한다. 미국은 이를 위해 동부유럽에서 러시아 접경지역 요충지인 우크라이나에서 친서방 정권을 수립해 러시아의 관심을 이 지역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묶여있었던 동유럽국가들에 친서방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지원하는 방식은 반러 극우세력 양성을 통해 정권을 전복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위해 CIA의 외곽 조직으로 전국민주재단(NED)과 같은 조직을 결성, 유럽 내 신나치세력 등을 포함하는 극우주의 정당과 시민단체들을 적극 지원해 왔다. 이는 실제로 2003년 그루지야의 “장미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레몬혁명” 등으로 나타난 바 있다.
<민중의 소리>에 따르면,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야누코비치 정권 전복에 앞장선 스보보다(Svoboda:자유)당 같은 대표적인 신나치세력 역시 미국의 지원을 받는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친러 성향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실각 과정 역시 우크라이나 장악을 위한 미국식 정권 전복 전략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 내 반러 극우세력을 지원하고 나토(NATO)로 하여금 포로셴코 정권에게 군사력을 지원하게 하면서 친러 성향의 동부지역 주민들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있다. <그림 1>에서 보듯 우크라이나의 동부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 이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러시아계 주민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이 지역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친서방 성향을 띄는 우크라이나 서부지역과 정치적으로 갈등상태를 지속해왔다.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탄압을 지원하는 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들의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전술에 부합한다.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 요충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또다시 극우 신나치 세력에 의해 정권이 전복되고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까닭은 이곳이 러시아와 서유럽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동유럽의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갖고 있으며, 과거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 다음으로 큰 경제규모를 차지했던 연방국 중 하나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 산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따라서 “강한 러시아”를 외치며 소비에트 시절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와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동남부 흑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크림반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가 필요한 러시아에게 매우 중요한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에서 흑해 서남쪽의 터키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면 지중해로 나갈 수 있고, 지중해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 중동 아라비아해까지 진출할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지금까지 크림반도 세바스토폴 해군기지에 흑해함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반대로 서방의 입장에서는 소련 해체 후 장악한 동부유럽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특히 크림반도를 병합하게 내버려둘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때문에 크림반도에서는 수백 년 간 군사적 충돌이 자주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크림반도는 1853년, 남서쪽으로 세력 확장을 노린 러시아 제국과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 등이 맞서 싸우면서 약 3년 동안 최소 50만 명 이상 사망했던 치열한 크림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에 농락당한 미국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전략의 원활한 달성을 위해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을 세우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는 러시아의 전격적인 군사행동에 의해 완전히 망신당하고 말았다.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 내 극우 세력은 2014년 2월,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대신 러시아와 손을 잡은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반정부시위에 돌입, 친러 정권을 전복하고 우크라이나를 완전 장악하는데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3월 1일 전격적으로 군대를 동원, 흑해함대 기지가 있는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의 공항·정부청사 등 주요 시설을 장악해 버렸다. 러시아는 아예 크림반도를 러시아 연방의 84번째 구성원으로 병합해버렸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크림지역 주민 96.6%의 압도적 찬성을 받은 ‘러시아 귀속 찬반 주민투표’ 결과를 받아들여 크림반도의 러시아 연방 병합안에 3월 21일 최종 서명, 합병을 위한 법적 절차를 모두 마무리했다. 러시아는 한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고 이 지역을 사실상 접수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오바마가 3월 7일,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관료나 개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하고 자국 내 자산을 동결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할 때 “러시아가 미국과 맺은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의 합의 사항 이행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는 러시아 국영 방송 <리아노보스티>의 보도를 내보냈다. 말 그대로 핵무기 감축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은 셈이다.
<그림 2> 러시아 전투기‘ 수호이-24’기(왼쪽)와 미 구축함‘ 더널드훅’함. [사진=미 해군·위키피디아]
한편 미국의 군사적 대응은 러시아에 의해 완전히 농락당했다. 미국이 통상 훈련을 명분으로 흑해 연안에 파견한 미국 해군 구축함 ‘도널드쿡(Donald Cook)’호는 러시아 전투기 수호이(Su)-24 한 대의 초저공 근접비행에 혼이 빠지고 말았다. ‘도널드쿡’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과 어뢰 등 공격용 무기를 실은 구축함으로, 미국이 이 함정을 흑해로 파견한 목적은 사실상 러시아에 대한 무력시위였던 셈이다. 그런데 미국 국방부 설명에 따르면 러시아 수호이-24 전투기는 거리상으로 ‘도널드쿡’ 900m 이내 지점까지 근접했으며 고도상으로는 해상 150m 지점까지 무려 12차례나 위협 비행했다고 한다. ‘도널드 쿡’은 급히 루마니아 항구로 대피했으며 심리치료를 받던 승무원 27명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또한 <연합뉴스> 4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미국 국방부 관계자는 러시아 해군 호위함이 미 군함을 따라다니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말 그대로 미국의 “굴욕”인 셈이다.
미국이 3월부터 주도한 대러시아 경제 제제안은 지금도 실효성 논란만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얽힌 유럽 국가들이 자국 경제에 역효과를 우려하며 본격적 제재를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이 추가 제재에 적극적이지만 폭스바겐 등 독일 기업들이 제재를 반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러 경제제제안에는 러시아 경제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 만한 에너지 관련 기업에 대한 제제는 단 하나도 포함되지 못했다.
군사분야 제제도 사실상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와 맺은 군사 협력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포커스> 4월 1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기업 ‘BSMPO-AVISMA’는 미국 보잉사의 787 ‘드림라이너’에 들어가는 티타늄 부품의 40%를 공급한다. 러시아 울리야놉스크 지역엔 나토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연합군에 공급되는 물자의 60%가 거쳐 가는 환적 기지도 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3조 5천억 원에 달하는 ‘미스트랄’급 대형 헬리콥터모함 두 척을 인도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수행 중에 있다. 만약 미국과 유럽이 군사분야 제제에 돌입한다면, 이 역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푸틴이 오바마를 지미 카터로 만들어 버렸다”며 집권 시절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의 미국대사관 인질사건 등에 잘못 대응해 최악의 외교력으로 혹평을 받았던 카터 전 대통령과 비교하기도 했다.
패권 유지에 버거운 미국
러시아의 크림반도 편입 결정은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을 수립하여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안정적인 실행을 꾀하려던 미국의 구상에 상당한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완전히 병합함으로써 흑해함대의 안정적 주둔근거지를 마련하였으며 이를 통해 향후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가 러시아로 전격 귀속된 것은 러시아와 미국, 유럽 사이의 역관계를 면밀히 타산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승리라 할 수 있다. 푸틴은 줄곧 “강한 러시아”를 주장하며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반대해왔다.
푸틴의 주장에는 과거 소련시절 미국과 자웅을 겨루었던 최강의 핵 무력과 최신예 수호이 전투기 등 군사력이 뒷받침되어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미국을 상대로 핵무기 감축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았으며, 수호이 전투기가 미국 구축함을 위협 비행하는 등 과감한 군사적 조치로 미국을 농락했다.
반대로 미국은 러시아의 군사적 조치에 맞대응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미 국방부 예산은 2013년 3월 연방정부의 ‘시퀘스터(예산 자동삭감)’ 발동으로 인해 2012년 6643억달러에서 올해 5749억달러로 감소하게 된다. 2년 새 국방비가 13.5%나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향후 10년에 걸쳐 삭감해야 할 국방 예산은 약 6000억 달러에 이른다.
이로 인해 미군의 병력 운용의 감소가 불가피하다.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2015년 미 육군 병력을 현행 52만명에서 내년 이후 44~45만명까지 줄일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보유한 지상군 병력의 최저 수준이다. 미 해군은 11개 항공모함 중 하나인 핵추진 항모 ‘조지워싱턴함’을 조기 퇴역시키라는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5월 임시 대선을 통해 수립된 친서방 성향의 우크라이나 포로셴코 정권이 유럽연합과 경제협정을 다급하게 체결한 사실, 그리고 포로셴코 정권 등장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러시아계 주민들에 대한 무력 탄압이 더욱 거세졌다는 사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직접군사력을 동원할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세계 패권의 균열은 이제 현실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패권 유지를 위해 아시아 태평양으로 힘을 집중할 것을 부르짖었지만 전통적 대러 전선인 우크라이나에서 힘의 공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지금 미국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