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느닷없는 멸망과 끈질긴 부흥 운동
그러면 당시 백제는 어땠을까요?
655년 백제 의자왕은 대륙의 사정은 전혀 모른 채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당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신라와의 전쟁을 잠시 멈추고 민생을 챙기자.”는 귀족들과의 대립이 격화되자 왕자 41명에게 몽땅 좌평 직위(1등급, 장관급)를 주며 주요 보직을 채워 넣는 개혁을 단행한 것이죠. 아니 의자왕 당신은 대체 부인이 몇이기에 왕자가 저토록….
이에 다수의 대신들은 쫓겨나거나 투옥되었는데, 대야성을 함락시킨 윤충 장군의 형인 좌평 성충(부여 성충)은 옥사할 정도였고, 동생들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린 태자 부여융은 왜국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사서에서는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칭송받던 의자왕이 신라에 연이어 승리하자 방자해져서 사치와 향락을 즐기다가 망했다고 나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학적 사관에 입각해 쓴 것이며, 승리한 측에서 패배한 왕을 몹쓸 인간이라고 매도해야 그 전쟁의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낙화암에 떨어졌다는 삼천궁녀 이야기 역시 가리지날입니다. 옛 사서엔 그런 기록이 없고, 조선 문신 민제인(1493~1549)이 부여를 구경하며 지은 시 ‘백마강부’에서 처음으로 수없이 많은 궁녀가 있었다는 의미로 삼천궁녀를 읊었던 거예요. 그후 이 문구가 널리 인용되면서 잘못 알려진 것이죠. 실제로 인구가 더 많았던 조선시대에도 궁궐 내 궁녀 수가 채 600명이 되지 않았거든요.
당시 젊은 친위 부대를 동원해 판을 엎은 의자왕은 실로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예전 수나라 대군도 고구려에 패했고 10년 전 당나라도 패배했으니 중국 세력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당 대신 고구려를 파트너로 삼아 신라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겠지요.
그런 의자왕에게 뜻밖의 비보가 날아오니 660년 7월, 당나라 13만 대군이 백강 하구에 나타났고 신라군도 탄현 고개를 넘어오고 있다는 것이었죠. 아니,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당시 백제도 대외정세에 아예 무심한 나라가 아니었는지라 당군과 신라군의 동태를 보고 있었는데, 애초 당군도 인천 쪽으로 항해했고 신라군도 북서쪽으로 진군해 서해안 덕물도(인천 덕적도)까지 갔기에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준비하는 줄 알았던 거지요.
하지만 의자왕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각지로 군사를 요청하는 파발을 보내는 한편, 옥에 갇혀 있던 좌평 흥수에게도 자문을 구했는데, 문제는 당군과 신라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나 빨라 그 어떤 대책도 이미 시기가 늦어버린 겁니다.
당군은, 늘 문제가 되던 보급은 신라군 5만 명이 식량을 싣고 합류하기로 했기에 가벼운 군장으로 금강 입구에 상륙해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을 향해 수군은 배를 타고, 기병은 강 양쪽을 따라 동시에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의자왕은 친위 쿠데타에 참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달솔(2등급)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와 함께 신라군을 저지하라고 지시하고, 계백 장군은 황산벌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계백 장군의 성이 ‘계’ 이고 이름이 ‘백’이라고 알지만 그건 가리지날이에요. 과거 MBC 드라마 ‘계백’에서도 그리 나왔지만, 실제 이름은 부여계백 또는 부여승이에요. 왕족 집안인 거지요.
많은 분들이 백제가 말년에 망조가 들어서 군대가 5000명밖에 없었는 줄 아시는데, 그건 사정이 좀 있어요. 당시 전쟁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당수 군대는 신라와의 최전선에 나가 있었고 지방에 있던 귀족들의 사병은 불러오지 못한 상황이라 그런 겁니다. 중국 군대가 보급 문제로 매번 철군한 것을 잘 알던 의자왕이 5000명을 뽑아 신라를 막게 하고, 그보다 더 많은 군사는 당군과 싸우게 하지만 1만 여 명이 백강에서 전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현대에는 계백이 출정 전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다 죽여 군사의 사기를 높인 것에 대해 칭송하는 분위기이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어요. 아직 아이들이 어렸기에 전투에 데려가지 못해 죽인 것으로 보아 젊은 장수로 추정되는데, 고려, 조선시대 학자들은 “아무리 충성심의 발로라지만 제 피붙이를 죽이는 건 천륜에 어긋난 행위”라고 아주 비판했다네요.
또한 황산벌이란 이름 때문에 너른 평지에서 백제군이 신라군과 격전을 벌였다고 상상하지만, 계백은 신라군이 당군과 제시간에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당군이 철수하도록 해야 했기에 벌판에서 맞대결을 펼치지 않고 황산벌로 들어오는 고갯길에 3개 진영을 차리고 신라군의 진격을 막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즉 시간 끌기 전술로 상대의 진격을 며칠이라도 막아내는 것이 최종 목표였어요. 흔히 정신력만 있으면 능히 승리한다고들 하지만, 어떤 전쟁이건 무모한 돌격은 대부분 패전으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이에 백제군은 지형의 유리함을 바탕으로 필사적인 방어전을 전개해 하루에 4번 싸워 4번 이긴 것이지요. 그러자 시간에 쫓기던 신라군도 결국 특단의 대책을 내니, 김유신 장군은 다 친인척 관계인 장군들에게 자식을 희생시킬 것을 주문합니다. 본인에게도 조카들인데 말이죠.
당시 백제나 신라나 장렬한 가족 희생을 통해 전황을 역전시키려고 한 것은 참으로 숙연한 장면이지만, 지금으로 치면 10대 청소년이던 이들 화랑은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이에 먼저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 장군의 아들인 반굴이 나서지만 곧바로 사망하자, 뒤이어 김유신처럼 가야계 진골인 김품일 장군의 아들인 관창이 나섰다가 사로잡힙니다. 계백은 잡혀 온 관창의 투구를 벗긴 후 깜짝 놀랐다지요. 아마도 본인 손에 죽은 아들이 생각났을 겁니다. 이에 소년 관창을 무참히 죽일 경우 닥칠 결과가 눈에 보여 2번 되돌려 보내지만, 임전무퇴를 외치며 돌격하는 관창을 어쩔 수 없이 베고 맙니다. 다만 최근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 화랑이 혼자서 돌격한 것이 아니라 수십여 명의 돌격대를 이끌고 소규모 기습작전을 벌이게 했을 것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사실이 어떻든 16세 꽃다운 나이에 용감히 전사한 김관창 군은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되나, 먼저 솔선수범한 화랑 선배 김반굴 군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처럼 장군들이 10대 아들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본 신라 군인들이 감복했는지, 아니면 ‘오늘 못 이기면 내 목도 날아가겠구나.’하는 절박감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계백과 5000 결사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함께 참전했던 더 고위직인 백제 좌평 20여 명은 포로로 삼습니다.
이후 당군과 신라군이 만나 사비성을 포위하는데 소정방은 신라군이 늦게 도착해 차질을 빚었다며 신라 선봉부대 김문영 장군의 목을 베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김유신이 분기탱천하여 도끼를 들고 “당군부터 처치하고 백제를 멸하겠다.”고 맞받아치며 부당한 지시를 막아냅니다. 조카들까지 죽이고 겨우 왔는데 그딴 대접을 하다니요. ‘한·중은 동반자 관계’라면서도 틈만 나면 갑질하는 건 뭐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네요.
이런 상황에서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함께 사비성을 버리고 북쪽 웅진성으로 달아나 항전을 준비합니다. 예전 장수왕의 침공에 맞서 끝까지 항전한 웅진성이 수비하기에 더 좋았고, 지방에서 올라올 응원군으로 사비성의 당군을 포위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거라네요. 그러나, 성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배신자 예식진이 의자왕과 태자를 묶고 항복해버리니 불과 개전 10일 만에 백제가 멸망하고 맙니다.
이후 의자왕과 왕자, 귀족들은 당나라로 압송되고 스트레스를 받은 의자왕은 곧 사망하나, 의외로 백제 왕족들과 귀족들은 당에서 귀족으로 편입되어 잘 먹고 잘살게 됩니다. 패망한 나라에서 끌려갔으니 노예로 일생을 살았을 것 같지만 이처럼 대우한 것은, 당이 황제국으로서 항복한 자에게도 이렇게 잘 베푸는 국가이니 앞으로 당군이 공격하러 가면 결사 항전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는 게 신상에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지요.
이는 신라가 가야 각국을 멸망시키면서 가야 왕족을 진골 계급으로 편입한 것이나, 1910년 조선이 망할 때 왕족들과 친일 세력들은 일본으로부터 작위 받고 돈 받아 잘 먹고 잘살았던 것과 동일합니다.
일제 치하 당시에 조선총독부의 경리 담당자가 이들 조선 왕족과 친일 귀족들이 어찌나 돈을 잘 썼던지 재정 관리하느라 애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반면 백제 땅에 남은 백성들만 학살과 착취를 당하게 되니, 다수가 왜국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백제가 바로 멸망하진 않습니다. 당군과 신라군은 기습 공격으로 백제 왕을 사로잡아 승리했다고 기뻐했으나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대의 지방 귀족 세력들이 일제히 봉기해 부흥 운동을 시작하거든요. 다만 지금의 전남 지역은 봉기가 없었다는데, 이 지역은 100여 년 전까지 마지막 마한 본거지로서 대항하다가 백제에게 흡수당한 처지였기에 백제의 멸망을 그리 안타까워하지 않았다네요. 누가 오건 다 정복자였을 테니까요. 이 같은 정서는 250여 년 뒤 후삼국 시절에 왕건의 후고구려 수군이 나주 지역을 점령해 후백제와 대치할 수 있었던 배경과도 이어지는 거예요.
당시 부흥군의 위세가 절정일 때는 200여 성을 차지해 오히려 당군과 신라군이 포위되는 지경이 되는데, 661년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사망이 실제로는 백제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만약 이때 제대로 반격해 당군을 몰아냈다면 왜국에서 돌아온 태자 부여풍이 백제를 재건할 수 있었겠지만,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 왕자가 복신을 죽이는 등 내분이 터지고, 663년 일본에서 온 왜 구원군마저 백강(또는 백촌강) 전투에서 당-신라 수군에게 전멸하면서 마지막으로 부흥군의 거점은 임존성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임존성을 깨뜨린 이는, 애초 임존성에서 거병해 부흥 운동을 시작했다가 당에 항복한, 임존성의 약점을 잘 알고 있던 흑치상지 본인이었어요. 이렇게 백제 부흥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는 반면, 일본에서는 663년이라고 보고 있지요.
그런데…, 백제는 그후 또 한 번 멸망하게 됩니다. 으잉? 그게 뭔 소리냐고요?
《삼국사기》에 백제 멸망에 대한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중국 기록을 옮긴 듯한데 “이로써 백제는 각각 신라와 발해에 의해 멸망했다.”라는 거예요. 당시 김부식도 이 글에 주석을 달아 “백제가 이미 신라에 망했는데 발해에게 망했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당혹해합니다.
이 의문은 2004년 중국 시안(옛 장안, 당나라 수도)에서 부여태비의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해결됩니다. 의자왕의 증손녀인 이 여인은 711년 당나라 황족이자 괵왕으로 책봉된 이옹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장남 이거가 괵왕 지위를 이어받아 731년 태비(왕의 어머니)로 책봉되었는데, 그녀의 묘지석에 따르면 당은 백제 유민들에게 건암고성(옛 고구려 요동 방어성 중 하나) 땅을 내주며 기존 백제 땅에서 신라에 밀려 철수한 웅진도독부를 다시 열고 백제 태자에게 자치를 허용했다는 것이죠. 또한 흑치상지 장군이 이끈 백제 유민군은 토번(티베트)의 침략에 맞서 연이어 대승을 거두는 등 당을 위해 헌신합니다.
중국 사서 〈자치통감 202권〉에 따르면, 요하 바닷가 건안고성은 예전 백제 연고지였기 때문에 이곳에 웅진도독부를 새로 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그곳이 유리왕을 피해 비류와 온조 왕자가 배를 타고 떠난 곳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이에 당나라 곳곳에서 다시 모이게 된 백제 유민들로선 새로운 백제의 건국으로 환영했지만, 당나라의 속셈은 지속적인 통치가 어려운 만주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상대로 방패막이를 하란 의미였지요. 이후 150여 년이나 건재한 요서 백제(소백제)는 820년대 어느 날 발해 10대 왕, 선왕(재위 AD818~830)의 공격에 함락당해 또다시 멸망하고 말았으니, 마지막 백제왕 이름은 경왕이라고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 고구려―내분으로 허무하게 망하다
자, 이처럼 백제가 망하면서 동맹을 잃어버린 고구려는 어찌 되었을까요?
당은 돌궐과 거란을 무력화한 데 이어 백제까지 멸망시켜 고구려 동맹 국가를 정리하자 곧장 다음해인 661년 고구려 2차 침공을 감행하지요. 이에 소정방이 이끄는 백제 주둔 당군도 본토에서 바다를 통해 평양으로 직공할 당 수군과 만나기 위해 북상하고 신라군도 보조를 맞춥니다.
이에 소정방이 가장 먼저 배로 평양성 앞까지 도달해 전투를 벌이지만 애초 오기로 한 본진 5개 군 중 2개 군이 돌궐 반란을 막으러 방향을 트는 바람에 남은 군사들만 남하하다가 연개소문에게 걸려 방효태 사령관과 그의 아들 13명이 모두 전사할 정도로 대패합니다. 이에 평양성 앞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소정방 군은 고립되어 배를 쫄쫄 굶다가 노구를 이끌고 달려온 김유신과 신라군이 추운 겨울(662년 음력 1~2월)에 고생고생해 가져온 식량을 맛있게 먹고 퇴각하고 맙니다. “어이~, 소장군! 우리가 어? 배달의 민족이라꼬 어? 이런 배달시키는 기가? 니가 생각하는 그 배달이 아이거든?” 이렇게 씩씩거리며 퇴각하던 신라군을 고구려군이 경기도 과천 부근에서 공격하지만, 역습을 당해 1만 명이나 전사하고 말았다는군요. 오랜 전쟁에 잔뼈가 굵은 신라군도 호락호락한 군대가 아니었던 겁니다.
애초 고구려의 정복을 원한 건 당나라였고, 백제 정복을 원한 건 신라였기에, 당나라가 성급히 백제 땅에서 주력군을 빼며 북상하자 백제 부흥군이 크게 떨쳐 일어나죠. 하지만 663년 당-신라 연합군과의 백강 해상전에서 백제-왜 연합군은 모두 바다에 잠겨버립니다.
이처럼 백제를 다시 평정하면서 숨 고르기 하던 당은 고구려 재침공을 망설이게 됩니다. 당태종의 1차 공격 때엔 요동 방어선 안시성 하나를 공략하지 못해 실패하고, 지금의 황제 명령으로 진행한 2차 공격에선 배를 타고 요동을 건너뛰어 평양으로 갔다가 연개소문에게 다시 패배하면서 고민에 빠진 것이죠.
그러던 당에게 희소식이 날아옵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형제들끼리 싸움이 터진 겁니다.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에선 연개소문이 663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연남생의 묘비에는 657년에 대막리지를 승계한 것으로 나와 그때 연개소문이 사망한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3형제에게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다투지 마라. 그러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신신당부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이 남아 있지만, 권력을 한 자식에게 몰아줬어야 하는데 셋 다 고만고만한 권력을 나눠 갖는 불안정한 상태로 남겨둔 것이 그만 불행의 씨앗이 된 거지요.
이후 두 동생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은 장남 연남생을 내쫓아 버리자 배신에 치를 떤 연남생이 국내성을 비롯한 북방성 6개와 10만 호를 데리고 당에 투항하고 맙니다. 고구려 인구가 69만 호였다고 하니 15% 가까이 사라진 겁니다. 게다가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남쪽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해버리죠. 이 같은 찬스에 환호성을 올린 당고종이 667년 즉각 출정을 명령하니 50만 명을 동원한 3차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3차 전쟁은 너무나도 당에게 유리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탄 연남생은 길을 안내하고 거란은 군사와 물자를 제공했으며, 고구려 내에서도 요동 방어선 신성 등이 스스로 항복하는 등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다급해진 고구려가 요동 지역 전 군을 동원해 격돌하지만 5만 명이 전멸하면서 천리장성도 무너지자 옛 북부여 지역도 고스란히 투항해 압록강 북쪽은 완전히 당의 손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에 대막리지 지위를 찬탈한 둘째 연남건이 주축이 된 고구려군이 저항하지만, 결국 평양성 앞까지 당군이 도달하고 신라군도 무려 20만 명이나 큰 피해 없이 평양성까지 북상합니다. 이에 고구려군은 식량 배달 부대이니 약할 것이라고 생각해 신라군을 먼저 맹공격하지만, 오히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며 고구려의 마지막 희망을 깨버리죠.
영화 ‘평양성’에선 마치 신라가 아무런 전투 없이 어부지리로 이기는 것처럼 나오지만, 고구려 정예병을 부수어버린 신라군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당나라와 일대 결전을 할 자신감이 생겼지 않았나 합니다.
그후 한 달여 간의 공성전 끝에 평양성이 함락되는데, 그동안은 중국군이 보급 문제로 무너졌다면 이때는 고립된 고구려군이 식량이 떨어지면서 보장왕 등이 먼저 항복을 하고 연남건과 연남산 형제만 끝까지 저항합니다. 이에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한 신하들이 각종 보물을 실은 배를 대동강에 띄우나 이 배는 뒤집혀 가라앉아버리지요. 당시 고구려의 밤하늘을 그렸다고 하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비석 역시 대동강에 가라앉았지만, 그후 이성계가 집권한 조선 초 누군가가 그 탁본을 바치며 다시금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어쨌거나 당나라는 주변 국가 중 가장 강대했던 고구려를 점령하면서 이제 대업이 완성되었다고 믿고 드디어 마지막 야욕을 드러냅니다.
- 당의 입장―모든 계획이 당나라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듯했으나
자 어떻습니까? 이제 삼국이 통일된 걸까요?
아뇨,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삼국이 통일되었다는 건 가리지날.
그후 사정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갔고 하마터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 먹힐 대위기가 오지만 국제 정세에 눈을 뜬 신라가 당나라에 먼저 선빵을 날리는 7년간의 ‘나당전쟁’을 전개함으로써 비로소 삼국통일이 완료되었습니다.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삼국 중 어느 나라도 혼자 힘으로 삼국을 통일할 수 없었기에 모두 외세를 끌어들였습니다. 고구려는 넓은 땅과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것 같았지만 서쪽 중원 제국에 비해 국력이 약했고, 남쪽의 백제, 신라, 북쪽의 여러 이민족 등 다양한 전선에 분산되어 한쪽으로 힘을 모을 수 없었습니다.
평화를 지향한 것 같은 백제는 오히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중국을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외교전을 오랜 기간 펼친 반면, 신라는 백제의 맹공 앞에 나라가 무너질 상황이어서 고구려건 왜국이건 당나라건 어디든 백제를 멸망시켜줄 동맹을 찾는 것이 가장 급한 목표였고, 그 목적 달성을 도와준 당의 요구에 응해 고구려의 멸망까지 지원해준 것입니다.
사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은 신라가 아니라 중국의 뚜렷한 천하관이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수나 당 모두 통일된 새 왕조에게 해가 될 주변 국가를 사전에 정리해 중국 중심의 천하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변 국가 중 가장 두려워한 것은 북방 흉노 등 유목민이었고, 두 번째 위협이 문명국가이자 군사 강국인 동방의 고구려였습니다. 그후 고구려를 도울 수 있는 주변 국가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해 돌궐, 거란에 이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드디어 고구려를 손에 넣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의 입장을 보면 최종 목표인 고구려 정복을 위해 주변 동맹국을 먼저 제거하는 가운데 안정적인 보급을 지원해줄 나라로 백제와 신라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더 절박한 신라를 이용해 먹은 이이제이 전법을 쓴 것이에요.
게다가 생각보다 신라군이 강군이기도 했고요. 당나라가 고구려만 손에 넣으면 이제 더이상 요구를 안 할 것이라고 기대한 신라에게 당은 철저히 배신을 때립니다. 663년 백강 전투를 끝으로 백제 부흥군이 와해되었음에도 애초 신라에게 주기로 한 백제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두어 장안으로 끌고 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데려와 도독으로 앉히고, 신라는 계림대도독부라 칭하며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하고 부여융과 화합하라고 한 것이죠. 즉, 당은 신라를 망한 백제와 동급으로 대우해 슬쩍 당나라 땅으로 만들려고 한 겁니다.
이에 신라는 칼을 갈기 시작합니다.
- 왜국의 사정―본토 항전을 준비했는데, 왜 안 쳐들어오지?
본격적인 나당전쟁에 앞서 남북동맹의 마지막 국가, 왜의 사정도 알아봅시다.
신라가 끝내 당에게 굴복했다면 한반도 전역은 당나라 땅이 되었을 것이고, 당은 왜국을 공격한다며 신라군을 동원했을 겁니다. 이는 이후 몽골이 고려의 항복을 받은 뒤에 요구한 것과 같은 수순인 데 돌궐-고구려-백제-왜로 연결되는 마지막 악의 축, 왜까지 정복하면 동방은 당의 천하가 되는 것이었겠지요.
왜국 역시 이 같은 상황이 예측되었기에 사전 방어를 위해 661년 부여풍 왕자를 돌려보내며 5000명의 군사를 파병한 데 이어 663년 2만 7000여 명을 더 보내지만, 수군의 실력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것을 깨닫고는 본토 항전 태세에 나섭니다.
왜국은 본토 방어를 위해, 지금은 학업의 신을 모시는 텐만구로 더 유명한 규슈섬 후쿠오카 남쪽 다자이후에 제2의 수도를 건설하고, 규슈 전 지역을 방어 요새화하는 작업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기다렸건만 당-신라 연합군은 오지 않아요. 그건 예상치도 못하게 신라가 당의 야욕을 박살낸 나당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놔~, 니뽄이노 쓸데없이 개고생만 했다데스!
그후 왜국은 더 이상 당이나 신라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는 상황을 파악한 뒤 당에게 유화 제스처를 보내며 공손하게 2등급 레벨 국가로서 나라 이름을 두 글자 ‘일본’으로 바꾸고 서서히 중국으로부터 직접 문화를 흡수하며 그동안 문화 스승으로 모시던 한반도와 결별 합니다.
- 통일 전쟁은 이제부터―알고보자, 나당전쟁
자, 이제 다시 마지막 주인공 신라 차례입니다.
신라는 당나라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일단 추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당군이 고구려 유민들을 마구 끌고가면서 마찰이 빚어지고,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주변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봅니다.
게다가 당나라가 고구려 전쟁에 집중한 사이에 토번(티베트)이 급성장해 669년부터 본격적으로 당과 마찰을 빚기 시작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미 토번은 그 이전부터 당을 공격해 당나라에선 641년 문성 공주를 토번 송첸 캄포 왕에게 후처로 시집을 보내며 화평을 청하게 되니, 지금도 티베트 라싸에 굳건히 서 있는 거대한 포탈라궁은 문성 공주를 위해 지어졌다고 하지요. 이처럼 급성장하던 토번과 당의 전면전이 임박해지면서 당이 계속 한반도에 주력 부대를 주둔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이 같은 면밀한 준비 끝에 신라는 나라의 운명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니, 몰래 고구려 부흥군을 도울 뿐 아니라 백제 유민들도 다독이며 ‘삼한일통’이란 기치하에 삼국이 힘을 합쳐 당에 대항하자는 분위기를 만들어 갑니다. 지금 우리는 삼한이라고 하면 마한, 변한, 진한을 떠올리지만, 당시엔 삼한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가 되었다고 여겼고, 이후 고려 역시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외쳤죠. 이는 이후 조선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과거 삼국을 이은 정통 황제국이라고 선언하고, 현대에도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이름에 ‘한’자가 쓰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특히 안시성 등 요동의 여러 성들은 평양성이 함락된 뒤에도 굳게 문을 닫고 항전하는 상황이었기에 이들과 연결만 된다면 당군을 포위해 만주 지역까지 장악할 수 있는 상황!
이에 드디어 신라는 670년 3월 설오유 장군이 지휘하는 1만 명 정예병을 뽑아 고연무 장군의 고구려 부흥군 1만 명과 힘을 합쳐 압록강을 건너가 요동반도 오골성을 깨뜨리는 선제공격을 감행해 나당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안시성을 향해 나아가던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당군의 거센 공격을 받아 산화하면서 671년 안시성 등 요동의 고구려 성들이 모두 함락되고, 당군은 대동강 유역까지 밀고 내려옵니다.
하지만 설오유 부대가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신라 주력군은 백제 땅에 남은 당군을 공격합니다. 또한 고구려 부흥군 역시 672년 호로아 전투를 끝으로 내분이 발생해 왕자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자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대거 익산지역에 정착시켜 백제 유민들을 견제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백제 지역을 일단 정리한 신라는 당군과 황해도 지역에서 격돌하지만 당군의 거짓 후퇴에 속아 깊숙이 진출했다가 참패하고 말지요. 이 석문 전투에서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죽으려 했지만 부하의 만류로 살아왔다가 아버지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매몰차게 의절당하고, 673년에는 김유신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어머니가 막아서는 등, 신라 지배층은 무섭도록 대동단결합니다.
그후 신라는 직접 대결은 피하고 성을 쌓고 활을 이용한 수비 전술로 일관하는데, 675년 9월 당이 최후의 대규모 공세를 펼쳐 20만 명이 매소성을 공격하지만 신라군이 대승을 거두지요. 게다가 당나라 서쪽에서 일어난 토번은 670년부터 당과의 전투를 시작해 676년에는 당 국경을 넘어오기 시작하니, 아무리 당시 초강대국인 당이라도 동시에 2개의 전쟁을 벌이기는 힘든 상황이 됩니다.
이에 당은 수도 장안과 더 가까운 토번의 공격을 막는 것이 시급해져 철수하게 되는데, 신라군이 이를 추격해 기벌포 해전에서 다시 격퇴함으로써 다시는 신라 땅에 돌아올 생각을 못 하게 만들며 드디어 삼국통일 전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이죠.
- 결론―당의 야욕을 꺾고 한반도만이라도 지켜낸 신라의 승리
어떻습니까? 당에 빌붙어 치사하게 같은 민족 국가 두 나라를 무너뜨렸다고 보기엔 신라도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요?
나라의 생존을 위해 초강대국 당과 손을 잡았지만 신라까지 넘본 당을 상대로 마지막 전쟁을 벌인 신라는 토번과 당의 전쟁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백제와 고구려 땅에 주둔한 당나라 군대를 시간차 공격을 통해 효과적으로 막아내어 하마터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 영토가 되는 위기를 극복해냅니다.
반면, 당나라는 645년 고구려 침공 이후 30여 년간의 전쟁을 통해 고구려는 멸망시켰으나 결국 만만히 봤던 신라에게 큰코다치게 되었고, 만주 지역 당군이 줄어든 힘의 공백을 틈타 698년 대조영이 만주 동모산에서 새로이 발해를 일으키니, 결국 모든 것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버리고 맙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후로 그 어떤 중국 한족 왕조도 긴 보급선 문제로 인해 한반도 왕조를 힘으로 무너뜨리지 못한 것을 감안해보면, 고구려 연개소문이 신라와 화평을 맺어 전선을 북방으로 한정하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더 분전해서 몇 년만 버텼으면 당나라가 결국 토번과의 전투를 위해 철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만주 영토 영유는 계속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가정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미 일어난 과거 역사에서 의미를 찾아본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시 세계 초강대국인 당나라의 야욕을 꺾고 하나의 왕조로 새출발 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는 첫 단추를 끼웠다는 점에서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후 신라와 발해는 서로 그다지 교류 없이 살아갔지만, 최근 들어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로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를 쓰면서 발해를 다시 주목하기 전까지는 그저 지금의 중국, 일본처럼 발해말갈이라 부르며 말갈족 역사로 치부하다가 멸망 후 800여 년 만에 비로소 우리 역사로 인식한 것인데,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상 조홍석 선생님(?)의 삼국통일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첫댓글 초반부만 읽었는데..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사는 승자편에서서 기록이됨니다
백제 의자왕 3천궁녀는 신라에 의해서 꾸며낸 이야기
백제충신 흥수와 성흥 두충신만 있어어도
흥수와 성흥 두분이 백제는 기물포(지금 군산 장항사이바다) 탄현 (예천에있는 식장산)을 지키라 했는데
역사 공부하고 갑니다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백제의 멸망은 무언가 내부의 문제가 있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