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다시 갈라선 삼국과 고려의 재통일
드디어 후삼국시대로 넘어옵니다.
통일신라는 서라벌 왕족과 귀족 이외의 사람들에겐 출세길이 막힌 나라였고, 중앙집권화도 덜 된 국가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방에 파견된 귀족들이 알아서 다스리는 지방분권이 가속화 되면서 수탈이 늘어납니다. 특히 장보고처럼 신분에 의해 출세가 좌절되는 상황이 결국 반란으로 연결되었고, 그중 두각을 나타낸 견훤, 궁예에 의해 다시금 나라가 쪼개지니 이를 후삼국시대라 칭하게 되지요.
- 견훤의 탄생 신화
신라 말기 수많은 반란이 있었으나 900년 견훤의 후백제 건국을 후삼국의 시작이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견훤은 원래 신라 장군으로서 지금의 전남 지역 해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아 파견되었으나 892년 반란을 일으키고 899년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해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900년 당시 호남지역 최대 거점인 전주성을 점령한 뒤 드디어 국호를 백제로 정하고 백제의 부활을 선언했지요. 따라서 당시엔 엄연히 백제국이라 불리었으니 나라 이름이 후백제라는 건 엄밀히는 가리지날 정보예요.
견훤 역시 왕조를 열면서 자신의 남다름을 과시하게 되는데요, 그의 탄생 신화는 지금까지의 신화와는 남다릅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기엔 아버지 아자개가 멀쩡히 경북 상주 호족으로 잘 지내신 분이다 보니 《삼국사기》에는, 어린 시절 부모가 농사일을 하면서 아기 견훤을 잠시 나무 밑에 두었는데 지나가던 호랑이가 젖을 먹여주었다고 되어 있지요. 이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레무스가 늑대 젖을 먹었다는 것과 아주 유사한 방식입니다. 우리나라에선 호랑이가 제일 무서운 맹수인 반면, 이탈리아에선 늑대가 제일 무서운 맹수였으니 그런 맹수조차 이미 떡잎부터 알아보고 젖을 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 거지요.
- 궁예의 탄생신화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해 한반도 중부를 평정한 후, 왕건에 의해 쫓겨난 궁예 역시 탄생 신화가 있지요.
탄생 신화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후고구려라는 표현 역시 가리지날입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옛 고구려와 헷갈리지 않게 하려고 앞에 ‘후’자를 붙인 건데, 고구려 역시 장수왕 이전 고씨 고려의 옛 이름을 쓴 것이니 가리지날 2단 연속 콤보인 셈입니다.
궁예의 탄생 신화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 헌안왕(또는 경문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원래 왕자였으나, 단오날에 이미 이를 가진 채 태어난 데다가 흰 빛이 하늘로 올라가자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나라에 우환이 미칠 것을 우려해 아기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급히 받으면서 그만 손가락으로 아기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슬픈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당시 역사 기록에서 실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찾으려고 했지만, 실제 기록과 맞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그건 그럴 수밖에요. 이는 궁예가 스님으로 지내면서 알게 된 불경 속 인도 아사세왕자 설화에서 따온 창작 스토리이거든요.
그 오리지날 설화의 앞부분은 이렇습니다.
석가모니가 출가하시던 때에 인도 마가다왕국의 빔비사라왕이 왕자를 얻고자 노력했는데 한 예언자가 말하길 “한 선인이 죽으면 그 인연으로 왕자가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 선인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왕이 자객을 보내 그 선인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 아내가 임신해 아사세왕자가 태어나죠. 하지만 아기가 손을 움켜쥐고 있기에 펴보니 “미생원, 즉 나는 원한을 갖고 태어났다.”라고 써 있었답니다.
그래서 점술가들이 이 아기를 죽여야 한다고 간언해 결국 왕이 요람을 누각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시종이 아이를 받아냈으나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하지요. 그후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아사세왕자가 부모에게 복수를 하게 되는데…. (이하 생략)
본인의 근거지이던 신라 5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청주) 사람들을 데리고 새 수도 철원에 이주한 것으로 보아 충청도 출신의 근본이 모호한 승려이던 궁예는 본인의 애꾸눈과 아사세 설화를 결합해 본인이 죽을 뻔한 신라 왕자라고 신분 세탁을 했을 겁니다.
궁예는 처음에는 기훤이란 지방 호족의 수하로 들어갔다가 다시 양길의 부하가 되죠. 이후 송악(개성)의 호족 왕씨 일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드디어 독립해 901년 다시금 후고구려, 즉 고려를 건국합니다.
당시 궁예는 방치되어 있던 고구려 평양성 옛터를 찾아가 “옛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새 나라의 이름을 다시금 고려라 했다고 하는데, 역사서에는 궁예가 비록 오만방자한 폭군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건국 과정에서 보인 그의 능력을 보면 스토리텔링과 퍼포먼스가 탁월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 왕건의 탄생 신화
고구려계 호족이던 왕건 집안은 궁예의 고려 건국에 결정적 도움을 주지만, 이후 궁예는 강원도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잇따라 바꿉니다. 철원을 안 가본 사람은 왜 하필 강원도 산골로 수도를 옮겼을까 싶겠지만, 먼 과거 신생대 추가령구조곡 화산 폭발 후 용암이 고르게 퍼진 강원도 최대 규모의 철원 평야가 있고, 도시 이름(철원, 철이 나오는 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철광석 산이 많아 무기 제작에도 유리한 곳이지요.
하지만 권력에서 밀려나던 고구려계 호족들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면서 궁예를 아주 악인으로 기록합니다. 하지만 당시 왕건이 왕좌에 오르자 충청 지역 호족들은 견훤에게 투항했으며, 궁예가 나라를 뺏기고 통곡하다가 죽었다는 명성산 인근의 설화에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는 내용이 전해져 오는 등, 역사서의 기록과는 다른 궁예에 대한 평가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처럼 궁예를 몰아낸 직후 내부 반발로 위기에 처한 고려로서는 민심을 다시 잡기 위해서는 왕건에 대한 신격화가 시급했는데, 역대 건국자 중 가장 화려한 탄생 신화로 기록됩니다.
즉, 왕건의 외가는 신라 성골인 호경 장군의 후손인데, 호경은 아들 강충을 낳고 강충은 아들 보육을 낳고 보육은 딸 진의를 낳았는데, 당 숙종이 아직 태자이던 시절 신라에 놀러 왔다가 이 진의와 사랑에 빠져 작제건을 낳았고, 작제건은 다시금 서해 용왕의 딸 저민의와 결혼해 왕건의 아버지 왕륭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런 훌륭한 피를 이어받은 이가 왕건이란 거지요. 아이쿠 길어라~.
다만 역사적으로는 고구려계 호족 세력인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바다를 통해 중개무역으로 큰돈을 벌었기에 해상 루트에 밝았던 점과 후고구려 장군 시절부터 후백제의 안마당인 금성(나주)을 점령해 두고두고 후백제를 괴롭힌 것 역시, 왕씨 가문의 오랜 해상 네트워크 덕분이라고 평가하지요.
참고로 당시엔 호남에선 견훤이 수도로 정한 완산주(전주)에 이어 금성(나주)이 두 번째로 큰 고을이었습니다.
이에 고려 초기인 1018년 지방조직을 재편하면서 호남지역을 전주와 나주 두 도시의 첫 자를 따서 전라도라 정하게 되고, 영남지역은 당시 신라의 수도이던 경주가 가장 번성했고, 견훤의 아버지가 버티던 상주가 두 번째로 큰 도시여서 두 도시의 첫 자를 따서 경상도라 이름 지었지요.
어쨌거나 외우기도 힘든 이런 탄생 신화를 통해 ‘너희들과는 혈통이 다른 인물’이라고 널리 알린 왕건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견훤을 두려워해 천년왕국 신라를 스스로 바친 데 이어,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견훤마저 아들에게 배신당하면서 내분이 발생해 후백제가 스스로 무너지면서 936년에 통일을 이루게 되니, 신라에 이어 두 번째로 다시금 한반도를 통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재통일 10년 전 발해가 멸망하면서 유입된 수많은 유민과 북방 영토 역시 왕건에겐 크나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통일은 건국자 1명이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지방 호족들의 군사력을 모아 승리한 만큼 각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 같은 상황은 조선이 건국되며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해당 지역을 일사분란하게 장악할 때까지 470여 년간 두고두고 민생 불안과 사회적 혼돈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제 고려의 위기로 넘어가볼게요.
고려 전기-서희가 세 치 혀로 거란군을 물리쳤다고요?
우리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외교관은 누구일까요?
그렇죠. 다들 고려시대의 ‘서희’라고 바로 답할 겁니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선비들이 즐겨 하던 관직 승격 놀이인 ‘승경도 놀이’에서도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판서 자리에는 늘 서희가 손꼽혔다고 하니, 이미 수백 년간 그 명성은 계속 이어져 온 것이지요.
우리 역사를 통틀어서 침략한 대군을 맞아 홀로 담판에 나서 전쟁을 종결시켰을 뿐 아니라, 오히려 땅까지 획득하고 온 경우는 실로 서희가 유일하니 신의 경지에 이른 협상가로 칭송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긴 한데요.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인 우리에게는, 외부와의 협상이 꼬였을 때 상사로부터 “서희는 세 치 혀로 나라를 구했다는데, 대체 너는 왜 이 모양으로 진행했느냐!”고 비교되는 애증의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아놔~, 5000년 역사에서 그런 경우는 딱 한 번 있었는데, 서희랑 비교하는 건 절대적으로 무리라고요~.
그런데…, 서희가 세 치 혀, 즉 말빨로 80만 거란군을 되돌리고 강동6주까지 공짜로 얻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가리지날입니다.
우리는 현란한 서희의 말빨에 어리숙한 소손녕이 설득당해 땅까지 선물로 주고 되돌아갔다고 알고 있지만, 서희의 담판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에요.
혹시 서희의 말솜씨에 녹아서 되돌아간 순진남 소손녕 장군은 그 후 어찌 되었을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정도로 사고를 쳤으면 최소한 목이 달아나지 않았을까 생각되시죠? 문득 눈가에 이슬이 맺히며 “아아~, 그는 알고 보니 착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추모하고 싶겠지만, 놀랍게도 요나라 성종 황제는 소손녕 장군의 협상을 치하하고 심지어 벼슬을 올려주기까지 했어요. 어째서 영토까지 내주고 물러난 소손녕이 칭찬을 받은 것일까요?
일단 당시 상황을 살펴봅시다.
거란이 고려를 처음 침공한 993년은 거란이 한창 송나라와 전쟁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예전 고구려에 복속하다가 당나라에 굴복해 있던 거란족은 916년 요하 일대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운 뒤 불과 10년만인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 일대를 차지하고, 송나라 영토이던 베이징 지역 연운 16주까지 점령하는 등 최전성기를 맞이하지만, 더 이상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지 못하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이었어요. 이 같은 상황에서 거란은 송과 국교를 맺고 있던 고려가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해 먼저 침공하게 됩니다.
역사책에는 1차 거란 침입 시 무려 80만 대군이 동원되었다고 나와 있지만, 여전히 송나라와 팽팽히 대치하던 상황에서 고려 침략을 위해 그렇게 많은 군사를 파견할 수 없었기에 소손녕 장군이 지휘하던 최대 인원인 6만 명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지요.
애초 기습적으로 침공한 거란군은 초기에 승리를 거두고 있음에도 남하하지 않고 “우리는 80만 대군이니 어서 항복하라.”는 권고를 보내옵니다. 이에 소손녕을 만나러 간 고려 사신 이몽전이 “자비령 북쪽 땅(평안도 전체)을 내놓으면 철군한다.”는 제안을 받아 오고, 80만 대군이라는 말을 들은 신하들이 겁을 먹고 서경 이북 땅을 주자고 간언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세에 밝은 서희는 승리를 했는데도 먼저 협상 제안을 하는 것을 보니 거란군이 장기간 전투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라는 속사정을 간파하고, 장기전으로 맞설 것을 청하지요. 그러자 만족한 고려 성종이 서희를 중군사로 임명해 시중 박양유, 문하시랑 최양과 함께 적을 방어토록 합니다. 그러고 보니 양쪽 모두 군주 묘호가 성종이네요.
이에 중책을 맡은 서희는 바로 담판 짓고자 거란군 진지로 찾아 가지 않습니다. 일단 협상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고려군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안융진 산성을 선택해 방어전을 펼치면서 고려의 첫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말을 타고 평원을 가로지르며 돌격하던 거란 기병은 고려군을 평지에서 격파해 왔지만, 산성에 틀어박혀 화살을 쏘아대는 고려군을 만나자 기병이 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요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유목민 출신인 거란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구하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식량보급부대 없이 왔는데, 고려군이 우리 민족의 장기를 살려 평야를 불태우고 백성과 가축을 모두 산성으로 피신시켜 주변을 모두 허허벌판으로 만들어버리는 청야 작전을 구사해 먹을 것이 태부족인 상황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아무리 잘 싸우는 군대라도 굶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역사의 진리!
아마도 거란 군사들은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을까요?
“배달의 민족이 다스리는 땅이라길래 24시간 배달 서비스되는 줄 알았다거란~.” 그게 1100년 뒤에나 가능한 거라니까요~.
이에 소손녕은 두 차례 더 서신을 보내며 협상을 재촉했지만, 서희는 시간을 끌다가 드디어 국서를 들고 거란군 진영에 나타납니다. 그러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소손녕은 서희에게 절을 올리라고 윽박지르나, 서희는 “당신이 임금도 아닌데 왜 내가 절을 하느냐!”고 가볍게 무시해버립니다.
그러자 그때서야 소손녕은 마지못해 서희와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고, 앉자마자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우리 거란은 옛 고구려 땅에서 일어났으니 과거 고구려 영토인 자비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며 뜬금없는 원조 논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서희는 “우리야말로 나라 이름부터 고려이며 언어와 풍속도 옛 고려 그대로이다.”라고 대꾸하면서 “오히려 요나라 수도 심양도 옛 고려 땅이니 내놓으라.”고 받아치자 소손녕은 할 말이 궁색해지고 말았다지요?
추가 설명을 하자면 우리 역사책에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고려라고 국호를 정했다.”라고 나오지만, 왜 ‘구’ 한 글자를 빼고 썼는지 그 이유는 안 알려주고 있어요. 고구려는 장수왕 11년인 432년에 이미 나라 이름을 고려라 줄였고, 멸망 시까지 계속 고려라 자칭했지요. 실제로 중원고구려비 비문에 장수왕이 스스로를 ‘고려태왕’이라고 칭하고 있지요. 하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왕씨 고려와 과거 삼국시대 고씨 고려가 헷갈릴 것을 염려해 고씨 고려의 초기 이름인 고구려라고 적은 건데, 그런 배경 이야기를 해주지 않다보니 고려란 이름이 실은 고구려 시절부터 쓰던 국호를 다시 쓴 것이라는 설명이 빠져 있는 거예요.
이처럼 고려라는 국호는 과거 삼국시대 고려 국명을 그대로 다시 쓴 것이고, 그 옛 고려 영토 안에 지금의 거란 영토 대부분이 속한 것이 사실이니 소손녕으로서는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못하게 됩니다.
씨름에서도 샅바를 잡는 순간 승부는 끝나는 법. 서희가 만만찮은 인물임을 간파한 소손녕은 그제야 “왜 우리와 더 가까운데 송나라와 교류하느냐?”고 본심을 내비쳤고, 서희 역시 “우리도 거란과 친하고 싶지만 우리 사이에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러니 그 땅을 우리가 차지하도록 양보해준다면 요나라와 국교를 맺을 수 있다. 이렇게 두 나라가 싸우는 것은 국력 낭비이니 서로 도움을 주고받자.”라고 화답하게 된 겁니다.
이처럼 서희는 거란이 무엇을 바라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소손녕 역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챙길지 명확히 이해했기에 “고려는 송과 국교를 끊고 거란과 교류할 것이며, 이를 위해 거란은 고려가 거란과 연결될 수 있는 강동6주의 영유권을 고려에 보장한다.”는 합의를 도출하고, 요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결국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협상을 마무리 짓게 됩니다. 7일이 걸렸다는 이 협상을 통해 요나라는 고려가 송과 단교하도록 하겠다던 애초 목표를 얻었기에 소손녕은 서희에게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와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고 되돌아가게 된 것이지요.
이 협상을 승인했던 요나라 황제 역시 만족하기는 마찬가지. 군사 손실을 최소화하고 조기에 목표를 달성한 소손녕 장군은 승진하게 되고, 고려 역시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고 압록강까지 영토를 인정받는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겁니다. 다만 그 강동6주는 빈 땅이 아니라 여진족(말갈족)들이 살고 있던 곳이란 게 문제였지요.
당시 거란 땅도 고려 땅도 아니었던 이곳에 그냥 살던 옛 발해 주민 여진족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두 강대국이 서로 땅 가르기 협상을 하고 고려군이 침공하자 압록강 건너 만주로 도망가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고려 역시 많은 군사를 희생했으니 공짜로 땅을 받은 게 아니에요.
이처럼 고려의 외교는 능수능란했습니다. 거란과 합의를 통해 송과 단절한 것이 알려질 경우 문제가 커질 것을 잘 알았기에 “거란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니 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송이 불가능하다고 답을 하자 그 이유를 근거로 단교해버린 겁니다. 원인 제공은 고려가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송나라에 책임이 있는 모양새가 되도록 한 후, 거란의 연호를 받아들이는 치밀한 전술을 구사한 것이지요.
즉, 고려는 서희로 대표되는 외교 전문가들이 냉정히 국제 정세를 판단해 전략을 확립하고, 협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고려군이 유리한 산성 전투로 끌어들여 기세를 꺾는 치밀한 전술을 구사했으며, 임금은 신하들을 믿고 협상 전권을 일임함으로써 실리를 챙기고 명분도 얻는 환상적인 팀워크를 선보였던 겁니다. 이처럼 고려-거란 1차 전쟁은 서희라는 한 위대한 영웅의 현란한 말솜씨로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니라 왕을 비롯해 조정 구성원 모두가 최선의 협력을 보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거지요.
또한 고려는 외교로 해결이 안 되면 여지없이 맞서 싸우는 전법을 구사합니다. 이에 거란의 2차, 3차 침공 시에는 서희에 의해 고려 영토로 인정받아 개척한 강동6주에 쌓은 여러 성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적을 차단했고, 3차 침입 시에는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정 예군 중 하나인 우피실군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더 이상 거란이 송나라를 압박하지 못하게 되면서, 송, 거란, 고려 3국간 힘의 균형이 맞춰집니다.
이에 송나라는 거란의 최강 부대를 압살해버린 고려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당시에 송과 거란이 각각 황제라고 칭하자 고려 역시 스스로 황제국임을 내세우게 되지요. 중세 유럽에서야 교황이 신의 이름으로 한 명의 황제만을 로마제국 황제의 후예로 지명했지만, 동양에서는 힘센 쪽이 스스로 황제라고 부를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흔히 5000년 내내 중국에 짓눌리다가 현재에 이르러서 겨우 수십 년간 중국을 얕볼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섰다가 다시금 눈치 보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귀주대첩 이후 고려 사신은 송나라에 가서 갑질을 톡톡히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송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이자 동파육 요리법의 발명가로도 유명한 소동파는 고려를 증오한 대표 인물이 되고 맙니다. 소동파는 7번이나 “고려 오랑캐와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다지요? 그 이유가 바로 고려 사신들에게 접대하는 비용이 10만 관도 넘게 들며 고려 사신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과 말을 징발하고 영빈관을 수리하느라 고통받고 있다며 그 돈이면 수만 명의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송 황제: “여봐라송. 고려에서 사신이 온다카더라송. 울리 살람 성대한 잔치 준비하고 영빈관 빨리 수리하라송.”
고려 사신: “여~ 황제님. 성대히 환영해주셔서 감사하고려. 우리에게 줄 선물도 잘 준비했고려?”
소동파: “아. 열받아동. 동쪽 오랑캐한테도 뜯기다니파! 동파육이나 쪄서 빼갈이랑 마시면서 스트레스 풀동파~.”
고려 사신: “동파 선생, 열받으셨고려? 거란이 쳐들어올 때 우리 고려가 송을 도와줄지 다시 한번 고려해볼 고려?”
송 황제: “거. 동파는 찌그러져 있으라송. 불쾌하게 만들어 미안하다 사랑한다송. 우리랑 계속 잘 지내자송.”
고려 사신 접대에 쓰인 비용이 정말 10만 관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상소문이 사실이면 북송이 서하에게 뜯기던 공물의 2배 비용이고 거란에 바치던 공물값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답니다. 거란이나 서하에게는 군사력에서 밀리니 그만큼 뜯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도와준다던 동맹국에게도 뜯기는 건 참을 수 없었나 봅니다.
이처럼, 거란을 물리친 고려는 중원 정통왕조인 송나라로부터도 상납을 받으며 큰소리를 쳤으니 실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가 바로 이때가 아니었을까요?
비록 영토는 줄었지만 고려 인구는 고구려에 비해 2배 이상 많았고 상시 동원 가능한 군대가 20만~30만 명이었다고 하니 국력은 고구려보다 오히려 더 강했으며 후대 조선보다 더 강력한 상비군을 조직한 국가였어요.
이처럼 고려가 한때 중국에게 갑질한 내용을 정작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만, 중국인들은 그게 그렇게 사무쳤는지 1999년 제작한 대만 드라마 ‘소년 포청천’에 고려 태자가 송나라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가 살해당하자 고려가 이에 앙심을 품고 쳐들어올까봐 송 황제가 덜덜 떠는 에피소드가 등장했다고 하네요. 뭐 고려 태자가 살해당했다는 건 전혀 역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이긴 하지만요. 어이~, 너네 중국은 쭉 우리한테 갑질했어. 이 사람들아!
어떻습니까? 그동안 몰랐던 고려의 위대함이 새삼 놀랍지 않으세요?
첫댓글 진짜 새로운 내용입니다, 장문 참으로 감사합니다^^
찬찬히 잘 읽었습니다.참 재미 있습니다.
기존의 역사를 배워 왔던 것 과는 많이 달라서(아마도 마도로스님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역시 정확한 그리고 그 시대의 상황에 이치에 맞는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