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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 만력 23년, 선조 28년(1595년)
1월 1일 도원수 권율과 접반관(接伴官) 이시발(李時發)이 천장 진운홍(陳雲鴻) 등을 모시고 용성관(龍城館)에서 연회하였다.
2일 진운홍 등이 영남으로 향하여 이내 왜의 병영으로 들어갔는데, 이시발이 따라갔다.
5일 유격장군 막여덕(莫如德)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이내 영남으로 향하였다.
6일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영남으로 향하였다.
11일 순찰사 홍세공(洪世恭)이 장수(長水)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이내 머물렀다.
○ 통융작미법(通融作米法)을 만들었는데 차역(差役)은 전과 같았다.
○ 통제사 이순신이 장계하기를, “각 고을 수령들이 적을 방어하는 데 뜻이 없어 수군[舟師] 수병(水兵)을 전혀 들여보내지 아니합니다. 운운.” 하였다.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근실하고 태만한 것을 사찰하여 죄와 벌을 정하여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남원 병사 양순세(梁順世)와 이승서(李承緖) 등을 통영(統營)으로 잡아들여 연달아 처참(處斬)하였다.
○ 명 나라 병사의 왕래가 길에 잇달았는데 연로(沿路)의 각 고을에서 지공(支供)하는 데 드는 것과 쇄마(刷馬)와 짐꾼을 당해낼 수가 없어서 백성이 살 수 없고 얼마 안 되는 소와 말도 태반이나 빼앗겼다. 사람들이 모두 농토를 방해로 여겨 버리고 흩어지는 자가 길에 연달았다. 본도 감사 홍세공이 걱정하여 내지(內地)의 각 고을로 하여금 나누어 운봉ㆍ남원ㆍ임실ㆍ전주 등의 참(站)에 속하게 하여 쇄마와 인부와 지공하는 잡물을 균평하게 나누어 정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하였는데, 참(站)을 주관하는 관원이 값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고통은 줄지 않았다.
○ 형벌을 함부로 쓴 죄로 이복남을 파면시키고 통제사 종사관 정경달(丁景達)로 남원 부사를 삼았다.
○ 내적(內賊) 김희(金希)ㆍ강대수(姜大水)가 영남에서 패하여 죽고, 고파(高波)는 장성(長城)에서 패하여 죽으니, 산군(山郡)에 비로소 길이 통하였다.
24일 진운홍(陳雲鴻)ㆍ낙상지(駱尙志) 두 장수가 왜의 병영으로부터 함양에 이르렀는데 권율이 본군에 있다가 그들을 잔치로 대접하였다. 진운홍이 권율에게 말하기를, “수길을 봉왕(封王)할 천사(天使)가 나오면 행장ㆍ의지 등이 곧 철병하여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하였다.
28일 진운홍 등이 남원에 이르렀는데 홍세공이 잔치를 베풀었다.
2월 1일 진운홍 등이 남원으로부터 서울로 향하여 이내 천조(天朝)로 돌아갔다.
○ 이달에 크게 가물고 누른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고 어지러운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15일 감사가 전주로 돌아갔다.
○ 지난해 갑오(甲午) 에 흉년이 들어 농우(農牛)가 씨가 말라 금년 농사철에 사람들이 스스로 끌며 밭을 가는데 8인이 한 패가 되어 곳곳마다 떼를 이루었다.
○ 예부(禮部)가 평양ㆍ개성ㆍ벽제(碧蹄)에 글을 청하였다. 왕경(王京)에 단(壇)을 설치하여 전사하고 병사한 관군(官軍 여기서는 명 나라 군사를 말함)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황제가 은을 보내어 제물을 사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고사(攷事)에 나왔다.
○ 병부 시랑 손헌(孫憲), 차사ㆍ신(愼)ㆍ장(章) 두 도사(都司) 모두 이름은 잊었다. 를 우리나라에 내보내어 이내 왜영(倭營)에 들어가 청정에게 선유(宣諭)하게 하니, 도사 등이 서울에 도착하여 이내 영남으로 내려갔다.
3월 영남 여러 둔(屯)의 적이 소리치기를,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땅히 군사를 움직여 침범하겠다. 운운.” 하니, 내지(內地)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사람들이 생기(生氣)가 없었다.
○ 호남의 각 절 노비(奴婢) 등의 신공(身貢)으로 작미(作米)한 것과 이전(移轉)한 곡식을 모두 산음현(山陰縣)에 납입하였다.
2일 신ㆍ장 두 도사가 경주로부터 울산 두모포(豆毛浦)의 청정의 진으로 들어갔다. 전월 27일에 두 도사가 경주에 이르러 곧 본국의 모든 장수와 관원들을 불러 함께 의논하고, 28일에 가정(家丁) 한 명과 통역 두 명을 시켜 먼저 왜진에 보내어 선문(先文)을 부치기를, “대명 도사 신ㆍ장은 일본의 장관(將官)들에게 상을 내릴 일로 흠차(欽差) 병부 시랑 경략 손헌의 패문(牌文)을 받들었는데, 일본 선봉 청정이 봉왕(封王)의 의론이 있는 뒤로부터 천조에 공순하므로 마땅히 관원을 시켜 상을 내리는 일로 이 패문을 만들었으니, 선봉 청정은 패문이 도착되는 대로 곧 편장(褊將) 한 사람과 통역 두 명과 말 20필을 보내어 속히 전탄(箭灘)에 달려와 영접해 가서 상을 내리게 하여 더디거나 어기어 불편함이 없게 하라. 운운.” 하였다. 본월 1일 보낸 가정과 통역이 돌아와서 청정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천조의 도사사(都司使) 휘하(麾下)의 보낸 글을 삼가 절하고 받았나이다. 도사사가 우리 병영에 오겠다는 일을 선봉이 와서 고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지 자못 그 이치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2일에 울산의 아상(阿上)에 오면 통역과 영접하는 말을 보내기로 했었는데, 천장 유 독부(劉督府 유정(劉綎))의 글이 함께 오지 아니함은 어찌된 일입니까? 자세한 말은 온 사자가 말할 것이오.” 하였다.
2일 이른 아침에 당관(唐官) 두 사람이 왜통역 세 명과 좌병사의 군관 한 사람을 데리고 출발하여 오후에 전탄의 옆에 도착하니, 청정이 부장(副將) 희팔(喜八)과 명 나라 통역 당지호(唐至湖)로 하여금 말 19필을 이끌고 하인 왜놈 50여 명을 데리고 아상(阿上)에 대령하였다. 작은 천막을 쳐놓고 두서너 잔 술을 마시기를 청한 뒤에 왜영에 들어가니, 해가 저물려 하였다. 희팔이 제집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는데 초경(初更)이 이미 다 되어도 한 사람도 와서 묻는 자가 없었다. 천장(天將)이 데리고 온 왜통사를 시켜 희팔에게 물으니 희팔은 말하기를, “청정이 사냥하러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이경(二更)이 되자 청정이 왜중 일진(一眞)으로 하여금 와서 문안하게 하고 말하기를, “청정이 나갔다가 막 돌아와서 몸이 불편하고 상관(上官)께서도 먼 길을 오느라고 힘들 것이니 내일 서로 만나자.” 하니, 당관(唐官)이 답하기를, “대단히 고맙소.” 하였다. 3일에 희팔이 당관에게 써서 보이기를, “청정이 진시(辰時)에 만나 의론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당관이, “만나 의론하지요.” 하였다. 진시에 희팔이 와서 당관을 청하였다. 당관이 왜통역을 시켜 말하기를, “탈 말이 왔는가?” 하니, 희팔이 말하기를, “멀지 않으니 걸어가시지요.” 하였다. 통역 이(李)가 당관의 말을 희팔에게 전하기를, “청정의 있는 곳이 여기에서 조금 먼데 천조의 상관이 어찌 걸어 갈 수 있단 말인가?” 하였더니, 그제야 말 네 필을 몰고 와서 동시에 갔다. 청정이 인사를 마치고 나서 말하기를, “먼 길에 오시고 또 귀한 물건을 보내 주시니, 황공하고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당관이 답하기를, “손노야(孫老爺)께서 선봉의 명성을 듣고 우리 두 관원을 보내어 선봉에게 상을 주시는 것이니, 선봉은 받으시오.” 하고, 말을 마치자 또 사사 예물로 흰 비단 한 필과 남색 비단 한 필과 홍전지(紅牋紙) 한 장과 금부채 네 자루를 주었다. 청정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 평일에 구하던 물건이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시고 또 선물을 주시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다 받고는 청정이 공연히 침실로 들어갔다. 당관이 그 연고를 몰라서 물으려 할 때에 왜승 일진을 시켜 나와서 청하기를, “의론한 일이 있으니 방안으로 들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당관이 그의 방에 들어가니, 청정이 기대어 앉아서 묻기를, “심 유격이 화친하자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지금 봉왕(封王)을 의론하니, 천사(天使)가 장차 나올 것이요.” 하였다. 청정이 말하기를, “소서비(小西飛)는 일개 종인데 거짓으로 상관이라 칭하고 심 유격이 대명(大明)에 데리고 갔는데 소서비가 무슨 말을 하였으며 화친은 무슨 일을 주로 하는가?” 하였다. 당관이 써서 보이기를, “시랑(侍郞) 손노야(孫老爺)가 22년 8월에 새로 요동에 이르러 오랫동안 선봉이 정직함이 다른 장수에게 비하여 남다르다 함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두 도사를 보내어 비단을 가지고 와서 상을 주게 하였는데 마침 들으니 심 유격이 소서비와 더불어 북경에서 봉왕(封王)하기를 요청하니 천조에서 이미 관백을 왕으로 봉하기로 의론하였다 하는데, 요동과 북경이 2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 천사가 언제나 나올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확실한 소식은 미처 모르고 왔는데 선봉은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천조에 가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선봉의 심중의 일을 알지 못하니, 만약 할 말이 있거든 한 장의 글을 써서 우리에게 주면 선봉을 대신하여 가서 말씀하여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청정이, “상관은 천조의 대관인데 어찌 화친의 일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우리는 집이 남방에 있는데 애초에 손노야를 따라서 지난해 8월에 새로 요동에 왔습니다. 우리 두 관원으로 하여금 다만 선봉에 상을 줄 한 가지 일만을 위하여 오게 한 것이라, 화친의 일은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청정이, “소서비와 심 유격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북경에 있습니다.” 하였다. “소서비는 왜 돌려보내지 아니하나요?” “방금 봉왕할 일을 의논하므로 북경에 머물러 있어 일의 결말을 기다리는 것이요.” 하였다. 청정이, “충청ㆍ전라도에 있는 당관은 누구의 관할인가요?” 하니, “고시랑(顧侍郞)의 관할이요.” 하였다. “유 독부(劉督府)는 지금 어느 곳에 있나요?” 하니, “평양에 있소.” 하였다. 희팔이, “전년에는 어디에 있었던가요?” 하니, “그 때에 우리는 남방에 있었으므로 자세히 알지 못하오.” 하였다. 청정이, “고시랑은 어디에 있소?” 하니 “북경에 있소.” 하였고, “유 독부는 누구의 관하(管下)인가요?” 하니, “고시랑의 관하요.” 하였다. “그렇다면 고시랑이 돌아갈 때에 왜 유 독부를 조선에 두고 갔나요?” 하니, “강화하는 일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머물러 기다리는 것이오.” 하였다. 청정이, “평행장 심 유격의 일은 모두 간사하고 거짓된 것인데 고시랑이 왜 황제에게 아뢰지 아니하시오?” 하니 “지금 우리가 여기에 와서 선봉의 말을 듣고야 비로소 그것이 거짓된 것을 알았는데 고시랑께서 어떻게 아시겠소.” 하였다. “손시랑의 말은 고시랑이 듣나요?” 하니, “들을 것은 듣고 안 될 것은 안 듣습니다.” 하였다. 이와 같이 자질구레한 말을 두세 번 물어서 기분이 상하게 하니, 당관이 그의 말 많은 것을 싫어하여 청정에게 말하기를, “날씨도 덥고 몸도 불편하니 내일 다시 서로 만날까요?” 하였는데, 청정이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2ㆍ3인 왜승과 한참 동안 의논하더니, 또 써서 보이기를, “대명에서 조선인을 일본에 속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하였다. 당관이 글의 뜻을 알고 발끈 안색을 바꾸며 말하기를, “이런 글은 알지 못하겠소.” 하고, 벼루 언저리에 던졌다. 청정이 좌우를 돌아보고 다른 말을 하다가 오후가 되자 점심 먹기를 청하고, 또 잡된 말을 지껄이기를 그치지 않다가 해가 저물자 청정이 안색을 고치며, “전일 송운(松雲)승장(僧將) 유정(惟政)의 호이다. 과 화친을 말할 때에 언어도 분명치 못하고 글도 희미하여 답답한 마음을 풀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두 분은 지략(智略)이 많고 왜통역 한(漢)통역의 언어가 명백하니, 나의 심사는 이제 다 밝혔습니다. 나는 조선의 땅을 욕심내는 것도 아니요, 또 속히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마음은 지극히 공정하여 편벽됨이 없으니, 지금 피차가 서로 화친하여 군사가 각기 물러가게 되면 어찌 나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운운.” 하였다.
아침에 시작하여 저물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파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청정이 희팔을 시켜 다섯 가지 일을 써서 보이면서 말하기를, “행장이 평양에서 패하자 관백이 죽이려고 하니, 행장이 말하기를, ‘내가 이 다섯 가지를 성사시키겠다.’ 하므로, 용서하여 일이 되기를 기다렸는데, 지금 행장이 이 다섯 가지 일을 도모하지 않고 피차간에 서로 속이니, 제일 간사스럽고 거짓된 것이라. 그 다섯 가지 일은 1, 대명이 일본과 혼인할 일. 2, 조선의 4도를 일본에 예속할 일. 3,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이 일본에 있을 일. 4, 조선의 원로 대관이 일본에 인질(人質)로 있을 일. 5, 원로 대관과 함께 맹세하고 의논할 일입니다.” 하였다. 청정이 또 당관을 대하여 말하기를, “금년 3월에 중국을 범하고자 하였으나 모든 군사가 일제히 모이지 못하였으므로, 명년 3월에 바로 중원(中原)을 범하기로 계획하고 있소.” 하였다. 또 당통역(唐通譯)이 가만히 당관에게 말하기를, “7ㆍ8월에 중국을 범하고자 합니다. 청정이 밀양(密陽)의 항복한 사람을 시켜 항상 군사가 매복한 곳에 있으면서 조선인 살해하는 것을 금지하여 본국 사람은 나가든지 들어오든지 그의 가는 대로 맡겨 두니, 이것은 인심을 얻으려는 생각에서입니다. 길에서 그 밀양 사람을 만났는데 역시 이와 같다고 합니다.” 하였다. 왜영에 저축된 양식이 많고 적은 것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왜인이 먹는 것은 풍족함이 없었다. 4일에 유숙하고 5일에 돌아오는데 청정이 왜승 일진(一眞)으로 하여금 그 부장(副將) 희팔과 함께 길 중간까지 전송하였다. 청정의 답서에, “문록(文祿) 수길이 임진년 겨울에 연호(年號)를 고쳤다. 4년 을미 3월 5일 묘시(卯時)에 천조 손노야 휘하(麾下)에게 절하고 답하나이다. 일본 청정이 흠차 손노야가 보낸 글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명의 여러 장수가 왜병 때문에 조선국에 나와서 주둔하였습니다. 왜군의 여러 장수도 역시 대명국에 쳐들어가기 위하여 조선국에 먼저 상륙하여 시일을 지체하지 아니하고 8도를 모두 정벌(征伐)하고 왕자와 여러 신하까지 포로로 삼았으니, 고시랑과 행장 등의 꾀로 화친을 약속한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은 경상도에 와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재작년 이래로 이상의 계책을 모르고 일본의 여러 장수들이 3ㆍ4개년을 부질없이 진(陣)에 있었으니, 이것은 이미 곡절 없는 일입니다. 고시랑ㆍ유격ㆍ행장 3인의 모든 일은 4개년 전부터 우리는 알았고, 일본 관백 전하도 역시 지금은 그들의 계책을 대략 압니다. 그러므로 전년과 같이 내년에도 조선국의 일에 미치지 않는 것은 대명국에 쳐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니, 그때에는 우리들이 선봉이 되어 가서 대명의 여러 장수와 싸울 날을 고대합니다. 한결같이 일본 관백의 명령이라 칭하나 행장이 보인 다섯 가지 일은 관백의 명령이 아닌데, 지금 이것으로 어찌 강화가 되겠습니까? 한 번 나오는 것을 보면 알 것입니다. 다섯 가지 일 안에 봉왕(封王)하는 일은 일본 관백이 어찌 대명이 봉왕해 주기를 요구할 수 있습니까?
일본 관백은 말하기를, ‘대명을 위하여 일본을 봉왕하는 일로 함께 보낸 것이다.’ 합니다. 첫째는 만약 대명의 여러 장수가 화친하고자 한다면 우리들이 지금 말할 적에 마침 온 두 도사(都司)가 마땅히 들어 알 것이고, 두 관원(官員)의 말은 나도 또한 들어서 이미 알 뿐입니다. 대명(大明)과 조선 두 나라의 여러 장수가 서로 말하였고, 또 근일에 이 두 관원이 손노야의 글을 가지고 왔으니, 화친의 일은 또한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지금 우리들이 두 관원의 말에 대하여 의심스러우면 두 관원이 다시 와서 한 사람이 일본에 가서 관백의 명령을 직접 들으면 그때에는 우리에게 허위가 없을 것입니다. 채단(彩緞) 네 필을 절하고 받았으니 후의(厚意)에 기쁩니다. 문록 4년 을미 3월 5일 평청정.” 이라 하였다. 또 4일에 청정의 아들이 두 관원의 숙소에 왔는데, 보아하니 준마를 타고 있었다. 두 왜놈이 말을 이끌고 긴 창 한 쌍이 앞에서 인도하고 칼을 찬 자가 10여 명이요, 조총을 잡은 자가 네 쌍이요, 모든 왜놈이 일시에 꿇어앉아 그 아이를 공경하였다. 당관(唐官)이 띠와 머리에 쓰는 수건 등을 주자 받고서 기뻐하였다. 글에 이해할 수 없는 곳이 많으니, 전해 쓴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반드시 청적(淸賊)의 글이 시원치 않아서 그런 것일 것이다. 또 왜추들이 모두 성을 평(平)이라 한 것도 실은 수길의 동성이 아니요, 또 수길이 내려준 성도 아니다. 왜의 풍속이 등(藤)ㆍ귤(橘)ㆍ원(源)ㆍ평(平) 4대 성을 귀족이라 하기 때문에, 그 품질(品秩)에 따라서 성명을 고친다. 수길도 또한 본성이 평이 아닌데 네 번 바꾸어 평이라 하였고, 여러 추(酋)가 평이라고 성을 쓴 것도 역시 함부로 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평의지(平義智)는 대마도주(對馬島主)이니, 수길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어찌 평이라 칭하였는가? 더구나 평행장의 사위가 아닌가. 청정의 성이 평이라 한 것도 역시 이와 같다.
○ 심유경이 소서비탄수와 더불어 천조에 오래 머물면서 봉공(封貢)을 표(表)로 청하였는데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그 계책을 맡아서 관백 수길을 봉하여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여 임회훈위도독첨사(臨淮勳衛都督僉事) 정삼품(正三品)이종성(李宗城)으로 책봉 일본정사(冊封日本正使)로 삼고 첨사(僉事) 양방형(楊邦亨)을 부사(副使)로 삼아 책보(冊寶)와 금백(金帛)을 싸 가지고 우리나라로 내보내어 이내 일본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심유경이 먼저 강을 건너왔다. 본국에서 문학(文學) 황신(黃愼)으로 심유경의 접반관(接伴官)을 삼고, 호조 판서 김수(金晬)로 정사의 접반사를 삼고, 이조 판서 이항복으로 부사의 접반사(接伴使)를 삼아서 의주에 가서 영접하게 하였다.
○ 윤근수(尹根壽)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황제의 칙서(勅書)를 가지고 왔는데, 칙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해경략관(該經略官)이 보고하기를, “왜병이 도망해 돌아가서 속국이 이미 수복되었고, 광해군(光海君)이 젊고 영특하여 신하와 백성이 복종하므로, 마땅히 그로 하여금 충성(忠誠)스러운 배신(陪臣)을 선택하게 하여 데리고 전라ㆍ경상도 지방에 머물면서 방어할 일을 경영하게 하소서.” 하므로, 해부(該部)에서 심의하여, “거기에 관한 칙서를 내려서 책임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고 청하므로, 지금 특별히 그대 광해군(光海君) 에게 명하여 전라ㆍ경상도의 군무(軍務)를 총독하여 돈과 양식을 저축하고 용사들을 불러 성을 쌓고 기계를 준비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요충지를 지키는 일체의 일에 편리하도록 조처하고, 배신 권율을 거느리고 마음을 다하여 협력할 것을 허락하노니, 그대는 마땅히 몸과 마음을 분발하고 굳세게 하여 아버지의 일을 맡아서 나라 보존하기를 도모하라. 안으로는 부상당한 자를 구하고 밖으로는 전장(戰場)을 잘 다스려 만전의 계책을 강구하여 길이 선후책(善後策)을 도모하여 나의 울타리를 견고히 하고 그대의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하라. 성공이 있기를 기다려서 특별히 우대하는 처분을 의논하겠으니, 혹시라도 밝은 명령을 어기지 말라. 좋은 시기를 잃어 일을 그르치게 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대는 공경히 받들지어다.
배신 한준(韓準)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사은(謝恩)하고 겸하여 세자책봉(世子冊封)할 일로 황제에게 아뢰어 청하였다.
○ 계사ㆍ갑오년 이래로 수병(水兵)들이 몹시 고생하였고, 연변(沿邊) 곳곳에 전염성 열병이 배나 치성하여 한산도를 지키는 군사들이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다. 이러므로 간 자는 돌아오지 않고, 남아 있는 자도 도망치고 흩어져서 허다한 군선(軍船)이 장차 다 비게 되었다. 이순신이 걱정하여 이에 수군[舟師]에 속한 각 관(各官)으로 하여금 촌백성을 수색하여 잡아서 군사를 채우고, 군관과 모든 장수를 연해(沿海)의 시장(市場)에 나누어 보내어 장사꾼을 덮쳐 잡아서 배에다 실어서 군사를 만드니, 이로부터 연로(沿路)의 시장이 다 파하고 마을이 황량해져서 사람들이 모두 풀 속에 엎드리고 구멍에서 살다가 틈을 엿보아 농사 짓고 수확하니, 마치 밭에 있는 제비[燕]의 괴로운 생활과 같았다.
○ 이시언(李時言)이 파직하고 이복남으로서 전라 병사를 삼았다.
○ 유격 심유경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4월 책봉천사(冊封天使) 이종성(李宗城)ㆍ양방형(楊邦亨)이 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였다. 심유경이 서울로부터 출발하여 충청ㆍ전라도로 향하였는데 접반관의 선문(先文)에, “행차에 소요되는 거우(車牛) 1백 마리ㆍ쇄마(刷馬) 3백 필ㆍ짐꾼 3백 명과, 모든 지공(支供)에 관한 일 등을 정제하여 대령하라.” 하니, 이 일을 삼도(三道)에 관문(關文)으로 보내었다.
18일 심유경이 임실을 거쳐 남원에 들어왔다가 이튿날에 영남의 왜영으로 향하였는데, 접반관 황신이 따랐다. 두 천사(天使)는 서울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28일 천장(天將) 유 참장(劉參將)이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남원에 이르러 머물렀다.
○ 한준이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는데 예부 상서(禮部尙書) 범겸(范謙) 등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만일 세자를 책봉하는 명령이 내리지 않아서 인심이 우러러 볼 데가 없다고 한다면 전에 새서(璽書)가 반포되어 대사(大事)가 이미 완수되었으니, 국인들이 또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일상적인 일이 아니므로 갑자기 의논하여 정하기 어려워 공손히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니, 신들로 하여금 해국(該國)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그의 차자(次子)로 하여금 먼저 내리신 칙서에 따라 마음과 힘을 다하여 일을 잘 조처하고 바로잡아 옛 제도를 잃지 않고 더 빛내고 키우기를 기약하십시오. 천천히 3년 동안 성과가 있기를 기다려 과연 그의 어진 소문이 더욱 드러나고 애쓴 공적이 참으로 나타나거든 그때에 가서 그들의 책봉 청하는 것을 의론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니 본부(本部)에서 다시 아뢰어 청하기를 기다려 처분하옵소서.” 하였다.
29일 심유경(沈惟敬)이 행장의 왜영에 들어가는데 황신(黃愼)이 따랐다. 행장이 심유경을 대할 적에 접반관이 함께 앉는 것을 허락지 않자, 황신이 발끈하여 일어나 나왔다. 행장이 말하기를, “천관(天官)에 공경을 지극히 하려다 보니 자못 예의(禮儀)를 잃었습니다.” 하고, 영접하여 앉게 하고 사과하며 말하기를, “조선이 유지되는 것은 이런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다.” 하였다. 심유경이 행장에게 이르기를, “왜병이 모두 철수한 후에 천사(天使)가 내려올 것이다. 운운.” 하였다.
○ 책봉천사(冊封天使)의 선문(先文)에 서울로부터 충청ㆍ전라도로 향하여 이내 경상도 왜영으로 갈 것이니, 각 도의 감사는 차사원(差使員)을 나누어파견하여 접대에 드는 비용을 준비하고 길을 닦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모든 왕래하는 명 나라 장군[天將]이 전라도를 거쳐 다닐 뿐 아니라 명 나라 사신이 오갈 때에도 반드시 이 길을 취하였는데, 이는 새재[鳥嶺] 일대에는 물력(物力)이 피폐해서였다.
○ 적장 평행장이 심유경을 병영에 머물게 하고, 저는 가벼운 배를 타고 가서 수길을 만나 심유경이 이미 부산에 도착하였고, 두 명 나라 사신이 왕경(王京)에 머물러 있는 일을 진술하고, 곧 도로 바다를 건너와서 또 우리나라의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행장이 지금 소서비탄수가 명 나라 사신을 따라 나왔으므로 억류하였던 담 도사(譚都司)를 놓아 보내었다. 도사가 적중에서 나와서 남원에 도착하여 그대로 머물렀다.
5월 18일 본도 감사 홍세공이 전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도로와 접대도감(接待都監)을 적간(摘奸)하였다.
○ 접반사가 3도에 관문(關文)을 보내기를, “두 명 나라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여 두 달 동안 머물 때에 그가 거느린 부하들이 앞을 다투어 약탈하였으니, 각 처의 도감은 문호를 견고하게 하여 그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지공(支供)과 잡물을 항상 미리 넉넉하게 준비하고, 거우(車牛)ㆍ쇄마(刷馬)와 짐꾼은 기일 전에 준비해 두고 소서비(小西飛)도 일시에 내려올 것이니 아울러 잘 대접하라.” 하니, 각 고을의 관원들이 분주히 조처하였다.
28일 남원의 무고(武庫)에서 화재가 나서 궁전수(弓箭手) 5ㆍ6인이 죽었고, 모든 기계가 다 잿더미가 되었다.
6월 가물었다. 남원에 머물던 유 참장(劉參將)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였다.
○ 심유경이 명 나라 사신에게 자문을 보내기를, “행장이 저의 본국에 왕래하면서 천사를 기다렸으나 아직까지 들리는 소식이 없어 모든 괴수들이 의심스러워합니다. 천사를 보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 부산 동래에 주둔한 적이 우리 사람들과 더불어 함안에 시장을 개설하였다. 적들은 소와 말 모두 우리 나라에서 약탈한 것이다. 을 가지고 왔고, 우리나라 사람은 표피(豹皮)와 매[鷹]를 가지고 매매하고 갔다.
7월 3일 담 도사(譚都司)가 서울로 향하였다. 홍세공이 전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성을 돌아보고 기계를 검사해서 판관 김유(金騮)를 곤장으로 치죄하였다. 이튿날 무산(毋山)의 오고 가는 길을 닦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안신원(安信院) 길이 험하여 닦기 어려우므로 홍세공이 산성의 승장(僧將) 처영(處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닦게 하였다.
11일 부천사(副天使) 양방형(楊邦亨)이 서울로부터 충청도로 향하는데 접반사 이항복(李恒福)이 따랐다. 홍세공이 남원으로부터 전주에 돌아와서 이내 여산(礪山)에 이르러서 기다렸다.
○ 적추 평행장이 밀양ㆍ함안의 경계에 나와 주둔하고 임시 처소를 마련하여 명 나라 사신을 기다렸다. 원수(元帥)중군에서 급히 보고하기를, “평의지(平義智) 등이 밀양에 나와서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할 곳의 임시 처소와 여러 상황을 살펴본 뒤에 도로 동래로 들어가서 짐을 거두어 실어서 부산으로 옮겨 보냈다.” 하였다.
16일 부사가 여산(礪山)에 이르러 이튿날 전주에 들어가 하루를 머무는데 연회로 대접하였다. 19일 임실에 도착하고 20일 남원에 이르렀는데 접반사와 감사와 도사(都事) 황극중(黃克中)과 반신종사(伴臣從事) 두 사람, 순종사(巡從事) 한 사람, 각 고을 수령들이 따라 들어오니 성 안이 가득찼다. 명 나라 사신의 일행에는 장관(將官)이 30명, 선봉이 50명, 초관(哨官)이 7명, 가정(家丁) 2백 명, 가마(駕馬)가 둘, 교자(轎子)가 하나, 수레가 여섯, 우리나라 출신의 배패(陪牌)가 25쌍, 조례(皂隷)가 15쌍, 나수(鑼手)가 6쌍, 짐꾼이 5백 명, 쇄마(刷馬)가 3백 필, 거우(車牛)가 60척, 아양마(衙養馬)가 50필로 길에 4ㆍ50리나 늘어 있었다. 명 나라 사신은 길에서는 항상 교자를 타는데, 중국 군사가 메었다.
21일 명 나라 부사가 남원에 머물면서 부의 동쪽 백파(白波)ㆍ풍암(楓嵒)을 유람하는데 접반사와 순찰사 등이 따라갔다 돌아왔다. 접반사는 걸핏하면 따라다니나 면접하여 말하는 때는 드물었다.
22일 부사가 함양으로 향하여 24일에 거창(居昌)에 도착하여 머물기로 하였다.
25일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명령을 받고 남으로 내려와 남원에 이르러 민폐(民弊)되는 일을 탐문(探問)하여 듣는 대로 곧 아뢰어 감해 주고 인하여 곡성(谷城)에 머물렀다.
○ 홍세공이 부사(副使)를 함양에 모셔 보내 주고 남원에 돌아와 상천사(上天使)의 선봉이 곧 전주로 향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 권율을 갈고 우의정(右議政) 이원익(李元翼)을 사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로 임명하고 겸하여 원수부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김륵(金玏)으로서 부사(副使)를 삼았다. 이원익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관대(寬大)하여 나랏 일 걱정하기를 자기 집안 일같이 하고 백성 생각하기를 제 자식처럼 하여 묘당(廟堂)에 깊이 있으면서도 민폐를 환히 알았는데, 본직(本職)에 임명되어서는 나라를 붙들고 백성을 구제함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조정과 민간에서 흡족히 여기며 태평한 다스림을 기대하였다.
○ 고(故)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의 혼이 그 아들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국가의 화란(禍亂)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앞으로의 일이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뜻만 지닌 채 헛되이 죽었으니, 어느 때나 눈을 감으랴.” 하고, 인하여 율시(律詩) 한 수를 지어 보이기를,
비운(否運)이 다시 돌아와 사람들이 죽으리니 / 否運重回士女殲
병정(丙丁)의 화가 쪽빛보다 푸르도다 / 丙丁之禍碧於藍
서쪽 철옹(鐵瓮)에 가자니 술 없는 것이 걱정이요 / 西行鐵瓮愁無酒
동쪽 금강(金剛)으로 달리니 소금 있음이 기쁘도다 / 東走金剛喜有鹽
임금의 일산이 비록 요동 학[遼鶴] 울음에 놀라나 / 翠蓋雖驚遼鶴唳
황건(黃巾)이 마침내 한(漢) 나라 발끝에 부서지리 / 黃巾竟碎漢靴尖
훗날 전란이 평정되길 기다려서 / 他年待得干戈息
바다 남쪽에 나의 뼈를 묻어 다오 / 吾骨須收瘴海南
하였다. 이것은 당시 소문으로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어찌 반드시 거짓이랴. 슬프다. 생전에는 국가를 위해서 죽었고,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하니,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의 뒤로 이러한 사람이 몇이나 될꼬.
○ 황신(黃愼)을 통정(通政)으로 승진시켰다.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고 체모를 중히 여겼던 까닭에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8월 14일 이원익이 경성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 자애스럽고 온화하고 진실하여 참으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본도의 병사(兵使) 이복남을 군문(軍門)에 잡아와서 곤장을 치며 남형(濫刑)한 죄를 다스리고, 인하여 위에 아뢰어 곧 파면시키고 순천 부사 박진(朴晉)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18일 이원익이 영남으로 가서 성주(星州)에 머물렀다. 남방의 모든 장수와 수령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기를 신(神)과 같이 하여 감히 속이고 은폐하지 못하니 잔민(殘民)들이 그의 덕에 소생되었다.
○ 명 나라 부사가 심유경에게 전하여 말하기를, “왜추가 비록 면대하여 상의하자고 요청하나 만약 철병하지 않으면 천사가 무턱대로 들어갈 수 없다.” 하였다. 심유경이 곧 이 뜻을 행장에게 전하니, 행장이 곧 김해ㆍ동래 길가에 있는 진을 철수해서 부산으로 옮겨 들어갔다. 심유경이 부사에게 자문(咨文)을 보내니, 부사가 곧 밀양으로 향하였다. 심유경이 또 정사(正使)에게 자문을 보내어 오기를 재촉하였다.
○ 충주(忠州)의 물에 물고기와 자라가 많이 죽었는데 모두 머리가 없었고 동해의 고기잡이들이 생선을 많이 잡았는데, 모두 죽은 쥐였다. 황해도의 경계에 반석(盤石)이 40여 리나 떨어진 곳에 옮겨졌는데 수많은 작은 돌이 따라갔고 모래와 자갈이 비 쏟아지듯 하였다.
9월 1일 일본을 책봉(冊封)할 상천사(上天使)가 서울로부터 출발하여 호서(湖西)로 향하여 6일에 공주에 이르러 공산(公山)을 유람(遊覽)하고 시를 짓기를,
긴 강 굽이굽이 평사(平沙)를 감도는데 / 長江曲曲繞平沙
성곽과 촌락이 쓸쓸하여 광경이 서글프다 / 城舍蕭條愴物華
산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름이 끊이지 않고 / 山色按天靑不齗
소나무 그늘은 땅에도 가득하여 푸르름이 가이 없네 / 松陰滿地綠無涯
지금 기자(箕子)의 천년 나라 이어지고 / 纔經箕子千年國
다시 장건(張騫)의 만리 뗏목을 띄우리 / 更泛張騫萬里槎
해 밑의 오색 구름 어느 곳이 거긴고 / 日下五雲何處是
높은 누각 옮겨가며 석양이 빗겼네 / 危樓徙倚夕陽斜
하였다.
15일 상천사가 임실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는데 접반사ㆍ감사 이하 따르는 자는 부사(副使)가 올 때와 같았다. 상사(上使)의 일행은 왕 중군(王中軍) 그 성만 기억하고 이름은 잊었다. 1명ㆍ참모 2명ㆍ상공(相公) 3명, 장관(將官) 60명ㆍ선봉(選鋒) 70명ㆍ가정(家丁) 6백 명, 그 이외 따르는 자는 한결같이 부사(副使)가 올 때와 같았다. 왜인 소서비탄수가 거느리고 온 30여 명이 일시에 부내에 들어왔다. 명 나라 사신은 오래 머물 계획으로 객사(客舍)에 주방(廚房)을 마련하고 그 아랫사람들은 도감(都監)에서 배정하여 나누어 지공(支供)하였다. 정사는 개구리를 먹으므로 본부(本府)에서 민간에 배정하여 납입하도록 하였는데, 서리 내린 후가 되어 구해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김수가 상통역(上通譯) 동지(同知) 남호정(南好正)에게 말하여 면제해 주었다. 상사 행차의 인부와 소와 말은 전날의 배나 되게 가지고 들어왔다.
○ 평행장이 소추(小酋)를 시켜 졸병 왜놈 20명을 거느리고 남원에 도착하여 명 나라 사신의 동정을 탐지하고 돌아갔다.
21일 정사가 신풍동(新豐洞)본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에서 재미로 사냥하였는데 조금도 즐거운 태도가 없자, 김수(金晬)는 준비를 잘 못해서라고 여겨, 본부의 판관 김유(金騮)에게 곤장을 쳤다.
○ 천장(天將) 항독리(項督理) 이름은 잊었다. 가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광한루에 머물렀다. 역시 천사(天使)의 소속이었다.
○ 이해에 목화가 또 흉년이 들었다.
10월 7일 상천사가 원천(原川) 호곡(虎谷) 송정(松亭)에 놀러가 사냥하였는데 김수ㆍ홍세공 등이 따랐다. 이날 패문(牌文)이 길을 떠났다. 호곡은 본부의 동쪽 12리에 있는데 좌우에 송정(松亭)이 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천사대(天使臺)라 이름하였다. 동리에 사는 생원 유인옥(柳仁沃)이 산과일을 바쳤더니, 종성(宗城)이 기뻐하여 《창옥관고(蒼玉舘館)》라는 책을 기증하였는데, 그의 선대의 문고(文稿)였다.
8일 부사가 밀양을 출발하여 동래로 향하여 11일에 부산 왜영에 들어가 머물고 이항복은 밀양에 물러와 머물렀다.
16일 정사가 남원을 출발하여 황산(荒山)에서 쉬고 저녁에 함양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거창으로 향하였고, 인하여 밀양에 이르러 주재하였는데, 항독리(項督理)는 뒤를 따라 영남으로 향하였다.
○ 배신 한응인(韓應寅)을 북경에 보내어 빨리 세자를 책봉하여 주기를 청하는 일로 아뢰자, 범겸(范謙)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지금 조선 국왕이 재차 삼차 세자를 책봉하여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약 삼군(三軍)을 거느려서 창을 베고 날새기를 기다리면서 밖으로 포악한 적을 막고 안으로 국토를 안정시킨다면 백성들의 기대가 돌아갈 것이니, 나라가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청컨대, 본국에 칙서를 내려 타일러서 잠깐 이 의론을 정지하였다가 왜란이 평정되어 사방이 편안해져 실정대로 아뢸 때를 기다려 재가를 청하게 하옵소서.” 하고 인하여 성지(聖旨)를 받드니, 황제는, “너의 부(部)에서 행하여 곧 조선 국왕에게 알려라.” 하였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가 되어 왜중(倭中)에 있는 귀천(貴賤)한 남녀가 이제 피차의 통행으로 인하여 비로소 편지를 전하는데 처참한 사연은 사람이 차마 볼 수 없었다.
○ 김덕령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두치복병장(豆恥伏兵將)이 되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한갓 잔혹(殘酷)한 것만 일삼아서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윤근수가 진주관(晉州官)으로 하여금 잡아 가두어 두고 조정에 아뢰어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시켜 잡아갔다가, 다음해 2월에 석방되어 진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언관(言官)이 수령 중에 허망한 말을 하는 자를 탄핵하자,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허망하기야 장성 군수(長城郡守) 이귀(李貴)와 같은 자가 있으랴. 익호(翼虎)란 말은 다시 입 밖에 내지 말라.” 하였다.
11월 상천사(上天使)가 밀양에 이르러 머물렀다. 우리나라에서 황신(黃愼)으로 통신정사(通信正使)를 삼고 박홍장(朴弘長)으로 부사(副使)를 삼아서 왜영에 가게 했다. 황신이 심유경의 접반관으로 이때에 왜중에 있었던 것이다.
○ 감사 홍세공이 순시하여 곡성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함을 듣고 포흠(逋欠)을 면제하여 주니, 백성들이 고맙게 여겨 손을 모아 빌었다.
○ 시랑 손헌(孫憲)이 명 나라 사신에게 공문을 전하기를, “왜추가 여러번 천사를 청하고 인하여 철병하고자 하나 천사가 겁을 내어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않아서 황제의 명령을 욕되게 한다. 운운.” 하니, 이종성이 곧 패문(牌文)을 출발시키고 이튿날 동래로 향하여 인하여 부산으로 들어가고, 김수는 물러와 밀양에 있었다.
○ 남원 부사 정경달(丁景達)이 파면되고 최염(崔濂)이 대신하였다.
12월 3일 태양이 셋이 아울러 나오고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성주에 머물면서 전라 감사 홍세공과 더불어 함양에서 회의하였다.
○ 원균으로 충청 병사를 삼고 배설(裴楔)로 경상 우수사를 삼았다.
[주-D001] 다시 …… 띄우리 :
한(漢) 나라 장건이 서역(西域)에 사자(使者)로 가다가 뗏목을 타고 황하(黃河)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은하수에까지 갔다는 전설이다.
[주-D002] 해 밑의 오색 구름 :
해 밑은 임금 있는 곳을 말하며, 오색 구름도 역시 임금의 거처한 곳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의 북경을 이른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양대연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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