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치병 전쟁 40년, 비타민C와 글루타치온으로 희망 찾은 재미의사 투병기
|
|
|
![]() |
|
온몸을 휘감은 염증과 원인 모를 호흡기 질환으로 생사를 넘나든 지 40년. 병마와 싸우기 위해 의사가 되고 과학자가 됐지만 현대의학은 ‘불가능’이란 말만 반복했다. 그래서 찾아 나선 ‘자연의학’의 길. 스스로 임상시험 대상이 되어 생명의 비밀을 풀어 나갈 즈음에 닥쳐온 대형 의료사고…. 현대의학의 ‘잔인한 선고’를 딛고 부활한 재미의사가 이 세상 의사와 환자에게 눈물의 편지를 띄웠다. |
|
![]() |
|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두꺼운 투병기 한 권이 될 것이다.
내 기억이 흘러가 머무는 곳, 그곳엔 늘 병마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소년이 있다. 날마다 치유의 희망을 안고 잠자리에 들지만 신은 그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았다.
초등학교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시작된 난치병과의 투쟁은 내 나이 마흔 중반,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다. 병을 이겨내기 위해 의사가 되고 과학자가 되고 다시 병원 레지던트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그 기나긴 여정 내내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한글도 못 깨친 꼬맹이 시절부터 아버지가 구해오신 결핵 주사약을 들고 동네병원을 전전했다. 주사 자국으로 퍼렇게 멍든 엉덩이를 까고 눈물을 참으며 주사를 맞던 기억이 생생하고, 시내에 있는 방사선과에 가서 무시로 엑스레이 촬영을 하던 장면도 떠오른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이번에는 코가 문제를 일으켰다. 콧속 염증은 재발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언젠가는 축농증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의 수술법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벅찼다. 지금처럼 내시경으로 간단하게 하는 시술이 아니라 입 안을 절개한 뒤 광대뼈 아래쪽을 부수고 들어가는 수술법이었다.
결국 부모님은 차선책으로 콧속을 마취시키고 바늘을 넣어 콧속 농을 씻어내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코 외에도 몸 이곳저곳에 염증이 생겼다. 온몸에서 감염성 질환이 떠날 날이 없었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서양의학은 내 병을 잡아내지 못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는 호흡기 증상과 함께 코, 귀, 기관지에 염증이 계속 발생했다. 기존 의학은 내가 가진 질병에 대해 해줄 게 없었다.
온몸 덮은 염증
내 몸에 분명 문제가 있는데도 “세균감염이 되기 전까진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서양의학. 마침내 어머니는 여린 자식을 구원할 방책을 찾아 세상을 헤매기 시작했다. 용하다는 한의사와 비방(秘方)의 명인들을 찾아냈고, 그들이 건네준 ‘명약’, 정체불명의 약물은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고스란히 내 어린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저 건강해지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그 어떤 쓰디쓴 약도 참고 삼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역겨운 맛과 향의 약을 불평불만 한번 털어놓지 않고 받아먹었는지 기특하기만 하다.
사진처럼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기차를 타고 간 어느 시골마을, 마을에 들어서서도 한참을 걸은 후 다다른 자그마한 집, 그곳 할머니가 건넨 편지봉투 속의 작은 환약들, 그리고 그 봉투를 들고 나오며 새 희망에 부푼 어머니와 아들…. “몸을 바로잡아주겠다”며 자신 있게 쏟아내던 자칭, 타칭 명의들의 지시사항대로 한 치 틀림없이 몸을 돌봤지만, 그 어떤 비방도 내 병을 고치지 못했다. 그 ‘명약’들에 들어간 돈은 넉넉지 않은 우리집 살림을 축내고 허탈감만 안겼다.
온갖 명약과 비방을 다 써봐도 차도는 없었다. 어머니는 콧속 염증을 더 이상 방치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전 여러가지 검사를 했는데 방사선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이비인후과에서 내과로 옮겨야 했다. 폐 엑스레이 검사 소견이 안 좋아서 일단 치료를 시작해봐야 축농증 수술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당초엔 폐렴으로 내려진 진단이 2주쯤 지난 뒤엔 ‘기관지확장증 같다’로 바뀌었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세요.”
결국 폐 질환 치료를 마치지 못한 채 이비인후과로 옮겨져 양쪽 축농증 수술을 받고 병원을 나섰다. |
무지막지한 진단법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염증도 문제였지만 내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걷기조차 힘든 호흡기 관련 난치병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증상이 조금씩 나타났지만, 이마저도 중학교 시절 축농증 수술을 하다 우연히 발견됐다.
당시에도 의사들은 구체적인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저 “폐렴 같다” “기관지확장증 같다”라고 언급할 뿐이었다. 난치병과 전쟁을 치르며 나는 자연스럽게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하얀 가운은 병약한 소년에게 곧 치유의 희망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힘들게 시작된 고교시절, 호흡기 증상은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심해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아보자는 생각에 훗날 모교가 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만난 분이 고(故) 한용철 선생님이다. 그는 내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던 날 병원장으로 졸업식장에 나오셔서 친히 내 손을 잡아주셨다. 미래에 존경하는 스승이 될 분을 고교시절 내과병동에서 주치의로 처음 만난 것이다.
입원한 뒤에도 병실의 불을 밝히고 공부하던 내가 기특했던지, 선생님은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셨다. “여기 들어와서 의사가 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들어만 와”라면서 환히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인자하신 의사선생님의 모습과 달리 그 시절의 의학은 차갑기만 했다. 서울대병원에서 내가 받은 것은 진단뿐이었다. 치료법이 없는 질환을 진단하는 과정에 몸은 더 황폐해져갔다. 아마 그때가 내 생애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당시의 기관지확장증 진단법은 무시무시했다. 어떻게 그런 진단법을 만들어냈는지 의사가 된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 지금은 CT 촬영으로 간단하게 진단할 수 있지만, 그때는 요즘 위장관 사진을 찍을 때 흔히 들이켜는 하얀 색깔의 조영제를 기도를 통해 폐 속으로 쏟아넣고 기관지확장증 여부를 판단했다.
조영제가 기관지를 타고 흘러들어가면 자연스레 기침이 나온다. 의사들은 기침을 참으라고 한다. 기관지를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기침을 하면 안 된단다. 의식을 잃을 만큼의 고통이 몰려와, 촬영을 마치고 나면 기진맥진 상태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기침을 해서 조영제를 뱉어내라고 한다. 기침을 하면 하얀 조영제가 쏟아져 나온다. 검사를 받으면서 이미 탈진 상태가 됐는데, 그 기력에 기침을 하라고 한다. 며칠 터울을 두고 양쪽 폐를 촬영했는데,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셨다.
이런 진단법은 환자를 단순한 객체로 생각하는 일방통행적 의료철학의 산물이다. 진단 결과에 따라 치료법에 큰 차이가 난다거나 기존의 치료법에 변화를 줘야 한다면 모를까, 치료법도 제대로 없는 질환에 정밀한 진단만 해서 뭘 하자는 것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치료법이 없다”
서울대병원에 다녀온 후 나는 앞으로 의사가 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고교시절을 보냈다. 고교 3년간 내가 다닌 곳은 학교, 독서실, 병원뿐. 내 고교시절은 투병과 학업이 전부였다. 3년 동안 극장 한 번 안 갔다면 요즘 젊은 친구들은 믿을 수 있을까. 어머니는 학교로 도시락을 실어 나르셨고 나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늘 병원을 드나들며 항생제 주사를 달고 살았지만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내가 고등학교 3년을 못 버틸 것이라고 염려했지만, 나는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붙들고 절대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나는 그토록 꿈꾸던 의사가 된다는 희망으로, 그래서 이제 내가 짊어진 난치의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들떴다. 관악에서 보낸 예과 시절은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할 만큼 꿈이 차오르던 시절이다. 그런데 예과 2학년, 한창 즐거운 캠퍼스 생활에 젖어갈 무렵 내 가슴엔 긴긴 세월 씻기지 않을 생채기가 생겼다. |
|
![]() |
|
저작권 협약이 체결되면 곧 의학 원서 값이 폭등할 거라고 해서 미리 사본 본과용 의학서적. 내가 가진 병에 대한 궁금증에 재빨리 넘겨본 본과 3학년용 내과 책에서, 거기에서 보지 말아야 할 부분을 보고야 말았다. 의학의 냉정하고 잔인한 선고.
‘치료법이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고드름이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외로움에 몸서리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서양의학이 내게 해준 것은 더 이상의 악화를 막아보자는 소극적인 방어술일 뿐 치료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몸에 염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서양의학은 늘 “염증이 더 심해지거나 완연한 감염증이라고 느끼면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당장도 견디기 힘든데 ‘더 힘들면 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돌이켜보면 의대 본과시절은 친구들에게 내 병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쓰던, 그래서 몸이 어느 때보다 힘들던 시절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여자친구가 가족들과 북한산 등반을 간다고 했다. 내 몸으론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무조건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리 무겁지 않은 배낭을 메고 북한산 산행이 시작됐다.
숨이 차오고 머리가 아파왔지만 계속 걸었다. 중간쯤에서 여자친구가 걸음을 멈추고 “이제 정상에 오를 사람만 가자”고 했다. 그 말에 차마 나는 여기서 쉬겠다는 말을 못하고 정상을 향해 박차고 올랐다. 그렇게 올라선 북한산 정상은 참으로 신선했다. 스치는 바람이 땀을 서늘하게 씻어주는 상쾌함을 느끼며 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와서 함께 간 여자친구의 집. 기침을 했는데 선혈이 나왔다. 폐 속의 혈관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그때 목도한 그 시리도록 붉은 피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병원에서 환자들이 출혈을 하면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지나치곤 했지만, 정작 내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오니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 그랬다. 내 젊은 대학생활이 그랬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보려고, 할 수 없는 것을 해보려고 부딪치고 애썼다. 젊은 혈기, 그래서 그때 피가 그렇게 붉었던가.
의학이 떠난 자리
의과대학에 들어갔어도 치료법을 찾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전국의 명의들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찾아낸 용한 의사들의 얘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번번이 계속되는 좌절에도 포기할 수 없는 모정은 이제 의사가 다 된 장성한 아들마저 그런 사이비 명의들의 진료실에 세웠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이 아니었다. 의학을 알고 나서 듣는 ‘사이비 명의’들의 말은 ‘천편일률’ 그 자체였고, ‘어떻게 이런 논리를 앞세워 돈벌이를 하나’ 하는 생각에 역겨움이 밀려왔다. 그들만의 비방은 백약이 무효였다. 진료실을 돌아 나오면서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지만, 어머니의 내리사랑은 내 발걸음을 다시 그리로 이끌었다. 어느 하늘 아래 있을 또 다른 명의의 진료실을 향해. ‘난치의 질환을 짊어진 젊음’은 그렇게 자신이 의사라는 자존심마저 내던지게 했다.
함량 미달인 사이비 의료인들의 진료실을 찾고 신들린 할머니의 주문 앞에 서기도 하면서 나는 그렇게 내 등에 지워진 짐을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짐은 운명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 여동생이 경희대 한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동생을 통해 한의학적 방법으로 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을 알게 됐고, 그들로부터 기적적인 치유 경험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자신들이 치료하고 있는 환자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다며 찾아왔다. 나는 신경과 병동 입원실에서 환자에게 건네지는 한약 꾸러미를 봤다.
이를 건네받은 보호자는 의료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선 들릴 듯 말 듯 “의사나 간호사가 보지 않을 때 몰래 한약을 먹는다”고 했다. |
|
![]() |
|
세상에 이런 난센스가 또 있을까. 이렇게 해선 투병하는 환자에게도, 치료하는 의학에도 이로움이 없다. 서로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도 치유의 길이 보일까 말까 한데 말이다. 이렇듯 동서양 의학이 반목하며 돌아선 빈 자리엔 환자만 남겨진다.
1990년 의대를 졸업한 나는 2년간 기초의학을 공부하고 1년간 임상경험을 쌓은 후 1993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존 의학이 하지 못한다면 내가 공부해서 직접 내 병의 치료법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때 내린 결론은 이랬다.
‘서양의학의 치료법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동양의학은 철학의 모호함에 안주해 정체되어 있다. 치료의학의 범주를 벗어나 현란한 보신의학의 늪으로 침잠해가는 한의학에 내가 더 기대할 게 없다.’
여행용 가방 두 개를 밀고 미국 공항을 나서며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돌아갈 때는 반드시 지금 병상에 누워 신음하는 환자들을 일으켜 세울 새로운 의학을 들고 갈 것이다.’
치유된 환자에게 답이 있다
미국에 도착한 나는 삶에 두 가지 목표를 갖게 됐다. 기존 의학에 과학의 영역을 접목한 공부를 하겠다는 게 하나이고, 나와 같이 서양의학이 손을 든 환자들이 미국에선 어떠한 치료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것이 둘째였다. 그래서 낮에는 오하이오 주립대 신경과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시험관을 잡았고, 밤에는 환자들의 의학을 배웠다.
난치병 환자들이 치유에 대해 품는 희망은 강렬하다. 그 희망에는 세상 그 무엇도 흉내 낼 수 없는 순수와 간절함이 있다. 그런 간절함은 세상을 울린다. 간구함이 열매를 맺어 이적(異跡)의 치유를 만들어낸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들을 치료한 의사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의학이 아무리 부인하고 수용하지 않는다 해도 치유의 흔적은 환자들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현란한 수사(修辭)로 치장된 의학논문이 허위를 꾸며낼 순 있어도 환자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치유과정에 나타난 생명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왜?’라는 물음을 던진 후,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나는 새로운 의학의 버팀목이 되어줄 논리를 환자와 의사들의 체험기를 통해 열어갈 수 있었다. 도서관과 책방을 전전하며 환자들의 투병기들을 찾아 나섰고, 난치 질환을 치료해낸 의사들의 경험담도 끌어모았다. 한국에도 수많은 건강서적이 나와 있지만 의사들이 펴낸 책들은 자신을 광고하는 도구로 전락한 듯 알맹이가 없었고, 환자의 처지에서 쓴 책들 역시 감상에 치우쳐 투병에 대한 모든 자락을 보여주지 못했다.
신대륙을 발견하다
하지만 미국 건강서적의 모양새는 아주 달랐다. 과학서적을 연상케 할 만큼의 논문자료를 참고자료 목록에 올려놨고, 자신의 생각이 어디로부터 흘러나왔는지도 알려줬다. 그렇게 찾은 책들에 실린 논문자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새로운 의학의 세계로 인도했다. 나는 이들을 등대 삼아 스승도 없고 교과서도 없는 그 길에 항해를 계속했다. 효과가 있다는 제제들은 모두 내게 투여해봤다. 내 몸이 내 의학의 실험실이 돼준 것이다. 실망감만 안기고 지나치는 치료법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다양한 치료법을 경험하게 됐다.
그러던 중에 만난 것이 비타민C와 글루타치온이다. 이후 비타민C와 글루타치온은 내 의학을 끌고 가는 양대 축이 됐다. 이것들을 만나면서 ‘자연의학’이라는 궤도를 발견했다. 그 궤도 위에서 코엔자임 큐텐(Coenzyme Q10, 코큐텐)과 오메가3 지방산도 만났다. 어느 것 하나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질병 치료제로 배운 적이 없는데, 이미 이들을 치료제 삼아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적지 않았고, 그 결과를 보고한 논문도 많았다. 이런 제제들이 나처럼 끊임없이 만성적 염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이들도 있었다. |
|
![]() |
|
숨이 차고 가슴이 한없이 죄어오던 날 입안에 털어넣은 다량의 비타민C 분말, 그리고 뱉어낼 수 없을 만큼 짙게 고인 객담을 배출하기 위해 들이켠 글루타치온 생성물질 NAC(N-Acetyl Cysteine).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어떤 치료제에도 말을 듣지 않던 내 몸은 그들에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논문을 찾고 비타민C로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서서히 비타민C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때껏 의과대학에서 배운 비타민C 지식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광활한 대자연처럼 펼쳐지는 비타민C의 세계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에 견줄 만했다. 그 신대륙은 미래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비타민C를 이용한 치료법을 찾던 나는 ‘비타민C 치료법으로 소아마비를 고쳤다’는 논문이 인용된 한 저술을 보게 됐다. 그런데 그 논문의 발표시점은 1948년. 이미 반세기가 지나 있었다. 논문을 찾으러 한달음에 오하이오주립대 의대 도서실을 찾았지만 워낙 오래 전 것이라 바로 찾을 수 없었다. “창고에 보관 중”이라는 사서에게 “그래도 꼭 찾아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얼마 후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고전들. 반세기 전의 저널에 실린 논문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의학의 뒤안길을 따라갈 수 있었고, 주류의학이 전하지 않고 물려버린 의학의 단면을 마주하게 됐다. 소아마비 치료에서 간염을 비롯한 여러 바이러스 질환 치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타민C 치료법이 논문으로 소개돼 있었다. 왜 이런 사실을 의사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비타민C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있는데 왜 그들이 전하는 치료 효과는 알려지지 않은 걸까, 주류 의학이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의 임상례를 확보하고 있는데 왜 그동안 임상시험조차 시도하지 않은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타민C와 NAC의 기적
자연의학에 관심이 많은 과학자 마크 노블 박사를 만난 건 2001년 즈음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로체스터 대학 교수로 줄기세포와 글루타치온 생성물질 NAC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내가 일하던 실험실에서 이뤄졌다. 당시 우리 실험실은 척수손상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척수손상을 입은 쥐의 척수에 줄기세포를 이식해 신경조직을 재건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줄기세포에 대해 연구하던 마크 노블은 다른 과학자들이 신물질 연구에 혼을 쏟는 것과 달리, 이미 잘 알려진 물질인 NAC에 심취해 있었다. NAC는 타이레놀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들에게 해독제로 쓰여 더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줄기세포의 분화와 암세포 연구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나와 마주앉은 노블은 과학 얘기도 했지만 거의 모든 시간을 비타민C와 NAC 이야기로 채웠다. 내가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비타민C에 몰입하고 있는 것처럼 노블 역시 자신의 체험을 발판으로 NAC의 효과를 재조명하고 있었다. 노블은 자신도 비타민C를 연구에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거미에 물린 경험을 들려주며 “NAC에 강력한 항산화 작용과 항염증 작용이 있다”고 했다.
“거미에 물린 적이 있어요. 심하게 부풀어 오르더군요. NAC를 투여했더니 가라앉기 시작하더군요. 이것이 NAC 효과인지 확인하기 위해 NAC를 투여하지 않자 다시 부풀어 올랐어요.” “나도 객담을 묽게 하고 숨쉬기 편해지도록 하기 위해 NAC를 투여해봤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
|
![]() |
|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숨을 쉬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워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몹쓸 생각도 했다. 수면제에 절었고 수면제가 가져다주는 유쾌하지 못한 느낌 속에서 절망의 세월을 보냈다. 왜 내게, 왜 내게…. 하려던 일을 진정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그렇게 무너져버렸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 몸은 부서졌다. 성경을 붙잡고 찬송을 불렀다. 그것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의료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의학의 길에서 피할 수 없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든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사고 후 남아 있는 폐 기능을 살핀 의사는 “이 정도의 폐 기능을 가진 내 환자들은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찾은 의학을,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의학으로 옮겨놓기 위해 병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물실험을 통해 아무리 효과를 보여줘도 환자에게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뒤집기 위해 실험실을 박차고 나오기로 한 것이다. 이런 계획을 들은 주치의는 내게 “현실적으로 생각하라(Be realistic!)”라고 했다. 그는 ‘불가능’만을 생각했다.
“약은 있다”
폐 기능 검사치의 숫자만 지켜볼 뿐 내 얼굴에 비친 투병 의지를 읽어내지 못한 의사는 자신이 배운 것만 이야기했다. 낮아진 폐 기능 검사 수치에 주눅이 든 듯, 그에게서 희망의 이야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숫자의 볼모가 된 의학의 현실을 보면서 이후 나는 재활에 온 힘을 쏟았다. 숨이 턱에 차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몰려들었지만 이겨냈다.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던 그 순간을 내 삶의 의지가 열었다. 재활 프로그램을 완전히 소화하고 난 후 무리 없이 걸어 다니기 시작한 나를 보고 의사는 “Possible!”이라면서 더는 내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이후 나는 생을 건 전쟁을 벌였다. 불가능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무한도전을 감행했다. 걷는 것만으로도 도전이 되는 인고의 삶. 말을 듣지 않는 몸. 그럼에도 끝없이 달려나가는 마음. 그런 심신의 괴리는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다.
나를 무엇보다 더 견디기 힘들게 한 것은 ‘왜 내게?’라는 의문, 그리고 희망을 던져주지 못하는 의학의 고질적 패배주의였다. ‘왜 내게?’라는 물음으로 되살아나는 잔인한 기억이 가져오는 고통. 그 고통에 무뎌지는 데만 3, 4년이 걸렸다. 계단 위를 오르기 힘들어지면 주차장 건물 계단을 한달음에 달려 올라가던 예전 내 모습이 떠올랐고,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숨이 찰 땐 볼링장에서 몇 시간씩 공을 굴리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금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 그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그 후에도 주류의학은 내게 잔인한 이야기들만 쏟아놓았다. 의사만 만나고 오면 풀이 죽어 절망감에 빠져드는 내 모습에 아내는 “더 이상 의사를 만나지 말라”고까지 했다. “폐를 좋아지게 하는 약은 없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
내게 끊임없이 던져지던 한마디. 한계에 다다른 의학의 패배주의는 이 한마디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 이 말을 믿는 호흡기 내과 의사가 있다면 당장 이 모토를 지워주기 바란다. 사람이 아픈데 쓸 약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간 엄청난 연구비를 소모한 의학이 “약이 없다”라는 말만 반복하면 되는가. 정말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내가 눈물로 찾은 의학에는 분명 치료약이 있다.
요즘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내가 어린시절에 느끼던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숫자가 점령한 컴퓨터 의학, 머리로 하는 의학보다 가슴으로 하는 의학이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법인데 현대의 의학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의지로 투병하는 환자들 앞에서 냉정한 숫자에 얽매여 그 희망을 꺾어버리는 ‘잔인한 조언’만은 그만뒀으면 좋으련만 의학은 내게 늘 ‘차가운 선택’만을 제시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해도 완전하지 않은 의학의 절대적 예견은 큰 가치가 없다. 세상에는 아직 주류의학이 알지 못하는 치료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대체의학자의 논리도 아니고 보완의학자의 주장도 아닌, 의학을 공부한 동료·선후배 의료인들이 자신의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도운 바로 그 치료법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얘기다.
|
|
첫댓글 무한한 사랑만이 우리를 살릴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