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5
8월17일[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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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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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kXb3L8pcEc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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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의 큰 착각 한 가지는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사탄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
유다인이면서도 탁월한 철학자요, 그리스도교 안에서 깊은 경지에 도달한 신앙이었던 시몬느 베이유의 자성과 성찰이 참으로 크게 와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착각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탄의 존재를 외부의 그 어떤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사탄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비유 말씀 역시 그런 오늘 우리의 무지와 무감각을 신랄하게 질타하는 말씀입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 32-33)
자신의 눈 안에 들어 있는 엄청난 크기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동료 인간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은 현미경의 시선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오늘 우리의 이율배반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종이 탕감받은 액수는 사실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만 탈렌트! 우리 같은 평민은 평생토록 접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선지 모르지만, 그 종은 임금에게 만 탈렌트의 빚을 졌습니다. 아파트 수십 채 값이니,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사정이 그렇게 되니 종은 바짝 자신을 낮춥니다. 바닥에 엎드려 싹싹 빌면서 외쳤습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그 모습에 임금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의 태도를 보십시오. 화장실 들어가기 전하고 나오고 나서의 얼굴처럼,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합니다.
그토록 큰 은혜를 입었으면, 사람이 바뀔 만도 합니다. 너무나 기뻐 펄쩍펄쩍 뛴다든지,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앞으로 어떻게든 잘 살아야겠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자비를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태도겠습니다.
그런데 탕감받은 종을 보십시오. 임금으로부터 물러나자마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습니다. 일만 탈렌트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였습니다.
그는 마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식으로 그를 대합니다.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당장 내놓으라고 합니다. 당장 없다고 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 안에 종의 모습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온 제 인생 돌아보니, 극진한 하느님 자비가 무한 반복되어온 인생이었습니다. 그토록 거듭된 큰 죄, 해도 해도 너무한 부끄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한결같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을 밥 먹듯이 용서해주고, 또다시 기회를 주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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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진정한 용서를 위해서>
하느님의 지속적인 은총과 자비 안에서 행복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꿈꾼다면 가장 밑바닥에 기본적으로 ‘쫙~’ 깔고 시작해야 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경한 어조로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경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흔일곱은 ‘완전 중의 완전’을 뜻합니다. 그러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를 할 때 적당이 용서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두 번, 열 번 스무 번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끝도 없이 용서하라, 틈만 나면 용서하라, 용서를 습관화, 생활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밥 먹듯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한 가지가 있군요.
삼시세끼 밥 먹듯이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용서하고 말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호흡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내 삶의 모토처럼 여기고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매일 매순간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평생 씻지 못할 모욕, 깊은 상처를 안긴 그 사람을 어떻게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소중한 인생에 맵디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큰 해를 끼친 그, 그러나 절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습관처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서에 앞선 마음의 정리가 요구됩니다. 때로 합당한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 습관적인 용서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결국 참된 용서를 위해서는 열렬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힘겹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그 어렵던 용서가 시작됩니다.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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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upNss6jc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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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위한 두 가지 지식>
초상집에 가면 아주 가끔은 형제들끼리 여러 가지 이유로 싸우는 경우를 봅니다. 많은 경우 부모에 대한 원망이 형제들에 대한 원망으로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 눈물 흘리는 두 형제가 서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한 용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용서의 힘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은 인정하면서도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예정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 미사 경문도 “모든 이”에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해 흘릴 피다!”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리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내가 사랑한다고 그분이 기뻐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우리 형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가 우애 있게 잘 지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 ‘형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 그리고 먼저 떠난 어머니께 전하는 진심’이란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이지형이란 서른 살 남자 청년인데 그의 고민은 유일한 혈육인 형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형과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보험설계사 일을 하면서부터였습니다. 형에게 5만 원짜리 보험에 가입해 달라고 했는데 형이 거부한 이유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동생은 형에게 부모의 사랑을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당시 형은 20대 후반이었고 변변한 직장이 없이 결혼하여 아기까지 낳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형에게 형수에게 빌붙어 사는 놈이란 식으로 말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형과 계속 화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돈이 좀 생기면 조카들에게 장난감도 보내고 형수 선물도 보냅니다. 그러나 형은 집에 찾아오지 말라며 여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형도 형대로 상처가 컸던 것 같습니다. 동생은 이런 TV 프로에까지 나오며 형에게 미안하다 하고 화해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형제니까 화해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될 일일 것입니다. 화해해야만 하는 이유는 부모님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약을 드시거나 차로 전봇대에 부딪혀 죽으려고 시도할 때 아들로서 그것을 막아드리지 못한 죄책감이 컸던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군대에 갔을 때 어머니가 또 죽고 싶다고 말하며 힘들어할 때 위로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 거면 죽어버리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진짜 이틀 뒤 목숨을 끊으신 것입니다.
누구나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 탕감받은 액수가 일만 탈렌트입니다. 약 6조 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모가 없다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일만 탈렌트는 우리가 모두 탕감받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100데나리온도 형제끼리 탕감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셔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녀가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위 청년이 어머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일,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자신도 죽어서 어머니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지금 혼자 산소를 방문할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내가 누군가 용서하기 위해 혼자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위로부터 새로 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내가 탕감받은 액수에 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찌른 예수님의 상처를 자주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에서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인다면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나만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흘리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앞에 나아가기 위해 모든 이를 용서하고 화해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모든 이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이 두 가지 지식만이 우리를 참 용서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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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21-19,1: 매정한 종의 비유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일흔일곱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주어진 용서를 모든 세대가 다 받았다는 것이다. 일흔일곱 번이란 루카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의 족보를 역으로 기록하였다. 루카가 꼽은 세대는 바로 일흔일곱 세대이다(루카 3,23-38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대를 모두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그만큼 모두 용서해야 한다.
복음에서 한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일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26절) 이는 종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종은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26절). 주인은 종이 청한 것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주인은 그 종이 이 일을 통해서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또한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용서의 조건은 우리 동료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백 데나리온이란 사소한 잘못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도 같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는 그 종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다.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랑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주인이 종에게 자신과 가족을 팔라고 했을 때, 분노에 찬 말은 아니었다. 자비의 순간이었다. 그때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분노와 처벌과 응징이 담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사악하고 악독한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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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후배 신부님이 안식년을 얻어서 신문사에서 잠시 지내고 있습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처럼 후배 신부님에게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홈 디퍼’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조립하는데 아주 잘하였습니다. 저는 잘 보지 못하는 것을 유심히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브루클린 미사에 함께 하면서 강론을 부탁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더니 좋은 강론으로 교우들에게 영적인 선물을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공자가 이야기한 지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하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이 있을지라도 덕을 베푼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이에 따라 갖추어야 할 지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15살이 되면 학문에 뜻을 두고, 30살이 되면 본인의 뜻을 세우고, 40살이 되면 삶에 부덕함이 없고, 50살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고, 60살이 되면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70살이 되면 어떤 행동을 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올해 60이 되었으니 좀 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지혜를 청하고 싶었습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하지만 우리 앞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요르단 강’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궤’를 앞세워 장애물인 요르단 강을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지내던 때를 그리워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굶주림과 목마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붙이를 모아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친 광야를 건널 수 있는 이정표였습니다. 십계명은 두려움이라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 중에 90%는 불필요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저도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욕심과 교만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욕심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재물을 쌓아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보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의 헌금보다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분노와 원망입니다. 분노와 원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용서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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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가 있는 뉴욕 플러싱에서 뉴저지 팰리세이드까지 가려면 2개의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하나는 화이트스톤 브리지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워싱턴브리지입니다. 막히지 않으면 30분이면 가지만 막히면 2시간이 넘게 걸리곤 합니다.
뉴욕과 뉴저지는 다리를 건너면서 넘어오는 차량에 통행료를 받습니다. 길도 막히고, 통행료도 내야하기 때문에 꼭 가야 할 일이 아니면 다리를 건너지 않는 편입니다.
동북부의 사제모임도 뉴욕과 뉴저지가 함께 하는데 뉴저지에서 하면 뉴욕 신부님들이 불편하고, 뉴욕에서 하면 뉴저지 신부님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씩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울 교구 신부님을 만나기 때문에 길이 막혀도, 통행료를 내면서 다리를 건너갑니다. 교구신부님들과의 만남이 제게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원고를 주시는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다리를 건너갑니다. 50년이 넘게 미국에서 사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홍해 바다를 건넜고, 요르단 강을 건넜습니다. 다리가 없었지만 하느님의 크신 능력으로 홍해바다를 건널 수 있었고, 요르단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길이 막히거나 통행료를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를 건너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지키며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정화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굶주리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바위에 물이 솟아나게 해 주셔서 갈증을 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기도 했고, 이집트로 돌아가려고도 했고, 불평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요르단 강을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공간에서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통행료를 낼지라도 갈 수 있습니다. 강에는 다리가 있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으로 가는 것은 가깝고도 먼 길입니다.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은 어딜까요? 아프리카, 남극, 북극도 아닙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입니다.”
저는 추기경님의 말씀을 피정 중에 들었습니다. 추기경님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의심이라는 벽이 생기면 매일 같은 잠자리에 드는 부부도 마음이 멀어집니다. 원망과 불평이라는 벽이 생기면 가까웠던 친구와도 마음이 멀어집니다. 욕심과 욕망이라는 벽이 생기면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외면합니다. 두려움과 걱정이라는 벽이 생기면 예쁜 꽃도 보이지 않습니다. 파란 하늘도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수도생활을 했던 수도자도,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신자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쉽지 않습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이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 가슴에서 다리로 갈 수 있는 여행의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단순히 남의 허물과 잘못을 탕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나의 모든 것을 주는 것(Forgiveness)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 주셨던 예수님께서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리로 여행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나의 여행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가슴에서 다리로 가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용서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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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받았으니 주어라.>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마태 18,24-30)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2-35)
이 비유는, “너희가 이미 용서를 받았으니 너희도 용서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시간적인 순서대로 표현하면,
1)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일 자체가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것도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일입니다.>
2)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이미 받은 용서의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만일에 우리가 용서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비와 사랑을 배반한 죄와 형제애를(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에 대한 처벌입니다.
비유에서, ‘만 탈렌트’는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갚을 수 없는 거액의 빚을, 즉 인간의 힘으로는 속죄할 길이 없는 ‘큰 죄’를 뜻하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는가?, 또는 도대체 그 ‘큰 죄’는 어떤 죄일까?라고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하고, 그 자비와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큰 사랑’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큰 사랑을 이미 받았고, 또 받고 있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백 데나리온’은 ‘작은 잘못’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탕감해 주는 일은 ‘작은 사랑’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종은,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잊어버렸거나 그런 사랑을 받은 적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웃을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나는 하느님께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적 없다. 그런데 저 사람이 나에게 한 짓은 정말로 큰 죄이다. 나는 하느님께 큰 상처를 드린 적 없다. 그런데 저 사람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주었다.”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나는 죄인이 아니다. 저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생각과 합해져서 교만한 위선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의 간청을 외면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는 일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임금에게 끌려가서는 “제발 참아 주십시오.”라고 애원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임금의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너는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면서 어찌하여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냐? 네가 네 동료에게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으니 나도 너에게 빚을 탕감해 줄 수 없다.” <아니면, 반대로 생각해서, 그 종이 자기에게 빚진 동료의 빚을 너그럽게 탕감해 준 다음에 임금에게 끌려간 상황이라면, 임금은 그 종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네가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니, 나도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네가 동료에게 빚을 탕감해 준 것처럼 나도 너에게 빚을 탕감해 주겠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입니다. 결국 내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심판 때에, “저자가 저에게 한 짓에 비하면, 저의 죄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자는 심판하지 않으시고 저만 엄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저자가 저에게 준 상처가 너무 커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그래서 내가 받는 심판은 저 사람이 받는 심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따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고, 나의 심판 때에는 나의 죄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심판받는 인간에게는 “누구의 죄가 더 큰가?”를 물을 권한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의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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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성경은 우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합니다. 이를테면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집회 6,15-16)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좋은 친구를 잃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가 깨지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용서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됩니다. 실망과 배반의 고통이 너무 크고, 미움과 복수의 충동을 잠재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려고 하여도 그에게 예전처럼 온전한 신뢰를 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어두움이, 마치 “족쇄와 쇠사슬로”(마르 5,4) 몸이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우리를 가두고 지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언제나)이 아니라 일흔일곱(또 언제나) 번까지라도”(22절) 우리를 괴롭히는 이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로 청하는 바를 삶으로 옮기도록 초대하십니다. 곧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처럼 우리 친구와 형제들을 언제나 용서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건너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의 중심인 계약의 궤가 가장 앞서 요르단강을 건너갑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우리의 노력과 힘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나되어 계시는 하느님의 권능이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것도 우리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현존과 그분의 권능을 믿으며 끊임없이 청하여야 할 일입니다.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 궤를 지고 요르단강을 건넜던 것처럼 우리도 갚을 길 없는 큰 사랑의 빚을 지고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를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도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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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상 주어지는 과제는 하느님 사랑과 거기에 따른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이라는 독특한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기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선민(選民)은 특정한 민족이나 집단이 신으로 선택되어 다른 집단이나 민족보다 우월감과 권위를 갖는다는 사상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이고 과거 나치집단이 그랬으며 전쟁을 일으켰던 신도이즘과 천황 신격화를 바탕으로 하는 일본이 그랬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은 타 민족과 공존하기가 어렵고, 공존한다 해도 긴장과 불화의 기류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가 지금의 이스라엘과 아랍인들과의 갈등이고 예루살렘을 예워 싼 장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에 정당성을 뒷받침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이 선민사상이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과연 이미 살고 있는 가나안 이민족을 무력적인 정복을 이끄셨겠느냐?는 질문이 나올 만도 한 것이지요. 가나안이 비록 종교는 다르다 해도 그들도 나름대로 고유 문화가 있고 그들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이지요.
토라 중에 레위기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땅에서 이방인이 너희와 함께 며무를 경우, 그를 업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레위기 19장 33절-34절)
물론 여기에서 이방인은 이스라엘 본토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서 중에서 요나서는 적대국 이방인인 아시리아 수도 니네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큰 성읍이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요나의 소명은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네베 성읍에서 하느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임금으로부터 신하와 짐승에 이르도록 먹지도 않고 마시지 않으며 사람들은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시어 재앙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을 가는 요나를 붙잡아서 억지로 니네베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요나는 삐칩니다. 하느님께서 골이 난 요나를 타이르시며 니네베 사람들을 위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예언서 4장 11절)
레위기와 한 예언서의 한 구절을 통해서 이방인과 적대국에 갖는 하느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하신 하느님께서 선택된 민족이라고 해서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서 약속의 땅을 내어 주실 수 있겠어요?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향하기 위해 요르단 강을 궤약을 멘 사제들을 백성 앞에 세웁니다. 궤를 맨 사제들이 요르단에 다다르자 언덕까지 차 있던 물이 멈추고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뒤따르던 백성들은 발도 적시지 않고 건너 예리코 맞은 편 땅으로 건너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한 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국수주의 편협 된 정서를 어떻게 성경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두고두고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자신을 거슬러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참고 용서해 주는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시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18장 22절)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임금에게 만 탈렌트나 빚을 진 사람이 자신에게 아주 작은 백 데나리오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은 경우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임금에게 큰 빚을 탕감 받은데 비해 정작 자신은 작은 빚을 진 동료를 탕감이나 용서하기는커녕 오히려 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자기 동료를 감옥에 넣어 빚을 갚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 끝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3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심에 갇혀 큰신 하느님의 사랑을 가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거슬로 실제로는 이민족에게 심하게 대합니다.
인간도 자기 형제에 어떻게 대하느냐가 큰 관건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없이 너그럽고 크신데 비해 인간은 옹졸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대로 볼 줄 알고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을 닮아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넉넉하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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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베드로 사도가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번도 어려운데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예수님께서는 다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합니다. 임금은 일만 탈렌트(1탈렌트=6천 데나리온)라는 엄청난 빚을 진 종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그를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자마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데나리온=당시 노동자의 일당)을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임금이 이 종을 불러들여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이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줍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9항)
이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자비의 얼굴」, 6항)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때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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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혜를 잊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나 스승의 은혜뿐 아니라 이웃의 은혜도 큽니다. 그리고 자연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움에 대하여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니 마음이 박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만큼 “네가 그럴 수 있나?”하는 서운함만 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눈감아 주고 참아줄 수 있는 한계를 일곱 번으로 표현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은혜를 입게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주님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 34,6-7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은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에게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애도 허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칭찬 받고 싶은 마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 3,12-13)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받을 은혜를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할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셨으니 인간이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의 은혜를 돌 판에 새기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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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형제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금연에 성공하기 위해, 주변 사람에게 담배 끊었음을 열심히 알렸습니다. 하지만 몇 달 뒤에 어떤 모임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담배를 피운다는 것입니다. 금연 사흘 만에 다시 피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금연으로 인한 금단 현상에 화가 너무 났고, 이런 화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담배 피우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스트레스가 담배보다 더 나쁘잖아요.”
신자들과의 만남이 중요해서 자주 술을 마신다는 신부님이 기억납니다. 이렇게 술자리를 통해 자주 만나야 본당 일이 잘 돌아간다고 하시네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신부 본인이 술 먹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 전, 치킨집에 갔습니다. 메뉴판 옆에 이런 말이 쓰여있었습니다.
“닭은 살 안 쪄요.”
기름에 튀긴 치킨을 먹고 어떻게 살이 안 찔 수 있을까요? 그런데 누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에는 뒷 문장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즉, ‘닭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하더군요.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 안에서 거짓으로 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실천하면서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향해 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최대한 네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용서에 한계를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니까, ‘네 번 이상을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 크게 써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마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지요. 자기 형제가 진 마음의 빚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용서를 바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딱 한 번이나 몇 번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 세상의 합리화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자기 합리화에서 멈추는 삶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추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이고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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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이니까>
마태오 18,21–19,1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사람이니까>
나
하느님께 바라듯
벗
나에게 바라니
하느님
내게 하시듯
나
벗에게 하고
나
벗에게 하듯
하느님
내게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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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가 사랑과 용서에 자주 실패한다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몇 번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일곱 번이면 되는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과 응답은 어제 주님 말씀과 이어지는 것일 겁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내게 잘못한 사람을 위해, 어쩌면 원수를 위해 교정과 용서와 기도를 해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어제 주님께서 용서해주라고 하시니 오늘 베드로가 몇 번 해줘야 합니까 하고 묻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시는데 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의 횟수를 여쭙는 베드로에게 주님도 횟수로 대답하신 것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몇 번을 교정해줘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교정해줘야 한다고 하셨는데 몇 번 교정해줘야 하겠습니까? 일곱 번 충고하고 일곱 번 교정해주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도 주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다시 말해서 그가 교정될 때까지 끝까지 교정해주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몇 번 충고했는데도 또 같은 잘못을 범하면, 여러 번 용서해줬는데 또 같은 죄를 저지르면 그 교정과 용서를 포기하고 싶고 실제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내 입맛 아프다고 하고, 내 입맛 더러워진다고 하며 포기하는데 이것을 사랑과 연결하면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일곱 번짜리입니다. 아니, 많은 경우, 우리의 사랑은 일곱 번짜리도 못 됩니다.
이에 비해 주님의 사랑은 몇 번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습니다. 최후 만찬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끝까지’는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라는 뜻도 되겠지만,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뜻하는 것일 테고, 배반했던 제자들 곧 당신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완전히 다시 돌아올 때까지일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사랑은 포기를 모르는, 끝이 없는 사랑이고, 우리에게도 몇 번을 세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비유는 용서의 또 다른 차원을 얘기합니다. 우리의 용서는 인간적인 용서가 아니라 신앙적인 용서, 곧 하느님 용서의 체험에 바탕을 둔 용서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끼리 용서하다 보면 용서가 한계에 부닥칠 것입니다. 일곱 번 정도 용서하고 나면 더 이상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게 해주신 용서를 생각하면, 앞서 봤듯이 끝까지 수없이 용서해주신 그 용서를 생각하면, 내게 범한 그의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고, 한두 번의 용서로 그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범한 나의 죄는 그가 내게 범한 죄보다 더 크고, 하느님께 범한 나의 죄는 그가 내게 범한 죄보다 더 많지요.
그런데도 그 많고 큰 죄를 다 용서받았고 지금도 용서받고 있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오늘 비유의 무자비한 종처럼 용서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용서에 자주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지 못했거나 체험했더라도 그것을 자주 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하느님 용서의 그 물줄기에서 물을 대는, 그런 우리의 사랑과 용서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명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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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탈출(Exodus)의 여정>
-날마다 새로운 출발-
"산처럼, 물처럼"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외관상으로는 고립된 섬처럼 보이는 요셉 수도원이지만 온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중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밤에 일어나 게시판을 읽어보면서 새삼 깨달은 진리입니다. 그중에는 잊지말고 기억해야할 사람 이름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알리는 것은 원장의 소임입니다.
1) 2023년 8월13일, 우리 공동체의 선배 안드리아스 헨첼 수사님이 93세 복된 나이에 선종하셨습니다. -독일, 쾨닉스 뮌스터 수도원.
2) 2023년 8월11일, 필립 신부가 은단다 선교병원에서 수도자이자 선교사로 길고 풍요로운 삶을 살다가 92세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아프리카, 은단다 수도원
3) 2023년 8월15일, 전 수도원장인 안셀름 젤러 퇴임 아빠스께서 향년 85세로 선종하셨습니다.-오스트리아, 피히트 수도원.
이분은 한국을 각별히 사랑하셨던 분이며 2024년 총회 방문 시 참 따뜻한 미소로 친절히 환대해 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이형우 시몬 아빠스님(2016년 선종)과 함께 머물렀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4)쿠바 선교 체험을 마치고 김안토니오 수사가 8월20일 귀국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세월중에 그립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사라져 갑니다. 한때 번성했던 절들의 폐사지, 절터를 방문할 때의 슬픔을 사라져가는 수도원들을 볼 때도 느낍니다.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벗어날 수 없는 세상 현실입니다.
메멘토 모리, 결코 한시도 잊지 말아야할 죽음입니다. 이밖에도 수도원을 잠시 방문하여 머물 분들, 그리고 고성 올리베타노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에 참여할 수도형제들의 이름들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섬같은 수도원으로 보여도 내적으로는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참으로 역동적인 환대의 수도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는 더불어(together) 여정중의 수도공동체임을, 또 정주와 환대의 영성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두분 자매도 잊지 못합니다. 한 분은 30년 이상 수도원 대축일 시, 머리가 까맣던 젊은 시절부터 수도원 꽃꽂이를 해주신 분으로 지금을 백발의 할머니가 된 분이요, 이분과 40년 이상 우정을 지속해온 자매 두 분이 함께 면담성사차 방문했습니다. 두 분의 한결같은 신앙과 우정에 감동했고 이 자체로 천국입장의 구원이라 격찬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우리 모두 더불어 여정임을 깨어 기억하며 살 것을 촉구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영성생활은 늘 새롭게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며 깨어 살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반복하여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삶은 탈출의 여정입니다.
혼자 또는 더불어 탈출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출발이 됩니다.
모세오경은 끝나고 오늘부터는 새로운 인물,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등장입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이름 여호수아는 그가 일생을 통해서 보여주게 될 일들의 청사진과 같습니다.
즉 이 이름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언입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된 땅을 정복했다는 것은 정치적 사건이기보다는 영적 해방으로서, 그 참 의미가 이름에서 드러납니다. 바로 이 이름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됩니다. 끊임없이,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구원 활동중인 예수님입니다.
탈출기의 홍해를 건너던 모세를 연상시키듯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요르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에 진입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참으로 모세의 이집트 탈출의 역사를 잊지 말고 생생히 기억하라고 주님은 여호수아를 등장시켜 요르단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끊임없는, 하루하루 탈출의 여정임을, 늘 새로운 출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생생한 9년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 잊지 못할 추억은 날마다 떠날 때의 기쁨이 제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마치면 다음날 새벽 일어나 떠날 때의 설레는 기쁨, 말그대로 떠남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루를 넘기면 마냥 지루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삶은 떠남의 여정, 탈출의 여정임을 새롭게 깊이 깨달았고 지금도 언제나 지금 여기서의 정주의 삶이지만 내적으로는 매일 탈출의 여정, 떠남의 여정을 삽니다.
이런면에서, 요즘 산책시 자주 만나는 맑게 흐르는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 불암산 계곡물은 저에게 참 좋은 최고의 스승이 됩니다.
이래서 제가 좌우명 삼아 자주 외는 짧은 자작 고백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산속의 강”-
이런 면에서 저의 호는 강산江山에 천산天山 둘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기억과 관련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 용서하라는 것은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매일 밥 먹고 매 순간 숨쉬듯이 영혼이 살기위해 밥먹듯이, 숨쉬듯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무한히 용서받고 있기에 이런 용서의 은총을 기억할 때 가능한 무한한 용서입니다. 용서도 훈련입니다. 정말 잊지 않기 위해 부단한 용서의 선택에 훈련, 습관화입니다.
바로 이를 잊었기에 무자비한 종의 비유입니다. 이 또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참으로 무한한 용서가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게 함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망각은 형제입니다. 만 탈렌트 사랑의 빚진 사실을 까맣게 망각한 무지한 무자비한 종입니다.
바로 탐욕에 눈멀었을 때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참 좋은 예입니다. 이런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진 것을 잊어 몰랐기에 백 데나리온 빚진 이에 대해 이처럼 가혹하고 무자비했습니다. 무자비한 종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영적 삶은 잊지 않고 기억하기위한 끊임없는 노력이요 투쟁입니다. 하느님 용서의 체험에 부단한 용서입니다. 이런 기억과 용서의 사람이 위대한 상식인입니다. 무한한 용서의 사람,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의 말이 생각납니다.
“결국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상식인이며, 위대한 생각은 완전한 상식 위에서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자비와 용서, 기억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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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5)
<용서의 당위성!>
오늘 복음(마태18,21-19,1)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조건없이 용서하라.'는 말씀과 큰 용서를 받고도 작은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18,21) 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2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의 의미?'
이는 '용서의 당위성인 조건없는 용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18,23-35)를 들려주시면서 용서의 당위성을 설명하십니다.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을 십만 원으로 잡았을 경우, '만 탈렌트'는 6조 원이나 되는 큰돈입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임금에게 다가와 간청하자, 임금이 그 종의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탕감받은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천만 원)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18,32-33)
'용서의 당위성?'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5)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으면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 받았기 때문에,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용서는 믿음의 문제이고, 그 대전제는 회개 곧 돌아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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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aLHDaCwR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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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 21)
수 없이
용서의 강과
용서의 고개를
건너고 넘어갑니다.
삶의 끝에는
언제나
용서를 청하는
기도가 있고
관계의 끝에는
욕망이 아니라
용서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되돌려 놓는
용서이며
서로를 살리는
용서입니다.
한 번도
용서한 적 없는
우리들에게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거울 앞에서
우리에게는
낯선 용서이지만
아버지 하느님께는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가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용서를
이야기하는 곳에
용서가 없습니다.
용서의 시작은
죄의 빚을
탕감해 주시는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써내려 가시는
역사는 용서의
역사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의 밥이 되는
삶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긴 용서의
복음입니다.
죄에서
돌아오게 하는
용서입니다.
용서로 돌아가는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의 사람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용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가는
가장 위대한
실천입니다.
완전한 용서보다
더 값진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라는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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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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