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리어답터 김유신, 페르시아 문화 전파자는 나야 나~
과거에 비해 가장 위상이 축소된 위인을 꼽으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앞서 소개한 을지문덕 장군도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는 단연 김유신 장군이시죠.
애초 신라 통일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은 김유신 장군이지만 구한말부터 고구려의 위상이 올라가고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확산되면서 덩달아 추락하신 거지요.
오죽하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조차 “삼국통일 김유신~”이 아니라 “말 목 자른 김유신~”이라서 아이들에게 처음 김유신 장군을 설명할 때 왜 말 목을 잘랐는지부터 말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배우 송강호 톤으로 나직하게 “음~, 그분은 말이야. 우리나라 오렌지족의 시초라고나 할까?”라고 말해야 할 것 같지요.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삼국시대 인간시장 주인공이자 옴므파탈(치명적인 남자)이라고나 할까요?
- 왜 말의 목을 잘랐을까?
김유신 장군이 금관가야 최후의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인 진골 귀족이었고, 할아버지 김무력, 아버지 김서현 모두 신라에서 유명한 장군이었고, 어머니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조카인 금수저였으니, 당연히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태어났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출생지는 뜻밖에도 충북 진천군이에요.
김유신 장군이 태어날 당시엔 기존 신라 귀족들이 망한 왕국의 후손인 김유신 아버지 김서현을 좋아하지 않아 아버지가 권력 주변을 맴돌다 보니, 아들 김유신이 태어날 때는 백제와의 국경지대인 충북 지역 방위를 맡던 시절이었다지요.
그래서 겨우겨우 서라벌로 복귀한 뒤 김유신이 15세가 되자 화랑이 되었는데 김춘추와 친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삼국통일의 두 기둥이 되는 이들은 화랑 시절만 해도 다른 화랑들에게 왕따 신세였어요. 김유신은 신라가 아닌 가야 출신 귀족이었고, 김춘추는 할아버지가 진지왕이었지만 재위 4년 만에 폐위당하고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당한 왕족이어서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처지였으니까요.
정사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화랑이 된 김유신이 35세에 첫 전투에 나갈 때까지의 중간 기록은 없는데, 고려 문인 이인로가 《저술한 파한집》에 그 유명한 말 목 자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흔히 알려지기로는, 친구들과 자주 가던 술집에 가다가 어느 날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더이상 놀지 않고 학습에 정진하겠다고 다짐하죠.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가던 중 말이 늘 가던 그 술집으로 데려가자 단박에 말 목을 자르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알고 있지요.
그런데 《파한집》의 원 기록은 좀 자세합니다. 당시 김유신이 찾아가던 그 술집은 기녀 천관녀의 집이었으니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켜 “집안을 일으키기는커녕 매일 술집에서 놀고 있느냐!”는 엄한 꾸지람을 듣고 발길을 끊었는데, 그 속사정을 모르던 바이오 내비게이션(말)이 즐겨찾기 1번 코스로 자동 주행하고 만 것이었고, 반가워 쫓아 나오던 천관녀 앞에서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보이고자 말 목을 치고 돌아서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억력 좋은 말은 무슨 죄???
그후 천관녀는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지내다가 병으로 사망했는데, 김유신은 삼국통일 후 천관녀가 어찌 지내는지 수소문했다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 그녀의 집에 천관사라는 절을 지었고, 이후 고려 중기 몽골 침입 당시 불타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요.
이처럼 말 목 자른 이야기는 청년 김유신의 단호한 결의를 나타낸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정식 역사서가 아닌 개인이 쓴 문집에 당시 존재하던 천관사 절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적은 내용이라 실제인 양 부각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되네요.
- 페르시아 문화의 얼리어답터, 김유신
그보다는 김유신 장군이 페르시아 문화를 열심히 받아들이고 지금도 전통문화로 남겨주신 얼리어답터였단 사실을 알리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어요. 매년 새해를 맞으면서 그 해에 해당되는 12지 동물의 의미를 거론하며 열심히 뛰어보자는 덕담을 나누고 있는데요, 신라에서 이 12지 사상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이가 바로 김유신 장군이십니다.
앞서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실은 이란 북부 소그드족 출신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고 했는데, 그 주장은 아직 주류 학계에선 인정되지 않지만, 김유신 장군 묘지에 둘러쳐진 12지신 박석은 한반도 최초의 12지 관련 유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흔히 12지가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라고들 여기시는데, 12지는 오방색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중국이 실크로드를 통해 여러 문명과 교류하면서 사산조 페르시아(AD226~651)
사람들과 그들의 풍속이 함께 전해집니다. 이때 태양력과 12지 등이 들어오면서 6세기 말 중국 《형초세시기》를 시작으로 입춘, 춘분, 추분, 하지, 동지 등 24절기 역법이 정립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페르시아 문화 역시 한반도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죠.
- 페르시아 신화를 여동생 결혼에 활용하다
이때 김유신은 막 유입된 페르시아 문화를 흥미 있게 보다가 건국 신화의 일부를 여동생 문희의 결혼 신화에 활용하기에 이릅니다.
청년이 된 김유신은 김춘추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합니다.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신라 왕족 만명부인과 결혼해 신라 권력의 중심으로 한 발 더 다가선 것처럼, 그 역시 비록 밀려난 왕족이지만 야심에 가득 찬 김춘추와 더 깊은 인연을 맺고 싶었던 것이죠. 그래서, 집에 초청해 축국 놀이를 즐기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찢어지게 해 두 여동생에게 옷을 꿰매 달라고 했는데, 큰 여동생 보희는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김유신은 술상을 차려 놓고 둘째 여동생 문희를 불러 대신 방에 들어가게 했고, 둘이 사랑에 빠져 덜컥 임신을 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 축국이라는 놀이는 가죽 공을 서로 발로 주고받으며 차다가 공중의 바구니에 넣는 게임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제기 차듯이 공을 떨어뜨리면 상대방에게 공격권이 넘어갔다고 하니, 발로 하는 제기 농구라고 봐야 할까요?
이 놀이가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데 이미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제나라 사람 중 축국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이미 전국시대(BC403~221)부터 존재한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은 축구는 영국이 아니라 자기네가 시조라고 주장했고, FIFA 역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축구라고 인정한 바 있어요.
이 모든 게 다 김유신의 계획이었지만 뜻밖에도 김춘추는 문희와의 결혼을 망설이게 됩니다. 그건 일단 두 집안이 서로 격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미 김춘추는 결혼을 한 유부남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의 정부인은 김보종의 딸, 보량공주였고 이미 고타소라는 딸도 낳은 상태였어요. 그러니 김유신은 눈을 질끈 감고 여동생을 둘째부인으로라도 만들어서 신라 왕가에 한 발 더 다가서려 한 것이죠. 앞서 단군 신화 이야기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려시대까지는 첫 부인이 아니더라도 다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러니, 최후의 수단으로 선덕여왕과 김춘추가 나들이 가는 일정을 확인하고, 자기네 마당에 불을 지피며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한 여동생을 불태워 죽이려 한다.”고 소문나게 해 결국 선덕여왕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 조카인 김춘추를 꾸짖고 결혼하도록 명령내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문희가 김춘추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데, 공교롭게도 첫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면서 정부인이 되었고 그후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고 자신의 큰아들 김법민이 문무왕이 되니, 오빠의 치밀한 계획으로 결국 망한 금관가야 왕족 혈통이 통일신라 시기 왕가의 한 축이 된 것이죠. 그러고 보니 김유신은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겁니다.
그후 왜 첫째 여동생이 아닌 둘째 여동생이 김춘추의 부인이 되었는지 그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보희의 꿈 이야기가 동원됩니다. 즉, 김춘추가 놀러 오기 전 언니 보희가 꿈에서 서라벌 서형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았는데 경주 시내가 다 잠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언니가 민망해하며 꿈 이야기를 하자 그 의미를 알아차린 동생 문희가 비단 치마 하나를 내어주고 그 꿈을 사면서 결국 태종무열왕의 왕비가 될 운명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영특함이 이어져 그의 아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그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죠.
그런데, 이 꿈 이야기는 실은 원조가 따로 있습니다.
원래 이 꿈 이야기는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나와 있는 페르시아제국 건국 신화의 초반부 이야기입니다.
원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BC 6세기,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 만다네공주로부터 산에서 소변을 누었는데 온 세상이 그 소변에 잠기는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에 해몽을 구하니 점술가들은 공주가 낳은 아들이 세계를 지배할 징조라며 칭송했으나 직계가 아닌 외손자가 나라를 차지하는 것을 두려워해 속국인 파르스(이란 지역)의 캄비세스1세에게 시집을 보내버렸고 외손자가 태어나자 살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후 파르스의 왕자 키루스2세는 나라의 힘을 키웠고 결국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메디아를 병합하여 첫 페르시아왕조인 아케메니드 페르시아(흔히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아제국)를 선포하니, 만다네공주가 꾼 꿈이 실현된 것이죠.
이 이야기는 아마도 국력이 강해진 키루스2세가 어머니의 조국을 멸망시키면서 그 이유를 납득시키고자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그리스와의 마라톤 전투 이야기, 영화 ‘300’ 등으로 인해 페르시아제국을 악의 제국으로 여기지만, 다리우스2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키루스의 후손에게서 황제 자리를 찬탈한 인물들이고, 제국 건국자 키루스2세 황제는 매우 용맹하면서도 피지배 민족에겐 관대했습니다. 그는 그후로도 진격을 거듭해 세계 최초로 돈을 만든 리디아(터키 지역)를 점령하고 바빌로니아 제국까지 정복한 뒤, BC539년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고향으로 보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보물창고를
동원해 예루살렘을 재건시켜줍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구약성경》 ‘에스라서’, ‘이사야서’에서 ‘고레스 왕’이라 쓰면서, “여호와가 기름 부어 세우신 자(메시아)”로 칭송하기까지 했지요.
당시 그가 멸망시킨 나라가 23개나 되었다는데 이처럼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고유 관습과 종교를 인정해주는 관용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을 오랜 기간 유지하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예전 페르시아 전쟁사를 읽다가 이 키루스 황제의 매력에 빠진 바 있기에 잠시 소개했습니다.
이에 김유신 가문은 이 페르시아제국 신화 이야기를 패러디해 슬기로운 문희가 소변으로 세상을 덮는 꿈을 언니에게서 샀고, 그녀의 아들이 한반도를 통일했다고 선전한 겁니다. 정말 버라이어티하고 글로벌하면서도 스토리텔링 전문가들이 넘치던 삼국시대였습니다.
부하: “장군, 나랏 사람들이 왜 첫째가 아닌 둘째 여동생이 춘추공의 부인이 되셨는지 궁금하다고 합신라~.”
김유신: “왜 그런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갖는다더냐서라벌. 춘추공이 둘째를 더 좋아하니 그랬다고 할 순 없고황남빵.”
부하: “천하가 다 주목하는 셀럽이니 그렇게 말하면 실망이 크지신라.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르시아?”
김유신: “얼마 전 읽은 페르시아 설화집이 있다르시아. 거기 키루스 황제 이야기를 응용해보자테헤란.”
이처럼 김유신은 몰락했던 집안을 일으키고자 곁가지 왕족 김춘추와 결혼으로 사돈지간이 되었는데, 이 결혼으로 서운해했어야 할 김춘추 첫 부인의 아버지, 김보종은 김유신, 김춘추의 든든한 재정 후원자로 남습니다. 이는 세 명 모두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선·후배 지간이었기에 가능했겠지요.
이에 무력을 가진 김유신, 왕족이자 꽃미남이자 외교력의 달인 김춘추, 기존 신라 왕족인 진평왕계 귀족이자 거부이던 김보종 3인의 연대는, 마치 로마 공화정을 제국으로 변모시킨 삼두정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결합 마냥 기존 신라의 권력 구도를 뒤흔들고 마침내 삼국의 구도마저 뒤흔들게 됩니다.
이제 삼국시대의 끝을 향해 달려가봅시다. 헛둘, 헛둘!
첫댓글 감상 잘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