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1군 역시 민스크 근교에서 러시아 1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2017년 11월 10일. 나토의 계획에 의하면 아직 나토의 스텔스 기들과 전자전 기들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구 소련 연방에 침공한 러시아 군에 대해 공습을 계속하고 있어야 했다.
해, 공군과 지휘 보급 체계를 상실한 러시아 지상군은 야금야금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나토 지상군은 러시아군의 돌발행동을 억제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러시아 해군의 예상치 못한 선제 기습 공격으로 인한 전방위 전투가 벌어지면서 나토는 고통스러운 전쟁으로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토 1군의 영국 주력군은 민스크를 포위했지만 스몰렌스크의 러시아 3군 31. 33사단. 35사단. 37, 39자동차화 저격 사단이 밀려들면서 오히려 벨로루시에서 폴란드 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미 5군은 급히 나토 1군의 지원에 나서며 갈팡질팡했다.
미 육군 사단은 전체가 기계화 보병 사단으로 편제되어 있어 나토나 러시아의 그 어느 사단보다도 장비나 훈련 면에서 우세했다.
미 5군의 13개 기계화 보병 사단과 합류한 영국군 7개 사단은 러시아 1군 및 3군과 밀고 밀리는 격전을 벌였다.
11월 11일 독일과 폴란드의 나토 공군기지, 그리고 발트해의 콜롬비아 항모와 로널드 레이건 항모 전단으로부터 발진한 미국의 F-35기들과 F-18, 나토의 유로 파이터, 라팔, 등은 민스크의 근교에 주둔한 러시아 1군의 기동 부대를 맹폭했다. 1차, 2차, 3차로 이어지는 공습에 공군력이 소진된 러시아는 위력이 떨어지는 대공 무기로 반격을 꾀하며 고전하고 있었다.
막심 고리끼는 대당 가격이 SU-30을 넘어서는 고가의 장비인데다 미국과 나토가 새로 대량 배치한 싸구려 무인기에 대부분을 상실하고 있었다.
키예프로 진격한 나토 2군은 러시아 9기갑 사단을 유인해 ATACMS 지대지 유도탄 1백 50발을 발사. 거의 전멸시킨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나토 3군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한 미 6군과 러시아 13군단과 중앙 집단군 23개 사단이 오데사에서 벌인 혈투였다.
투입된 총 병력은 미 6군의 18개 기계화 사단과 나토 3군의 독일과 이태리 군, 여기에 대응하는 러시아 13군단의 5개 사단과 중앙 집단군 23개 사단이었다.
드네프르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에 들어간 양군은 러시아의 경우 공군 지원이 거의 끊겼고 나토 또한 흑해에 파견되어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항모 전단과 루즈벨트 항모 전단의 함재기들이 반수가 넘게 격추되어 원활한 공중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육상 공군 기지는 거리 상 나토를 지원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둘로 나뉘어 나토 3군이 러시아 13군단을 맡고 미 6군이 러시아 중앙 집단군과 맞부딪쳤다.
미 6군과 러시아 중앙 집단군은 11월 15일부터 11월 21일 까지 6일 간 전투를 벌였다.
공중 지원이 없는 가운데 순수한 육상전으로 벌어진 미 18개 기계화 보병 사단과 러시아 중앙 집단군 소속 10개 자동차화 저격 사단과 5개 보병 사단은 항공 기갑전과 포병전에서 승패의 명암이 갈렸다.
미군의 M 2 전차는 러시아의 T-95 전차보다 우세했고 코만치나 아파치 같은 항공단 병력이 훨씬 탁월했다.
포병 역시 대 구경 로켓 MLRS와 자주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GPS 시스템과 레이더의 조준에 따라 쏘아대는 미국 포병에 비해 러시아 포병은 대 구경 로켓과 야포의 정확성이 떨어졌다. 다만 퉁구스카를 보유한 러시아 군에 상당수의 미군 아파치가 격추당했다. 반면 미 지상군의 어벤져 시스템은 러시아 MI-28 기에 비해 사거리가 불리했다. 이때문에 러시아 전투 헬기들은 미군 헬기보다 더 많은 기갑차량을 파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숫적인 면에서 정예 자동차화 저격사단 당 전투 헬기가 12대에 불과, 전세를 엎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기간에 러시아 중앙 집단군은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러 모든 부대의 통제를 상실했다.
러시아 중앙 집단군은 6만 명의 포로를 남기고 부대별로 뿔뿔이 퇴각했다.
-우리는 M 2 전차를앞세워 러시아 13군 45전차 사단과 들판에서 기갑전을 벌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런 기갑전이 다시 재현되리라고는 어느 군사 분야 종사자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중 지원이 끊기고 해병이나 공정단의 후미 공격도 없는 터에 부대 후방에 보병과 포병을 배치해 놓은 상황에서 기갑전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전투였다.
아군의 6개 대대, 280대의 전차는 약 200대로 추산되는 러시아 28, 29전차 여단과 정면으로 돌진했다. 각 기갑 부대의 측면에는 보병 전투타가 전개되고 있었다.
양 쪽 진영에 강력한 대전차 미사일을 장비한 보병이 있었으나 쌍방의 연막 장갑차가 퍼부은 연막으로 시계가 제로였고 쌍방 포병의 엄호가 펼쳐져 진지에서 나올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양측은 열영상 장치에 의존해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13군단의 전차부대는 T-95와 BMP-3를 장비하고 있는 정예부대였다. 쌍방의 전차포가 직선으로 날았다. 여기 저기 불타며 부서진 전차와 시체들이 즐비했다. 전차들은 어쩔 수 없이 시체를 뭉개고 전진했는데 일부 전차는 파괴된 전차들을 들이받는 등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확실히 적의 BMP-3는 보병 전투차 간의 전투에서는 우리 브래들리 보병 전투차보다 한 수 위였다. 우리 브래들리들은 BMP-3의 100밀리 저압포에도 쉽게 파괴되었다. 하지만 적의 BMP-3는 우리 브래들리의 25밀리 포에 파괴되지 않았다. 브래들리는 적 BMP-3를 파괴하기 위해 토우 미사일을 발사해야 했는데 조준에서 발사까지 시간이 느렸다.
전투는 한 시간 만에 끝났다. 귀가 멍멍하고 눈, 코, 피부 등 몸의 감각기관 전부가 마비된 것 같았다. 러시아군 전차는 거의 파괴되었으나 우리 전차는 100대 쯤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후미의 보병 부대와 함께 돌진해 적의 포병과 보병을 무력화시켰다.
-미 2전차 여단 1대대장. 한스 브릭스 중령의 회고.
그러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나토 수뇌부 역시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었다.
개전 초 묘한 흥분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미국과 유럽의 국민들은 이제 빨리 전쟁을 끝내라고 아우성이었다.
러시아를 구 소련 연방으로부터 몰아내려면 적어도 초기 동원 규모에 달하는 대군이 추가로 필요했다.
미국은 극동과 중동을 비워둔 채 더 이상 병력을 이동할 수 없었다.
유럽은 애당초 동원할 수 있는 맥시멈의 군대를 동원했다.
양측은 지지부진한 전투를 얼마간 벌이다 터키의 앙카라에서 종전과 평화조약안에 서명한다.
러시아는 전 군사력의 태반을 잃고 서방을 적으로 만들었을 뿐 얻은 것이 없었다.
러시아 국민들은 연방이 수중에 들어오면 과거 소련의 위세를 되찾을 수 있는 것 마냥 과대 선전을 해댄 안드레이 블로코프 정권을 비난하고 꿈에서 깨어 추운 겨울 한 가운데에 있는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야당의 공세를 막아주던 군이 몰락하자 안드레이 블로코프는 내각을 총 사퇴시키고 정권을 재수습하려 했으나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전쟁에서 양측이 얻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2017년 가을. 유럽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한국은 대선의 열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일단 흥국회는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무영을 지지하기로 내부방침을 굳혔다.
그리고 11월 27일 실시된 선거에서 이무영은 집권당의 20년 장기 집권을 더 이상 연장시켜서는 국민이 불행해 진다는 야권 단일의 젊은 후보 신현수의 상당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표차를 벌려 5년 연임에 성공했다.
그리고 11월 30일에는 오랜 병석에 누워 있던 김정일이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정일의 장례는 이무영을 비롯한 한국 내각과 서회 중국 부총리 겸 외교부장 일행이 조문사절로 참석한 가운데 연방의 국장으로 평양에서 조촐히 치러졌다.
이날 장례식에 나란히 앉은 김국과 이무영은 일상적인 인사 외에 서로 말이 없었다.
2018년 2월에 출범한 새 내각에서 주목할 점은 노국봉이 국가 보안상에 연임된 것이었다. 이무영은 새 임기 동안에도 김국을 견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노국봉은 보안성 순시 보고에서 이무영에게 폭탄 발언을 했다.
“각하, 연방 정부 내각 수반은 총통여유?”
“그게 무슨 소리야?”
“각하도 이리 총선을 거쳐 어렵게 연임을 하는데 연방 정부 내각 수반은 임기도 없이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 질 때까지 재임한다는 최고민족연방회의의 가당찮은 내부 규약에 묶여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유. 그 내부 규약이 뭐여유? 바로 김국이 최고민족연방회의 의장에서 내각 수반으로 옮겨가기 전에 지멋대로 만든 거 아녀유? 최고민족연방회의 의원들이 하는 게 뭐 있어유? 그저 국가 재정이나 축내고 명예나 좋아하는 사람들이쥬. 의원 거의가 흥국회의 손 안에 있어유. 최고민족연방회의에서 연방 내각에 행사하는 권한을 대폭 축소해야 하여유. 지금은 옛 남북 시절처럼 눈치 볼게 하나도 없어유. 연방정부 내각 수반도 검찰총장이나 경찰청장, 합참의장 같이 임기를 2년으로 못 박아야 되유. 그래서 각하가 국회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지유. 연방 정부는 각하의 하부 내각이지 동등한 정권이 아닌 거잖유.”
이무영도 그 점에 관해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다. 연방에 갈 때마다 느끼는 점으로 연방 정부의 관료들은 자신이 아닌 김국 수반을 국가 원수로 인지하고 있었다. 연방 내각의 장관도 김국이 제멋대로 임명하고 해임했다. 최고민족연방회의 규약상 연방의 내각 임명은 한국 대통령인 자신의 인준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김국은 사후통보로 그치고 있었다.
더구나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흥국회의 지원을 받은 야당 인사가 적지 않게 당선되었다. 당내 반 흥국회는 김국의 해당(害党)행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며 분개했으나 내각수반 임명과 동시에 탈당한 김국에게 당 차원의 제재를 가 할 수도 없었다. 노국봉과 강계철은 대한민국 집권여당 정부의 하부조직인 연방의 내각 수반이 야당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반역과 무엇이 다르냐며 이무영에게 분노를 토로하고 있었다.
이무영은 몬테크리스토 시가를 꺼내 정성껏 골고루 돌리며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김국은 그에게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있었으나 그를 신봉하는 흥국회 등 일부는 실질적인 한반도의 지도자를 김국으로 결정짓고 있었다. 특히 연방 정부에서 북한 연방 인민에게 암암리에 주입하는 김국에 대한 일종의 숭배화는 보안성 판단실(判断室)로부터 자주 보고되어 올라왔다. 이무영은 김국의 현재 행태를 묵인해서는 곤란하다는 결심을 세웠다.
“나도 그리 생각하오. 지금의 연방 체제로는 완전한 통일에 5년이 걸릴 지 10년이 걸릴 지 모르는 일이오. 그때까지 김국이 내각 수반으로 있는 것은 불합리하지. 이기순 당대표를 불러 주시오”
2018년 3월. 대통령 선거 후 처음 열린 국회에서 연방에 관한 법률이 상정되었다. 다수의 여야 의원들이 발의에 참가했다.
연방 청사의 김국은 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여당 20년 집권이 누구 덕입니까? 각하의 뛰어난 업적 때문이 아닙니까? 수소에너지로 인한 경제적 도약이 없었다면 제 놈들이 어찌 그런 국민의 지지를 받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각하를 몰아내겠다고 창을 들이댑니까? 이무영이 그런 정도의 인물이었습니까?”
박수길 내무상이 울분을 토로했다.
“이무영은 그럴 분은 아닌데. 아마 반 흥국파의 장난일 거요.”
“각하, 그냥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흥국회 소속 국회의원이 몇이나 되지?”
“지금 총 97명입니다.”
“많이 늘었군.”
“그렇습니다. 지난 번 총선 때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심철민 흥국회 고문께서 애써 관리해 주셨습니다.”
“여야 분포는 어때?”
“여당 54명. 야당 43명입니다.”
“반 흥국회는 어때?”
“여당에만 50명 선입니다. 하지만 이무영이 지시를 내리면 나머지 중도 성향의 의원들도 어쩔 수 없이 법안 통과를 지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국과 박수길은 자신들이 속해 있던 집권당을 여당이라 불렀다. 그만큼 두 사람의 정치인에 대한 시각은 냉소적이었다.
“그래도 우리 쪽은 야당까지 포함해 두 배에 가까운 세력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부터 공작을 시작하면 이무영 쪽의 의도를 저지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 자금을 좀 풀어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방송보도를 보니까 이번 법안의 표결 처리는 권력과 부의 대결이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국민들 반응은 어때?”
“여론 조사 결과 일반 국민들은 대개 반반입니다.”
“그래? 사회 사업에 그 많은 돈을 뿌렸는데... 한강에 기증한 내 이름이 붙은 다리도 세 개나 되지 않는가. 전국에 기증한 지하철 노선이 몇 개야? 좀 섭섭하군. 내가 민족 통일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지 내 잇속을 차리려고 여기 앉아 있는 건가? 곧 통일이 될 텐데 그걸 못 기다려 줘? 내 진정한 마음을 너무들 몰라준단 말이야.”
“일반 국민들은 이제 배가 불렀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굴종하는 영웅은 찬미하지만 군림하는 영웅은 허락지 않습니다.”
“그건 그래.”
“대중 연예, 스포츠 스타에게 대중은 돈과 명예를 주지만 각하처럼 그들 위에서 일하려는 사람은 부담스러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흥국회의 자본 정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릅니다.”
“더불어 이무영의 청빈 이미지가 상승했겠군.”
“그렇습니다.”
“결국 국회 표 대결로 결판을 내는 수 외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겠어.”
“그렇습니다. 현재의 여론을 보면 우리나 반 흥국회나 표결 결과에 승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275석 국회 분포 중에 여당이 137석, 3개 야당이 130석, 무소속이 8석입니다.”
“우리 흥국회는 아무리 이무영이 나서도 부결 표를 던질 거요. 현재는 우리 쪽이 유리하지 않소?”
“겉으로 보기엔 그렇습니다만 43명의 여권 중도파 의원들이 다 회유된다고 보았을 때 우리 측 94, 이무영 측 93명으로 비슷합니다.”
“결국 결정은 야당에 달려 있군. 우리 라인을 풀 가동해서 좀 움직여 봐요. 심 선배가 잘 할 거요. 야당에 우리 자금 안 쓴 의원이 없지 않소.”
김국은 자신만만했으나 3월의 첫 개회에서 법안은 통과되었다. 찬성 148표 반대 104표, 기권 및 무효가 20표였다.
김국은 믿었던 야권에게 물린 셈이었다. 야권 대통령 단일 후보로 추대되어 선전한 신현수가 집권당 내의 파워 게임을 통한 내분을 노려 자신의 세력에 들어 있는 야당의원들을 맨 투 맨으로 설득해 법안 통과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여기에 노국봉은 보안성의 역량을 총동원한 공작을 시도했다.
“쥐새끼 같은 놈들.”
김국은 이무영에 대한 배신감과 반 흥국파와 야당에 대한 분노로 가득찼다.
김일성- 두번 죽다.
이 무렵 연방에는 점차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 닥치고 있었다.
김국은 연방 정부 내각 수반에 취임한 이래 아직도 신격화되어 있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그리고 기본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연방이 취한 조치는 의복의 김일성 배지를 떼라는 것뿐이었다.
만수산 기념 궁전에는 아직도 여전히 참배객들이 모여들었고 전 연방에 산재한 김일성의 동상과 기념비는 수 천 개에 달했다. 북한 연방이 지닌 아킬레스 근을 한번도 건드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김국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는 가만히 때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2018년 3월 마지막 주 연방의 전 T. V방송들은 ‘김일성, 그는 누구인가?’라는 10부작 특별 방송을 시작했다. 제목부터가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이 프로를 김국은 연방 인민들이 의무적으로 시청하도록 국가 내무성에 지시했다.
첫날 방영에서 연방인민들은 숨을 죽인 채 자신들의 성역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1부 ‘김일성의 탄생과 성장’에서 김일성에 관한 각종 기록과 증언, 러시아에서 제공된 필름, 김성주라는 본명 등이 나오자 일부는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김국은 방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연방의 옛 조직을 활용하였다.
각 조 별로 모여 함께 프로를 시청하고 토론하게 하는 것이다.
김일성과 김구의 회담의 진상이 나오고 한국전쟁이 북침이라는 구 소련과 중국학자들의 증언이 계속됐다.
연방 정부는 이 프로를 위해 여러 수용소에서 구한 전직 북한 고위 간부들을 대거 동원했다.
방수철 전 국가 검열상. 민진관 전 조선 노동당 조직 지도부장. 양일우 전 인민군 대장. 성준섭 전 당 비서. 김태기 전 황해도당 비서 등 생존해 있는 숙청 인사들이 총 망라되어 증언에 임했다.
2부에서 증언된 개인 숭배 정책에서 연방인민들은 충격으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마치 회교국가에서 포르노를 단체 관람하는 격이었다.
8월 종파 사건과 김일성의 정책, 김정일의 후계자 선택, 유일 사상과 주체사상, 우리식 사회주의의 실상 등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뜬소리로 들었던 것들이 국영 T. V.를 통해 방영되자 인민들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프로는 생생한 화면과 함께 기쁨조와 김일성 부자의 향락 퇴폐 생활까지 방영했다.
10부가 끝나고는 특별 좌담회를 열어 방송국과 평양과 지방의 인민들을 연결해 생중계 했다. 정권에 충성하게 길들여진 그들은 한 번 입이 열리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쏟아 놓기 시작했다.
김국이 바라던 바 그대로였다.
“우리 동리 인민 중 20명이 굶어 죽었수다. 이거이 당의 은덕이고 김일성 수령님이 이뤄 놓은 지상낙원이요?
“인민들은 굶어 죽는데 위원장 동지와 당간부들은 저런 음탕한 놀이에 빠져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오”
“우리네 정말 이 정도일 줄 몰랐음메. 그럼 지금까지 당은 우리를 속여 온 거 아임메?”
“놀랍수다. 내래 당 중간 간부라 들을 건 듣고 알건 알고 있었지만 어케 저리 됐냔 말이오?”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온 불만은 며칠을 두고 그칠 줄을 몰랐다. 김국은 내각을 소집해 앞으로의 모든 정책은 당분간 인민들이 그들의 분노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데 초점을 맞추라 지시했다.
인민들의 분노는 연방 정부의 유도와 비호 아래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평소 불만이 많던 이른바 ‘함경도 아바이들’이 가장 먼저 들고일어났다.
청진에서는 소요에 가까운 시위가 일었다.
처음에는 관제 주도였으나 조금 시간이 가자 인민들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터뜨리고 만다.
시위대는 김일성의 노작집, 전기, 초상화, 동상, 흉상, 등 닥치는 대로 부수고 모아 불을 붙였다.
이 분노의 불길을 함경도에서 시작되어 산불이 바람을 타고 번지듯이 혜산, 김책, 신포를 거치더니 강계, 함흥, 신의주로 번져 나갔다. 일주일이 못 되어 이 거센 불길은 평양에 상륙했다.
이번에도 대학생들이 선두에 섰다.
평양에 있는 김일성 종합대. 김책 공대. 평양 외대등 대학생들이 다 나섰고 평양 제 1고등중학. 모란봉 제 1고등학교 등 고등학생들까지 가세했다.
평양은 일시적으로 무법천지로 변했으나 연방 청사에만 보안군 병력이 배치되었을 뿐 나머지 군경 병력은 김국의 지시로 모두 평양 시외로 철수한 상태였다.
“보라구. 시키지 않아도 잘 들 하지 않나. 주입식 억지 교육보다는 스스로 깨닫는 교육이 더 효과적인 거야.”
김국은 연방 청사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평양 시내를 살피다 옆에 있는 박수길과 최일도에게 웃어 보였다.
북폭에서 재건된 지 얼마 안 된 인민대학습당과 소년 문화궁전, 조선 중앙 박물관, 조선 혁명 박물관 등에서 서책과 자료가 산처럼 끄집어내져 불이 붙었다.
김일성 종합 대학에 집결한 학생 등 시위대 8만 여명은 바로 옆에 있는 금수산 기념 궁전을 습격했다.
방부 처리되어 호화로운 이 궁전 안의 주 안치실에 보관되던 김일성의 유리관이 꺼내졌다. 김일성의 시신은 아무렇게나 꺼내져 대리석 위에 질질 끌려가 궁 앞에 놓여졌다.
방부 처리되어 화장을 입힌 시신은 끌려가며 여기저기가 떨어지고 꺾어졌다.
“죽여라, 인민을 속인 김일성이를 죽여라.”
인민들의 외침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 학생이 썩은 개처럼 문드러진 김일성의 시신 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김일성은 1994년 사망한 뒤 두 번 째 주검을 맞은 셈이었다.
만수대 의사당 앞의 대형 황금 도금 김일성 동상도 목에 줄이 걸려 군중들에 의해 쓰러졌다.
“모스크바에서 군중에 의해 쓰러진 레닌 동상보다 20년을 훨씬 넘게 버텼군.”
김국은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연방의 지위에 관한 법률이 통과된 후에도 이무영은 당분간 김국을 내각 수반 자리에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그 법률이 김국을 겨냥한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김국을 제거하기란 정도를 중시하는 그의 성격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첫댓글 20년 장기집권, 과연 국민들이 이걸 허락할까요?????? 우리나라 헌법상 5년 단임제입니다. 그런데, 4번 연속 당선이라, 선진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도 2번만 대통령 하게 해줍니다. 최소한 우리나라가 연임제로 바뀌어도, 2번 연속밖에는 못할겁니다.
자주국방 만세님....집권당의 20년 집권이라고 되어있어요. 앞선 강두일이 5년 하고...그 전에도 여당이 하고..헌법 개정으로 이무영이...두 번째 그나마 임기도 거의 못 채우는 걸루..........이무영이 20년 하는 게 아니에요.
건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