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이 있는 글 - 안유환 수필을 쓴다는 것은 거창한 소재를 끌어들이기보다는 대체로 일상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음식을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음식은 간혹 특별한 식재료를 선택하여 맛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흔히 쓰는 재료를 이용한다. 그러므로 같은 음식이라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맛있는 음식과 그렇지 않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똑같은 종류의 음식점이 나란히 있어도 한집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다른 집은 한산한 광경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은 맛 때문이다. 어떻게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가? 주방장이나 주부가 음식을 만드는 것은 자기가 먹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고객과 식구를 위한 것이다. 특히 고객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면 수많은 고객의 입맛에 맞춰야 한다. 언젠가 여름방학에 딸네 식구와 함께 문경지역을 여행하다 한 ‘불고기 맛집’을 찾아들었다. 그 집은 식당 한쪽 벽에 입간판처럼 세워놓은 ‘손님이 짜다면 짜다’라는 말로 지금까지 인상 지어져있다. 그 음식점이 어떻게 고객에게 맛 나는 음식을 제공할 것이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한 편의 수필을 독자 앞에 내놓는 것은 고객에게 한 그릇의 음식을 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글을 읽은 독자가 ‘재미없다’고 느끼면 그 글은 재미없는 글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재미있다’(고급 문학적 안목에서)고 하면 그 글은 잘 된 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한편의 좋은 글을 써낼 수 있을 것인가? 재미있는 글이 되려면 그 느낌과 생각이 자기만의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독자의 입맛을 생각해야 한다. 글을 쓰는 것은 독자가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사물을 해석하는 것이다. 한마디 말은 그 해석에 따라 유머나 위트가 되기도 하고 듣는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쏟아진 물처럼 내뱉은 말을 거두어들일 수 없듯이 한편의 글이 활자화되면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지워버릴 수 없다. 쓰여진 작품은 개인의 행위에 속하지만 발표를 하고나면 그 작품은 사회성을 띄게 되기 때문이다. 새해 들어 첫 번째로 13편의 작품을 대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 김주남 어떤 사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느낌이 모든 사람에게 ‘이하동문’처럼 일치한다면 각자가 불평이나 칭찬 같은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처럼 사물의 크기나 모양에 대한 느낌이 천차만별이가 때문에 하나의 사건에서도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이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수필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음으로 인해 그것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던 화자가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키가 무릎높이밖에 되지 않는 이질적인−서너 살 된 여자아이가 쳐다보았다.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잠시나마 동행하는 것이 주는 어색함에 짓눌릴 때도 있지만 다행히(?) 귀여운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어 화자는 먼저 “안녕?” 하고 말을 걸었다. 그 말을 듣고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이하동문’으로 ‘안녕!’하고 마주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네!”라고 다른 말을 했다. 화자에게는 딸 셋이 있지만 할머니 소리를 들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기분이 고약했다.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아이 엄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뭣이라!’ 화자는 “비틀거릴 뻔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이의 생각을 고쳐줄 요량으로 “나? 나, 할머니 아닌데?”라고 핀잔을 주듯 말했다. 아이는 다시 골똘히 생각하듯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할머니 맞는데!”라고 단호히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찰라 엘리베이터는 화자의 집이 있는 층에 멈추고 “한마디 항변도 못해보고 패잔병”처럼 집으로 들어왔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녁을 준비하다 초고추장이 필요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이번에는 그 아이가 아빠와 함께 타고 있었다. 화자는 낮에 일을 항변(?)하려는 듯 한마디 했다. “너 나보고 할머니라 한 애구나?” 이 말은 아이 아빠의 도움으로 억울함(?)을 풀고 한편으로 그때 아무 말도 없었던 아이 엄마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아빠는 한술 더 떠서 “OO야, 할머니가 아니라 언니라 해야지.”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 말의 의미는 화자에게 마치 ‘그러면 당신이 할머니지, 이 어린 것이 언니라 해야 맞나요?’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이의 아빠는 너무 젊은(?) 할머니가 굳이 ‘항변’을 하는 어색한 분위기를 일신해보려고 ‘언니’라는 말을 위트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아이의 아빠라면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거나 철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에티켓 정도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할머니라고 확인(?)을 했는데도 그것을 부인하며 다시 변명하려는 화자의 억지 해석(?)이 재미있다. 이번에는 남자가 애완견을 안고 있는 젊은 부부와 맞닥뜨렸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공간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왕!”하고 개가 위세 당당하게 짖지만 젊은 부부는 자리를 내어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이래저래 화자의 속내는 불편하다 “쥐콩만한 아이와 그 아빠에게 한 대 얻어맞고, 심지어 개한테도 밀린 기분이 꿀꿀하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내가 좀 더 일찍 결혼 했거나 큰 아이가 일찍 결혼 했더라면 할머니가 되었을 나이 아닌가.” 화자의 말을 새겨보면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아무도 잘 못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어린 아이는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아이 아빠의 말은 역습이 아니라 굳이 할머니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아주머니를 예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젊은 부부도 그대로 보아주어야 할 것 같다. 요즘 젊은 세대의 생각을 고치거나 바로 잡아준다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다. 하지만 평자는 흐르는 세월이 그들을 가르쳐주리라 믿는다. 다만 작가의 ‘작은 일에 분개하는’ 자세가 일상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감으로 한편의 맛있는 수필을 만들어놓았다는 생각이다. 「크레파스」 - 김수민 만물은 모두 자기 색깔을 갖고 있다. 봄의 색깔은 새싹이 얼굴을 내미는 연두색이다. 여름의 색깔은 무성한 녹음의 진한 녹색이다. 가을의 색깔은 물들어가는 단풍의 붉은 색이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의 코발트색이다. 그리고 겨울의 색깔은 뭐니 뭐니 해도 눈을 상징하는 하얀 색깔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도 연륜에 따라 자기색깔을 갖고 있다. 어린아이나 십대 때는 홍안소년이란 말처럼 밝은 색깔이지만 나이가 들면 그 색은 어두운 색으로 변해간다. 사람들은 변해가는 어두운 색깔을 밝게 하려고 화장을 하고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기도 한다. 그렇다고 어른들의 색깔이 화려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변한 것처럼 착각할 뿐이다. 사람들은 매일아침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지만 자기의 색깔이 변하여 가는 것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람의 색깔이 어떻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친구의 부모님을 대할 때는 ‘여전하십니다’란 말로 인사를 대신하여 상대방을 즐겁게 한다. 그것이 다른 이를 대하는 예의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눈은 정확하고 숨김없이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주 젊지 않은 여인들은 어린아이의 눈에 할머니로 비치는 것처럼 ‘크레파스’에서도 네 살 손녀는 그런 천진한 눈으로 어른들의 색깔을 정확히 집어낸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모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댁을 찾은 손녀는 화자(할머니)가 미리 준비한 크레파스와 색칠공부 그림책을 선물로 받고 ‘할머니 최고’라는 인사를 하고는 색칠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손녀는 크레파스 뚜껑을 열고 분홍색을 집어 들더니 색칠공부에 들어갔다. ‘나는 핑크색이 좋아요’ 조잘거리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인어공주를 온통 분홍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상어가족을 보다말고 색칠공부에 빠져든 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곁에서 한동안 쳐다보다가 ‘도희야, 엄마에게도 크레파스 한 개를 드리면 어떨까?’ 했더니 서슴없이 연두색을 집어준다. 이번엔 ‘아빠에게도 드려야지’ 했더니 망설이지 않고 연하늘색을 건네준다. 그럼 ‘동생에게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동생은 병아리 색이 어울린다며 샛노란 크레파스를 뽑아 동생 손에 꼭 쥐어준다.” 화자는 저마다 어울리는 색깔을 선택하는 것을 신기해하며 ‘손녀의 눈에 비친 나의 색깔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손녀는 “할머니에게는 무슨 색깔을 드리면 좋을까?”란 아빠의 말을 듣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카키색을 집어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니는 내심 화려한 색깔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흙먼지’란 뜻에서 파생된 카키색에 실망하고 있다. 할머니는 우울해지는 기분을 숨기면서 속마음과는 달리 “고마워”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내친김에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할아버지에게 손녀가 드리고 싶은 색깔은 무엇인지 주문했다. 이번에는 ‘국방색’을 뽑아들었다. “황록에 짙은 풀물을 섞고 흙먼지에 한 바퀴 굴린 것 같은 국방색이 할아버지의 이미지색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꾸미고 치장을 한다 해도 동심으로 보는 이미지는 어둡고 탁하고 밀어내고 싶은 색깔일 뿐이다.” 할머니는 놀라우면서도 한편 한편으로 씁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밝은 기대감을 내려놓지 않고 자위한다. “손녀가 열 살쯤 되었을 때 나에게 집어주는 색은 또 다른 색으로 변할 터이다. 더 칙칙한 짙은 밤색이 어울리겠지만 할미 눈치 보느라고 보라색을 건네며 어울린다고 할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그때도 “응, 고마워”로 대답할 것이라 생각한다. 계절의 색깔은 제 철만 되면 언제나 자기 색깔로 바꿔 입지만 인생의 색깔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색깔이 어둡고 탁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도 해야 하고 싫어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삶을 이어간다. 결국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색깔 때문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체면을 살려주는 인간의 마음 때문이란 것을 ‘크레파스’는 잘 보여주고 있다. 공가(空家) − 박영란 ‘공가’의 서두 부분을 다시 읽어보자.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길 건너편에 장막이 쳐졌다. 아주 길고 높은 가림막이다. 그 안에는 쪼르르 달려갔던 은행과 약국이 있었고, 야채와 과일을 팔던 부부가 있었고, 우편물을 부치고 슬그머니 들어가서 즐겨먹었던 칼국수 집이 있었다. 그 뒤편에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오밀조밀 주택들이 차 있었다. 문패를 마주하고 있었던 그 집들은 오랜 세월 한 동네의 내력을 함께 하였다. 어느 날 이것들은 죄다 ‘공가’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빨간 글자는 돌림병처럼 옮아가더니 커다란 상호도 멀쩡한 건물도 하나하나 지워져갔다. 이들은 결코 누추하지도 병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떠나가고 집들은 서서히 비워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의 문은 동아줄로 묶이고 문짝과 유리창이 먼저 떨어져 나갔다.······” 한편의 소설이 탄생할 것 같은 긴장감을 이끌고 글은 아름답게 전개되어나간다. 마치 공가를 눈앞에 보는 것처럼 좋은 묘사를 하고 있다. 화자는 가림막 안에서 동네가 날마다 무너지고 있는 현장을 보며 애잔함과 분노마저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묘사는 계속된다. “잡초는 폐허 속에서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고, 그 가운데 집 한 채가 보였다. 지게차와 덤프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작업을 하고 있는 그곳에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한 집 한 채가 오롯이 남아있었다.······” 한편의 수필이 되려면 이쯤에서 ‘이야기’가 등장해야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 집 한 채에 대해서도 ‘묘사’에만 머물고 있다. 그리고 재개발의 횡포와 쫓겨 가는 사람들의 슬픔을 화자만의 목소리로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의 삶을 재개발의 결정에 항의하는 용기 있는 행위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의 수필이 되려면 현장의 에피소드를 등장시키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가’는 독자들이 보고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흔히 “소설의 문장은 주로 묘사에 있고 수필의 문장은 느낌이나 생각에 있다.”고 말한다. 수필은 화자가 사물과 맞닥뜨린 현장의 느낌과 생각을 엮어야 한다. 한편의 글을 완성하려면 작가가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집’을 찾아들고 그 생활의 고충과 재개발에 대한 항변을 집 주인의 입을 통해 이끌어내어야 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자기의 관찰과 생각만을 엮어놓아 아쉬움을 더한다. ‘공가’는 수필 메뉴를 주문하는 독자 앞에 소설 같은 메뉴를 제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수필은 형상화가 되지 않으면 그 가치를 상실한다. 형상화란 화자의 생각이 아니라 독자가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글을 펼쳐가는 것이다. 문학의 장르는 그 성격들을 규정한다. 시를 두고 소설이라고 할 수 없고, 수필을 시처럼 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수필은 수필다워야 한다. 은행과 약국이 사라졌기 때문에 격어야 하는 불편, 우편물을 부치고 슬그머니 들어가서 즐겨먹었던 칼국수 집에서 생긴 이야기와 그 맛, 과일가게 부부가 과일 한 개를 더 얹어주던 넉넉한 이야기들이 있다면 훌륭한 한편의 수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 같은 수필(?)의 아름다운 미완성을 아쉬워한다. 마무리 어떻게 멋과 맛이 있는 한편의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운전면허를 취득했다고 금방 운전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몇 시간의 주행연습으로 연수를 받고 나서도 능숙한 운전은 어렵다. 때로는 뜻밖의 접촉사고도 겪으면서 연륜을 더해야 좋은 운전자가 될 수 있다. 모든 글이 다 성공작이 될 수는 없다. 서예나 그림에서처럼 수필에도 ‘운필’이 필요하다. “글쓰기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될 때, 조금만 더 자신을 밀고 나가 보라. 당신이 종점이라 생각하는 곳이 실은 초입에 들어선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항상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당신은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이다. 글의 맛은 미사여구가 아니라 감동이다. 감동이 없으면 맛도 멋도 없다. 물론 감동이 넘친 기억을 쓰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이 매일같이 감동을 받을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슬픈 일, 괴로운 일, 놀라운 일들이 너무나 많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것들을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감동을 발굴(발견)해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동의 마음판을 갖는 것이다. “마음과 영혼이 어린 아이들과 같은 신선미를 갖는 사람이 위대한 문학인”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더 깊이 더 멀리까지 들어가고 나아가야 한다. |
출처: 흰물결 언덕 원문보기 글쓴이: 흰물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