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두 번째 근거: 하박국 2장 4절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저는 이 구절의 참 의미를 추적하는 최선의 방법이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이 구절을 인용한 구절들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분들은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은 신약성경에 모두 세 차례 인용되었습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히브리서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구절들을 철저히 연구하면 칭의의 교리를 바르고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을 순서대로 하나씩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약의 인용: 갈라디아서 3장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라."
더 유명한 책의 더 유명한 구절인 로마서 1장 17절보다 이 구절을 먼저 다루는 이유는 갈라디아서가 로마서보다 먼저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갈라디아서 3장 11절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설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창세기 15장 6절을 다룰 때, 신약의 첫 번째 인용인 갈라디아서 3장 6절을 설명하면서 바울이 창세기 15장 6절을 이신칭의의 근거로 삼은 것이 정당한가를 가장 먼저 다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 2장 4절의 첫 번째 인용인 이 구절에서도 하박국 2장 4절을 이신칭의의 근거로 인용한 것이 정당한가를 다루고자 합니다.
이것은 심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의 인용에는 많은 난제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고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기독교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이 구절의 인용이 정당함을 증명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이단종파가 되어버립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이 말한 대로 진짜 이단의 괴수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학자들이 이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거나 자세히 다루지 않고 슬쩍 넘어갑니다. 이에 대한 답이 없는 상태에서 하박국 2장 4절을 통해 이신칭의의 진리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않은 것이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렵더라도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답을 찾기로 작정하고 무기한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저는 하박국 2장 4절에 대한 주석들은 기본이고, 이 구절을 신약에서 인용한 구절들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주석들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연구했습니다. 또, 창세기 15장 6절과 로마서 4장의 다윗의 시와 아브라함의 100세 때의 믿음 그리고 야고보서 2장 21절에 대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참으로 어렵게 분별하고 정립한 것들이 큰 도움이 되어 결국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드시겠지만 잘 듣고 소화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박국 2장 4절의 믿음(신실함)은 누구의 믿음인가?
바울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하여 설명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본문 전승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소라본문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베차디크 베에무나토 이흐예)
70인역 "그러나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호 데 디카이오스 에크 피스테오스 무 제세타이)
로마서 1장 17절 ; 갈라디아서 3장 11절 "그러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호 데 디카이오스 에크 피스테오스 제세타이)
히브리서 10장 38절 "그러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호 데 디카이오스 무 에크 피스테오스 제세타이)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런 다양한 본문들에 나타나는 주요 차이점은 대명사들을 포함시키거나 배제시켰다는 것입니다. 마소라 본문은 '그의'를 포함시킴으로써 믿음(신실함)이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70인역은 대명사 '나의'를 삽입함으로써 신실함을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런 대명사를 완전히 제거해버렸고, 히브리서 저자는 대명사 '나의'가 '의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러면 이 구절의 "믿음"은 과연 누구의 믿음일까요?
앤더슨은 "70인역 사본에서 대명사 '무'는 '베에무나토'("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저자 주)에 나온 마지막 '바브'("그의")를 '요드'("나의")로 잘못 읽은 데서 기인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단어가 매우 유사하므로 가능성 있는 주장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으로 문제가 종결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 약점입니다.
물론 "그의 믿음" 혹은 "그의 신실함"이 칠십인경에 나와 있듯이 의인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묵시를 알리셨고 그 묵시가 거짓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3절의 언급은 의인이 누릴 삶의 근거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는 이해와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사해 두루마리의 하박국 주석은 마소라의 본문 전승을 반영합니다.
"해석은 유다의 집에서 율법을 행하는 모든 자들과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의 투쟁과 의의 교사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 때문에 심판의 집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1QpHab 8.1-3)
또, 바울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언급하고 있다는 개스턴(Gaston 1987: 118-119)의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도리어 바울은 70인역에 있는 '나의'를 생략함으로써 이런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이 그렇게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바울의 다른 인용구들이 보여주듯이 바울은 여기서도 당시의 시대적 조류를 따라 70인역에 많이 의존한 것이 분명합니다. 70인역에는 "의인은 나의 믿음(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되어 있고, 마소라 사본에서는 "의인은 그의 믿음(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당대에 마소라 사본의 다른 형태들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도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생략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한편, 로마서 1장 17절의 인용문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두 경우 모두 16절과 17절의 주장과 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16절의 목적은 구원을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믿는 자가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가 '살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신실함으로 '살리라'고 말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혹은 하나님)가 자신의 신실함 혹은 순종으로 말미암아 종말론적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의인'이라는 용어를 메시아적 칭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또, 의인에 대해 말하는 맥락에서 갑작스레 하나님을 가리키는 접미어는 문법적으로 적절치 않습니다(Hunn). 그리고 하박국 2장 4절의 악인과 의인 대조를 고려할 때, '신실함'에 붙은 "그"는 "의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때문에 이 구절에 나오는 믿음은 의인 즉 사람의 믿음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70인역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뜻하는 "나의"를 제외시킨 것은 옳은 결정입니다.
(2) 이 구절의 신실함을 믿음으로 바꾼 것이 정당한가?
개역개정성경 하박국서를 비롯하여 신약에 인용된 하박국 2장 4절은 모두 '에무나'(신실함)를 '피스티스'(믿음)로 옮겼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칠십인경이 '에무나'를 '피스티스'로 옮긴 경우는 여럿입니다(19회). 그러나 문맥상 한 군데도 '믿음'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칠십인경에서 '피스티스'는 '신실, 성실, 진리' 등의 의미로 쓰였고, 신약 본문에서도 '신실함, 충성스러움'이라는 의미로 종종 쓰였습니다(이를테면, 마23:23, 롬3:3, 갈5:22, 딛2:10).
그러나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신약의 구절들에서는 '피스티스'가 '신앙' 혹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신약의 인용은 칠십인경의 글자를 가져왔으나 의미를 변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실함을 믿음으로 바꿔서 인용한 것이 정당하냐? 라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토마스 슈라이너는 이 의문에 두 가지로 답했습니다.
먼저, 그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하박국 인용문을 정확하게 사용했는가? 쿰란공동체는 이 구절을 율법 준수에 적용했으며, 이러한 견해는 마소라 본문의 의도와 매우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언약의 의무들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다(Dunn 1988a: 45). '에무나'는 믿음이 아니라 각 사람의 신실함과 신뢰성에 초점을 맞춘다(Jepsen, TDOT 1:317-320). 그럼에도 바울이 하박국 2장 4절의 역사적 의도를 왜곡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한 일이 될 것이다.
바울의 강조는 의와 생명에 이르는 길로써 하나님에 대한 믿음, 신뢰 및 의존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우리가 5절에서 '휘파코엔 피스테오스'(믿음의 순종)라는 문구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순종과 관련이 있다. 진정한 믿음은 순종과 신실함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리하여 믿음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 신실함에 대한 하박국의 강조 사이에 쐐기를 박아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구약성경에서 '에무나'는 '신실함' 즉 순종과 관련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은 순종을 낳으므로 서로 다른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말입니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은 역사적 문맥에서 하박국이 의미하는 바를 왜곡하는가? 많은 이가 하박국 선지자가 사람이 지닌 믿음보다 그의 신실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해석은 선지자의 생각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하박국은 갈대아 사람들이 죄 많은 유다를 징벌할 심판의 날을 예견한다. 유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합1:4-11). 그러한 심판은 남은 자들을 위한 믿음의 시험이다. 그들은 미래에 일어날 바벨론 심판(합 2장)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재현(합 3장)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믿을 것인가? 하박국 3장의 출애굽에 대한 많은 암시는 새로운 출애굽의 약속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해방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모범이 된다. 그는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주님을 계속 신뢰할 것이다(합 3:17-18).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구원을 신뢰하고 즐거워한다.
이 책의 정경상의 문맥은 하박국 2:4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분을 계속 신뢰할 것을 요구받는다. 하박국의 초청에 담긴 근본적인 의미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실함이 믿음에서 나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신실함은 항상 믿음에서 진행된다. 신실함은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구조물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박국을 훌륭하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 메시지를 왜곡하지 않으면서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
존 스토트도 이것을 뒷받침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성경을 통해 믿음에 대한 자신의 강조를 확증하며 하박국 2:4을 인용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해 무자비한 바벨론 사람들을 일으키시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 어떻게 악한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악한 자들을 사용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교만한 바벨론은 멸망할 것이지만 의로운 이스라엘은 그의 믿음에 의해, 즉 전후 문맥으로 보았을 때 그가 겸손하고도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에 의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더글라스 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에무나'의 의미는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개념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 바울은 하박국의 몇몇 핵심 단어의 의미를 '심화'했다. 그러나 그는 그 선지자의 강조점을 본질적으로 충실히 따른다. 즉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속 깊이 신뢰하는 것을 기초로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고 기다릴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박국 2장 4절의 "신실함"을 "믿음"으로 바꿔서 인용한 것은 잘못이 아니며 정당한 것입니다.
(3) 과연 이 구절의 "살리라"가 생명을 얻는다는 뜻인가?
저는 이 점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중 무의 책에서 부분적인 답을 얻었습니다.
"'산다'는 여기서 '자신의 삶을 산다'는 의미로 보통 여겨진다. 그러나 소선지서에서 '하야'의 용례는 이 단어가 좀 더 신학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의심할 이유 몇 가지를 제공한다. 이 동사는 16회 나오며 단순히 '생명체'를 말하는 곳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참된 삶', '하나님 앞에서의 삶', '복'을 나타낸다(호6:2, 14:7, 암5:4, 6, 14, 슥10:9)."
그래서 해당 구절들을 일일이 찾아보았는데, 만족할 수 있는 충분한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 저는 답을 찾기 위해 계속 주석들에 파묻혀서 씨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들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토마스 슈라이너는 "살리라"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갈3:11b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우리는 바울이 하박국을 인용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는 '하였음이라'라는 단어로 하박국의 구절을 소개한다.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종말론적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맥에서 '살리라'라는 동사는 '의롭게 되다'라는 동사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 문맥에서 그것은 종말론적 생명을 가리킨다."
또한, 김근주 교수님은 "살리라"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2:4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a절과 b절이 대조되어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로 번역된 표현에 '~안에'(in)를 의미하는 전치사 '브'가 쓰였고, '에무나' 앞에도 동일한 전치사가 쓰였다는 점 역시 a절과 b절의 대조('그는 그 안에서'와 '의인은 에무나 안에서')를 보여준다. ...
a절과 b절이 대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네페쉬'와, '살다'를 의미하는 동사 '하야'다. 개역개정판이 '마음'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네페쉬'가 '살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하야'와 결합되어 쓰이는 예가 많다. 이런 경우 '생명을 보전하다', '생명을 구원하다'와 같은 의미다(창12:13, 19:20, 왕상20:32, 시22:29, 119:175, 사55:3, 렘38:17, 겔18:27). '~의 살아 있음을 두고 말하건대'와 같은 맹세 양식에서도 이 두 단어의 결합을 볼 수 있다(삼상1:26, 17:55, 20:3, 25:26, 삼하11:11, 14:9, 왕하2:2, 4, 6, 4:30). 이를 염두에 두면 4절은 '부풀었으되 그의 네페쉬는 올바르지 못하다: (그래서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살 것이다' 식으로 대조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살지 못하되, 의인은 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살리라'로 옮겨진 히브리어 동사 '하야'는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단순히 육체적 호흡이 지속되는 삶이 아니라 '생명을 누리다'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은혜와 구원을 상징한다. 죄악을 떠나 하나님의 규례를 지킬 때 '너희가 살리라'고 약속되는 것(이를테면, 레18:5, 신30:6, 느9:29, 시22:26, 겔20:11, 33:19, 암5:4-6)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용례들 중에는 '살게 되다'라는 약속과 함께 전치사 '브'가 쓰인 경우가 여럿 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8:5)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겔20:11, 또한 겔20:13, 21, 25, 느9:29)
위에 인용한 본문들에서 강조체로 표시한 부분을 직역하면 모두 '그가 그 안에서 살리라/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이며 하박국 본문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하박국서 본문 역시 '의인은 그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옮길 수 있다."
참고로, 공동번역은 하박국 2장 4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또, 히브리어 직역 구약성경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보라. 마음이 부풀어 그의 영혼이 바르지 않은 자를. 그러나 의인은 자기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
현대인의성경 더 분명하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라."
그러므로 바울이 하박국 2장 4절의 "살리라"를 영생을 얻는다 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은 올바른 것입니다.
(4) 이 구절의 '의인'은 이미 경건한 사람인데 이것을 인용한 것이 정당한가?
여러분에게 바울이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세 가지 의문에 대해 답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주석가들이 거의 다루지 않는 심각한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하박국은 처음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의인인 사람을 다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 믿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바울이 주장하고자 한 진리는 죄인이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2장 4절에 나오는 사람은 이미 의인입니다. 그 전부터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4장을 자세히 읽으면 힌트들이 나옵니다.
먼저,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이신칭의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이곳이 아니라 창세기 12장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처럼 아브라함은 이때 이미 의인이었습니다.
또한, 같은 장에서 바울은 이신칭의를 설명하다가 17절부터 아브라함의 100세 때의 믿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로마서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그리고 100세 때의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4: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처음 의롭다 함을 받은 때와 너무 다른 시기지요! 당연히 이때도 아브라함은 이미 의인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역시 같은 장에서 바울은 이신칭의를 설명하기 위해 다윗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4: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앨런 로스는 시편 주석에서 이 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시편은 밧세바를 범한 다윗의 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시편 51편과 한 짝이 될 수 있다. 당시 다윗은 1년간이나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시편 51편은 용서를 구하는 기도이며, 32편은 그 다음에 쓴 것 같은데 하나님의 용서와 다윗이 깨달은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밧세바와 범죄한 다윗 왕이 그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것을 회상하며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때 처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목동 시절부터 어쩌면 그보다 훨씬 어린 시절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시를 인용했습니다. 그 이유를 더글라스 무는 이렇게 썼습니다.
"다윗의 말은 시편 32:1-2a에서 딴 것이다. 바울이 이 절들을 인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키워드인 '여기다'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절들을 단어의 병행에 입각하여 관련시키는 것은 유대교의 주석에서 흔히 쓰이는 기술이었다."
저는 이것이 바로 바울이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다윗의 시를 인용한 것은 그 시기가 아니라 "여기다"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할 때도 시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 구절의 '의인'이라는 단어와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진리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인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끝으로, 이 설명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기독교는 유대교의 이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교가 유일한 참 종교였고, 신약시대에는 기독교만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참 종교입니다. 때문에 종교다원주의에 물든 카톨릭은 기독교의 자격이 없습니다. WCC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그런 것들에 미혹되지 말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반드시 천국에 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