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수탈 항구' 군산·목포의 슬픈 번영[한국근대사의 숨은 풍경들]
△ 금융조합 건물 앞을 초립 쓴 조선주민들이 가득 메운 가운데, 사이사이 서양 캡틴 모자를 쓴 일본인 모습들이 보인다. 일제가 관제기관으로 각 지방에 세운 금융조합은 자금대부 등으로 소작쟁의와 농민들의 결속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했다
“세관 옥상, 부두, 도로에도 눈길 가는 곳마다 도처에 수백가마씩 쌓여 20만 쌀가마니가 정열하였으니…오호 장하다! 군산의 쌀이여!”
1925년 일본 어용학자들이 발간한 <군산개항사>는 시종 영탄조로 쌀을 열심히 일본 오사카로 퍼 날랐던 항구 군산을 예찬하고 있다. 1899년 개항 전부터 금강 하구의 이 상업 포구를 점찍어 둔 일본 정부는 농업 이민과 기업들을 내세워 거대한 `식민지 타운'을 만들었다.
전주통, 명치정, 소화통, 영정 등의 근대 시가지와 부두, 바둑판식 도로, 야시키(일본식 대저택)에다 미두장, 금융업으로 흥청거렸던 군산은 30년대 최대의 조선쌀 수출항이자 오사카의 원격 위성도시로 위세가 드높았다.
교외의 옥구 들녘에는 강점 전부터 오쿠라, 미쯔비시 등의 재벌들이 사들인 대규모 농장이 성업했고, 시내에는 곡물시장(미두장)의 투기로 한몫보려는 미두꾼들이 들끓었다. 한마디로 군산은 당대 무역항이자 소비 도시로서 모략과 범죄, 궁핍이 뒤섞인 거대한 인간 탁류의 도가니였던 것이다.
군산의 영화는 조선을 먹여 살리는 곡창 전라도가 근대화시기 일본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겪어야 했던 모진 수탈의 역사와 반비례한다. 조세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경제적 비중이 컸고, 조선시대부터 농지개발이 진척되었던 전라도를 그들은 치부의 신천지로 인식했다.
20년대 불이흥업이 벌인 옥구 간척 사업의 경우 간척 노동자였던 소작농들에게 가구당 5마지기 정도만 준 반면 일본 이주농에게는 가구당 60마지기를 12년 무이자 상환의 파격적 조건으로 나눠줄 정도였다. 총독부와 일본 사업가들에게 무엇보다 곡물을 수송할 효율적인 운송 인프라 구축이 절실했다.
전북평 야의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를 1908년 최초의 포장 도로로 완성하고, 군산·목포항 축항에 힘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빨리 근대화 단물을 맛보았던 군산의 근대화 시계가 해방 뒤 멈춰 버린 것은 그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1차대전 전승국으로서 시베리아 출병과 중국 산동출병 등의 후속 전리품 챙기기에 집착했던 일제에게 쌀 수급은 침략을 위한 군량미 조달과 국내 정세안정 측면에서 절대 명제였다. 1918년 쌀값 폭등에 따른 폭동 또한 더욱 강팍한 수탈을 채근했다.
전라도를 희생양삼은 30년대의 `남면북양' 구호와 20년대 산미증식계획은 이런 배경아래 나온 정책이다. 관개수로 개발과 간척사업으로 대표되는 산미증식계획은 전라도에서만 20년대 300만섬 이상 수확증가라는 성과를 낳았으나 한 일본학자의 회고처럼 “토지 없는 농민의 비약적 증식에도 성공”했던 것이다.
근대 항구와 내륙의 후진적인 소작촌, 전통 지주도시인 전주, 광주 등으로 공간이 나뉘어 이들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전라도는 일본 본토의 경기 부침에 매달리는 기생형 경제 구조가 뿌리를 내린다. 이런 일제시대 전라도 근대화의 허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곳이 목화와 쌀, 소금을 뜻하는 3백 항구로 이름 높던 목포다.
1897년 개항 뒤 국제 거류지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땅 따먹기식으로 토지를 매수해 마음내키는 대로 시가지를 꾸몄다. 일본학자 야나기가 `사람과 자연이 서로 끌어안은 곳' 이라고 격찬한 이 미항은 유달산 남동쪽 자락의 일본인 거주지와 간척지 공단을 거점삼아 대표적 수탈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해방 뒤 일본 교역로가 막히면서 삼백 산업을 비롯한 도시의 경제 기둥은 내려앉았고, 90년대까지 침체된 소비도시에 머물러있어야 했다. 지금도 목포에는 당시 동양척식회사건물과 에도시대 풍의 일본인 주택, 도정공장, 유곽 등이 주홍글씨처럼 남아 근대화의 역사를 증언해야할 숙명을 지우고 있다.
시인 문병란씨가 시 <목포>에서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이라고 한탄했던 데는 그런 까닭이 있었으리라.
[노형석 기자]
[출처] : 한국근대사의 숨은 풍경들 / 한겨레 신문
전라도 군산 부두에 일제가 조선에서 수탈한 쌀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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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도시의 두 얼굴- 목포
목포의 낯은 보기에 참 애처로웁다. 남편으로는 늘비한 일인의 긔와집이오 동북으로는 수림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이 솟아 있는 외에 땅에 붙은 초가뿐이다… 유달산 밑을 보자. 집은 돌 틈에 구멍만 빤히 뚫러진 도야지막 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다."
목포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박화성(1904~1988)은 1925년 데뷔작 <추석전야(秋夕前夜)>에서 목포를 이렇게 묘사했다. 서울의 경우에도 충무로와 명동 등 남촌에는 일본인이, 북촌에는 조선인이 사는 등 식민지 조선 대부분의 도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삶의 터전이 분리돼 있었다.
1930년대 목포 전경. 유달산을 사이에 두고 초가집이 즐비한 조선인 마을(왼쪽)과 정돈된
일본인 마을이 극명하게 분리돼있다
그러나 1897년 개항한 근대 도시 목포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일본인은 개항 직후 목포에 마련한 '각국공동거류지'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1910년 한일 강제병합 후에는 총독부 토지조사국이 시가지 조사를 한 뒤 도로를 축설하고 도시계획을 세워 시가지를 조성했다. 그곳이 지금의 목포시 만호동이다.
반면 조선인은 유달산 기슭의 무덤 150여 기를 이장한 터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가뜩이나 바위와 늪지대로 덮인 고장인 목포에서, 살 만한 땅은 모두 일본인이 차지한 탓이었다. 현재의 행정구획 상으로 죽교동, 대성동인 조선인 마을은 처음부터 경계도 없이 빈 터만 있으면 움막을 지었다.
목포와 해남을 연결하는 목포대교 위로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지나갔다. 멀리 암태도가 보였다. 그곳은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섬이다. 마음 같아서는 유달산 정상을 향해 걸어 올라가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해안도로로 걸어내려 왔다.
오른쪽으로는 바닷가, 왼쪽으로는 유달산을 벗 삼아 걸었다. 간간이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위에 세워진 인어상과 목포 개항 110주년 기념비도 보였다. 싱싱한 생선을 진열한 수산물시장을 지났고 높은 온도에도 견디는 벽돌을 만들던 ‘조선내화’ 공장 터도 지났다. 지금은 버려진 공장의 길가 건물에서는 젊은이들이 문화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목포는 영산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항구 도시다. 그러니까 선창 부근이 원도심이다. 그런데 영산강 하구언을 만들면서 하당이라는 광활한 매립지가 생겼고 그곳에 신도심이 건설되었다. 그 너머 남악에는 전남도청이 자리 잡았다. 구도심에 살던 사람들이 신도심으로 이사가면서 목포의 원도심은 다소 퇴색한 분위기였다.
먼저 과거 일본영사관이었던 건물에 자리 잡은 목포근대역사관을 찾아갔다. 유달산 자락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 보였다. 그곳에서 서울의 일본대사관 뒤에서 보았던 평화의 소녀상을 만났다. 식민지 시대 일본영사관 건물 앞이라 더욱 감회가 깊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목포의 역사는 식민지의 역사와 겹친다. 부산, 인천, 원산 등에 이어 개항한 목포는 호남평야의 쌀과 면화 등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항구도시가 되었다. 유달산 자락에 잘 구획된 대지에 일본인들의 버젓한 주택들이 자리 잡았고 그 주변에 경찰서, 영사관, 동양척식회사, 일본인을 위한 학교, 우체국, 은행 등이 들어섰다.
박물관은 식민지 시기에 목포라는 도시가 어떻게 발전하고 근대적인 문물이 도입되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식민지 시대에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도시가 형성되고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착취와 수탈이 진행되던 역사가 그곳에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성옥기념관과 이훈동정원으로 향했다. 성옥(聲玉)은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이 창업한 ‘조선내화’를 해방 이후 불하받아 발전시킨 목포의 갑부 이훈동의 호이다. 성옥기념관에는 그의 일대기와 그가 수집한 국보급 미술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는 일찍이 고온을 견디는 내화물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을 건설할 때 필요한 내화물을 공급하여 성공한 기업인이다. 기념관의 전시가 시작되는 첫 번째 방에는 그의 입지전적인 삶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그 방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전시물은 이훈동 회장이 박정희 장군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긴장한 군인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군복 점퍼 차림에 별 두 개가 달린 모자를 쓴 박정희 장군 곁에 이훈동 회장 부부가 서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박 장군이 전국을 돌다가 목포를 방문했을 때 이 회장의 집 정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대원군의 난초 병풍, 추사 김정희의 행서 병풍, 남농 허건의 금강산 산수화 등을 감상하고 기념관을 나와 부근에 있는 이훈동정원으로 향했다.
원래 식민지 시기에 쌀과 면화를 수출하여 축재한 일본인 최고 갑부가 살던 집인데 어느 국회의원을 거쳐 1950년 이 회장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저택에는 일본식 고급 가옥에 아주 세심하게 신경을 쓴 일본식 정원이 조성돼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구에 작은 연못과 정원이 방문객을 환영한다. 그곳을 지나 왼쪽으로 들어서면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제각기 자리를 지키고 서 있고 군데군데 석탑, 석등, 석불을 비롯한 적절한 규모의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곳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 비탈길을 올라가면 뒷정원이 나온다. 후원에 도달하자 눈앞에 잘 구획된 식민지 시대 일본인들이 살던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고 멀리 바다가 보였다. 등 뒤로는 이훈동 회장의 묘소가 있다. 천하의 명당이라는 느낌이 확 들어왔다.
정원을 나와 발걸음을 옮겨 목포역을 향해 걷는데 오거리가 나오고 곧 이어서 일본식 분위기의 건물이 보였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교토 소재 동본원사라는 절의 목포 분원이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교회 건물로 쓰이다가 지금은 목포시 문화재단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옛 건물을 보존하고 그 옆에 아담한 규모로 재단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그 규모와 비례가 원래 있던 건물과 잘 어울렸다. 건물 앞 입구의 돌바닥과 계단도 오래된 돌을 살리고 있어서 역사의 흔적이 느껴졌다. 과거 목포의 가장 번화한 구역이었던 오거리 부근은 인구와 상권이 신도시로 이동하면서 다소 퇴락한 느낌을 주었지만 목포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코롬방제과만은 고객들로 붐볐다.
1974년 여름 친구들과 배낭을 메고 전국 일주를 할 때 그곳에 들러 크림빵을 먹던 기억이 났다. 그곳을 지나 삼학도로 향했다. 오랜 수난의 역사가 새겨진 삼학도에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기념공원과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있다. 목포의 눈물을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한 힘으로 전환시키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출처] : 정수복 사회학자,작가 : <정수복의 도시를 걷다> / 경향신문
1930년대의 목포의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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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동해안 및 삼학도
목포부 경정 본정
목포 전경과 삼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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