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7
8월19일[연중 제1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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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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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zmEjOSWK0w (임지용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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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초 긍정적 시선이요, 초 낙관주의적 시선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개념 있는 행동이나 예의바른 처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 사고나 판단 능력보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요란스레 예수님 앞에 등장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입니다. 안그래도 계속되는 복음선포 활동으로 격무와 상습피로에 시달리고 계시는 스승님이신데,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셔야 할 스승님이신데, 개념도 예의도 없는 아이들이 몰려오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가까이에서 군중들의 질서 유지 담당 역할도 수행했었던 제자들이기에, 자연스레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스승님께 몹시 바쁘시니, 빨리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크게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 14)
우리 가톨릭교회는 예로부터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어린이의 예를 들어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의심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그런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을 하느님 나라 입국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십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입국은 불가능하다거나 요원한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니고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자연을 향한 강한 믿음과 신뢰심, 깨끗한 마음과 단순성, 솔직함과 겸손함을 지닌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 존재에 대한 극진한 존중과 배려가 눈에 띱니다. 그분께서는 시대를 앞질러 인권의 가치와 소중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시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어린이들, 그들에게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넘어 영적 차원에서 그들이 지닌 우월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의 천진난만함, 영적인 순수함, 맑은 영혼의 가치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들 못지않게 결핍 투성이요,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무리 비참하고 죄투성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초 긍정적 시선이요, 초 낙관주의적 시선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관대하고 부드러운 시선을 오늘 병든 우리의 영혼을 재조명하고 일어서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숱한 죄와 불충실로 인해 부끄러운 우리지만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그대의 인생은 아주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더 존귀합니다. 그대는 내게 정말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지닌 가치와 아름다움에 걸맞은 성(聖)스런 삶을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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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시네 체라 (sine cera : 진실)>
어린 수도자들을 가르치던 수련자 수사님이 유난히 사랑하던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것에 대해 질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에게 참새를 한 마리씩 주면서 “아무도 없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 참새를 죽여와라!”라는 숙제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의 참새를 가지고 산속으로 각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제자들은 자신이 죽인 참새를 가지고 스승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해가 져도 한 제자만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밤이 되었는데 갑자기 산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더니 그 제자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참새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참새를 죽이지 못하고 가져오는 제자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스승은 그 제자에게 “왜 죽이지 못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제자는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산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산속에는 나를 바라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습니다. 동물들과 새들이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두워지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다른 제자들도 스승이 왜 그 제자만 특히 사랑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항상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 이 아이는 하느님께 감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분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출 것도 많아지고 그래서 두려움도 많아집니다. 제가 이번에 여름 신앙학교 가서 풀장의 더러운 물을 좀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치부 아이들과 초등학교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에 대여섯 명씩 달려들어 제 머리를 짓누르고 덤벼들다보니 조금씩은 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 때문에 너무 즐거웠습니다.
신앙학교가 다 끝나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인 자모회 분들과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30-40대 자매님들임에도 불구하고 제 옆에 앉기를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조금 더 편하게 다가와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부담스러워서 그러는지 다 제 자리부터 먼 곳에서부터 앉기 시작했고, 결국 늦게 오시는 분들이 그 벌로 제 옆자리를 차지해야 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참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잘 알지 못하는 선배 신부님들이 계시다면 먼저 그 분 옆자리에 가서 앉지는 못합니다. 부담스럽고 비위를 맞추어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자신을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왜 어른들은 겁을 먹게 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도 편하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아마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친해지는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그냥 거리를 두는 관계를 선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 안에 숨기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숨기고 있는 바로 거기 까지만 깊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아이들이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께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 감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처럼 예수님께 달려들기 위해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합니다. 감출 것이 없어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진실이라는 이 말은 라틴어로는 시네 체라(sine cera)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밀초를 칠하지 않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것은 고대 도자기 산업이 발달 하면서 생긴 단어 입니다.
우리들이 보아도 값싼 도자기(옹기)는 두껍게 만들기 때문에 불에 구워낼 때에 금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값비싼 도자기는 얇게 만들고 가볍게 선명한 색깔을 넣습니다.
그러다보니 값비싼 도자기는 불에 구워내기 전이나 구워낸 후에 금이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정직한 도공은 이런 도자기는 깨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도자기에 색소에다 딱딱한 밀초를 섞어 갈라진 틈을 메워 유약을 발라 상품으로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햇빛에 비추어 밀초를 메운 자국이 있나 없나를 확인 하였습니다. 그런 후 그런 자국이 없을 때 'sine cera'라는 글을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나는 깨진 자신을 밀초로 메워 하느님과 사람 앞에 나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솔직하게 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바로 ‘sine cera’란 증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새겨진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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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3-15: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13절) 제자들은 아이들 때문에 예수께서 피곤해지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얼마 전에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앞에 세우시고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하셨다. 이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어린이의 순수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예수께 올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막고 있다. 순진한 어린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막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빛바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4절)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거룩한 삶의 방식으로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갖추라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어린이들처럼 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되지 않는 한,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18절) 사도 바오로는 “생각하는 데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1코린 14,20)라고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하느님께서는 어린이가 지닌 자질들을 우리가 선택하여 갖추기를 바라신다. 즉 순박함, 남들에게 당한 악을 악으로 갚을 줄도 모르는 것, 부모를 사랑하는 것 같은 자질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으신 것은 바로 그 안수를 통해 그가 하느님의 권능으로 무장하게 해 주신 것이다. 아이들에게 축복하시고 떠나시는 예수께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초대하신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도 순박한 어린이와 같이 앞뒤를 재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천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삶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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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 그런 중재를 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수송아지로 우상을 만들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려고 하였을 때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다가 광야에서 모두 벌하신다면 다른 신들이 하느님을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럴 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와 메추라기는 질린다고 불평했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높이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서 ‘밀당’을 잘하였습니다.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만남’에도 적당한 밀당은 필요하다고 합니다. 전화 빨리 받기, 문자 바로 보내기는 필요하지만 가끔 여유를 가지고 전화하거나 문자 보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만날 때 마다 비용을 혼자서 지불하는 것도 좋겠지만 가끔은 상대방이 비용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혼자서 비용을 모두 계산하면 처음에는 고마워 하지만 나중에는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상대가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만남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쌍방통행일 때 더욱 깊어진다고 합니다. 100%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만남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적당한 ‘밀당’은 서로를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합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그런 ‘밀당’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밀당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그 가족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느님만을 섬길 것인지 다른 이방의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 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수아와 같이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증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은 너희가 너희 하느님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일에는 밀당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도 선을 넘지 않는다면 적당한 밀당은 사목에 도움이 됩니다. 매일 똑같은 날씨보다는 4계절이 있는 것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매일 맑은 날 보다는 때로 흐린 날, 비오는 날도 있으면 인생이 따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밀당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도, 배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부자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밀당이 아니고 선택입니다. 그 선택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 결단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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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시편의 어느 저자는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와 달을 보며 사람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바라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4-5)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을 돌보아 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아기와 젖먹이들”(시편 8,3)에게서 나오는 찬미를 그분께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마태오 복음서에서 되풀이되는 가장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 헌장’이라고 불리는 마태오 복음 18장의 서두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18,1)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18,2-3 참조)
오늘 복음에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축복하여 달라는 청원이 나옵니다. 이때 제자들은 도리어 그들을 꾸짖습니다. 여기서 ‘꾸짖다’로 쓰인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 나온 표현입니다(마르 1,25 참조). 이것은 역설적으로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쫓아내야 할 것이 있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여전히 굳게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선물로 인식하고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 어른 행세만 하려고 하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자녀는 무엇으로 삽니까? 그들은 부모를 향한 전적인 믿음과 온전한 의탁으로 그리고 부모에게서 받는 한없는 사랑으로 삽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자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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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못 되면 조상 탓”이란 옛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그 탓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조상이나 부모의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자신의 고통스런 상황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돌림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하고 보호하려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안에서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자신 밖에서 문제점을 찾고 다른 이들이 그 문제점을 해결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겪는 고통 역시 내가 겪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 겪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유다 백성은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탈출 20,5)는 말씀에 따라 자신들이 받는 고통이 조상들의 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과 죄도 없이 살았는데도 선조들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지어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선조들과 선조들의 죄를 자신들에게 묻는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았다. 선조들과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 가득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열심하고 의롭게 살더라도 계속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절망 속에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보는 하느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는가!9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의 마음에 언짢다.”라고 당신의 마음을 전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선조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후손에게 묻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씀하신다. 죄에 대한 벌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받는다. 죄와 의로움의 문제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행동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부모 세대의 죄와 연결된 고리가 끊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지은 죄의 사슬에서도 풀려난다.
그는 이제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을 새롭게 살게 된다. 그러나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책임지울 수 없듯이, 부모의 모범적인 삶을 자식에게 유리하게 끌어댈 수도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희 하나하나를 너희의 행실대로 다스리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냉정하게 우리의 잘잘못을 심판만 하시는 재판관이 아니시다. 오히려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창조주이시다.(1티모 2,4-6 참조)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개인의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벌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계명을 지키고 살도록 초대하시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회초리를 드는 부모의 심정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고치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기에 우리의 죄를 물으시는 것이다.
오늘,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가 걸어야 하는 인생의 길, 예수님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걷는 신앙인이 되자.
죄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를 벌하시려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당신의 계명을 따르도록 하시는 사랑의 마음임을 알고 느끼자.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녀가 되어야 하듯이,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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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흥주 베드로 신부님]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란 어떤 모습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해 자녀로서 겸손과 단순 그리고 신뢰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이를 가리켜 ‘영적 어린이의 길’이라고 했다.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영성적으로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산 분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성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하느님 앞에 가장 작은 자가 되기 위하여 어린이의 길을 택했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했으며 모든 일을 하느님께 의탁했다.
성녀가 깨달은 진리는, 성화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 인간은 어린이와 같이 작은 채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고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걱정하지 않듯이 모든 것을 선하신 주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예수님의 팔’이라는 상징적 용어를 쓰며 성화시키시는 하느님께 대해 자신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를 하늘까지 들어올려 줄 승강기는 오, 예수님, 당신의 팔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저는 커질 필요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작은 채로 있어야 하고 점점 더 작아져야 합니다.”
성녀는 자신을 낮추는 이러한 겸손을 바탕으로 어린이가 부모 앞에서 단순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하듯이 하느님 앞에서 그러하고자 했다.
그래서 성녀는 겸손이나 희생 혹은 애덕과 같은 덕행의 실천에 있어서도 어떤 계획이나 방법을 따로 세우거나 특별한 기회를 만들어 행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아주 작은 기회나 사소한 것들 안에서 단순하고도 자연스럽게 실천했다.
또한 성녀의 생활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대한 자녀다운 신뢰로 넘쳐 있었다. 성녀는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겼으며, 설사 고통을 통해야 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했다. 더군다나 성녀는 자기 힘이 닿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충분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무능력함·작음·허물이나 미천함을 느낄수록 무한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고 더욱더 신뢰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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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
오늘 독서에서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는 말씀이 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정말 나는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마음을 고쳐야 한다. 어떤 마음으로 고쳐야 하는가? 오늘복음에서 모델을 제시해주신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즉 우리가 고쳐야할 마음은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우선 순수하다. 아직 자기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틀이 짜여 져 있지 않은 마음이다. 미성숙한 마음이요,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마음이다.
무엇을 먹고 자라느냐에 따라서 예쁜 마음으로 자랄 수도 있고 악하고 나쁜 마음으로 자랄 수 도 이는 미완의 마음이다.
어린이의 마음은 누가 무엇을 주고, 먹이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랄 수 있는 마음이다. 한 마디로 어린이의 마음은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어린이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는 광고가 바로 어린이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 큰 선물은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엄마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어린이만 엄마의 사랑을 먹을 수 있듯이 하느님도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축복해주신다. 그러나 아무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와 같이 마음이 비어있고 순수하고 하느님께 의존하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
모두가 이 큰 선물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다. 못 받아들인다. 몰라서 못 받아들이고 알면서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
자기 마음 안에 도저히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그 동안 자기만 먹고 자랐다.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자기 고집, 자기 계획, 자기 취미, 자기 건강, 자기 미래 등 항상 자기 것으로만 가득 채우기 때문에 도저히 자기 것이 아닌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아니라, 하느님의 할아버지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 그 사람 안에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 있어야 들어가지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는가?
췌장암으로 3년간 고통을 겪다가 임종할 때가 가까이 다가 왔다는 것을 알고 고통 중에 지내야 했던 3년간의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여 책으로 남긴 시카고의 교구장이신 베르나르딘 추기경의 저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평화의 선물"이라는 소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이 책을 끝맺으면서 나는 피로감에 지칠 대로 지쳐 있으나 한편으로는 큰 의미가 있는 이 책을 완성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결말 부분을 써 내려가면서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하고 평온하다.
오늘은 11월 1일, 가을이 겨울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뭇잎은 그 아름다운 빛을 잃게 되고 세상은 눈으로 뒤덮일 것이다. 땅은 휴식을 취하며,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걸치고 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시카고의 겨울은 너무나 매서워 죽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 생명과 경이로움을 안고 봄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새봄에 나는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는 곧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되리라. 내세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생 동안 최선을 다해 봉사하도록 이 세상으로 나를 부르신 하느님께서 지금은 본향(本鄕)으로 부르고 계심을 확신한다.
많은 이들이 내게 천국과 내세에 관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아는 것이 없기에 그저 미소로 답할 뿐이다.
언젠가 한 젊은이가 내게, 과연 하느님과 하나 되기를 고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보다 앞서 간 사람들과의 해후를 고대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그때 나는 이 책에서 언급한 바 있는 젊은 시절의 경험과 연관시켜 말했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부모님의 고향인 북부 이탈리아의 토나디코 디 프리미에로를 방문했을 때, 나는 전에도 그곳에 가본 것처럼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 세월동안 어머니의 사진첩을 들여다보았기에 그곳의 산과 들 그리고 집과 그곳의 삶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이렇게 감탄했다. "맙소사, 내가 아는 곳이예요. 드디어 고향에 왔어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도 어쩐지 그와 유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곳이 본향임을 알게 될 것이기에 말이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참으로 알아듣기 쉽게 적은 글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하늘나라는 나와 전혀 낮선 곳이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곳이라 하더라도 낮선 곳은 나의 고향이 아니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에 가면 마음이 편안한 것은 그곳에 나의 어릴 적 삶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미 내 몸과 마음에는 고향의 흙냄새가 배어있고 자연의 정취가 배어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향의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을 먹고 자랐다. 그런 것들이 나의 마음과 정신을 형성시켜왔다.
고향 사람들의 아름다운 정과 따뜻한 마음 그리고 구수한 이야기들이 나의 성장기를 도왔고 나는 그런 것들을 먹으며 자랐다. 그래서 고향에 가면 편안하고 고향을 떠나오면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모든 산과 들, 바람과 나무, 구름과 물이 다른 곳엔들 없겠는가? 어쩌면 더 아름다운 자연들이 있는 곳도 많다. 그래도 그런 곳보다 고향이 더 좋은 것은 나의 몸에 고향의 정취가 베어있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은 어릴 적 자기의 생명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감싸주고 덮어주고 안아주며 키워주었던 엄마의 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입에 생명의 음식인 젖을 갖다 주었고 몽실몽실한 젖을 만지게 해줌으로써 10개월 동안 안식처로 삼고 자랐던 엄마의 태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체험이 없는 어린이는 엄마의 품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엄마의 품속에서, 치맛자락에서 자라보지 못한 어린이는 엄마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모른다. 오히려 자기를 키워주었던 할머니의 품속을 더 그리워 할런지 모른다.
천국 즉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의 선물을 받아본 이만이 하늘 나라의 그리움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정말 죽은 후에 천국에 갔을 때 마치 고향에 왔다는 안도감을 그리고 평화를 느낄 수 있으리라.
우리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하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선물을 그리고 축복을 받고 자란 이에게만이 고향과 같은 하늘 나라가 될 것이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즉 하늘 나라는 어린이가 엄마의 사랑을 받아먹고 자라듯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만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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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지금은 구역 반모임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방문을 하고 가정축복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집을 개방한다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속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이 있던 예전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반모임 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을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않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할머니가 데려온 어린아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머리 굴리지 않으며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어미 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가 부모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의탁하는 단순함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시편131,2) 같이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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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배우 윤여정 씨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나이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처음 살아 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윤여정 씨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지금 자기 나이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나이만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말로 과거에만 머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거의 나이를 통해 다른 이를 판단하고 때로는 잘못되었다면서 단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자기 나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처음 살아 보는 자기 나이, 이 나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힘이 없다고, 나이가 들어 정신도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다면 지금 나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이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많은 어른이 이렇게 과거의 나이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과거의 나이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더 나이 먹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지요. 과거에 하지 못한 것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는 과거의 나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의 나이만을 바라보며 미래를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어린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면, 우리는 열심히 어린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외모를 어린이처럼 꾸미면 될까요? 아니면 말투를 어린이처럼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간직하지 않으며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어린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어린이처럼, 이것저것 재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지 않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잘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찾는 사람만이 미래에 할 수 있는 것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주님께서 주신 처음 살아 보는 지금의 나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이 주님의 훌륭한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를 떠나 지금의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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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린이와 같은 사람>
마태오 19,13-15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다가오시는 분께
다가가는 사람
함께하시는 분과
함께하는 사람
믿으시는 분을
믿는 사람
바라시는 분을
바라는 사람
사랑하시는 분을
사랑하는 사람
품으시는 분께
안기는 사람
내주시는 분께
드리는 사람
이끄시는 분을
따르는 사람
닮게 하시는 분을
닮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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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타성과 사랑의 갱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오늘 독서는 여호수아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어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얼마나 좋은 것을 많이 베풀어 주셨는지 장황하게 얘기한 여호수아는 이제 자기 삶과 역할을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다른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그것도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저는 오늘 여호수아의 촉구를 들으면서 ‘오늘 선택’하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선택하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진정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까? 말로만 선택이지 실제로는 어찌해야 할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런 면이 있고 또 그래야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마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로 당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종처럼 비굴하게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자유가 있는 존재로서 사랑으로 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귀인이 되게 하시고 당신은 귀인의 사랑을 받고자 하심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받는다면 종의 사랑보다 귀인의 사랑을 받길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택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래서 이것의 의미는 다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너희가 다시 선택하라는 말이고, 부모와 조상의 선택에 떠밀려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선택으로 새롭게 다시 섬기기 시작하라는 것일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선택으로 신자가 되거나 부모의 권유로 수도원에 들어온 경우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성당을 멀리하거나 수도원 성소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예’라고 하고는 포도밭에 가지 않은 아들보다 ‘싫다’라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는 아들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부모의 선택, 조상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의 선택이어야 하고, 그것은 자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늘’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과거 조상들이 어떠했어도 오늘 네가 새로이 결정하고 선택하라는 것이고, 또 나의 결정으로 하느님을 섬겨왔더라도 오늘 다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오늘 선택하라는 것의 의미는 사랑의 타성을 깨는 의미이고 사랑을 갱신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한번 결혼했으니 사랑 없이도 남편과 아내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을 매일 다시 선택하고 새롭게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음으로써 타성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오늘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뭐든지 갱신하지 않으면 타성에 젖기 쉽기에 세례를 갱신하고, 서약을 갱신하고, 혼인을 갱신하라는 일깨움을 여호수아로부터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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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린이 예찬>
-하늘 나라의 삶-
어제는 결혼과 이혼, 독신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나눴고, 어제에 이어 오늘은 어린이에 대해 나눕니다. 강론쓰는 이 시간, 어린이같은 마음으로 책상앞에 앉아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참으로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했을 때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자 예수님의 즉각적 반응입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이어 생각나는 매3주간 저녁 성무일도시 두 번째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입니다. 이런 시편을 찬미노래로 바칠 때의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 그렇지 않고는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후렴에 이어지는 사랑스런 시편 131장입니다.
“주여, 잘난체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아니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
끊임없이 바치는 이런 찬미의 은총이 주님을 닮아 날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자만심이나 자부심은 추호도 찾아볼수 없는, 순수하고 단순하고 열려있는, 신뢰심 가득한 겸손한 어린이 같은 영혼입니다. 요즘은 노인들은 많은데 어린이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참 힘듭니다. 예전 어린이들 가르칠 때가 생각나 보관중인 옛 일기장을 들춰 봤습니다. 누렇게 바랜 공책은 글씨도 희미했습니다. 정확히 47년전 저는 28세 청년 교사로 12세 5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일기장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치열했던, 가열찼던 초등학교 교사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75세, 당시 12세 아이들은 지금 59세가 되었고, 이때 맡았던 학급 인원은 80명 이상이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온통 어린이들과 함께 지냈던 8년간의 교사시절은 저에게 가장 행복한 때 였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제 사랑 전부이지만 그 당시는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했듯이 저도 그러했습니다. 일기장은 물론 글씨도 희미하게 바래있었습니다. 두 편의 동시를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떠나간 빈 교실은
썰물이 씻어간 바닷가
먼 파도에 귀를 모으며 나는
귀여운 조개를 줍는다
커텐 주름에서, 꽃병밑에서, 고운 향기로 살아오는
맑은 웃음들,
“저요, 저요, 저요”
고사리 손의 물결속에 방실방실 떠오르는
작은 얼굴들
눈을 감으면 끝없는 물결소리
내 작은 인어들은 어느 수평선을 가고 있을까?
아이들의 옷깃을 고치듯
비뚜러진 책상을 바로 놓는다’-1976.9.15.
또 하나의 동시입니다. 아마 교재준비후 7시 넘어 퇴근할 때의 심정일 것입니다.
-‘텅비어 있는 교실
창을 통해 어둠이 들어오면
마음의 창도 빛을 잃는다
유리창 안에 들어왔던 하늘도
초롱초롱 빛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말소리도 흡수해버린
교실은 말이 없다
밤이 무척 쓸쓸하고 무섭지만
아이들의 꿈을 꾸면 즐거워진다
내일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1976,9,18
이때의 추억이 지금도 산책중 동요를 부르도록 부추깁니다. 지금도 즐겨부르는, 해방후 가장 먼저 많이 불렸다는 ‘새나라의 어린이’입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하늘 나라의 우리로 생각해도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쟁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몸이 튼튼합니다.
무럭무럭 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해방후 새나라 건설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지금도 즐겨 부르는 동요입니다. 어떻게 찾은 나라인데... 어제 원장수사에게 부탁의 메시지와 더불어 태극기 선물도 받았습니다.
“내 솜씨로는 안되니 가능하면 태극기 A4용지 크기로 출력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집무실 십자고상밑에 붙여놓고 애국심愛國心을 진작振作시키며 독립운동獨立運動하는 마음으로 살려구요!”
광복 78주년을 지났지만 진정한 독립은 아주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마음 역시 어리이같은 순수한 마음의 발로라 믿습니다. 오늘 강론은 어린이 예찬입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 늙어도 마음은 순수한 어린이들입니다. 다시 이런 어린이 마음을, 동심童心을 살아야 하겠고, 참으로 예수님처럼 어린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해서 잠언 역시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대의 아이들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당신을 거쳐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또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에게 소유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자기만의 사고가 있으므로.
그대의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까지 가두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하지는 마라.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의 어린이들 사랑 깊이에는 이런 어린이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동심을 살고 싶은 우리들 하나하나 영혼에 대한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제1독서 여호수아 이름은 그대로 예수입니다. 두분 다 어린이같은 영혼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하늘 나라를 사셨던 분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여호수아의 마지막 열정과 순수를 다한 연설입니다. 여호수아의 연설에 주님을 섬길 것을 약속하는 백성들이 순수한 어린이들 같습니다.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누굴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이구동성, 이에 대한 한 목소리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거듭 응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대로 순수한 영혼의 어린이들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섬기듯, 예수님을, 이웃 형제들을 겸손한 사랑으로 섬길 때 동심도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마지막 여호수아의 죽음이 장엄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는 뒤에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죽었다. 그의 나이는 백 열 살이었다.’
가장 확실한 사실은 언젠가 죽는 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때 어린이같은 순수한 영혼에 하늘 나라의 삶일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린이같은 마음으로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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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전폭적인 신뢰와 따름!>
오늘 복음(마태19,13-15)은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사랑하시다.' 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제가 3-4살 될 무렵에 넘어져 오른쪽 눈가가 찢어지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유는 시골에서 어머니가 냇가로 빨래하러 가시는데, 울면서 어머니를 뒤쫓아 가다가 넘어져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영아기 때부터 6세 이전인 초기 아동기 때까지의 어린이들의 모습입니다. 그 시기 어린이들은 조금도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침에 울고불고하는 어린이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유치원에 가는 어린이가 엄마와 헤어질 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어린이는 바로 이런 어린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린이들이 엄마에게 보이는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고, 이런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여호24,14-29)는 모세를 대신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여호수아가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유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유언을 마치고 백열 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24,15)
'전폭적인 신뢰와 따름!'
이것이 바로 어린이들의 본성이며,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이 하느님을 믿는 우리 안에 늘 살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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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Tff7Xkk2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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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 14)
이른 아침
맑은 이슬을
봅니다.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이
오히려
어린이들과 같이
낮아지는 땅에
있음을 뜨겁게
깨닫습니다.
어린이들의
즐겁게 노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각양각색의
작은 힘이
모여야
큰 힘이
됩니다.
한마음 한마음이
모두 소중합니다.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린이들
마음 안에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경쟁과 차별
비교가 없는
모두가 평등하고
소중하고 편안하고
자유롭고 다정한
모두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전인적인
인격 형성을 위한
인간 교육은
언제나
주님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돕는
마음은 언제나
순진한 마음입니다.
단순한 행복을
놓치고 사는
제 자신입니다.
삶의 전부를
거는 것도
단순한
사랑입니다.
사는 재미를
잃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로
갈 수 있는
모든 길은
동네 놀이터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즐겁게 사는 법을
즐겁게 노는 법을
다시 배우라고
어린이들이
우리의
스승이 됩니다.
감추는 법이
아니라
나누는 법을
즐겁게 뛰노는
법을 오늘
다시 만나는
우리의
하늘 나라입니다.
즐겁게 기도하고
즐겁게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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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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