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양_세계기독교고전 33
성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7
제6장,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형언할수 없는가?
6.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한 말이나 찬양은 합당한 것이었는가? 나는 말하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느끼며, 만일 내가 말을 했다면 그것은 내가 하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이 점을 아는가?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말했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형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언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 형언할 수 없다는 말을 하므로 여기에 이상한 명사 모순이 생긴다. 그리고 이 명사 모순은 말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그저 침묵으로써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성에 알맞는 말을 전혀 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자기를 낮추사 사람들이 입으로 드리는 경배를 받으시며, 말로 드리는 찬양을 기뻐하신다. 이런 원칙 아래서 그를 (라틴어로) 데우스(Deus)라고 부르는 것이다.
(라틴어에서) 두 음절로 된 이 말에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전하는 아무 지식도 없지만, 라틴어를 아는 사람은 이 소리를 들을 때에 한 영원한 최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35)
제8장.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지혜이시므로 모든 다른 것보다 더 존중히 여겨야한다
8. 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을 살아 있는 존재라고 하므로 신을 생명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신에 합당하고 어리석지 않은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이 신에 대해서 어떤 형체를 생각하든 간에, 그 형체를 생물이나 무생물로 만드는 것은 생명이라고 믿으며, 무생물보다 생물을 높이 평가한다. 또 생물체에 관해서도 그것이 아무리 찬란하거나 거대하거나 아름다울지라도, 그 형체와 그것을 살리는 생명을 구별한다. 그뿐 아니라, 생명이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하므로, 영양과 생명을 받는 신체보다 생명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 자체를 주시하려고 노력한다.
나무와 같이 감각이 없는 식물적인 생명보다 동물과 같이 감각이 있는 생명을 높이 평가한다. 또 이 후자보다 사람에게 있는 것과 같은 지성적인 생명을 높게 본다. 이 생명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어리석을 때도 있고 현명한 때도 있지 않은 지혜 자체인 생명을 더 높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현명하다고 할 때에, 그는 지혜를 얻기 전에는 지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자체이신 분은 현명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현명하지 않을 때가 있을 수도 없다.
사람들이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들은 변하는 마음보다 변함없이 현명한 생명을 높이 평가하며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변하지 않는 생명을 더 높이 생각할 때에 의거하는 그 진리의 규범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들 자신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본성을 초월하지 않고는 이런 변함없는 진리의 규범을 깨달을 수 없다.(37)
제10장. 하나님을 보려면, 영혼이 청결하게 되어야한다
10. 그러므로 변함없이 살아 계신 진리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창조주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그 피조물을 염려해 주시므로, 우리는 광명을 깨달을 힘을 얻으며, 깨달은 광명 안에 안주하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청결하게 해야 한다. 이 청결 작업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여행이라고 생각하자.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이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청결한 소원과 착한 습관을 길러야 한다.(38)
제11장 지혜가 육신이 되어 청결의 모범을 보이셨다
11. 그러나 만일 지혜 자체이신 분이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와 같이 연약하게 되시고 우리 인간의 형태로 거룩한 삶의 표본을 보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에게로 가는 것을 현명하다고 하므로 그가 우리에게 오셨을 때에, 교만한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또 우리가 그에게 가면 강하게 되므로, 그가 우리에게 오셨을 때에 사람들은 그를 약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1:25). 그러므로 그 자신이 우리의 본향이시지만, 그는 우리에게 본향으로 가는 길이 되어 주셨다(요 14:6).
제22장.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라
20. 이 모든 사물 가운데서 우리가 영원불변하다고 한 것들만이 즐거움의 진정한 대상이 된다.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영원불변하는 것들을 즐길 수 있도록 이용한다. 그러나 다른 사물들을 즐거워하며 이용하는 우리 자신도 사물이다.
참으로 우리는 위대한 사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입고 있는 죽을 몸에 대한 말이 아니라, 우리를 동물보다 높게 만드는 우리의 이성(理性)적인 영혼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을 서로 즐길 것인가 또는 이용할 것인가 또는 양쪽을 다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지만, 사람을 그 자신을 위해서 사랑할 것인가 또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사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만일 그 자신을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즐기는 것이 되며,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것을 그 자체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렇게 즐기는 것이 곧 행복한 생활이 되며, 그 행복이 현실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런 소망을 가지는 것이 현세에서의 위로가 된다. 그러나 사람을 믿고 소망을 가지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다(117:5).
21. 이 문제를 분명히 볼 때에, 아무든 자신을 기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할 때에도 자기를 위해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즐김의 진정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 사람은 그 생활 전체가 영원불변하는 생명을 향하여 가는 여행이 되며, 그 심정이 전적으로 이 일에 집중될 때에,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만일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사랑한다면, 그는 자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까지도 즐기지 않고, 변함없는 선에 지성이 전적으로 집중되며 심정이 열중할 때가 더 좋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까지도 자신을 위해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즐기기에 가장 합당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면 아무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랑한다고 해서 노할 권리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위로 내려진 사랑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지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마 22:37-39
레 19:18 : 신 6:5). 즉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생각과 생명과 지력(力)을 남김없이 완전히 집중하라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라는 말씀은 이를테면 우리 마음의 한 구석을 비워서 다른 것을 즐기려는 여유를 제공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사랑의 합당한 대상으로서 마음에 떠오를 때에, 그것도 우리의 애정의 큰 흐름에 합류시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이웃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줄기와 합류되며, 사소한 부분이라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본 줄기의 수량이 조금도 감해지지 않게 된다.
제23장. 자기와자기 몸을 사랑하라고 명령할 필요는 없다
22. 우리가 이용하는 것을 모두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나 천사와 같이 우리와 관련이 있어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것만을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와 관련이 있어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할 것, 예컨대 우리의 몸은 사랑해야 한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이 사악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들의 사악을 사랑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할 것이 네 가지다. 첫째, 우리보다 높은 것, 둘째, 우리 자신, 셋째, 우리와 동등한 것, 넷째, 우리보다 낮은 것이다. 이 가운데서 둘째와 넷째에 대해서는 교훈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이라도 여전히 자기와 자기 몸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변함 없는 광명 즉 만유의 지배자를 피하여 도망하는 영혼도 자기와 자기 몸을 지배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며, 그런 영혼도 자기와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23. 그뿐 아니라 그런 영혼은 자기와 동등한 존재들 즉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을 위대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하나님에게만 돌아가야 할 것을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하며, 무엇보다도 그것을 원하는 것이 죄많은 영혼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런 사랑은 미움이라고 할수 있다. 자기 밑에 있는 것이 자기에게 복종하는 것을 원하면서, 자기 위에 있는 것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않으며, "불의(不義)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느니라"(시 11:5, 70인역)고 한 말씀은 지극히 공정하다. 따라서 그 영혼은 약하게 되며 죽을 몸 때문에 고통을 많이 받는다. 영혼은 물론 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몸의 부패를 슬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 건전해야만 몸도 불멸 불후(不滅不朽)하게 된다. 그런데 영혼이 건전하려면 영원 불변하시는 하나님께 꾸준히 밀착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본성이 자기와 동등한 것, 즉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애쓰는 영혼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교만에 빠져 있다.
제24장. 자기의 육신을 학대하는 사람도 그 육신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24.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이 점은 종파(宗派)들 사이에서 문제된 일도 없다. 또한 자기의 몸을 미워하는 사람도 없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는다"(엡 5:29)고 한 사도의 말씀은 지당하다. 육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사람들은 완전히 스스로 속은 것이다. 그들이 미워하는 것은 그 몸이 아니라, 몸이 병들고 무거워서 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병들지 않고 이주 경쾌한 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금욕과 노고(勞苦)로 몸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 몸을 없애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몸을 복종시키며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려는 것이다. 즉, 몸을 힘들여 단련함으로써 몸에 해로운 정욕들을 뽑아 버리려고 한다. 영혼이 합당하지 못한 것을 즐기게 만드는 습관과 취미를 근절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되려고 조심하는 것이다.
25.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도착(錯)된 생각으로 자기의 몸을 마치 선천적 원수인 것처럼 여겨서 그 몸과 싸우고 있다. 성경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느니라" (갈 5:17)고 한 말씀을 그들은 오해했다. 이것은 아직 극복되지 않은 육적인 습관, 성령에 대항하는 습관에 대한 말씀이다. 성령은 육체를 없애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정욕, 즉 그 악한 습관을 근절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연 질서가 요구하는 대로 악한 습관을 영에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부활 후에는 몸이 완전히 영에 복종해서 영원히 완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살 것이므로 그와 같이 금생에서도 육신의 습관을 개선해서 과도한 욕망이 영혼과 싸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까지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르며 성령의 소욕이 육체를 거스른다." 영은 그 사랑하는 것이 최고 원칙에 복종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육체와 싸우더라도 육체를 미워하며 근절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고 한다. 육체가 대항하는 것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조에게서 받은 습관이 그 본성에 뿌리를 박고 고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은 육체를 복종시킴으로써 악한 습관이 이룩한 잘못된 평화를 깨뜨리고 선한 습관에서 생기는 진정한 평화를 출현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릇된 생각에 오도(誤導)되어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한 눈을 희생할 결심은 없을 것이 다. 눈 하나를 뽑더라도 고통이 없으며 남은 한 눈으로도 이전과 같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조건이라 해도 한 눈을 잃고도 오히려 좋을 만한 어떤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이 일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예와 다른 비슷한 예들을 볼 때에, 솔직히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도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것이다.
"누구든지 언제나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라고 사도는 말하고, “오직 앙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느니라”고 첨가한다 (엡 5:29). (45-50)
제34장. 하나님께로 가는 처음 길은 그리스도시다
38.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다. 만유를 지으신 진리와 말씀이 우리 사이에 거하기 위해서 육신이 되셨건만 사도는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한다(고후 5:16)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의 길을 완전히 마친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고자 하실 뿐 아니라, 길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 길이 되고자 하셔서 육신을 입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나를 그의 건의 처음으로 만드셨다"는 말씀이 있다 ( 8:22 70인역),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로 가려는 자들이 그 길을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하늘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갔으며 (빌 3:13), 이미 출발점을 지났고 새로 출발할 필요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해서 영생에 거하고자 할 때에, 모두 이 길에 들어서 출발해야 한다. 주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 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즉 나를 통해서 다른 쪽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를 매며 인봉해서 우리를 변함없는 최고선 안에서 영원히 안식하게 만드신다. 따라서 주께서도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길이 되시며, 우리를 막지 않고 도리어 전진을 계속하라고 하시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길을 멈추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시간적인 것을 입으셨지만, 우리는 그것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속히 초월하며 그리스도에게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 입으신 우리의 본성을 시간적인 것의 속박에서 해방하시고, 성부의 오른편에 두셨다.
제35장.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사랑이 성경의 성취며 목표다
39. 사물을 논하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한다면, 율법과 모든 성경의 성취와 목적은 즐김의 대상을 사랑하며, 그 대상을 우리와 함께 즐기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금세(今世)의 일들은 우리가 이 진리를 알고 그대로 행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소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마련된 일들을 사랑과 기쁨으로 거기 안주할 것으로 생각하여 사용할 것이 아니라, 길이나 교통기관이나 그밖의 우리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서 임시로 사용해야 한다. 이 점을 더 적당하게 표현하는 다른 비유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얻으려는 목표를 위해서만, 거기까지 가게 하는 것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제39장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성숙한 사람은 성경이 더 필요하지 않다
43.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의지하며 그것을 굳게 파악한 사람은 남을 가르칠 때 외에는 성경이 더 필요하지 않다. 성경을 가지지 않고도 이 세 가지 은사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많으며,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고적하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우에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8)는 말씀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이를테면 도구로 삼아서 자기 안에 믿음과 사랑의 큰 건물을 지었으며, 완전한 것을 잡고 부분적으로만 완전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금생에 대해서 하는 말이며, 내세와 비교할 때에는 아무리 바르고 거룩한 사랑의 생활일지라도 금생에서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런즉 믿음,소망,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다(고전 13:13). 사람이 영원계에 도달하면, 다른 두 가지는 없어지더라도 사랑은 풍성하고 더욱 확고하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40장. 성경은 어떤 독자를 원하는가?
44. 그러므로 성경에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딤전 1:5)고 하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며, 성경에 대한 그의 모든 지식으로 이 세 가지 은사를 육성하는 데 이바지하게 하는 사람은 침착한 마음으로 성경을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사도는 사랑을 말하고 "청결한 마음에서 나는"이라는 말씀을 첨가해서, 마땅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예방한다.
그리고 소망에 관해서 "선한 양심"을 첨가한다. 양심이 선하지 않은 사람, 즉 양심에 가책이 있는 사람은 그 믿고 사랑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품지 못한다.
셋째로, 사도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말한다. 우리의 믿음에 위선적인 것이 아주 없을 때에 우리는 사랑하기에 마땅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지 않고 단정하게 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소망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나는 믿음에 관한 일에 대해서 당면한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범위 내에서 논하려고 노력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내가 쓴 책들에서 이미 많이 논의되었다. 그러면 이것으로 이 권을 끝내고, 다음 권에서는 하나님이 빛을 주시는 대로, 부호에 대해서 논하겠다.(64-65)
제5장. 성경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6 그래서 중병에 걸린 인류의 의지를 치료해 주는 성경도 여러 언어로 번되었다. 처음에는 한 언어로 성경이 기록되었고, 적당한 때가 오면 모든 민족 사이에 전파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언으로 번역되어 널리 전파되며 알려졌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사람들은 지자들의 생각과 뜻을 알려고 하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한다. 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말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6장. 성경에서 비유적 표현 때문에 뜻이 모호한 것은 그만큼 쓸모가 있다
7. 성경에는 애매모호한 구절이 많아서, 부주의하고 성급한 독자들은 뜻을 혼동하며 오류를 범한다. 어떤 구절은 비슷한 해석조차 짐작할 수 없으며, 어떤 표현은 아주 어두컴컴하게 덮여 있어서 뜻을 알아낼 수 없다. 이것은 사람들이 교만을 버리고 노력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일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또 사람의 마음은 쉽게 깨달은 것을 경시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그 교만을 방지하시려는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언행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며 온갖 미신을 다 버리게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을 본받아서 교회의 지체가 된 하나님의 선하고 참된 종으로서 그들은 세례반에서 세상의 짐을 씻어 버리고 거기서 일어난 후에는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의 사량을 열매로 맺는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아가서에 있는 말씀을 듣고, 같은 뜻을 생각하는 편이 더 즐거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가서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칭찬하면서,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한다(아 4:2). 이런 비유를 쓰지 않는 평범한 표현에서 얻는 생각보다 이런 비유를 들음으로써 더 얻는 것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룩한 사람들을 명상할 때에, 그들을 교회의 이로 생각하는 것이 더 즐겁다. 그들이 흰 이가 되어 사람들을 과오에서 물어뜯으며, 몸된 교회 안에 넣는다고 상상한다. 그들이 고집을 물어뜯음으로써 완전히 부드럽게 만든다고 본다. 그들은 털을 깎은 양과 같이 목욕을 하고, 즉 세례를 받고 나서 두 사랑의 계명, 즉 쌍둥이를 낳으며 그 거룩한 열매가 없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 왜 그런지,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8. 그러나 성경에서 아무 비유도 얻을 수 없는 것보다 비유를 써서 문제를 보는 것이 무슨 까닭에 더 즐거운가? 사실과 얻는 지식이 다르지 않으니, 이 문제는 대답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비유를 통해서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 더 즐거우며, 어렵게 구하며 얻었을 때에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다. 구해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배가 고프다. 또 원하는 것이 이미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전혀 구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배가 불러서 활기가 없다. 이 두 가지 원인에서 온 무기력은 피해야 한다. 따라서 성령은 경탄할 지혜와 우리의 행복에 대한 배려로, 성경에 평이한 구절들을 두어 우리의 굶주림을 구하며, 모호한 구절들을 두어 우리의 식욕을 자극한다. 모호한 구절들에서 발굴되는 의미나 아주 평이한 다른 말씀에 나타난 것이나, 같지 않은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72-73)
제9장. 어떻게 성경을 연구할 것인가?
14.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마음이 온유하고 경건한 사람은 이 모든 책에서 하나님의 뜻을 탐구한다. 이 탐구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첫째 원칙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책들을 알고 있으라는 것이다. 아직 잘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읽고 기억해야 하며, 적어도 전혀 모르고 있어서는 안된다. 다음에, 생활과 믿음에 관한 규범들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다른 것보다 그것을 더욱 열심히 더욱 면밀하게 탐구해야 한다. 이 방면에서 얻는 바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이해력이 크게 된다.
성경은 믿음과 생활 방식에 대한, 즉 소망과 사랑에 대한 말씀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성경의 표현 방법에 어느 정도로 익숙하게 되면, 우리는 더 나아가서 모호한 구절들을 본받아서 모호한 구절들의 뜻을 밝히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서 의심스러운 구절들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업에서 기억이 큰 몫을 담당하지만, 그 기억에 결함이 있을 때에는 보충할 길이 없다.(78)
제16장. 비유적인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사물에 대한 지식이 다 필요하다
23. 비유적인 부호들에 관해서도, 그 부호들을 모르기 때문에 앞길이 막힐 때에는 일부는 언어에 대한 지식으로, 일부는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뜻을 밝힐 수 있다. 예컨대, 주님께서 흙에 침을 발라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이야기에서, 실로암못이라는 말에는 비유적인 뜻이 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가 설명하지 않았다면(요9:7) 우리는 그 중요한 뜻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성경 기자들이 설명하지 않은 히브리어 이름이 많은데,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성경에 있는 수수께끼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히브리어에 능한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고유 명사들을 그 출처(出處)와는 상관없이 뜻만을 설명한 것이 후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혜택을 주었다. 인명으로서는 아담, 하와, 아브라함, 모세 등, 그리고 지명으로서는 예루살렘과 시온, 시내 산, 레바논, 요단, 기타 우리가 모르는 것들의 뜻을 설명했다.
이런 고유명사들을 연구하고 설명하면, 성경에 있는 비유적 표현들의 뜻이 뚜렷하게 되는 때가 많다.
24. 사물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도 비유적 표현의 뜻을 모호하게 만든다
예컨대 성징이 자주 비유로서 동물이나 광물이나 식물을 언급하는데, 우리가 그 특성을 모르는 때와 같다. 뱀은 공격을 받으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몸 전체를 노출시킨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이것은 맵과 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마 1:16) 주님의 명령을 해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는가?
바꿔 말하면,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박해자에게 내어주며, 우리 몸을 구하려고 하나님을 부인해서 몸으로 믿음을 말살하지 말라는 것이다.
혹은 뱀은 묵은 껍질을 벗어 버리고 새 힘을 얻을 때에 아주 좁은 구멍으로 나간다고 하므로, 우리도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엡 4:22) 사도의 교훈과 뱀의 지혜를 본받으라는 말씀은 얼마나 잘 일치하는가! 또 주님도 옛사람을 벗기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마 7:13), 성경이 뱀을 자주 비유로 쓰기 때문에 뱀의 본성에 대한 지식이 그런 비유들을 해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이, 비유에 뱀 같이 자주 나오지 않는 다른 동물에 대해서도 지식이 없으면 지장이 많다. 광물과 식물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홍옥이나 금강석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해석의 길이 막히는 때가 많다.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고 방주에 돌아왔다는 것은(창 8:11) 영구적인 평화를 의미한다. 이 점을 우리가 금방 이해하는 것은 오직 감람나무의 특성을 알기 때문이다. 감람나무 기름은 다른 액체를 부어도 여전히 부드러우며, 상록수이다. 히솝, 즉 우슬초가 폐를 깨끗하게 하는 약효가 있으며, 그 뿌리는 바위를 뚫고 들어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풀에 대해서 무슨 까닭에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시 51:7)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5. 수(數)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성경에 비유적으로 신비롭게 표현된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컨대, 모세와 엘리야와 우리 주님께서 40일 동안 단식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출 24:18; 왕상 19:8; 마 4:2), 솔직한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확인하고 싶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수에 대한 지식과 연구 없이는 이 숫자도 해석할 수 없다.
40은 10과 4를 곱한 것이며, 만물에 대한 지식과 시간에 얽힌 지식을 의미한다. 하루와 한 해가 지나가는 데는 시간적 구분이 넷이다. 하루는 아침, 낮, 저녁, 밤에 걸쳐 있는 시간들이며, 한해는 봄, 여름,가을, 겨울에 걸친 여러 달이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을 경멸하고 영원을 구하라는 교훈을 시간 중에서 배우지만, 우리가 원하는 영원을 위해서는 그 시간 중에 사는 동안에 일체의 쾌락을 끊어 버려야 한다. 그뿐 아니라, 10이라는 수는 창조주와 피조물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창조주는 삼위일체이시며, 피조물에는 생명과 몸이 있으므로 일곱으로 상징된다. 생명은 세 부분으로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도 마음과 뜻을 다해야 하며, 몸에 네 요소가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러므로 10이 시간, 즉 네 번과 연결되어서 우리 앞에 제시될 때에는 시간 중에서 얻는 쾌락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일체 끊어 버리라는 교훈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40일간 단식의 의미이다. 이 일은 모세가 대표하는 율법과 엘리야가 대표하는 예언자들이 우리에게 훈계한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증언을 받으시는 듯, 산상에서 나타나서 세 제자들이 보고 놀라게 하였다.
우리는 같은 식으로, 40에서 50이 나오는 이유를 연구해야 한다. 50이라는 수는 우리 종교에서 오순절 때문에 보통 이상으로 거룩하게 여긴다. 이 수는 세 곱이 되었는데, 이 셋은 시간의 세 구분, 율법 이전과 율법 아래와 율법 이후, 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그리고 삼위일체를 모든것 위에 첨가하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한 교회라는 신비와 관련되어, 주님의 부활 후에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서 잡은 물고기 153마리와 같다(요 21:11,6). 이와 같이 성경에는 수와 수의 배열로 여러 가지 신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있으므로, 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읽어도 뜻을 깨달을 수 없다.
26. 음악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깨달을 수 없는 일이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수금과 열 줄 비파의 차이점으로 어떤 비유적인 구절들을 잘 설명했다.
열 줄 비파에 열 줄이 있는 것은 음악적 법칙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면 십계명 때문에 열이라는 수가 신성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학자들이 논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열은 창조주와 피조물에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성경에(요. 2:20) 성전 건축에 46년이 걸렸다는 기사가 있고, 이 말씀은 주님의 몸과 관련해서 나온 것인데, 46이라는 수에는 어떤 음악적인 음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단자들은 성자의 몸은 가짜가 아니라, 참으로 인간의 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수와 음악에 대해서 은연중에 경의를 표시하는 말씀이 성경에는 많다.
깊은 사람이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름은 잊었으나, 어떤 나라가 아폴로 신전에 헌납하기 위해서 미술가 세 사람과 계약하기를 각각 뮤즈의 상셋을 만들어, 그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들을 사기로 했다고 바로는 말한다. 그런데 미술가들이 만든 조각이 모두 똑같이 훌륭하고 아름다워서, 결국 아홉 개를 다 사서 아폴로 신전에 봉헌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 B.C. 8세기)가 아홉 여신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우스가 아홉 뮤즈를 낳은 것이 아니라, 세 미술가들이 창작한 것이다. 처음에 나라에서 셋을 주문한 것은 어느 시민이 환상으로 보았거나 세 여신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곧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소리가 세 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악기 없이 입으로만 노래를 부를 때의 음성, 나팔이나 피리를 부는 숨, 비파나 북과 같이 손으로 쳐서 내는 소리, 이 세 가지이다.
제18장. 세상사람들이 가진 지식도 유익하면 멸시하지 말라
28. 바로가 한 말이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성경을 이해하는 데 음악 지식이 조금이라도 유용하다면, 이교도들의 미신 때문에 음악을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비파와 그 밖의 악기들을 연구한다고 해서, 그들의 경박한 연극을 구경하라는 것은 아니다.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를 문학의 보호신이라고 해서, 문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정의의 신전들을 세우고, 마음에 간직해야 할 정의와 미덕을 기피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도리어 반대로 진리가 어디 있든지 간에, 진리는 모두 주님의 것임을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한다. 이 진리를 고찰하고 식별함으로써 그들은 이교도들의 종교적 문헌에 있는 미신적인 이야기들까지도 배격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사람들을 슬퍼하며 경계할 것이다. 그들은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1:21-23)
제19장. 이교도들의 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29. 이 문제를 빠뜨릴 수 없으므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교도들 사이에 있는 지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이 제정한 일들에 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역사적으로 발전한 일이나 하나님이 제정하신 일들에 관한 지식이다. 인간이 제정한 일들에 관한 지식은 일부는 미신적이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88-92)
제28장. 역사는 어느 정도까지 도움이 되는가?
42. 과거의 연대(年代)에 대해서 우리가 얻는 지식은 어렸을 때에 교회 밖에서 배운 것이라도 성경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올림픽 연대나 집정관들의 이름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기록을 밝힐 때가 많다. 우리의 주님께서 탄생하시며 수난당하신 때에 어느 집정관들이 재직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은 46세에 수난당하셨다고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건축한 연수를 46년이라고 했고, 주님은 성전이 자기의 몸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2:19-21). 그런데 복음서에(3:23) 주님이 세례를 받으신 때에 30세 쯤 되셨다는 권위 있는 기록이 있다.
그 후에 사신 연수는 주님의 행적들을 종합해서 알 수 있지만, 다른 방면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던지는 자료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복음서와 세속 역사를 비교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더라도 성전 건축에 46년이 걸렸다고 한 것은 무익한 말이 아니었음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이 숫자는 주님의 나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에 대한 비밀한 가르침에 관한 것이다. 이 몸은 만물을 지으신 분의 몸(요 1:1-3), 하나님의 독생자의 몸이시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가 싫다 하시지 않고 입으신 그 몸이었다.
43. 그뿐 아니라 역사적 지식이 유용하다는 데 대해서는 헬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암브로시우스가 얼마나 큰 문제를 해결했는가! 플라톤의 글을 읽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존숭하며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플라톤의 책에서 배운 것이라는 주장을 감히 했던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연대가 주님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들은 역설했다.
그러나 저 유명한 감독은 세속 역사를 연구해서, 플라톤이 애굽에 여행했다는 것과, 그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애굽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플라톤이 우리의 문헌을 알게 되었으며, 그의 훌륭한 사상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믿을 만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왜 그런고 하니, 플라톤이 신학을 배운 선생들의 선생이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피타고라스도 일신교(一神敎)를 가르친 히브리 민족의 서적보다 먼저 생존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진리의 말씀을 주장한 철학자들이 우리의 문헌에서 배웠다고 하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플라톤의 글에서 배웠다는, 너무 어리석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개연성(蓋然性)이 있다.
44. 또 역사서에 사람들이 이전에 조작한 일들이 기록될 때에도 역사 자체는 인간의 무모한 조작의 일종이라고 할 수 없다. 과거에 사람이 한 일, 말살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이 장악하고 주관하시는 시간에 속한 것이다. 이미 행한 일을 말하는 것과 행해야 할 일을 알리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역사는 이미 행한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점쟁이들의 책과 기타 유사한 문서는 행하며 지켜야 할 일을 가르치려고 한다. 대담하게 지도하려 하고, 충실히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제37장. 수사학과 변증법
55. 그러나 이 기술을 배운 사람은 어떤 의미를 확인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의미를 표현하는 데 이용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추리와 정의와 구분에 관한 기술은 의미를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이런 일들을 알았다고 해서 행복한 생활의 비결을 알았노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기술을 배워 이용함으로써 얻으려는 목적이 따로 있으며, 이런 기술의 복잡하고 어려운 원칙들을 배우는 것보다 그 목적을 직접 얻는 것이 더 쉬운 경우가 있다. 걷는 법을 가르치려는 사람이 여러 가지 원칙을 말할 것을 상상하라.
앞발을 디디기 전에 뒷발을 들지 말라, 무릎 관절은 어떻게 움직이라는 등, 자세히 경고하며 설명한다. 그가 하는 말은 다 옳고, 그대로 하지 않으면 걸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운동을 하면서 일일이 운동에 주의하거나, 운동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는 것보다 실지로 움직이며 걷는 편이 더 쉽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은 그런 지시들을 실지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그에 대한 관심이 더욱 희박하다.
그와 같이, 영리한 사람은 추리에 대한 원칙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어떤 추리가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더 속히 깨닫는다. 그러나 둔한 사람은 추리가 건전하지 못한 것을 깨닫지 못하며, 원칙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한다. 그 원칙들은 우리의 지력(知)을 훈련할 수 있지만, 우리의 논쟁이나 의견 형성을 돕기보다 진리를 알려주는 듯하기 때문에 더 매력이 있다. 다만 이 원칙들을 알았기 때문에 악하고 교만한 생각이 들어, 궤변과 번드레한 질문으로 남을 속이거나, 큰 것이나 얻은 듯이 선량하고 순진한 사람들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믿게 되어서는 안 된다.
제38장. 수학은 사람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발견했을 뿐이다
56.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수학은 사람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탐구해서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탈리아(Italia)라는 말의 처음 음절을 고대 사람들은 짧게 발음했지만, 베르길리우스는 길게 만들려고 해서, 실지로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셋을 세 번 더하면 아홉이 아니라고 정하고 싶어도 그 원하는 대로 만들 사람은 없다. 또는 셋을 세 번 더한 것은 셋의 제곱이 아니라든지, 셋의 세 곱이 아니라든지, 여섯의 한 배 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또는 셋을 세 번 더한 것은 어떤 수의 두 배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기수에는 절반이 없기 때문이다. 수는 그 자체로서만 생각하든지, 도형이나 음향이나 다른 운동에 적용하든지, 일정한 법칙들이 있으며, 그 법칙들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재주 있는 사람들이 밝혀낸 것이다.
57.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심히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를 자랑한다면, 그리고 참되다고 깨달은 것들의 진리의 근원, 불변하다고 깨달은 것들의 불변성의 근원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신체적인 외형에서 그 마음으로 전진해서, 마음도 변한다는것, 즉 유식한 때도 있고 무식한 때도 있다는 것을 알며,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위에 변함 없는 진리가 있고 아래에 변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 이 모든 일을 알아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줄로 아는 유일신에게 찬양과 사랑이 돌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박식한 듯 할는지는 몰라도, 도저히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112)
제40장, 이교도들이 한 바른 말은 우리가 모두 이용해야 한다
60. 그뿐 아니라 소위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들, 특히 플라톤파가 한 말이 바르고 우리의 신앙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채택해서 이용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보다 우리가 당연히 가져야 할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이 싫어 도망하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패물 그리고 옷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갈 때에 그것들을 얻어가지고 갔다. 이러한 것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잘 이용하려는 것이었고, 자기들 생각만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굽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자기들이 잘 이용하지 못하는 금은과 의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공한 것이다(출 3:21, 22: 12:35, 36).
그와 같이 이교도들의 학문에는 그릇되고 미신적인 공상, 그리고 불필요한 노고의 무거운 짐이 붙어 있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도하에 그들과 결별할 때에, 마땅히 그것들을 기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에는 진리 탐구에 유용한 교양도 포함되었고, 훌륭한 도덕적 훈계도 있다. 심지어 유일신 경배에 관한 진리도 있다. 이런 것들은 이를테면 그들의 금과 은이며, 그들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파냈을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광산은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파낸 금과 은을 부당하게 귀신 숭배에 악용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의 불행한 관련 정신적으로 끊고 떠날 때에, 그들의 금은을 취해서 복음 전파 사업에 이용해야 한다. 또 그들의 의복, 즉 금생에서 필수적인 사회 생활에 적합하게 만든 각종 문화도 기독교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61. 우리 형제들 가운데서 여러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한 일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저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선생이요 순교자였던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애굽을 떠날 때에, 얼마나 많은 금은과 의복을 가지고 나왔던가! 락탄티우스(Lactantius), 빅토리누스(Victorinus), 옵타투스(Optatus), 힐라리우스(Hilarius)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나왔던가!!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과 헬라인 중의 선생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장 충실한 종이었던 모세는 이들의 선배로서 같은 행동을 했다. 그는 애굽 사람들의 학술을 다 배웠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다(행 7:22).
더군다나 그리스도의 멍에를 배척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때에, 그들이 이교도들의 지식을 유일신 숭배에 이용해서 허망한 우상 숭배를 전복시키리라는 것을 이교도들이 알았다면, 그들은 그 지식의 어떤 분야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금은과 의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 애굽을 떠나게 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이용될 줄 모른 까닭이다. 출애굽 때에 있었던 일은 확실히 지금 있는 일의 예표였다. 나는 이 해석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와 비슷하거나 더 훌륭한 해석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41장. 성경을 연구하는사람이 가져야하는 태도
62.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준비를 한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에, 끊임없이 명상해야 할 말씀이 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사도는 말했다(고전 8:10).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아무리 많은 보물을 가지고 왔을지라도,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서 유월절 제물이 된 분은 그리스도시며(고전 5:7),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에게 가장 분명히 가르치는 말씀이 있다.
애굽의 바로 밑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멍에가 가볍다는 것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며, 지식이 교만하게 만들지 않고 사랑이 덕을 세우는 사람이 아닌가? 한 예표와 그림자로서 유월절을 지킨 사람들이 우슬초로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표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일을 회상하라 12:21-22). 그런데 이 우슬초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할 만한 풀이지만, 가장 강하고 그 뿌리도 가장 깊이 땅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우리가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7-19),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려는 것이다.
십자가의 넓이는 주님이 두 손으로 달리셨던 가로대가 표시하며, 길이는 머리 아래의 몸이 달린 가로대까지의 높이가 표시하며, 높이는 머리를 기댄 나무가 표시하며, 깊이는 땅속에 묻힌 부분이 표시한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해야 하며, 그리스도에게 항상 밀착해 있어야 하며,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하며, 성례를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 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으로 깨끗이 된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엡 3:18)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을 지으신 성부와 동등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앎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려는 것이다(엡 3:19). 또 우슬초에는 정화하는 힘이 있어서, 교만하게 만드는 지식 때문에 가슴이 부풀지 않게 하며,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보화 때문에 자랑하지 않게 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시 5:7-8) 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즉시 첨가해서, 우슬초는 교만을 씻어 버리는 상징임을 알린다.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8).
제42장 세속 저술가들과 성경을 비교함
63.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할 때에 가지고 온 금은보화와 의복이 많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그 후에 예루살렘에서 얻은 재물, 특히 솔로몬 왕 때의 전성기에 도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빈약한 것이었다. 그와 같이, 이교도들의 서적에서 수집하는 유용한 지식을 종합해도, 성경에서 얻는 지식에 비하면 빈약하다. 다른 데서 얻은 지식이 유해한 것일 때에는 성경이 정죄하며, 유용한 때에는 성경에 이미 있다. 다른 데서 배운 유용한 것은 모두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데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일들을 성경에서 훨씬 더 풍부하게 발견한다. 그뿐 아니라, 놀랍게 숭고하고 놀랍게 단순한 성경에서만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한 예비 지식을 얻어 모르는 부호로 지장을 받지 않는 사람, 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그리스도의 쉬운 멍에를 메고 가벼운 짐을 지며, 믿음에 뿌리를 내리며 터가 굳고 믿음이 장성해서 지식이 교만하게 만들지 못하게 된 사람은, 더 나아가서 성경의 모호한 부호들을 고찰하며 토론하는 일에 착수하는 것이 좋다. 나는 이제부터 제3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주님이 주시는 것을 말하도록 힘쓰겠다.(115-119)
제21장. 다윗은 간음죄를 범했으나, 정욕의 종이 되지 않았다
다윗이 그의 불효하고 괴상한 아들 때문에 이런 피해자가 되었을 때에, 그는 미친 아들을 참아 줬을 뿐 아니라 아들이 죽었을 때에 슬퍼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손상보다 아들의 죄를 슬퍼했고 육적인 질투심에 좌우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전투에 지더라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고 굴복된 후에 회개할 여지를 주었다. 이 계획이 좌절되었을 때에 아들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그렇게 악한 간음자일 뿐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 한 자가 받을 엄벌을 생각해서 통곡한 것이다(삼하 16:22; 18:5; 19:1). 이 일이 있기 전에 다른 무죄한 아들이 앓았을 때에는 다윗이 몹시 고통스러워했지만, 아들이 죽은 후에는 곧 기운을 회복했다(삼하 12:19-23).
31. 고대인들이 일부다처였으면서도 얼마나 절제와 자제의 생활을 했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한가지 사실로 알 수 있다. 다윗 왕이 젊은 정열과 세속적 번영에 정신이 현혹되어 한 여인을 불법적으로 취하고 그 남편을 죽이도록 명령했을 때에 한 선지자가 그의 죄를 책망했다. 선지자는 한 비유로서, 어떤 가난한 사람이 재산이라곤 어린 암양 새끼 한 마리밖에 없었는데, 양을 많이 가진 이웃이 자기의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암양 새끼를 잡아 먹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이 노해서, 그 놈을 죽이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양을 네 배나 갚으라고 명령했다. 이와 같이 왕은 자기가 알면서 저지른 죄를 부지중에 정죄했다(삼하 12:1-6).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 주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벌을 전했을 때에 다윗은 깊이 회개함으로써 그 죄를 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비유에서는 가난한사람의 암양 새끼로 그의 간음죄를 의미했을 뿐이고, 여인의 남편을 죽인 문제, 즉 그 가난한사람 자신을 죽인 문제는 언급이 없다. 즉 다윗에 대한 정죄는 간음죄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 여인에 관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보면, 그가 많은 아내들에 대해서 절제를 지켰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경우에, 방탕한 생각은 그와 함께 영주한 것이 아니라 한때의 손님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를 책망한 선지자도 그의 불법적인 욕망을 손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암양 새끼를 잡아서 왕에게 대접했다고 하지 않고 손님을 대접했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경우에는, 이 정욕이 손님같이 잠깐 왔다가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그를 지배했다.
성경은 솔로몬에 대해서 잠잠하지 않고, 여러 외국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비난한다. 그는 왕이 된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지혜를 구했는데, 열정적인 사랑으로 지혜를 얻은 후에는, 육적인 정욕으로 그 지혜를 잃어버린 것이다.(155-156)
제2장. 기독교의 교사가 수사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3. 그런데 수사 기술은 진리나 거짓을 주장하는데 효과가 있으므로 진리를 옹호하는 사람이 대표하는 진리가 아무 무장도 없이 거짓과 대립하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예컨대, 거짓을 사람들에게 믿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호의적인 것으로 만들며, 귀를 기울여 배우게 만들도록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을 알고, 진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술을 모르는 것인가? 전자는 그 거짓을 간단 명료하고 그럴 듯하게 말하는데, 후자는 듣기에 지루하고 알아듣기 어렵고 믿기에 쉽지 않은 모양으로 말하라는 것인가? 전자는 진리에 반대하기 위해서 궤변적인 논법을 동원하는데, 후자는 진리를 옹호할 줄도 모르고 거짓을 논박할 줄 몰라도 좋은가?
전자는 그 그릇된 의견을 청중에게 불어넣으면서, 그 힘찬 언변으로 그들의 마음을 흔들며 녹이며 활기를 주며 흥분하게 만드는데, 진리를 옹호하는 후자는 느리고 무뚝뚝하고 졸리게 해도 좋은가? 어떤 미련한 사람이 이것을 지혜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언변은 양쪽으로 유효하며, 그른 것과 바른 것을 모두 주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므로, 무슨 까닭에 진리 편에 선 착한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가? 한쪽에서 악한 자들은 웅변술을 이용해서 악하고 무가치한 주장이 이기게 하며, 불법과 오류를 퍼뜨리고 있다.
제4장. 기독교 교사의 의무
6. 성경을 해석하며 가르치는 사람, 진정한 믿음을 옹호하며 오류에 반대하는 사람은 바른 것을 가르치는 동시에 그른 것을 논박하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의무다. 그리고 이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적대적인 사람의 마음을 달래며, 무관심한사람의 열성을 일으키며, 무식한 사람들에게 현재 있는 일과 장차 있을 일을 알려줘야 한다. 그러나 청중이 일단 우호적이며 주의하게 되며 배울 용의가 있게 되면, 그들이 이미 그런 상태든지 또는 자기가 그렇게 유도했든지, 다음에 할 일을 때에 따라 적합하게 수행해야 한다. 청중이 배을 필요가 있을 때에는 문제의 내용을 충분히 이야기해 들려줘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의심스러운 점을 밝히려면 추리와 증명이 필요하다. 만일 청중이 배우는 것보다 격려를 받을 필요가 있으면, 그래서 이미 아는 일을 열심히 실천하며 그 인정하는 진리를 달갑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말에 힘을 더 주어야 한다. 호소와 비난, 권고와 책망, 그 밖에 감정을 격동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7. 언변을 통해서 해석과 교훈을 할 때에는 내가 말한 방법들을 거의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사용한다.
제5장. 기독교 교사에게는 웅변보다 지혜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을 어떤 사람은 거칠고 쑥스럽고 무뚝뚝하게 쓰며, 어떤 사람은 날카롭고 단아하고 활기있게 쓰므로, 성경을 해석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토론하며 주장할 때에 언변보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언변도 좋으면 청중에게 더 많은 유익을 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유창한 언변으로 무의미한 말을 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더군다나 들을 가치 없는 말을 청중이 기뻐하며, 언변이 좋은 사람이 하는 말은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더욱 경계해야 한다. 웅변술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런 의견을 말한다. “웅변이 없는 지혜는 국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지혜가 없는 웅변은 전적으로 해를 주며 도움을 주는 일은 절대로 없다.”
웅변술을 가르친 사람들은 빛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약 1:17) 참 진리, 즉 하늘 지혜를 알지 못했으면서도 사실을 관찰하고 응변술에 관한 그 저서에서 이와 같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이 더 높은 지혜를 받아 섬기는 우리는 더욱 그렇게 느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에 대한 지혜가 얼마나 전진했느냐 하는 데 따라 그 사람이 말하는 지혜의 정도도 달라진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기억하라는 뜻이 아니라 바르게 이해하며 뜻을 주의깊게 탐구하라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읽고 기억도 하지만, 뜻을 알려는 성의가 없다. 말씀을 기억한 것은 비교적 적을지라도 마음의 눈으로 성경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가지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다. 그는 성경 말씀을 언제든지 암송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뜻도 바르게 깨닫고 있다.
8. 그런데 언변이 없으면서도 지혜롭게 말해야 할 사람은 특히 성경 말씀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기가 하는 말이 빈약한 줄을 알수록 풍부한 성경에서 말씀을 얻어와야 하며 자기가 한 말을 성경 말씀으로 증명해야 한다.
자기 말을 할 때에는 작고 약한 그가 위인들이 확인해 주는 증언으로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의 말솜씨로 청중을 기쁘게 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하는 증명은 기쁘게 한다. 지혜와 언변을 겸하면 더 도움을 줄 것이므로 지혜를 말할 뿐 아니라 언변도 좋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수사학 교사들에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웅변가들의 연설을 읽거나 들으며 또 모방해서 연습하라고 권하겠다. 특히 웅변일 뿐 아니라 지혜 있게 말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에게 가라고 나는 권고한다.
웅변가의 말은 듣기에 즐겁고, 지혜 있는 사람의 말은 유익하다. 성경에도 많은 웅변가라고 하지 않고 "많은 현자(賢者)는 세상의 구원"이라고 했다(지혜서 6:24). 맛이 쓰더라도 유익한 것이면 삼켜야 할 때가 많은 것과 같이, 달더라도 해로운 것은 언제든지 피해야 한다. 그러나 달고도 유익한 것과 유익하고도 단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무엇인가? 달게 만들수록 그것은 유익한 도움을 더욱 많이 줄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저술가들 중에는 성경을 지혜롭게 설명할 뿐 아니라, 웅변적으로 해설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글을 읽을 열성과 여가가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제6장, 성경 기자들은 웅변과 지혜를 겸비했다
9.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들이 쓴 글이 우리의 정경이 되었고 이 정경에는 지극히 유익한 권위가 있지만, 혹은 이 저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현명하다고만 할 것인가 또는 웅변도 겸했다고 할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나의 동료들에게는 대답하기 어렵지 않다.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 본다면, 그들의 글은 비할 데 없이 지혜가 있을 뿐 아니라, 언변도 비할 데 없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감히 말한다. 이 저자들이 하는 말을 참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동시에 그들이 사용한 것보다 더 적합한 표현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모두 잘 안다.
웅변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청년들에게 더 적합한 것과 노년에 더 적합한 것이 서로 달라서, 말하는 사람의 처지에 맞지 않는 것은 웅변이라고 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최고의 권위를 가졌노라고 주장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며, 분명히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웅변이 따로 있다. 성경 기자들은 이런 웅변으로 말했고, 다른 종류의 웅변은 그들에게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성격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위에 있어서 헛되이 부푼 것이 아니라 공고한 장점이 있었으며, 그들의 웅변은 그들의 성격에 적합한 것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성격이 그들보다 떨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그들의 웅변이 나에게 그다지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내가 이해하는 때와 같은 수준이리라고 믿는다. 그뿐 아니라 성경의 구원의 말씀에 있는 모호한 점은 우리의 지성을 단련하기 위한 웅변술의 한 구성 요소였을 것이다. 즉, 지성으로 진리를 발견할 뿐 아니라, 지성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10. 우리의 성경 기자들보다 자기들의 말솜씨가 우수하다고 자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법이 장엄해서가 아니라 과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랑하는 웅변적인 힘과 미(美)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이 있으면 보여주고 싶다. 고마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장점들을 성경에 준비하셔서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며, 우리를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위에 있는 축복된 세계로 인도하려 하신다.
그러나 이교도인 웅변가나 시인들과 성경 저서들의 웅변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내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성경 저자들이 그 독특한 웅변술을 이용하는 방법에 더 경탄한다. 즉, 그들의 웅변술은 있거나 없거나 간에 현저하지 않다. 웅변술을 비난하거나 과시하는 것은 어느 쪽도 그들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변술을 피했다면 비난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요, 그것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면 과시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학자들이 웅변술을 발견하지 못하는 성경 구절들에서는 논의된 문제의 성격상, 그것을 표현하는 말은 일부러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떠오른 것 같이 생각된다. 마치 지혜가 집에서, 즉 지혜 있는 사람의 가슴에서 걸어나오고 웅변은 떨어질 수 없는 수행원과 같이 부르지 않아도 따라나선 것과 같다.(174-178)
제15장. 기독교의 교사는 설교를 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32.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사는 언제든지 공정하고 거룩하고 선한 일만을 말해야 하는 동시에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며 즐기며 순종하도록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이 목적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웅변적인 재능의 덕분이 아니라, 경건한 기도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는 말을 하기 전에 상대할 사람들과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입을 벌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목마른 영혼을 들어올려, 자기가 쏟아내려는 것을 마시며 나눠 주려는 것으로 자신이 우선 충만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에 관한 제목은 어느 것이든지 할 말과 말하는 방법이 많은 것이므로 어느 특정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말하며 청중이 무엇을 들어야하는지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이외에 누가 알겠는가? 또 우리와 우리의 말을 그 손에 쥐고 계신 분 이외에 누가 우리가 마땅히 해야하는 말을 올바른 방법으로 말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러므로 알기를 원하며 또 가르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르칠 일을 모두 배워야 하며, 또는 성직자로서 합당한 언변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말할 시간이 온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회상하는 것이 경건한 마음에 더 합당한 태도다: “어떻게 또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그러면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자의 손에 넘겨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즉, 무슨 까닭에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마음속에서도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제16장. 하나님이 진정한 교사를 만드시지만 사람의 지시도 무시하지 말라
33. 성령께서 사람들을 교사로 만드시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지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님 말씀에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기 때문이다(마 6:8).
사도 바울도 디모데와 디도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교사의 지위를 얻은 사람은 이 세 서신을 항상 눈앞에 두어야 한다. 디모데전서에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는 말씀이 있고(딤전 4:11), 이것들이 무엇인지는 그 앞에서 이미 말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라"는 말씀도 이 서신에 있지 않은가? (딤전 5:11). 디모데후서에는 "너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하지 않는가? (딤후 1:13). 거기에는 디모데에게 주는 명령이 있지 않은가?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같은 서신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는 말씀도 있다(딤후 4:2).
또 디도서에서도 사도는 감독인 사람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딛 1:9)고 말하지 않는가?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며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게 하라" 한다(딛 2:1-2),
같은 서신에 "너는 이것을 말하고 근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하는 말씀이 있다(2:15:3:1).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도는 성령의 역사로 사람들이 교사가 된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지시하고 있으니, 그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인가? 또는 성령을 주실 때에, 교사들까지도 사람이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없어지지 않지만,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라고 이해할 것인가? 그러므로 거룩한 자들이, 심지어 천사들이 우리를 돕더라도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일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그가 하나님에게서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바르게 배우지 못한다.
시편에 하나님을 향해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과 같다(시 143:10). 그래서 같은 사도는 제자인 디모데에게 선생으로서 말한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아느니라"(딤후 3:14). 하나님은 약의 도움이 없이도 병을 낫게 하시지만, 약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고치지. 그런 약을 우리가 인체에 사용할 때에, 하나님이 효력을 주시지 않으면 약은 아무 유익이 없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약을 쓰며, 의무적으로 약을 주는 사람을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이 사람이 도구가 되어 가르치고 도울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 도움을 유익하게 만드시지 않으면 그것은 배우는 사람의 영혼에 유익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복음을(갈 1:1) 사람에게 주실 수 있었다.(197-199)
제27장. 가르치는 말과 생활이 일치하는 교사는 가르침의 효과가 더 크다
59. 그러나 말에 설득력이 있으려면, 어떤 숭고한 웅변보다도 연사의 생활이 더 큰 영향을 준다. 지혜롭고 웅변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그 생활이 악하면,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많을 수 있지만, 그 자신의 영혼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집회서 37:21). 그래서 사도도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라고 한다(민 1:18). 그리스도는 진리시지만, 진실하지 못한 자가 진리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바꿔 말하면, 악하고 거짓된 자가 바르고 참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전한다. 그러나 참 신자들은 사람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음성을 따른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다(마 23:3). 그래서 말하는 자들 자신은 무익한 생활을 하건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유익을 얻는다. 그들은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지만, 건전한 교리에 근거를 둔 교회의 권위 있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감히 자기 생각을 교리로서 가르치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종류의 인간들에 대해서 내가 방금 인용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하셨다(마 23:2). 그들은 자기 자리가 아닌 모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악한 행위를 하면서도 부득이 선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면에서는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갔지만, 그 차지한 자리 때문에 그들 자신의 주장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60.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행하지 않는 일을 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 그들이 만일 그 전하는 대로 생활한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자신의 악한 생활을 변명하기 위해서 교사들의 언행을 비교하며, 마음속으로 심지어 노골적으로 "왜 당신은 내게 명하는 대로 행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교사의 말에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며, 전하는 자를 멸시함으로써 전해지는 내용까지 멸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 다음에, 멸시를 피할 방법을 즉시 첨가해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한다(딤전 4:12).
제28장. 진실이 표현보다 더 중요하다. 말다툼이란 무엇인가?
61. 여기서 묘사한 것과 같은 교사는 듣는 사람의 순종을 확보하기 위해서 부드럽고 유려한 어조로 말할 뿐 아니라 격렬한 어조로 말하더라도 체면을 잃는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생활이 그를 보호해서 멸시를 받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정한 생활을 견지하는 동시에 세평도 좋도록 노력한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한 일에 조심하며(고후 8:21),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사랑한다.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에도 말이 아니라 말하는 내용으로 그들을 기쁘게 한다. 사실대로 말할수록 잘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교사는 자기가 하는 말에 지배될 것이 아니라 말을 지배해야 된다고 믿는다.
이런 뜻으로 사도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고전 1:17)역시 같은 뜻으로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너는 그들로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고 한다(딤후 2:14). 그런데 이것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거역할 때에 우리가 진리를 변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가 감독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한 것은 어디 있겠는가?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1:9).
말다툼이라는 것은 진리로 오류를 극복하려고 조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표현보다 자기의 표현이 선택되게 하려고 애쓴다는 뜻이다. 말다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조용한 방식이나 유려하고 격렬한 방식을 쓰더라도, 진실을 분명하고 즐겁고 효과 있게 말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사랑은 교훈의 목적이며(딤전 1:5)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지만 (롬 13:10) 그 사랑도 사랑하는 대상이 진실되지 못하고 거짓인 때에는 바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체의 모양은 아름다워도 마음 상태가 나쁜 사람은 몸이 병든 사람보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더 괴로운 존재인 것과 같이,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은 웅변가일수록 더욱 가련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웅변과 지혜를 겸비했다는 것은 적합한 말로 진실을 표현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진술체로 적합한 말을 사용하며, 유려체로 우아한 말을 사용하며, 숭엄체로 강력한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웅변과 지혜를 겸비할 수 없는 사람은 지혜 없는 웅변보다 웅변이 없는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225-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