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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사 이순신이 원수의 진중(陣中)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주의 서로를 거쳐 구례로 항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터에 정백해 있는 것을 보고는 곡성을 거쳐 서해로 향해 갔다. 이때 배설이 배 12척으로 퇴각하여 진도의 벽파정 밑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그리로 달려갔다.
○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석주(石柱)로부터 퇴각하여 본성으로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피하여 남원으로 갔다.
7일 적병이 구례에 들어왔다. 이때 심유경이 요동에 있다가 일이 급한 것을 듣고 관하의 우파총(牛把摠)으로 하여금 집에서 부리는 병정 5명과 통사 1명을 거느리고 행장의 진으로 보내자, 이날 우파총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 본부에서 군관 하원서(河黿瑞)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여 구례 성 밖에 이르니, 적병이 우루루 나오다가 심유경의 성명을 쓴 표기(標旗)를 보고는 그쳤다. 이때 의홍 등 여러 추장(酋長)이 악양에 있으므로, 파총이 악양으로 가서 여러 추장을 보고 심유경의 뜻으로써 물러가라고 타이르니, 행장 등이 말하기를, “관백이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반드시 전라도를 함락시키라.’ 하니, 사세가 중지할 수 없소.” 하고, 금ㆍ는ㆍ칼을 보내었다. 우파총이 이에 돌아와서 서울로 향하였다. 의홍 등이 구례에 이르니 적의 선봉이 남원 지경에 들어가 분탕(焚蕩)질하였다. 양원(楊元)이 성중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원천(原川)으로 향하는데, 정기원(鄭期遠)ㆍ임현(任鉉)이 따랐다. 숙성령(宿星嶺)에 이르러 군사를 사열하고 돌아왔는데, 이날 밤에 성중에 있던 우리 군사는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 청정 등 적이 이미 창녕ㆍ초계ㆍ합천ㆍ삼가를 지났는데, 지나간 각 고을은 불모지가 되어 남긴 것이 없었다.
8일 양원이 군사를 나누어 성을 지키는데, 성 위에 8백 명이요, 토장(土墻) 안에 1천 2백 명이고, 유군(遊軍)이 1천 명이었다. 우리 나라 각 진에 가정(家丁)을 나누어 보내 들어와 함께 지키기를 독려하였다. 이날 운봉 현감의 급한 보고 가운데는, “영남 좌우도의 적이 이미 거창ㆍ산음 등지에 이르러 모두 분탕질하였습니다. 운운.” 하였다.
○ 이때 본도의 피난민이 혹은 경상좌도로 들어가고 산중으로 들어간 사람도 또한 많았다.
○ 문안사(問安使) 오응정(吳應井)을 남원 총병부에 보내고 바로 오응정을 본도 방어사로 임명하였는데, 성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 이광정(李光庭)이 남원성 안에 머물러 있다가 이날 남문으로 향하여 나오면서, “우리 나라 군사가 산성을 맡아 지킨다면 직책은 비록 다르나 나도 또한 죽음으로써 함께 지키려 하였는데, 산성이 이미 파하였으니 여기에 있어야 무슨 소용이랴.” 하고, 주포(周浦)에 이르러 김수(金晬)와 함께 향교로 가서 변란을 대기하였다.
9일 흉악한 적이 둔산령(屯山嶺)을 넘어서 산안의 여러 마을을 불질렀다.
○ 운봉 현감의 급한 보고에, “적병이 진주ㆍ구례로부터 산에 들어와 수색하는 놈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이때 내가 부사의 서기(書記)로 성중에 있으면서 가족을 먼저 산중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지금 흉악한 적이 연일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는 충성할 마음도 비록 간절하나 노모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부득이 동문으로부터 나와서 집에 와보니 동리는 텅 비었고 다만 두어 명 하인이 산에 숨어 내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고, 처자는 영(嶺)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함께 상룡추(上龍湫) 가에 있는 산막에 들어갔다. 내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조모에게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외조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 임금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전교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다. 이때에 체찰사와 도원수가 거느린 군사들이 이미 다 흩어져 떠났고, 단기(單騎)로 말을 달려 왕명에 부복하였다.
10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퇴각하여 남원성 안으로 들어갔다.
○ 양원이 적병이 들어와 점거할까 염려하여 부사 임현(任鉉)으로 하여금 산성 안에 있는 가옥을 모두 불사르게 하고 본성 밖의 인가도 불태우게 하였다.
○ 김수(金晬)가 이광정(李光庭)과 함께 향교에서 출발하여 부(府)의 북촌(北村)으로 퇴각하였다가 서울로 향하였다.
11일 오후에 흉악한 적이 숙성령(宿星嶺)을 넘어서 혹은 10여 명 혹은 20여 명씩 끊임없이 잇따라 내려 보내 원천(原川)의 촌락을 정탐하고, 밤에는 성밑에 들어와서 엿보고 돌아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넘어 원천(原川) 원평(院坪)에 주둔하고 선봉이 이미 요천(蓼川) 가에 진출하였는데, 동남 4ㆍ50리 안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리우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였다. 나는 아직 왜놈을 직접 겪어보지 못하였으므로 용추(龍湫)한 고을은 군사를 피할 수 있다 하여 동형(洞兄) 진사 정사달(丁士澾)과 양덕해(梁德海) 형과 상의하였다. 적이 이리로 오리라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에 정진사는 파근원(波根源) 아래로 들어가고, 양형은 나를 따라서 상룡추(上龍湫) 가로 들어갔더니, 이날 밤에 본촌(本村) 사람이 적에게 잡혀 결박되었다가 도망해 왔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병화(兵禍)의 참혹한 것을 알았으며, 여기에는 잠깐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곧 양형과 더불어 가솔 80여명을 이끌고 무산(毋山)쪽으로 달아나 장차 멀리 가고자 하였더니, 팔량현(八良峴)에서 패한 병사가 달려와서 말하기를, “영남의 적이 이미 산음ㆍ안음에 이르러 조만간에 여기에 도착할 것이다.” 하므로, 양형과 더불어 노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을 걱정하였더니, 운봉현 선비 주난수(周蘭秀)란 사람이 지리산 서쪽 기슭으로부터 달려와서 큰소리로 급히 외치기를, “당신들은 적병이 이미 가까이 닥친 것을 모르오? 대방(帶方)의 연기와 불꽃은 하늘에 치솟고, 영남의 포성은 땅을 진동하니, 이 깊은 산 험한 골짜기를 잃으면 중도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우리는 이미 큰 산에 막을 쳐 놓았으니, 당신들은 멀다 여기지 말고 한 곳에 함께 머물면서 같이 죽기로 마음을 맹세하면, 산을 수색하는 자질구레한 도적은 걱정할 것이 없소.” 하였다. 나는 양형에게 말하기를, “이 말도 역시 이치가 있다. 지금 만약 거기에 갔다가 화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주군(周君) 때문이요, 가족을 보존하고 생명을 건진다 해도 그것도 주군 때문이다.” 하고, 곧 망랑현(望閬峴)에 올라가 밤을 지내었다.
○ 병사 이복남(李福男)ㆍ조방장 김경로(金敬老)ㆍ산성 별장 신호(申浩) 등이 모두 남원성 안에 들어갔다. 처음에 이복남이 순천으로부터 옥과현에 이르니 현감 홍요좌(洪堯佐)가 창고를 다 불지르고 단신으로 변란을 대기하고 있었다. 이복남의 거느린 군사도 또한 거의 다 흩어지고 다만 수하의 편비(褊裨) 50여 명만이 있었다. 남원 서창(西倉)으로 가서 성중으로 향하는데, 김경로가 금성(金城)으로부터 오다가 시전(柹田)에서 이복남을 만났다. 이복남이 기뻐하며 손을 잡고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진군하여 비홍령(飛鴻嶺)을 넘어서니 적병이 이미 성 밑에 박두하였다. 이복남이 바라보고 눈을 부릅뜨고 손에 침 뱉고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급난(急難)을 위해 일할 날이 이 날이 아니냐! 국가의 홍은(洪恩)에 보답할 날이 이 날이 아니냐! 병졸은 분발함으로 말미암아 날래지고, 군사는 곧음으로써 씩씩하나니,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어느 겨를에 따지겠느냐?” 하고, 크게 나팔과 호각을 불며 북을 치며 서서히 행군하여 만복사(萬福寺) 앞 대로를 따라 행군하여 남문을 거쳐 조용하게 들어갔다. 외촌(外村)에서 불지르고 노략질하던 적들이 불을 멈추고 물러서서 손가락질하면서 구경하고, 성 밑에 있던 적들은 군대를 머물러 움직이지 아니하고 놀라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러 왜적이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힐문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당돌함이 이 같으냐?” 하므로, “본도의 병사 이아무개이다.” 하였더니, 그를 장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13일 적병이 크게 성밑으로 진군하여 오니 산에 가득 차고 들을 뒤덮어 물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 선봉 행장과 의지 등이 먼저 방암봉(訪岩峯)에 이르러 진을 치고 큰 기를 세우고 포를 터뜨리며 호각을 부니 여러 괴수들이 이것을 신호 삼아 전진하여 요천(蓼川) 가에 이르러 세 길로 나누어 포위하였다. 1운(運 군대 편성의 단위 4대)은 방천(防川)에서 선원(禪院)을 거쳐 향교 앞까지 뻗쳐 장성교(長城橋)를 지나 서문 밖에 이르러 진영을 짜고, 1운은 칠장(漆場)으로부터 시내를 가로질러 덕암(德岩) 밑의 구지소(舊紙所) 앞을 지나 다시 내를 건너 율장(栗場)으로 뻗어 대무천(大毋泉)을 지나 서문 밖의 적과 서로 이어 진영을 짜니, 연이어 빙 둘러서 달무리처럼 백겹이나 에워쌌다. 유격병(遊擊兵)은 바로 평탄한 길을 따라 동문으로 항하여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왔다 물러났다 하며 도전하고, 왜장은 혹은 향교산(鄕校山)ㆍ기린산(麒麟山)에 올라 가고, 혹은 덕암봉(德嵓峯)ㆍ빙고봉(氷庫峯)으로 올라가 군막을 지어 진을 치고, 혹은 진중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이때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에 있었고, 천총 장표(蔣表)는 남문에 있었고, 모승선(毛承先)은 서문에 있었고, 병사 이복남은 북문에 있으면서 군대를 나누어 성첩을 지켰다. 양원이 주라를 불며 포를 쏘게 하고, 성중에 전령하여 군기(軍器)를 함부로 허비함을 엄하게 금했다. 오시(午時)에 적 5명이 곧장 동문 밖으로 들어와 돌다리 위에 벌려서자 양원이 몰래 문을 나가 외성(外城) 안에 서서 장사를 뽑아 적을 쏘게 하였다. 우리 나라의 능한 포수 부장(部將) 김익룡(金翼龍)과 겸사복(兼司僕) 양득(梁得)과 별패진(別牌陣) 정금(鄭金) 등이 일시에 총을 쏘니, 세 놈이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 놈들이 시체를 운반해 물러갔다. 미시(未時)에 거의 수만 명에 이르는 적병이 칠장(漆場)ㆍ선원(禪院)으로부터 고함치며 전진하여 성 바깥 백 보 지점에 벌려 서서 연달아 총을 쏘며 소리 높여 크게 고함쳤다. 성중에서 잇달아 진천뢰(震天雷)를 발사하여 적병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자 적은 도로 물러갔다. 양원(楊元)은 적이 목숨을 헤아리지 않고 백주에 감히 전진하여 오니 밤에 반드시 난입할 것이라 예측하여, 마름쇠를 참호 밖에다 많이 박고 못판을 만들어 몰래 다리에 묻었다. 이날 밤에 양원이 친히 문밖에 있으면서 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밤 2경(二更)이 되어 잠시 발자국 소리가 있으므로 고개를 쳐들고 이들을 기다리니 과연 세 적병이 벌써 못판을 제거하고 다리를 건너오려 하므로 명 나라 군사 수명이 창을 들고 출전하여 그들을 베었다. 양원이 즉각 4개 문의 다리를 철거시켰다. 사면의 적진에서는 아침까지 불을 놓고, 밤새도록 쉬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포를 쏘아댔다. 그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니 백 리 안이 연기와 불길로 하늘이 뒤덮혔다. 이때 본도 감사 박홍로(朴弘老)가 이미 바뀌고 황신(黃愼)이 그를 대신하여 감사가 되었으나, 변산(邊山)으로 달아나 왜병을 피하고 있었다. 도사(都事) 김순명(金順命)은 군대가 무너진 뒤에 홀로 금성(金城)에 있다가 총부(總府)의 징원차관(徵援差官)과 같이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가다 적성진(赤城津)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달아났다.
14일 적병이 숙성(宿星)ㆍ원천(原川)으로부터 산으로 흩어져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 펴듯 좌우익을 펴고 몰려오는 진법의 하나)을 벌리고 내려오는데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성밖에 와서 사면으로 나누어 에워싸고 토목(土木)의 역사를 전보다 더욱 급하게 서두르며 비운장제(飛雲長梯)를 많이 만들어 성에 오르는 기구로 삼고, 대무천(大毋泉) 모퉁이에다 풀ㆍ짚단ㆍ흙ㆍ돌을 운반하여 참호를 메워 길을 내고 그 밖에도 장대를 가로 매었는데 그것이 거의 백여 보에 이르렀다. 민가의 판자를 가져다가 장대에 기대어 죽 늘어 세우고, 또 성밖의 장벽을 뚫어 모두 총쏘는 곳으로 삼았다. 또 높은 사다리를 삽교(鍤橋) 모퉁이에다 매어 성안을 굽어보면서 무수한 탄환을 쏘아대니, 이 성의 안팎을 지키던 명 나라 사병들이 일시에 모두 죽어버려 동남 모퉁이의 성첩이 다 비게 되었다. 정오에 적병이 또 칠전(漆田)으로부터 고함치며 돌진하면서 일시에 총을 쏘아대니, 탄환이 우르릉거리는 뇌성과 쏟아지는 우박 같아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서문의 왜적은 수송용 차에다 만복사(萬福寺) 절 이름. 서문밖 2리 앞에 있는데 5백 나한(五百羅漢)이 있었다. 의 사천왕(四天王)을 싣고 와 성밖을 돌며 시위하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 양원은 말하기를, “적병은 연일 도전하고 아군은 움츠려들어 약세를 적에게 보인 것이 진실로 적지 않았으니, 이제 군대를 내보내 공격해야 한다.” 하자, 중군은 말하기를, “이것은 안전한 계책이 아니니 성을 굳게 지켜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듣지 아니하고 곧 천여 명의 군병을 모아 문을 열고 나가 싸우게 하니, 적병은 속임수로 물러갔다. 아군이 돌다리 밖까지 따라가자 적병은 문밖으로부터 상하로 잠복하였다가 기어서 앞으로 나와 포위하고 무찔러 죽일 심산이었다. 양원이 급히 주라를 불게 하고 초요기(招搖旗)를 여러 차례 펄럭이니 성밖의 군사들이 도로 들어왔는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수삼 명이었다. 날이 저물자 군사를 거두어 굳게 지켰다. 이날 적병 50여 명이 운봉현(雲峯縣)에 가 분탕질을 치고 산을 뒤져 가면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15일 양원이 동문의 성위에 있으면서 주라를 몇 차례 불게 하였으나 성중은 고요하므로 관가(管家 하인)를 시켜 성위로 나가서 크게 두어 번 소리치게 하니, 왜놈 5명이 달려서 동문 밖 돌다리까지 와 꿇어앉아 전갈이 있기를 청하였다. 양원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몇 마디 말을 설파하게 하니, 다섯 왜놈이 방암봉(訪岩峯)으로 달려 돌아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 또한 몇 마디 말로 보고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양원이 적병에게 서로 사자(使者)를 내왕하게 하자고 말하자, 명병(明兵)을 먼저 보내라고 회보하였다.”고 말하나, 자세하지 않다. 양원이 그 자리에서 관가(管家) 두 사람을 불러 이야기하여 내보내니, 왜놈의 사자가 명병을 대동하고 방암봉을 향하여 갔다. 적의 장수와 만나 일을 의논하였는데, 행장(行長)은 음식을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저녁 때에 왜장의 사자 5명이 말을 타고 와서 곧장 동문에 이르니, 양원이 통사를 시켜 왜사(倭使)를 대동하여 남문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양원이 용성관(龍城館)에 들어가 앉아 왜사를 만나 의논하니, 왜사는 행장의 말이라면서, “빨리 성을 비기 바랍니다.” 하였다. 양원이 말하기를, “내가 15세부터 장수가 되어 천하를 횡행하면서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소. 이제 정병 10만 명으로 이 성을 지키는데, 퇴각하라는 명령은 없었소.” 하니, 왜사들이 도로 남문으로 나아갔다. 왜사가 또 전언하기를, “천여 명의 잔졸을 가지고 어떻게 백만의 군대를 당할 것입니까? 천장(天將)께서는 조선에 무슨 은혜가 있어 후회할 일을 남기려 하시오?” 하였다. 양원이 몇 마디 말을 일러 보냈다. 여러 날 포위당하였는데 적의 형세는 더욱 성하여 호호탕탕하고 위급하기가 바람탄 불과 빠른 우레 같았다. 점차 성에 다가와 더욱 공세를 퍼부우니 우리 형세는 다급하여 날마다 점점 외롭고 위태해 갔다. 성 내외의 명 나라 병사들이 서로 부르짖기 시작하고, 우리 나라의 남녀들도 동분서주하며 울었다. 적이 이것을 알고 침공을 배나 더했다. 이날 밤에 큰비가 오자 적병은 어둠을 틈타 성을 공격하였는데, 우리 군대와 중국 군대는 맞아 싸우느라 잠자고 밥먹을 틈도 없었다. 이때 심산궁곡까지도 왜적의 발굽에 거의 짓밟혔고, 운봉(雲峯)ㆍ주성(周性)의 무리들도 모두 약탈을 당했다. 나와 양형(梁兄) 및 백암(白嵓) 이공직(李公直)의 부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의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 황류동(黃流洞)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와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三岐)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 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날마다 고성(孤城)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 무리처럼 에워싸 위급하였다. 포성은 하늘을 진동하고, 불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저 관군들이 힘을 다하여 지키고 방어하는 고생과 흉한 왜적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형상을 생각하니 가슴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음과 눈물이 함께 나오고, 한숨 짓고 탄식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만일 1개 여단의 군대가 내 손에 있다면, 한 번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나아가 성원하여 아군이 갈망하는 마음을 풀어 주고, 저 왜적들의 집어 삼킬 듯한 기세를 꺾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만 애석하다! 수양(睢陽) 한 성이 함락에 임하여서는 장순(張巡)의 한쪽 손으로는 공효를 이룰 수 없었고, 하란(賀蘭)의 주둔병이 이미 흩어지니 제운(霽雲)의 혈성(血誠)도 무엇에 쓰겠소. 뜻은 있으나 속수무책이니 다만 통분할 뿐이오.” 하니, 모든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 청정 등의 군사가 함양(咸陽)에 이르렀는데, 선봉 수천 명이 진군하여 황석성(黃石城) 밑에 임박하여 통사(通事)를 시켜 개산(介山)을 불러 말하기를, “너의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라.” 하였다. 백사림(白士霖)이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왜적이 말하기를, “비록 백 명의 개산을 죽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적병이 고함쳐 말하기를, “성을 비어 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 하니 백사림이 줄을 타고 성에서 매달려 내려가고 군사는 무너져 달아났다. 적이 입성하여 마구 죽이니,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ㆍ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 등은 가족과 함께 죽었으며, 근처 첩입관(疊入官)과 장졸 등 죽은 자가 5백여 명에 달했다. 개산은 김해(金海) 사람이다. 아버지가 임진란 초부터 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계책을 도왔다.
16일 흉적(兇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총병(總兵)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摠) 장표(蔣表)ㆍ모승선(毛承先),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부사(府使) 임현(任鉉), 통판(通判) 이덕회(李德恢),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元春) 등이 다 남원에서 죽었다. 양원이 50여 기(騎)로써 서문으로 나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이날 적의 괴수 등이 양원이 성을 나가도록 재촉하였고, 양원도 또한 결국 함락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서 군사를 버리고 갈 계획을 하자, 성중의 사람들이 법석대며 두려워하여 곡성이 우레 같았다. 적병이 성 밑에 육박하며 더욱 급히 공격하여 이경에 이르러 남문으로 마구 몰려들어 어떤 사람은 대모천(大母泉) 모퉁이로 해서 성에 올라왔다 하는데, 옳지 않다. 어둠을 틈타 마구 찌르니 명병과 우리 나라 장사들이 달려가 북문 안에 몰렸다. 적병이 칼을 휘두르며 따라와 죽이니 양군이 북성 안에서 모두 죽었다. 성중에서 전후하여 죽은 자가 거의 5ㆍ60명에 이르렀다. 왜적은 성 안팎의 관사와 민가를 다 불살라 버렸다. 양원이 접반사를 살리고자 그가 타지 않는 남은 말에 태워 같이 나왔다. 정기원은 말타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누차 떨어져 잘 따라오지 못했다. 당초에 마귀(麻貴)가 여러 장수에게 분부하여 말하기를, “혹시 위급한 사태가 있게 되면 남원은 전주에 알리고, 전주는 공주에 알리고, 공주는 서울에 알려 차례차례로 달려가 응원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진우충(陳愚衷)이 전주에 있었으나 와서 응원하지 아니하고 또 급함을 알리지도 아니하여 대군이 몰사하게 되었다. 이날 밤에 나는 양형(梁兄)더러 말하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사람들이 살아날 길이 없소.” 하고, 서로 슬퍼하며 탄식했다. 양형이 말하기를, “성이 함락된 뒤에 적은 반드시 대거 산을 수색할 것이요, 그대는 모름지기 노복을 인솔하고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운반하여다 산에 머무를 밑천을 장만하시오.” 하여, 나는 곧 하인 10여 명을 인솔하고 문현(門峴)에 올라가 망을 보았다. 이날은 바로 청정(淸正)의 군대가 함양으로부터 운봉으로 넘어 들어갈 때이다. 황산(荒山) 상하에는 적병이 가득 찼고, 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보니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 즉시로 양형과 이공직 등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을 건너 은신암(隱身庵)의 옛터로 향로봉의 북쪽기슭 아래 있다.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17일 행장(行長)의 선봉은 임실(任實)을 지나 분탕질하며 도둑질하고, 청정의 군대는 모두 운봉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전주로 향하자, 진우충은 성을 버리고 도망쳐 달아났다. 청정의 군사가 운봉으로부터 두 길로 나누어 남원으로 향하였는데, 1대는 바로 안신원(安信院)으로 향하고, 또 1대는 행진하여 구등굴(九等窟)을 거쳤다. 왜적 5명이 원주(原州)로부터 구등굴에 이르러 대화하고, 양로(兩路)의 군대가 모두 물러나 운봉으로 돌아가 며칠을 머무르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수색하다가, 혹은 사찰에 유숙하고, 혹은 산꼭대기에 모여서 잤는데,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9일 적병이 전주로 들어와 모두 분탕하여 없애고 성과 참호를 헐어버렸다.
20일 청정의 군대는 운봉으로부터 장수로 향하여 남원의 동천(東川)을 지나 번암(番岩)ㆍ철천(銕川) 등지에 머무르면서 차산(差山)에 가 대수색을 벌였다. 근읍의 사람들은 이 산이 군읍과 거리가 약간 멀고, 또 적병이 서울로 향하는 직로가 아니라 하여 피해 들어간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씨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이튿날 적병은 장수(長水)와 진안(鎭安)을 지나 그대로 전주로 향하여 갔는데, 거치는 촌락과 산골짝에서 분탕질하고 해치고 노략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주에 이르러 양정포(良正浦)에 주둔하고, 행장 등의 군대와 같이 시장을 열고 남원에서 얻은 중국 물건을 뽐내 보였다. 적의 괴수들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임진년 싸움에 8도가 모두 함락되었으나 조선이 이때까지 부지(扶持)해 온 것은 수로(水路)로 서로 통하여 호서ㆍ호남 양호의 힘이 서로(西路)에 미친 소치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군대를 수륙으로 나누어서 응원하는 길을 막는 것만 같음이 없다.” 하고, 그날로 군사를 나누어 청정 등은 경기로 직행하고, 수가(秀家)와 행장(行長) 등은 회군하여 도로 내려가고, 의홍 등의 적은 나누어 우도로 내려가 열읍(列邑)에 주둔했다.
○ 적의 경보가 대단히 급하기 때문에 중전(中殿)과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 관서(關西)의 강계(江界)길로 향했다.
22일 적병 16명이 몰래 은신암의 산막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살해하므로 내가 그들을 격파하고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과 같이 월락동(月落洞)으로 넘어 들어가 머물러 있었다.
30일 수가와 행장 등의 군대가 임실로부터 남원을 지나 원천(原川) 원평(院坪)에 진을 치고 산골짜기를 대수색하며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9월 1일 행장 등의 적이 구례로 해서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 결진하여 성을 쌓고 막을 치고, 본부의 사람들에게 패(牌)를 주어 속여서 꼬여 소집하고, 군대를 나누어 본성과 광양성(光陽城)을 지키고, 사방으로 군대를 흩어 외촌에 주둔하며, 항복하여 붙은 사람과 같이 집결하여 한 마을을 만들고, 벼와 곡식을 수확하여 식량을 준비했다. 패를 받은 사람은 각각 쌀 3말씩을 납부했다. 수가는 섬진강(蟾津江)으로 해서 한산도(閑山島)에 유둔했다.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명량구(鳴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2일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 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煙象山)으로 내려가고,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을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鄭嶺城)에 도달하여 잠깐 쉬고, 아침에 서운암(瑞雲庵) 터에 내려가 매복하여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올라왔던 산적이 모두 내려갔다. 수색하는 왜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월운령(月雲嶺)을 달려 지나가 노숙(露宿)하고, 아침에 파근산(波根山)에 올라가 정찰하다가 처음으로 한 동리 사람을 만나 왜적의 형세와 고향 소식을 들었다. 그대로 숲속에 숨었다가 저녁 때에 경덕사(敬德寺)로 내려가 유숙했다. 인솔한 늙은이와 어린이도 아직까지 모두 탈이 없었다. 보는 사람마다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본촌 사람으로 왜적에게 죽은 자가 백여 명에 이르렀고, 유아들을 모두 내버렸다.” 했다. 며칠을 머물면서 왜적의 형세를 염탐하여 보고 노복을 본촌에 보내 벼를 베어 오게 하여 비로소 조석 끼니를 잇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사로운 일은 기록할 만한 것이 못 되나 이런 사실을 예로 들면 다른 일을 알기 때문이다.
6일 명 나라 장수 부총병(副摠兵) 해생(解生) 등이 적병을 직산(稷山)의 금오평(金烏坪)에서 대패시키니 청정 등은 쫓겨 도망쳐 영남으로 내려갔다. 처음 양호(楊鎬)가 평양에 있으면서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다랐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달려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부교(浮橋)를 동작진(銅雀津)에 가설하게 하고, 먼저 부총병 해생, 참장(叅將) 양등산(楊登山), 유격 파새(擺賽)ㆍ파귀(頗貴) 등의 군사 수만 명을 보내 적을 호서(湖西)의 땅에서 맞이하였다. 해생 등이 금오평(金烏坪)에 이르러 군사를 쓰기에 편리한 곳을 둘러보고, 군대를 3협(三協)으로 나누어 좌우로 엄습할 계책을 했다. 진우충은 전주로부터 도망하였는데, 적병이 뒤를 따라와 벌써 금강(錦江)을 건넜다. 임금이 밤낮으로 울면서 경리(經理)에게 호소하니 경리는 위안시키며 말하기를, “혹시 관군(官軍)이 불리하더라도 주군(主君)의 궁권(宮眷)들은 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고, 곧 마귀와 같이 대군을 영솔하고 길을 떠나 수원에 이르러 목채(木寨)를 치고, 갈원(葛院)에 군대를 보내어 개천(介川)의 상하에다 매복시켜 후원부대로 삼았다. 적병이 공주(公州)ㆍ천안(天安)으로부터 바로 서울로 향하여 5일 동틀 무렵에 전추참(田秋站)을 경유하여 홍경원(洪慶院)으로 향하니, 선봉이 벌써 금오평에 이르렀다. 명병의 좌협(左協)은 유포(柳浦)로 나가고 우협(右協)은 영통(靈通)으로 출발하여 대군이 곧장 평탄한 길을 따라갔다. 바라 소리가 세 번 일어나니 함성이 사방에서 어울렸다. 연달아 대포를 쏘고, 모든 깃발이 일제히 흔들리고, 철마(鐵馬)들이 구름처럼 떼지어 날뛰고, 창검이 떨쳐 나가는 듯하였다. 달려가 돌입하면서 마구 무찌르니 적의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하루에 6차례나 맞붙어 싸우니 왜적의 형세가 산란해졌다. 날이 저물어서 각각 군사를 거두어 둔취(屯聚)하였다. 청정은 밤에 여러 군대에 명령하여 내일 아침에 죽음으로써 싸울 계책을 결정토록 했다. 해생은 비밀리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오늘 왜적의 형세를 보니 내일에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심하고 물러갔으니 부디 죽음을 걸고 용감하게 싸워서 군율을 어기지 말라. 그리고 저 왜적은 교활하니 패하여 물러가게 되면 반드시 산길로 해서 갈 것이다. 험한 곳에서는 기병과 보병이 형세가 다르니 끝까지 추적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다음날 먼동이 틀 때 적병은 일제히 계속 포를 쏘며, 학익진(鶴翼陣)을 벌이고 진군하여 오는데, 흰 칼날을 서로 휘둘러 살기가 하늘까지 뻗치고 기괴한 형상은 사람들의 눈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명병이 포를 응사하면서 돌연히 일어나니 철편(鐵鞭) 아래에 왜적은 손을 쓸 사이도 없었다. 싸움이 붙은 지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패하여 도망하여 목천(木川)ㆍ청주(淸州)를 향하여 달아났다. 대군의 힘이 다 되고 또 산간 벽지의 길로 나갔기 때문에 마귀는 추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휴식시켰다가 길을 나누어 추격하여 내려갔다. 그 뒤에 왜적이 본국으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3대전(三大戰)을 말하기를, “평양(平壤)ㆍ행주(幸州)ㆍ금오평(金烏坪)이라.” 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금오평 싸움에 명병은 홍경원에 결진하고 비밀리 화약을 군막의 풀 숲에 묻었다가 왜적이 이르러 오자 거짓 진을 버리고 달아나니, 적병이 앞을 다투어 들어와 막을 불사르다가 화상을 입고 죽은 자가 많았다.” 하니, 이 말이 사실에 가깝다. 경리(經理)는 수원에 가지 아니 하고 있다가 임금과 같이 종남산(終南山)에 올라가 멀리 기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적병이 패하여 달아났다.”고 하였다.
9일 양형과 같이 그대로 파근사(波根寺)에 있었다. 본부의 아전 정대인(鄭大仁)ㆍ배입(裴立) 등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올라와 말하기를, “근자에 왜적의 형세를 보면 결코 근절될 이치가 없습니다. 겨울이 깊어져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적의 수색이 그치지 아니하오면, 불쌍한 우리 남은 백성은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니, 아무개는 강개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래부터 아는 터이니 격문을 사방으로 띄워 모집한다면 얼마의 장정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의 오는 길을 끊어버린다면 부모 처자를 걱정 없이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꼭 같다. 그러나 적의 떼가 가득 차 있어 한 장의 격문도 통과하기 어려워서 민망함을 참고 이 곳에 머물러 있자니 다만 통분할 뿐이었는데, 그대가 이토록 꾀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았다.” 하고, 서로 날짜를 약속하여 장사를 모집하기로 하였으나, 또한 왜적의 형세가 갑절이나 치열하여져 사람과 물건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일 양형과 같이 가족을 인솔하고 송림사(松林寺) 터로 내려가니 상사(上舍) 정사달(丁士達) 형제가 처음 파근원(波根源)에서 패배를 당하여 몸만 빠져 남으로 달아났다가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남촌에서 밤에 몰래 오다가 들 가운데서 나와 만나게 되어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이어서 산으로 들어가 한 곳에다 초막을 쳤다.
○ 청정 등 적이 청주에 이르러 길을 나누어 내려갔다. 1대는 청산(靑山)ㆍ황간(黃澗)을 지나 성주를 거쳐 남도로 내려가고, 다른 1대는 함창(咸昌)ㆍ상주(尙州)로부터 인동(仁同)ㆍ대구(大丘)를 거쳐 내려가고, 또 1대는 문경(聞慶)ㆍ군위(君威)ㆍ비안(比安)으로 해서 내려가 모두 전에 있던 소굴로 들어갔다. 윤직무(允直茂) 등은 청주로부터 공주로 도로 나와 청정의 군대 수만 명과 같이 호서의 우도를 분탕질하고, 이어서 전라우도로 내려가면서 모두 분탕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여 민패(民牌)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
○ 의홍 등의 적은 순창(淳昌)ㆍ담양(潭陽)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져 주둔하고 지켰다. 창평(昌平)ㆍ광주(光州)ㆍ옥과(玉果)ㆍ동복(同福)ㆍ능주(綾州)ㆍ화순(和順) 같은 데는 적병이 많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엄금하며 민패를 발급하여 불러다 항복시키니, 달려가 붙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저자를 열어 교역하는데 까지 이르렀고, 연도(沿道) 각읍의 왜적도 모두 이같이 하였다. 동복(同福)의 생원(生員) 김우추(金遇秋)가 본현의 왜장(倭長)에게 편지를 올려 이르기를,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한 호(戶)로 편입되어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끝에다 서를 지어 붙이기를
칼을 짚고 동해를 건너오니 / 杖劍渡東海
장군은 왕의 보필감이요 / 將軍王佐才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다면 / 殺人如不嗜
천하가 모두 돌아올 것이요 / 四海盡歸來
하였다. 그 뒤 난리가 평정되자 사림들이 왜적에게 붙었다는 것으로 죄주었다. 이때에, “창전(昌全)ㆍ옥삼(玉三)ㆍ동이(同二)ㆍ곡일(谷一).”이란 말이 있었는데, 전(全)이란 것은 창평 한 고을 사람이 전부 들어갔다는 것을 말함이고, 3ㆍ2ㆍ1이라 함은 그 괴수가 옥과에는 셋, 동복에는 둘, 곡성에는 하나라는 말이다.
17일 적장 평조신(平調信)이 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임실(任實)로부터 남원(南原)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그대로 본현에 유둔하고, 산에 들어간 사람을 유인해 내다가 민패를 주고 쌀도 주었다. 도로에다 난동을 금지하는 군대를 두어 왕래하는 왜적으로 하여금 수색하고 노략하지 못하게 하니, 궁한 백성이 우선 당장에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투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때에 적병이 상도(上道)로부터 혹은 백여 명, 혹은 5ㆍ60명, 혹은 천여 명, 만여 명에 이르는 집단이 연속하여 내려왔다.
○ 적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도(右道)로부터 곡성(谷城)으로 와 주둔하여 민패를 주며 백성을 달래니, 투항해 들어가는 자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민간에 가서 약탈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니 본현과 남원 남서면의 무지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가 민패를 받았다. 남원 출신 하원서(河黿瑞)의 딸이 곡성의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하원서는 민패를 차고 적진으로 들어가 그 딸을 보고, 요시라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요시라는 주관하는 왜장을 불러 물어 보니, 하씨의 딸은 금법을 내리기 하루 전에 붙들려 왔다고 하여, 원서는 찾아서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18일 적병 수천 명이 우도로 해서 남원에 이르렀고, 다음날 구례로 향하였다가 이어서 사천(泗川)으로 들어갔다.
19일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 근일에 내려오는 왜적은 다 남원을 거쳐 구례로 향하여 갔다. 운봉ㆍ함양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 추수를 하는데, 이들 왜적이 불의에 돌진해 왔기 때문에 살해 당하고 약탈 당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ㆍ찬획사(贊劃使) 이시발(李時發)이 서북의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별장(別將) 한명련(韓明連)ㆍ경상좌방어사(慶尙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으로서 선봉을 삼아 청정을 추격하여 비안(比安)까지 이르렀으나 따라 잡지 못하였다.
22일 내가 왜적 5명을 불우(佛隅) 부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에서 죽였으나 그 머리를 베지 않았다. 이때에 정사달ㆍ양덕해 등 제형과 함께 한 곳에 있으면서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막사로 모여 날마다 왜적의 동태를 바라보는데, 도로에 그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세력이 큰 왜적은 그래도 간혹 하루 걸러 내려오지만, 세력이 작은 왜적은 항상 내려왔다. 그들 생각에 우리 나라에는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서인지, 행군함에 있어서도 정돈된 항오로 습격에 대비하는 태도가 없었다. 내가 여러 형들에게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흉한 적들이여! 부끄럽도다, 우리 나라여! 영남에서 당초에 사변을 당하였을 때, 사람들이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못하여 각자가 살길을 도모하는데, 곽재우(郭再祐)는 한 빈한한 서생으로 남보다 앞서 자진하여 일어나, 혹은 공격하고 혹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적을 베니, 우도의 여러 고을이 12일 동안에 수복되었소. 이것은 국사(國士)의 기풍이 감발한 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소? 오직 우리 도는 본래부터 예의의 고을이라 일컬어 왔고, 충절과 효행이 고금에 드러났으니 임금께서 오늘날에 바라는 것은 호남과 영남이 다를 바 없는데, 왜적이 본도에 들어온 뒤로 한 사람도 의를 들고 일어나 왜적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목베어 바치는 사람이 없소. 비록 혹독한 왜적이 득실거려 어떻게 할 만한 방책이 없다 하지만, 임금님의 수복(收復)하려는 소망을 생각하고 신민의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면, 꼭 한 번 죽어야 할 처지인데 그대로 산 숲속에 매복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자신만을 도모해서야 되겠소. 이것으로 논하면 척수공권(隻手空拳)으로라도 참으로 나아가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할 것이니, 한 몸의 화복을 어찌 헤아릴 겨를이 있겠소? 더욱 지금 적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왕래하는 것이 고약(孤弱)하고, 우리 인민은 사변에 익숙해져서 밤을 이용하여 서로 통하니, 만일 이때에 밝게 깨우쳐서 장정을 모집해서 복병을 설치하여 왜적을 사로잡고, 군사를 동원하여 추격하면, 곽의사(郭義士)가 우도를 수복한 공적을 우리도 오늘에 쉽게 얻을 것이오. 고군(孤軍)을 이끌고 뱃전을 치며 강을 건너가면 용맹을 날릴 수 있거니와, 초수(楚囚)가 되어 산중에서 서로 마주앉아 우는 것이 어찌 충성이 될 수 있소. 어떻게 하면 적당한 사람을 얻어, 여러 형과 같이 그를 도와 대사를 도모하겠소? 이 서투른 말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고, 오직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힘을 합쳐 그것을 도모하면 다행하겠소.
여러 형들은 모두 충의를 가진 선비라 내 말을 듣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러한 사람이 적격자가 가까이 있는데 하필 멀리 가 구하겠소?” 하고, 동시에 바로 나에게 한 번 죽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분한 나머지 마음을 스스로 누르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왜적을 토벌한다고 소리쳤으나, 오활한 썩은 선비로 일찍이 향리에서 믿음을 받지 못하여 한 사람도 같이 일하겠다고 응모해 오는 사람이 없고, 말하기를, “간신히 생명을 보존하여 오늘까지 왔는데, 아무개는 무슨 꼴로 또 남은 백성을 죽이려 하는가?” 하였다. 나는 여러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기를, “근일에 피살된 사람들이 모두 의병 때문이란 말이오? 붙들려서 죽는 것보다는 순국(殉國)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소. 나 역시 이들 왜적의 천심(淺深)을 알지 못하지만 한 번 죽음으로써 시험하여 사인(士人)들의 의혹을 풀어주기 원하오.” 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식구들을 풀속에 은신시켜 두고 단지 두 사람의 종만을 인솔하고 성부(城府)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박언량(朴彦良)은 사람됨이 강개하여 실로 충용한 사람인데,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활을 끼고 따라나섰다. 불우(佛隅)에 이르러 높은 데로 올라가 망을 보니, 흉적(凶賊) 5명이 성중으로부터 총을 메고 검을 휘두르며 이리로 왔다. 나는 박언량한테 말하기를, “우리는 4명이고 적들은 5명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지만 우리는 의리에 분발한 신예병(新銳兵), 저들은 바로 멀리 와 싸워 피곤한 군사다. 더욱 그대는 일당백할 용사요, 내 또한 한 번 죽음을 결심하였으니 이것으로서 헤아린다면 적은 바로 안중에 들어온 것이다. 힘써 싸우라.” 하고 말이 끝나자, 길가에 매복했다. 적병이 앞으로 오자 박언량과 함께 일시에 발사하니 잇달아 5명의 적이 맞았는데, 두 놈은 곧 거꾸러지고 세 놈은 검을 던지고 살려주기를 구했다. 나는 하인에게 명령하여 쳐죽이게 하니, 하인은 내가 수급을 필요로 하는가 여겨 귀를 베고자 하므로 내가 제지하며 말하기를,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은 수급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된 직책을 다하는 것 뿐이다.” 하였다. 휴식하는 사이에 포성이 들리므로 잠깐 산 위로 피하여 망보니, 적병 수백 명이 부(府)로부터 오다가 적의 시체를 보고 떠들썩하게 가리키며 부오(部伍)를 정돈하고 높은 데 올라가 망 보다 달아났다. 나는 고갯길에서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군사는 고단하고 화살도 다 없어져 분개하며 산으로 돌아왔다. 제형이 왜적을 섬멸한 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군자정(軍資正) 유지춘(柳知春)이 오차산(於差山)에서 패하여 단신으로 달려와서 내가 왜적을 친 것을 기뻐하며 말하기를, “흉한 왜적들이 가득 퍼지자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도모하니, 비록 크게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나 군사를 모집하기가 극히 어렵소. 참으로 그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정위(精衛)도 나무를 물어 나르면 큰 바다도 메울 수 있고, 노계(老鷄)도 알을 품을 때에는 미친 개도 쫓는 법이니 다만 진력함에 있는 것이지 어찌 수효가 많음을 일삼겠소.” 하였다.
23일 우리 군사가 왜적 36급(級)을 궁장현(弓藏峴)에서 죽였다. 이날 새벽에 또 가족을 숲속에 숨겨 두고 몇 사람의 하인을 거느리고 왜적을 토멸한다고 성명하니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20여 명이 되었다. 선달(先達) 김완(金完)은 영암(靈巖)인인데 새로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영남좌방어사(嶺南左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진중으로 가다가, 본도가 대패함을 듣고 노모(老母)가 있는 까닭에 말을 바치고 나와 남원에 이르렀으나,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하고, 마침 서로 만나게 되어 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내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을 기뻐하여 함께 일어났고, 정사진(丁士進) 군은 강개(慷慨)한 선비로 나의 뒤를 따르니 박언량 등과 아울러 28명이 되었다. 송림으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요천(蓼川) 위의 방암봉에 올라가 숨어서 망을 보니 흉적 50여 명이 임실(任實)로부터 소와 말을 몰고 축천정(丑川亭) 성 북쪽 5리에 있으며 금우정(金牛亭)은 물 가운데 있다. 을 지나 곧장 동도역(東道驛) 앞 소로를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었다. 나는 김군한테 말하기를, “이 왜적들의 행보가 별운교(別雲橋) 부의 동쪽 7리쯤에 있다. 로 들어가니 반드시 무산(母山)으로 향할 것이다. 궁장현은 길이 좁고 좌우에 막힌 곳이 많아 방연(龐涓)을 잡을 만한 곳이다. 이제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무산으로 향한다면 여원곡(女院谷)에서 추격하여 죽일 수 있을 것이오.” 하고, 말이 끝나자 망을 보니 적병이 과연 궁장현으로 향했다. 내가 달려가며 약속하여 말하기를, “군대란 정(精)한데 있지 수효 많은 데 있지 않소. 적을 만나 후퇴하여, 적으로 하여금 형세를 이용하게 하면 많은 것이 더욱 해로움이 있소. 그대들 가운데 만일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이제 뒤로 처지시오.” 하니, 말을 듣고 물러난 자가 7ㆍ8명이었다. 단지 수십 명을 거느렸는데, 궁시(弓矢)를 가진 자는 나와 김완ㆍ정사진ㆍ박언량 네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몽둥이를 들고 산 위로 해서 달려 궁장현에 당도하니 왜적은 이미 요긴한 길목을 지나갔다. 우리는 이미 형세를 잃어버려 용맹을 쓸 만한 곳이 없어 적을 버리고 헛되이 돌아오게 되니 이는 나의 뜻이 아니었다.
마침내 고함치며 활줄을 세게 당겨 전진하니 적병이 칼을 뽑고 총을 안고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먼저 형세를 타지 못하였다 하여 겁을 먹고 모두 후퇴하고 들어가지 아니하니, 나를 따라 죽기로 나선 자는 6명뿐이었다. 싸움이 한창 붙게 되자 구릉을 한계로 삼아 왜적으로 하여금 난입할 수 없게 하고, 또 먼저 총 가진 자 3ㆍ4명을 쏘아서 죽였기 때문에 멀리서 덤빌 염려는 제거되었으나,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 힘이 서로 대적이 안 되었다. 비록 활 쏘는 것을 정확하게 한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모두 맞칠 수는 없었다. 왜적의 전봉(前鋒)인 5명의 적이 그 자리에서 죽은 뒤로 나머지 왜적이 일시에 포위하고 들어오니, 우리들은 포위망 속에 있으면서 사면으로 발사하였다. 얼마 동안 치열하게 싸우자 왜적은 더욱 목숨을 내걸고 먼저 정군(丁君)은 쳐서 왼발 복아뼈를 찍어 대고 그 다음으로 박언량을 치니, 박언량이 활과 살로 그것을 막아서 활은 쪼개어지고 사람은 죽음을 면했다. 박언량은 맨손으로 포위를 뚫고 나와 모난 몽둥이를 들고 다시 들어가니 정군도 자기 상처를 돌보지 아니하고 굳게 서서 난사하였다. 나와 김군도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하는데, 뜻밖에도 김군의 활이 또 부러졌다. 한 놈의 왜적이 김군을 쫓아가서 일이 매우 위급하므로, 내가 돌아서며 그를 쏘니 한 살에 바로 죽었다. 나는 살을 뽑아 난사하고, 또 박필남(朴弼南)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김군을 추격하던 왜적이 내가 쏜 한 살에 굴러 떨어지는 것을 봤는가?” 하니, 박필남은 뒤에서 따라 오면서 대답하기를, “그것을 봤습니다. 봤습니다.” 하였다. 박언량이 급하게 김군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홀로 포위망 속에 있으면서도 죽기로 결심하고 물러가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달아나고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하였다. 이때에 적병으로 죽은 자가 15ㆍ6명이 넘었는데, 모두 싸움을 경험해 본 놈들이라 감히 결사적으로 싸워왔다. 그런데 나도 화살이 떨어져 급하게 경계(庚癸)을 부르니 박필남이 뒤에 처졌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화살을 던져 주므로 나는 살을 계속 주워서 쏘아 댔다. 진시(辰時)부터 교전하여 날이 신시(申時)ㆍ유시(酉時)에 이르자 여러 왜적이 모두 죽었는데, 그 수효는 36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포로된 사람들이라 다 거두어 돌아오니, 부북(府北)의 둔덕촌(屯德村) 사람 고한전(高漢傳) 등이었다. 두 왜적이 개울가에서 짐을 지키며 관망하다가 도망쳤는데, 날이 어둡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산꼭대기에 앉아서 군사를 쉬게 하고 다시 싸움터를 돌아보니, 넘어져 있는 시체가 서로 베고 누웠는데 비린내 나는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 곧 노획한 왜놈의 행장을 나누어 군인에게 주고 뒷날의 거사에 미끼로 삼게 하였다. 밤중에 산에 돌아오니, 여러 사람이 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뜻밖에 파목(頗牧)이 우리들 가운데 계셨소. 만일 조정에서 이런 줄을 알게 된다면 충갑(沖甲)의 공은 여실(麗室)에서만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뿐만이 아닐 것이오. 운운.”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김완과 박언량 등 몇 사람이 궁장(弓藏)으로 머리를 베어 왔다. 바야흐로 난투할 때에 사람이 모두 상처를 입었는데, 나만 홀로 종 대손(大孫)이가 모난 몽둥이를 가지고 곁에 있으면서 타격하는 것을 힘입어서 마침내 완전하게 이겼음.
○ 왜적의 괴수인 내도수(來島守)는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서해로 향하여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밑에 이르렀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명량(鳴梁)에 유진하고 피란한 배 백여 척이 뒤에서 성원하였다. 이순신은 왜적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경솔히 대적하지 말고 기회를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 하였다. 왜적은 우리 군대가 외롭고 힘이 약함을 보자 삼킬 듯이 서로 다투어 먼저 올라와 사면을 포위하고 엄습하여 왔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였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도수(來島守)를 베어 머리를 돛대 꼭대기에 매달으니, 장수와 사병이 용맹을 떨쳐 달아나는 놈을 추격하고 패배하여 가는 놈을 따라가 목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급이 되었으며, 도망하여 탈출한 것은 겨우 10여 척뿐이었고 아군의 병선은 모두 무사하였다. 왜적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담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명량의 싸움을 말하였다 한다.
○ 곡성에 머물러 있던 요시라는 복병을 4개 도로 나누어 보내 우선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을 금하였다. 부성(府城)의 동문 밖의 요천(蓼川)에도 또한 와서 8명이 막을 치고 머물러 있으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달래어 모아들였다. 내가 박언량ㆍ김완과 같이 그들을 치는데, 먼저 왜놈을 경험한 사람으로 하여금 왜적의 군막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형세를 탐지하게 하니, 왜적은 민패를 받은 사람으로 여겨 싸울 생각이 없이 말을 지껄이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들이 대비하지 못한 때를 이용하여 갑자기 습격하였다. 그래서 박언량은 그들의 수급을 다 거두어 돌아왔다.
○ 적병 50여 명이 오수역(獒樹驛)에 주둔하고 곡식을 거두어 군량을 준비하였다.
○ 명 나라 군사가 서울로부터 처음으로 호남지방에 당도하여 선봉 30여 명이 전주를 경유하여 와서 말을 달려 돌격하니 적병은 짐을 모두 다 버리고 도망쳐 구례로 향했다. 전주 이상에서 적병이 다 내려온 것을 비로소 알았다.
○ 적의 괴수 평수가(平秀家)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순천(順天)의 왜교(倭橋)로 돌아나와 행장과 진영을 합하였다.
○ 이광악(李光岳)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삼고, 원신(元愼)을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10월 명 나라 군사가 오수역으로부터 나아가 남원성을 탐색하다가 향교의 뒷산에서 말을 쉬고 있는데, 곡성의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몰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러 동철 5백 나한(羅漢)을 녹인 구리쇠 을 싣고 가므로 명 나라 군사는 말을 달려 뒤쫓아가 4급(級)을 베어 죽였다.
8일 청정 등 여러 도의 왜병이 두모(豆毛)ㆍ서생(西生)ㆍ도산(島山) 등 예전 보루로 들어가 진을 쳤다.
○ 마귀는 대군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뒤따라 전라도로 내려와 남원의 북쪽 율현(栗峴)에 이르러 곡성에 적이 있음을 탐지하고 전주로 도로 물러갔다. 배신(陪臣) 우상(右相) 이항복(李恒福)ㆍ반신(伴臣) 장운익(張雲翼)이 이들을 따라갔으나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도로 향했다.
9일 아군은 왜적을 산동촌(山洞村)까지 추격하여 수급 다섯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왜적의 괴수 평조신(平調信)이 남원을 경유하여 구례로 향할 때, 그들의 군대 4백여 명을 산동촌에 머물러 두어 벼를 베어 양식을 준비하게 하였는데, 그 왜적들은 원내촌(院內村)에 주둔하여 복병을 원하천(院下川) 가에 배치하고 날마다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겸하여 산골짜기를 탐색하며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노략질한 것이 그 수효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본촌의 선비 형덕흥(邢德興)은 연일 급함을 고하여 왔으나, 나도 또한 가까운 적이 급급하여 가서 추격할 겨를이 없었다. 이달 이후로부터는 왕래하는 영적(零賊)들이 아군이 요지를 점거하고 있음을 꺼려 원천(原川)을 경유하지 않았다. 내가 막 가서 그 왜적을 잡으려 하는데, 이날에 형덕흥이 또 와서 살려 줄 것을 요구하므로 즉시 김완ㆍ박언량 등 10여 명과 같이 산동촌으로 향해 떠나니, 양덕해(梁德海) 형이 따라가 구경하기를 원했다. 숙성령(宿星嶺) 위에 이르니 작은 밤고개에 수십 인이 늘어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므로 불러서 그들을 오게 하니 모두 진안(鎭安) 사람이었다. 이때에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호남과 영남의 경계로 와서 주둔하였으나, 각관의 수령들이 달아나 숨고 나오지 아니하며, 왜적을 토벌하는 데 뜻이 없는 까닭에 그 더욱 심한 자를 조사하여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본현의 현감 오장(吳長)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보내어 왜적의 귀를 얻어서 후환에서 벗어나려고 도모했으나, 그들은 아군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이곳에서 정탐하고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나게 되니, 기쁘고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진안의 영장(領將)한테 말하기를, “네가 내 뒤를 따르면 왜놈의 머리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나 싸움에 임하여 어물거리면 군법에는 피차가 없다.” 하니, 영장이 말하기를, “죽건 살건 명령을 따를 뿐이오.” 하였다. 행진하여 운제(雲梯)에 이르러 박언량ㆍ형덕흥에게 명령하여 산에 올라가 정탐하게 하니, 많은 왜적이 원(院) 내의 마을에 결진하고 복병한 군막은 원 아래에 있었다. 저녁 때에 적병 16명이 큰 진으로부터 와서 원 아래 군막을 지켰다. 내가 김완한테 말하기를, “왜적의 세력이 매우 성하여 싸울 수 없으니 마땅히 기계(奇計)를 내어 적을 제압하여야 하오.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 하고, 즉시 군인으로 하여금 연관사(煙觀寺) 남쪽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자모장(自募將) 고민덕(高敏德)이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벌써 여기에 와 있으면서 여러 날 틈을 엿보았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기뻐하며 말하기를, “일이 잘 이루어 질 것 같소.” 하였다. 밤 2경(二更)에 여러 군사와 같이 몰래 숨어 내려가 원후(院後)에 이르러 세 곳으로 나누어 매복하였는데, 하나는 큰 진의 길목을 끊고, 한 패는 개정(介亭)의 길목을 지키고, 한 패는 모전(茅田)의 험한 지형을 끼고 있었다. 또 박언량 등 7ㆍ8명과 같이 직접 왜군의 군막을 공격하니, 왜놈이 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은 자가 5ㆍ6명이 되었다. 나머지 왜군은 화살을 맞은 채 달아나 큰 진으로 들어갔다. 요로에 있던 군병이 살과 돌을 함께 쏘며 던지니, 빠져 달아난 왜적은 얼마 없었다. 나는 빼앗은 당마(唐馬)를 타고, 향로를 바꾸어 중산(中山)으로 올라가 연달아 삼혈 총통(三穴銃筒)을 쏘며 그 소리에 따라 고함치니, 왜적도 또한 불을 들고 떠들어대며 포를 쏘고 고함쳤다. 나는 다시 연관사(煙觀寺)로 올라가 잠깐 쉬었는데, 고민덕과 진안 사람들이 다 흩어져 갔다. 이날 밤에 큰 진의 왜적들이 숲속으로 숨어 들어 흩어져 매복했으므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닭이 울 때에 김완ㆍ박언량과 같이 군사를 이교(梨橋)의 높은 봉우리로 이동하여 총을 쏘며 고함치기를 어제 밤과 같이 하고, 즉시 다른 봉우리로 이동하여 숨어 엎드려 망을 보았다. 왜적의 진에는 2백의 기치가 세워져 있었고, 또 몇 사람의 기병이 구례로 파견되고, 이어서 8명의 적병이 중산으로 올라가 연기를 피워 사변을 알리고는 한참 망을 보다가 내려갔다. 잠간 있노라니 5ㆍ6기의 적병이 구례에서 달려오자 대진(大陣)의 적은 일시에 막사를 불태워버리고 철수하여 구례로 향하였다. 아군은 겨우 5명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김완ㆍ박언량 등은 적의 귀를 많이 얻어 가지고 은전을 입기 위하여 나와 같이 상의하고 그날로 사람을 전 초계 군수(草溪郡守) 첨지(僉知) 정이길(鄭以吉)에게 보내어 맞이하여서 대장을 삼으니, 정이길은 나와 재종(再從)간이다. 부모가 다 오차산(於差山)의 왜적에게 죽었기 때문에 초계로부터 와서 곡하고, 바야흐로 동지를 모집해서 복수를 도모하려 하다가 나의 소식을 듣고 기뻐서 달려왔다. 그가 우리 산막에 이르자 맞이하여 대장을 삼고, 보수(報讎) 두 글자로써 장표(章標)를 삼았다. 그리고 나를 출전장(出戰將)으로 정사달(丁士澾)을 종사(從事)로 유지춘(柳知春)을 참모(參謀)로 양덕해(梁德海)를 병량유사(兵粮有司)로 삼았다.
이날로 원수(元帥)에게 보고하기를, “의병장은 군공(軍功)을 보고합니다. 나라 운수가 두 번째 비색하여 흉한 왜적이 제멋대로 날뛰니, 관군은 무너져 흩어지고, 중국 군대는 패전하고, 남은 백성이 어육이 됨을 면한 자 거의 드뭅니다. 지난 아무 달 아무 날 제 부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죽은 곳으로 달려가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굴러 슬퍼함이 끝이 없었으며, 동지들과 의거하여 적을 토멸해 적의 살점을 찢어 원수를 만분지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본부의 유학(幼學) 조(趙) 아무개 등은 본래 충성되고 용맹한 사람으로서 복수의 대의를 떨쳐 정예를 모집하여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싸울 때에는 반드시 앞장서서 용감히 굽히지 않아서 여러 차례 크게 이겨 수급을 벤 것이 많았습니다. 임금께 여쭙지 않는 것이 사체에 옳지 못하다 여기고 군수를 청하여 모주(謀主)를 삼았습니다. 어버이를 여의고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여 참으로 미안한 줄 압니다만 복수에 급급한 나머지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전후의 군공(軍功)과 수급을 벤 수효와 왜놈의 짐을 모두 올려 보냈습니다. 본도가 함몰을 당한 뒤로 감히 한 사람도 왜적을 칠 계책을 하지 못하였는데, 다만 이 서생만이 용맹을 떨쳐 적을 공격하였으니 나라를 위한 정성이 실로 비길 데 없습니다. 이 같은 사람을 급히 포상하도록 계하하시어 훗날의 길을 넓혀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왜적의 상황으로 말하면, 남원 위로는 현재 적의 둔병이 없사온데, 곡성에 머무른 왜적은 1만여 명에 이르러 패를 주어 인민을 유인하고, 살생과 노략을 엄금하므로, 본현 사람과 남원 남서면 사람들 가운데 먼저 들어간 어리석은 백성들이 당분간이나마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민패를 받고 쌀을 바치니, 저놈들이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철수해 갈 뜻이 없습니다. 지난 모월 모일에 적병 50여 명이 상도(上道)로부터 내려와 오수역에 주둔하자 명군 30여 명이 전주로 해서 이곳에 이르러 말을 몰아 돌격하니, 적병이 도망쳐 구례로 향했습니다. 명군은 행진하여 향교 뒷산에 매복했는데, 곡성의 왜적 30여 명이 소와 말을 가지고 만복사(萬福寺)에 이르렀으므로, 명군이 기마병을 보내어 추격케 함으로써 4명을 베었는데, 그 후로 곡성 읍내에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으니 아마도 소굴을 불태우고 철거한 듯합니다. 우도(右道)로 말하면 적병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차 있어 민패를 주고 쌀을 받았으며, 왕래하던 적들은 모두 옥과ㆍ곡성으로 해서 구례로 향하여 갔습니다. 본부로 말하면, 산동(山洞)에 있는 왜적의 수효가 4백여 명에 달하는데, 벼를 베어 군량을 준비하며 오래 머무를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달 9일에 조 아무개는 군대를 거느리고 고개 위에 둔을 치고 적의 형세를 엿보았으나, 중과부적이어서 감히 부딪쳐 싸우지 못하고, 밤을 틈타 습격해서 다수의 적을 베어 죽이니, 적병이 두려워하여 그날로 철수하였습니다. 몇 명이 되지 않은 군인이오나 분탕을 당한 나머지라 군량을 보급할 길이 없사오니, 한 집안이 모두 죽은 사람이나 도망한 군대의 전답에서 나오는 벼를 군용으로 가져다 쓰려 하오니,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이 때에 원수는 영남으로부터 장수현(長水縣)에 이르렀다가 다시 남원의 목동촌(木洞村)으로 갔다가 전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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