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2월 1일, 기아는 현대 품에 안겼다. 2000년 현대그룹이 계열사를 분리하면서 이듬해 현대자동차그룹의 일원으로 거듭났다. 2002년 기아는 스포티지 출시 후 약 9년 만에 신형 SUV인 쏘렌토를 선보였다. 원래 쏘렌토는 스포티지 후속으로 기획했는데, 쌍용 렉스턴, 현대 테라칸, 싼타페 등 쟁쟁한 맞수가 등장하면서 한 급 위로 신분을 높였다. 코드네임은 BL. 차명은 이탈리아 캄파니아 주에 자리한 휴양지에서 따왔다. 다소 투박한 외모의 기존 SUV와 달리 승용 느낌이 물씬했다. 특히 매끈하고 우아한 안팎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뒤로 바짝 누운 A필러, 2열과 트렁크 옆 창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C필러가 한 몫 톡톡히 보탰다. 우드 장식 듬뿍 담은 인테리어도 쏘렌토의 가치를 높였다.
쏘렌토
차체는 스포티지의 설계를 이어 받은 보디 온 프레임 방식. 뒷바퀴 굴림(FR)을 기본으로 사륜구동 시스템을 짝 지었다. 심장은 현대차가 갤로퍼부터 얹던 미쓰비시의 직렬 4기통 2.5L 디젤 엔진을 개량한 ‘커먼레일 직접분사 방식(CRDI)’의 디젤 터보. 여기에 국산 SUV 최초로 5단 자동변속기를 물려 최고출력 145마력, 최대토크 33.0㎏‧m를 뿜었다. 또한, 자외선 차단 글라스, 속도감응식 파워 스티어링, 운전석 8방향 전동시트, 터치스크린 등 다양한 장비를 욕심껏 얹었다. 특히 쏘렌토는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이 실시한 충돌 테스트에서 최고등급인 별 5개를 받아 남다른 안전성을 뽐냈다. V6 3.5L 가솔린 시그마 엔진을 얹은 상위 트림을 앞세워 북미시장 수출의 활로 또한 개척했다.
쏘렌토 광고
피터 슈라이어 영입 후 ‘디자인 기아’ 강조
기아는 중형세단 로체와 대형세단 오피러스, MPV 카렌스 등을 선보이며 승용 라인업을 두둑이 살찌웠다. 그러나 이들 차종은 각기 다른 개성을 추구했다. 통일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기아차는 걸출한 스타 디자이너 영입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1953년 독일 출생으로, 아우디를 비롯해 폭스바겐 그룹에 오랜 기간 몸담은 피터 슈라이어였다. 정의선 수석부사장은 기아차의 디자인을 강화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폭스바겐 디자인 총괄을 역임한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최고 디자인 책임(CDO) 부사장으로 데려왔다. 당시 기아차는 피터 슈라이어를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라고 자랑했다. 이때만 해도 현대‧기아차는 외국인 전문가를 임원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혁신의 시작이었다.
피터 슈라이어 디자이너
칼자루를 건네받은 피터 슈라이어는 과감한 디자인 개혁에 나선다. 유럽 자동차 특유의 ‘패밀리 룩’ 디자인을 가져와 ‘기아의 표정’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호랑이 코를 연상시키는 이른바 ‘타이거 노즈 그릴’을 씌우고, ‘K 시리즈’로 세단 라인업을 개편했다. 변방의 아시아 제조사에 둥지를 튼 스타의 행보에 전 세계 자동차 업계가 주목했다. 첫 결과물은 2008년 나온 기아의 첫 대형 SUV 모하비. 정의선은 2005년 기아차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브랜드 이미지 이끌 ‘플래그십 SUV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피터 슈라이어는 남성미 물씬한 스타일을 모하비에 녹이며 ‘새로운 기아’의 시작을 알렸다. 유럽과 일본 등 자동차 선진국을 따라가기 바빴던 국산차 디자인 역사에 새로운 서막을 연 주역이다.
기아만의 역동적인 감각으로 제품 차별화
현대차와 한 이불 덮으며 ‘기아차 특유의 개성을 잃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한 때 ‘기아의 자존심’으로 불렀던 크레도스는 옵티마에게 바통을 넘기며 쏘나타의 이란성 쌍둥이로 변했다. 다양한 제품이 현대차와 플랫폼 및 파워트레인을 나눠 쓴 결과다. 하지만 플랫폼 공유는 비단 전 세계적 추세였다. 기아는 역동적인 감각으로 제품 차별화에 나섰다. K 시리즈의 신호탄이었던 K7은 소위 ‘역대급’ 스타일을 지녔다. K는 기아자동차(Kia), 대한민국(Korea), 크라토스(Kratos, 강력함‧지배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앞 글자를 의미한다. 숫자 ‘7’는 대형 세단을 뜻한다. 그동안 현대 그랜저의 빛에 가려 좀처럼 기지개를 못 편 기아 포텐샤의 후속이자 야심차게 준비한 준대형 세단이었다.
기아 K7
이때까지 대형 세단은 보수적 이미지가 물씬했다. 나이든(배도 나온) 아저씨가 편안하게 타는 고급차였다. 반면 K7이 겨눈 과녁은 사뭇 달랐다.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갈아엎은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주인공 이병헌이 K7 몰고 추격전 벌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이처럼 K7은 기존 세단과 달리 ‘운전이 재미있는 스포츠 세단’으로 표정을 바꿨다. 이듬해 등장한 K5는 쏘나타의 아성을 무너트린 주역. 이때부터 기아차는 K와 숫자의 조합으로 세단 라인업을 재정비했다. K5는 현대‧기아차가 새로 개발한 ‘타입-N’ 플랫폼을 바탕삼아 매끈한 안팎 디자인을 갖췄다. 그 결과 세 달 연속 쏘나타를 제치고 중형차 판매 1위에 올랐다. 위기감을 느낀 현대는 쏘나타에 1% 초저금리 할부를 내걸었을 정도다.
RV 라인업 탄탄히 살찌운 기아차
봉고와 카니발의 성공으로, ‘RV=기아차’라는 공식이 국내 팬들에게 통했다. ‘박스카’ 쏘울도 좋은 예다. 2008년 선보인 소형 크로스오버카로, 북미에서 ‘원조 박스카’ 닛산 큐브를 밀어낸 주인공이다. 남다른 안팎 디자인으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했고, 이듬해 ‘북미 올해의 차’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최근 3세대로 진화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기아는 경쟁사엔 없는 차종으로 틈새를 공략해왔다. 니로 하이브리드가 대표적이다. 인기 있는 소형 SUV에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조합한 기아의 ‘효자모델’ 중 하나다. 별다른 마케팅 활동 없이 꾸준한 판매고를 올리는 몇 안 되는 차 중 하나이기도 하다. 2,700㎜에 달하는 넉넉한 휠베이스, 1L 당 19.5㎞를 뽐내는 연료효율 등이 입소문을 탄 결과다.
기아 니로
박스형 경차 레이도 빠질 수 없다. 2011년, 다이하츠 탄토를 벤치마킹해 4년 동안 개발비 1,500억 원을 들여 만든 모델이다. 경차 규격의 한계까지 밀어붙인 차체와 슬라이딩 도어, 1.7m에 달하는 높이로, 차급을 뛰어넘는 넓은 거주공간을 갖췄다. 1.0L 가솔린 엔진을 기본으로, LPG와 함께 쓰는 ‘바이퓨얼’과 터보 버전, 화물 밴 모델도 나왔다. 가장 독보적인 모델은 카니발로, 일명 ‘아빠들의 드림카’다. 7인승부터 11인승까지 3가지로 나눈 구성, 다둥이 가족에게 요긴한 독립시트, 효율 높은 2.2L 디젤 엔진과 버스 전용차로 주행 혜택까지 머금은 기아의 베스트셀러다. 현재 판매 중인 모델은 3세대로, 2020년 풀 모델 체인지를 앞뒀다. 그럼에도 2019년 누적 판매량이 기아차 전 라인업 중 1위다.
기아 레이
기아가 꿈꾸는 미래
기아는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전동화다. 이미 하이브리드 및 배터리 전기차(BEV)로 탄탄한 입지를 다져온 기아는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몸집을 불리고 있다. 최근 현대‧기아차는 크로아티아 고성능 전기차 업체인 ‘리막 오토모빌리(Rimac Automobili)’에 1,000억 원을 투자했다(현대 854억 원, 기아 213억 원). 포르쉐도 파트너십 맺은 전기차 제조사다. 이를 바탕으로 2020년 고성능 전기차 프로토타입을 선보일 계획이다. 앞으로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핵심 사업자로의 위상도 공고히 할 계획이다. 또한, 지난해 동남아시아 최대 카헤일링 업체인 ‘그랩(Grab)’에 약 3,200억 원, 인도 1위 카헤일링 기업 ‘올라(Ola)’에 약 3,500억 원을 투자하며 미래 모빌리티 시대를 한 걸음씩 앞당기고 있다.
이매진 바이 기아
올해 3월, 서울모터쇼에서 공개한 차세대 전기 콘셉트카 ‘이매진 바이 기아(Imagine by KIA)’를 보면 기아차의 미래 전략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첨단 기술을 양껏 심는 데에 그치지 않고, 탑승자의 감성적인 부분까지 충족시킨다. 또한, 총 21장의 고해상도 디스플레이를 중첩시킨 오버레이어드 대시보드, 아크릴 유리로 치장한 22인치 휠이 눈길을 끌었다. 기아자동차는 1944년 창립 뒤 위기를 맞을 때마다 ‘기술’과 ‘남다른 제품기획’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2014년 글로벌 누적판매 3,000만 대를 돌파했고, 현재 6개 국내외 공장과 23개 자회사를 거느린 글로벌 브랜드로 거듭났다. 세계적인 브랜드 컨설팅 기업, 인터브랜드가 선정한 ‘글로벌 100대 기업’ 가운데 기아는 74위를 기록했다.(기아자동차 브랜드 히스토리 마지막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