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 따르면 미개인은 미개한 인종이다. 한편 미개라는 말은 아직 개화되지 않음, 혹은 문명이 널리 퍼지지 않음을 뜻한다. 그리고 원시인은 원시 시대에 살고 있던 인류 혹은 미개 사회의 야만적인 인간, 미개인과 동의어라고 한다. 미개인 혹은 원시인에 대한 이러한 사전적 정의는 일종의 가치 판단을 포함한다. 사실 미개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요컨대 미개한 상태에 비해서 미개하지 않은 상태가 보다 나은 혹은 바람직한 상태라는 가치 판단이다.
미개인의 예는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아메리카 인디언,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는 '타잔'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사람들, 샴 왕국 그러니까 오늘날의 태국을 무대로 하는 율 브린너 주연의 뮤지컬 영화 '왕과 나'(최근에는 홍콩 출신 배우 주윤발 주연의 영화로 다시 만들어진 바 있다.)에 등장하는 샴 왕국 사람들. 그밖에도 우리는 아마존 유역, 파푸아뉴기니 등 세계의 오지에서 전통적인 방식대로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미개하다, 원시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언급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서양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서양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도 미개인 혹은 원시인인가? 적어도 서양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우리 나라가 서양 여러 나라와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전에는 우리도 미개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미개인이었을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미개인이었다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문명인이 되었단 말인가?
Lucien Lévy-Bruhl
Claude Levi-Strauss
2. 미개의 사고와 야생의 사고
프랑스의 인류학자 뤼시앙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 1857-1939)은 1910년에 출간한 저서 <미개인의 사고>에서, 미개인과 근대인의 심적 상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개인은 '논리 이전(pre-logic)의 사고방식과 느낌을 지닌 사람들이다. 미개인들은 집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개별적인 심상을 객관적, 논리적으로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으며, 논리 이전의 신비적인 관계를 통해 생각한다. 레비-브륄에 따른다면 미개와 문명은 질적으로 다르며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문명인의 사고와 미개인의 사고는 사물을 분류하는 방식과 관심의 주된 영역이 다를 뿐, 어느 것이 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요컨대 미개인과 문명인의 사고 방식은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의 다른 방식 혹은 태도일 뿐이다. 레비-브륄이 말한 '미개인의 사고'가 논리 이전의 사고라면,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1962)는 이른바 미개인의 사고가 근대인 혹은 문명인 못지 않게 질서와 체계에 민감하고 나름의 논리적, 과학적 사고 방식임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보자. 근대인은 과학을 통해 자연 현상의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에서 과학적 법칙을 찾는다. 때문에 근대인의 사고 방식은 기본적으로 인과론적 결정론이다. 그렇다면 미개인의 주술적 사고 방식은 어떠한가? 우리는 주술을 과학 이전의 사고 방식이거나 기껏해야 사이비 과학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주술적 사고가 과학적 인과론과는 다른 종류의 결정론이라고 본다.
"주술은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결정론을 전제하는데 비해, 과학은 우선 여러 개의 차원을 구분하고 그 중에 일부에만 결정론적 형식을 부여하며, 그밖의 차원에는 같은 결정론적 형식을 적용하지 않는다. 주술은 훌륭히 구축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과학 체계와는 별개의 것이다. 주술과 과학을 대립시키지 말고, 양자를 지식 습득의 두 가지 병행하는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과학과 주술은 같은 성질의 지적 작업을 요한다." (pp.65-66)
사물을 분류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개인의 언어에는 구체적인 사물의 명칭은 있지만 그것들을 범주로 묶어 분류하기 위한 추상명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가 비논리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미개인과 문명인은 사물을 범주화시켜 분류하는 방식과 관심의 영역에서 다를 뿐,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보다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원주민의 분류법은 조직적이며 견고한 체계적 이론적 지식에 의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오늘날 동물학과 식물학에서 사용되는 분류법과 유사한 경우가 많다." (p.104)
3. 틀림과 다름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이성 중심의 서구적인 사고 방식이 가장 우월하다는 통념에 큰 타격을 가했다. 더 나아가 비서구적인 것을 비과학적, 비논리적,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태도에도 일침을 가했다.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틀림과 다름의 문제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은 분명 다르다. 그런데 다르다는 말을 사용해야 할 때 틀리다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나와 저 사람은 피부색이 틀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 피부색은 맞고 저 사람의 피부색은 틀리다는 말인가? '틀리다'는 표현은 '옳은 것이나 표준적인 것이 아닌 상태가 되다' 혹은 '이미 주어진 것이나 이전의 말과 마땅히 같아야 함에도 달라진 상태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다. 결국 피부색이 틀리다고 말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내 피부색은 정상적이고 저 사람의 피부색은 정상적인 피부색이 아니라는 뜻을 포함할 수 있다. 요컨대 다르다는 사실을 틀리다는 일종의 가치 판단과 혼동하는 셈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했던 서구인들의 비서구 사회에 대한 편견에 대한 비판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서구 사회와 비서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름과 틀림의 혼동은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재일 한국인들을 차별하는 일부 일본인들의 태도에서도 그런 혼동을 볼 수 있는가 하면, 외국인 노동자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일부 우리 나라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고, 개를 식용으로 사용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을 향해 야만인, 미개인이라고 비난하는 일부 외국인들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