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비단 우리 민족의 스승으로서 존경받는데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퇴계의 학문과 사상이 임진·정유의 전란을 통해 수입되어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던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와 그 학파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메이지의 교육지침을 확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요코이 쇼오난(橫井小南)과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의 존경을 받았다. 일본의 퇴계연구가인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1998: 25)는 이런 사실을 오늘날 일본인들은 흔히 잊어버리고 있지만, 일본 문화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기반을 도외시하지 말아야 함을 역설한다. 또한 선생의 생존시에 이미 유성룡(西厓)에 의해「성학십도」가 중국에 전파되었다. 청나라 말엽 중국에서 「성학십도」를 간행할 때 당대를 대표한 사상가 양계초(梁啓超)는 "퇴계선생성학십도찬시"(退溪先生聖學十圖讚詩)를 지어 선생을 다음과 같이 예찬한 바 있다(신귀현, 2001: 61).
높고 거룩하신 퇴계 선생님 / 예 잇고 뒤 열어 고금(古今)을 꿰뚫으셨네.
열 폭 그림으로 성리학의 요결(要訣) 전하시어 / 오랜 세월 사람들 가르치셨네.
학문과 예술 주자(朱子) 못지않고 / 광풍제월 그 기상 주염계(周濂溪)와 같다네.
높은 덕망 넓은 교화 삼백 년 미치시니 / 온 누리 사람들 모두 다 공경하네.
퇴계는 대감으로 불려지기보다 '선생'으로 불리기를 원한 분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말까지는 선생(또는 스승)에 대한 존경은 교육의 시작과 마지막이었다. 지금 일본인들과 달리 우리들에게 '유감스럽게도 선생'이란 말은 큰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정재걸(2001: 119-120)은 그렇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불행했던 지난 역사에서 찾는다. 즉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서 결코 학생들의 본보기가 될 수 없었던 조선인 교사들이 해방 후 미군정의 "현상유지 정책" 아래 며칠간의 "새교육강습"을 받고 모두 정치적 사면을 받았을 뿐 만 아니라,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일제하 친일교사들이 이승만 정권의 보호아래 현직에 종사하며 각종 부정 선거에 앞잡이 노릇을 한 과정이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약화시키고 왜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교육을 사적인 소비재로 보고 자유시장에 내맡겨 경쟁력과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최근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도 다른 각도에서 선생에 대한 존경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다음과 같은 지적(같은 책: 121)은 선생에 대한 존경은 교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존경하지 못하는 선생님에게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존경하는 선생님을 가지지 못한 학생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교사에 대한 존경을 제도적으로 파괴하는 우리나라의 교육은 얼마나 비참한가?
선생이 존경받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사회에 바람직한 교사상의 정립을 위해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퇴계의 삶에서 교사상을 찾아보고자 한다. 벌써 퇴계 탄신 500주년을 넘겼을 만큼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이지만, 단절된 전통의 고랑을 넘어 존경받는 스승의 참 모습을 확인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의가 있는 일이다. 금장태(1998: ⅶ)는 퇴계를 다음과 같이 자리매김 한 바 있다: "한국유교에서 퇴계의 위치는 금강산 일 만 이천 봉 가운데 비로봉에 견줄 수 있겠다. 그 인격의 고매함은 따뜻한 빛으로 우리 삶을 비춰주고, 그 학문의 심오함은 맑은 샘으로 우리 정신을 해갈시켜 주기에 넉넉한 철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고자하는 바는 유학자로서 선생의 심오한 학문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교육자로서의 퇴계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 같은 탐구의 목적을 위해 본고는 먼저 선생의 삶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이어서 퇴계의 삶에 나타난 교사상을 그려봄으로써 존경받는 교사상의 확립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생 애
연구가들은 대체로 퇴계의 일생을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금장태, 1998: 3, 이상은, 1999: 17, 정옥자, 1998: 56). 수학의 시기, 출사의 시기, 강학의 시기가 그것이다. 각각 출사하기 전의 성장기(초년기 또는 제 1기), 벼슬길에 나간 서른네 살에서 그만두기로 결심한 마흔 아홉 살까지의 사환기(중년기 또는 제 2기), 은퇴기(말년기 또는 제 3기)를 구분한 것이다.
1. 수학의 시기
퇴계는 율곡과 마찬가지로 이름보다 호(號)가 더 잘 알려진 분이다. 선생의 성은 이(李)고,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京浩), 관향은 진성(眞城)이며, 사용한 호 가운데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계수(溪 ), 도수(陶 ) 등이 있다. 연산군 7년(1501년) 11월 25일 예안현 온계리 본가에서 탄생했다. 부친 이식(李埴)은 퇴계가 출생한 다음해 6남 1녀를 두고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이상은: 19). 퇴계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금을 변통하며 여러 아들의 공부를 뒷받침한 모친 박씨의 각별한 교육열과 훈육 그리고 학문을 업으로 삼았던 부친이 남긴 많은 책을 접하면서 자랐다. 특히 퇴계가 모친에 대해 말하기를
매양 자식들을 훈계하시되, 문예에만 힘쓰지 말고 더욱 몸가짐과 행실을 삼갈 것을 중요하게 부탁하셨다. …… 늘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부의 자식은 교육이 없다고 조소하는데, 너희들은 글공부를 백배로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조소거리를 면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先 贈貞夫人朴氏墓碣文).
그리고 숙부 이우(李愚, 호는 松齋) 또한 퇴계의 학문적 성장에 일찍부터 영향을 준 인물이다. 퇴계가 쓴 숙부의 묘갈문(墓碣文)을 보면 선생의 문학적 시적 취미와 소양은 숙부의 훈도의 영향으로 보인다. 여섯 살 때 이웃의 노인을 찾아가『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 숙부로부터『논어』를 배웠다. 송재는 글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는 어린 조카를 가리켜서, "가문을 유지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이상은: 23-24). 연보에 따르면, 열네 살 때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즐겨 외우며 그를 흠모했다. 이를 통해 학문의 초기에 문장학에 힘쓴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각각 열다섯 살 때 실개천 작은 웅덩이 속에서 돌아다니는 가재를 바라보며 쓴 시(石蟹)와 열여덟 살 때 마음을 읊은 시(詠懷)인데(이윤희, 2000: 25-26), 젊은 퇴계의 포부와 학문적 사색의 깊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
돌 지고 모래 파면 집은 절로 되고, / 앞으로 뒤로 달리는 발 많기도 하구나.
평생을 한 움큼 샘물로만 살아가니 / 강과 호수 물 얼마든 알 바 없노라.〈石蟹〉
숲 속 오두막 만 권 책 홀로 사랑하며 / 한결같은 뜻으로 십 년을 살아 왔네.
이제사 진리의 근원을 깨달은 듯한데 / 내 마음 속에서 우주(太虛)를 보네.〈詠懷〉
그리고 스무 살 때 『주역』을 연구하였는데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그 결과 건강을 해쳐서 그 뒤 오랜 세월 고생하게 된다. 스물한 살 때 허씨(許氏) 부인과 결혼하여 스물네 살 때 아들 준(寯)을 낳았다. 그 해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공부하는 선비들의 타락상에 크게 실망하고 두 달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짧은 유학동안 마음공부에 대한 옛 성현의 말씀을 정리한 책『심경』을 얻어 읽었고, 김인후(河西)와 친하게 지냈다. 스물일곱 살 때 향시의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나고 허씨 부인을 사별했다. 이듬해 봄에는 진사 회시에 뽑혔다. 서른 살에 권씨(權氏) 부인을 재취로 맞이했고, 다음 해 셋째 아들 적(寂)이 태어났다. 서른두 살에는 문과 별시에 합격했고, 다음 해에는 경상도 향거에 응시하여 일등으로 천거되었다. 서른네 살 때 대과에 급제함으로써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이상은: 25-26, 이윤희: 27).
2. 출사의 시기
형과 모친의 권고에 의해 과거와 벼슬길로 나섰지만, 일생을 통해 학문적 노력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12, 3년에 걸친 출사기에 있어 벼슬살이는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 국왕의 대내외 발표 문서를 제술하고 보좌하는 기관인 홍문관, 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 국왕에게 경전과 사서를 진강하는 경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단양·풍기 군수 두 외직을 제외하면 총 14개 아문에서 29종의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 재직기간이 가장 오랜 것으로는 본직의 홍문관 벼슬 30개월과 겸직의 승문원 벼슬 31개월이다. 다음으로 장기간을 차지한 것은 겸직으로서 경연 24개월, 춘추관 21개월이다(이상은: 31).
문과에 급제한 퇴계는 승문원에서 부정자(종9품)로 벼슬을 시작하여 정자(정9품), 저작(정8품), 박사(정7품, 34세), 교검(정6품), 교리(정5품, 40세), 교감(종4품, 43세), 참교(종3품, 45세)로 임직하였다. 예문관에서는 검열(정9품, 34세)을 지냈고, 홍문관에서 부수찬(종6품), 수찬(정6품, 39세), 응교(정4품, 44세), 전한(종3품, 45세)을 역임했다. 춘추관에서 기사관(정9품, 34세), 기주관(종5품, 40세), 편수관(정3품, 45세)으로 봉직했다. 그리고 경연의 검토관(정6품, 39세), 시독관(정5품, 40세), 시강관(정4품, 45세)으로 직무를 수행하였다.
퇴계는 홍문관 수찬, 교리, 응교로 있으면서 항상 춘추관의 기주관, 편수관을, 경연의 검토관, 시독관, 시강관을 겸하였다. 또한 정6품 이상이면 의례적으로 맡아 왕의 교서를 제술하는 지제교의 직책을 겸직하였다. 이 밖에도 시강원의 문학(종5품)과 필미(정4품), 종친부의 전적(정4품), 형조의 정랑(정5품), 사헌부의 지평(정5품)과 장령(정4품), 성균관의 전적(정6품), 사예(종4품), 사성(종3품), 의정부의 검상(정5품)과 사인(정4품) 등의 벼슬을 하기도 했다. 의정부의 검상으로 재직할 때(중종 37년 4월)는 어사로서 지방 실정을 시찰하고 임금께 복명하여 공주 판관(정3품)의 죄를 가차 없이 적발하고 다스리게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마흔 다섯 살 때 왜인의 화친 요구를 허락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는 반세기 뒤의 임진왜란을 생각해 보면 율곡의 십만양병설과 함께 그가 국가의 장래를 위하는 원대한 식견을 지녔음을 보여준다(이상은: 34, 이윤희: 46). 다음은 그 상소문의 일부이다.
조정에서는 왜국과 교류를 끊어야 한다는 말을 임금께 올리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백년을 이어온 나라의 흥망에 관계된 근심거리이고 억만 백성들의 생명이 걸린 일이라 생각됩니다(請乞勿絶倭使疏).
정계를 물러날 생각으로 퇴계는 경직에서 외직으로 나가기를 요청했다. 마흔 여덟 살 때 단양군수로 9개월 재직한 다음 풍기 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풍기군수로서 경상감사에게 글을 올려 백운동 서원이 사액(소수서원)을 받게 만들었다. 만 1년간 있다가 경상감사에게 병을 이유로 사직원서를 냈다. 마흔 아홉 되던 해 12월 사직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떠났다. 온계리 토계(뒤에 '퇴계'로 고침) 시냇가 거처(寒栖庵)에서 은퇴생활을 시작했다.
3. 강학의 시기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연구와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고자 했지만, 이 같은 은퇴의 시기에도 조정으로부터 관작이 자주 제수되었고 임금의 소명으로 어쩔 수 없이 입경해야 했다. 본직과 겸직으로 제수 받은 벼슬(품계: 재직개월 수 또는 사직 유무)은 다음과 같다(이상은, 1999, 정순목, 1993). 먼저 본직으로 홍문관의 부응교(정5품: 2), 부응교(종3품: 사직), 부제학(정3품: 사직), 사헌부의 집의(종3품: 사직), 병조의 대호군(종3품: 사직), 상호군(정삼품하: 2 + 5), 참의(정3품: 2), 성균관의 대사성(정3품: 1 + 2 + 3), 형조의 참의(정3품: 1), 공조의 참판(종2품: 사직), 판서(정2품: 사직), 예조의 판서(정 2품: 사직), 의정부의 우찬성(정2품: 사직), 중추부의 첨지사(정3품: 사직 + 4), 동지사(종2품: 사직 + 사직 + 사직), 지사(정2품: 사직), 판사(종1품: 사직) 등이다. 그리고 겸직으로 지낸 벼슬은 지제교, 경연의 시독관(정5품: 2), 참찬관(정3품: 1), 동지사(종2품: 사직 + 사직), 지사(종1품: 사직), 춘추관의 주기관(정5품: 2), 수찬관(정3품: 1), 동지사(종2품: 사직 + 사직), 지사(정2품: 사직), 승문원의 교리(정5품: 2), 예문관의 제학(종2품: 사직), 대제학(정2품: 사직), 홍문관의 대제학(정2품: 사직), 성균관의 지사(정2품: 사직) 등이다.
품계가 높아질수록 퇴계는 벼슬을 사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풍기군수사임장을 올린 49세부터 마지막 사임장(乞致辭狀)을 올린 70세까지 21년 동안 사퇴원을 낸 것이 53회나 된다. 벼슬생활에 있어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겼다. 굳이 물려나고자 한 까닭은 여러 사정이 복합되어 있다. 금장태(1998: 41)는 이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 바 있다: ① 활동적이기 보다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기질, ② 병약한 신체적 조건, ③ 학문에 전념하려는 자신의 입지, ④ 높은 벼슬을 감당할 식견과 역량이 부족하다는 믿음, ⑤ 그 시대의 사회상황 속에서 출처의 의리에 따른 판단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기대승(高峯)에게 보낸 답장에서는 자신이 벼슬에 나가는 것이 맞지 않다며, 그 이유로 ① 크게 어리석음(大愚), ② 심한 병(極病), ③ 헛된 명성(虛名), ④ 잘못 입은 명성(誤恩) 때문임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의 몸가짐이 또한 어렵게 된 까닭은 크게 어리석기 때문이요, 심한 병 때문이며, 헛된 명성 때문이요, 잘못 입은 은명(恩命) 때문입니다. 매우 어리석으면서도 헛된 명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망녕된 짓이요, 심한 병 때문에 잘못된 은명을 받아들인다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대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망녕된 짓을 한다는 것은 의리와 덕에 있어서 상서럽지 못하고, 사람에 있어서 길하지 못하며, 나라에 있어서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벼슬을 즐겨 아니하고 항상 몸을 빼려고 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닙니다(答奇明彦, 정묘 9월 21일).
퇴계의 저서들은 주로 만년 강학기에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저서(저술연령)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정순목, 1992: 68-71). 여기에는 「청량산백운암기」(28세), 「일강구목소」(41), 「관동일록」(42), 「청걸물절왜사소」(45), 「단양산수가유자속기」(48) 「유소백산록」(49), 「주자시발」(50), 「서회암시첨후」(52), 「청량산록발」(52), 「유사학사생문」(53), 「금강산유산록서」(53), 「양생설후」(53), 「숙흥야매잠주해」(53), 「계몽도서절요후」(54), 「경복궁중신기」(54), 「주자서절요」(56), 「농암이선생행장」(56), 「계몽전의」(57), 「일성록」(58), 「백록동규집해」(59), 「이산서원기」(59), 「도산잡영」(61), 「전도수언발」(62), 「성주목사황공행장」(63), 「송계원명이학통록(63), 「무이구곡도발(64), 「조정암선생행장(64), 「도산십이곡발(65), 「인심도심도」(65), 「심경후론」(66), 「회제이선생행장」(66), 「서이대용연경서원기후」(67), 「역동서원기」(68), 「무진육조소」(68), 「성학십도」(68), 「사서역의」(69), 「걸치사장」(70) 등이 있다. 이 시기의 교육활동은 다음 장에서 다룬다.
Ⅲ. 교육자로서의 퇴계
본 장에서는 강학시기에 있어 선생의 삶의 모습을 다루려 한다. 그의 삶에서 우리는 관료, 학자, 교육자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구도자적 인간상까지 볼 수 있다(윤사순, 1993: 17-30). 빈번한 관직 사퇴에서도 짐작하듯이, 그에게는 경세 지향의 '관료인의 상'보다 근본적으로 학문 지향의 '학자의 상'이 더 짙었다. 그러나 유학자에게 있어 학문과 경세의 측면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듯이, 퇴계의 교육적 삶에서 학문과 강학은 별개의 일은 아닌 것이다.
1. 퇴계의 교육활동
나는 이 길에 뜻을 두었으나, 깨우쳐 줄 스승이나 벗이 없었다. 그래서 몇 십 년간을 밤잠도 안 자고 이 길로 들어갈 문이나 처음 시작해야 할 곳을 찾느라고 헛되이 몸과 마음만 낭비하였다. 결국 마음에 병을 얻었고 이 일을 거의 폐지한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가 늦게야 비로소 그것을 깨닫게 되어서 다시금 이 큰 일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이다(퇴계선생언행록. 이덕홍 기록).
(1) 퇴계의 스승: 인용문은 심오한 공부 길이 혼자서 터득한 독학의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이웃 집 노인에게 『천자문』을, 숙부(송재공)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소년시절에 사촌형제들과 더불어 청량산 등 산사에서 독서를 하며 학문의 기틀을 닦도록 지도한 숙부는 퇴계 17세 때 별세하였다. 뚜 웨이밍교수(하바드대학교)는 퇴계가 경전을 읽는 방법은 숙부에게 전수받았고, 논증과 주석은 주자의 방법을 응용했다고 말 한 바 있다(권오봉, 1996: 20). 퇴계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이야기하는 방에서도 혼자 벽을 향해 조용히 독서할 정도로 책읽기를 좋아했다. 20세 전후하여 『주역』 연구에 몰두하여 밤낮으로 침식을 잊고 독서하여 회복하기 어려운 병이 생긴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숙부는 성리학을 가르친 스승은 아니었다. 그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도록 권장하고 특히 과거에 합격하기를 기대했다. 23세와 33세 때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나 성학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지 못했다(신귀현, 2001: 25). 『주역』을 읽기 앞서 19세 때 『성리대전』을 보았고, 23세에 성균관에 갔을 때 구해 온 『심경부주』를 읽음으로써 성학을 배우는 길을 알게 되었다. 퇴계는 이정(二程)과 주자(晦庵)가 주를 붙인 『심경부주』를 통해 심학(心學)의 연원과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 책을 신명과 같이 믿고 아버지처럼 존경했다고 술회 한 바 있다(같은 책: 22). 특히 『주자대전』을 읽고 평생 동안 존경했던 마음의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한여름에도 문을 닫고 읽기를 계속했는데, 사람들이 더위에 병난다고 경고하자, 이 책을 읽으면 가슴속에 시원한 바람이 나는 것을 느끼고 더운 줄을 모른다고 하면서, 이 책 속에 학문하는 방법이 들어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배우는 이들이 도에 들어가는 길을 알고자 할 때는 반드시 『주자대전』에서 구하여야 힘쓸 곳을 쉽게 얻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주자야말로 진정으로 성학을 가르쳐 준 마음의 스승이었다. 퇴계의 주자에 대한 존경(사숙)의 깊이는 '꿈속에서 주자를 뵈었다'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같은 책: 26).
그런데 퇴계에 있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최초의 스승이었고 심대한 영향을 주신 분이다. 출생하고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가르침도 받은 일이 없다. 다만 어머니와 숙부를 통해 아버지의 뜻과 사업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학문을 좋아하여 정진한 일과 서당을 지어 거처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자 한 사업과 여러 아들 가운데 자기가 하고자 한 사업을 이어주도록 바랐던 사실을 퇴계는 부친에 대한 행장초(行狀草)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권오봉, 1996: 65-67).
아버지께서는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뜻이 돈독하고 힘써 정진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공부하셨다. …… 친한 분에게 말씀하기시를 "내가 끝내 세상을 만나지 못한다면 여기에 서실(書室)을 지어 거처하면서 공부하려는 생도들 모아 글을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저버릴 수 없는 내 뜻이다." …… "여러 아들 중에 내 뜻을 따르고 내 업을 이을 자가 있으면 내가 비록 해 놓은 일은 없다 하더라도 한이 없겠다" 하셨다 한다(先父君行狀).
어머니인 박씨 부인은 과부의 몸으로 가난 속에 농잠으로 가계를 꾸리면서도 법도를 세웠고 부군의 유업을 아들들에게 전수시켰다. 자신의 신념과 선대의 기대를 분명하게 내세워 자녀를 교육했다. 퇴계는 어머니의 묘비명에 "나에게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은 우리 어머니이시다"라고 적었다. 그 뜻을 따른 어머니의 가르침으로는 "몸가짐과 행실에 조심하라", "남보다 백 배 더 공부하라", "어리석어 세상에 쓰이지 못할 것이니 조그만 벼슬에 그쳐라"(현감 한 자리만 하고 그만두라: 言行通錄) 등이 있었다(같은 책: 69).
뒷날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는데도 부인은 영달과 진취를 기뻐하지 않고 늘 병든 세상을 걱정하셨고, 비록 문자는 배우지 않았지만, 평소 선군의 정훈(庭訓)과 여러분이 서로 강습하는 것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서 의리를 깨우쳐 주기도 하고 사정도 밝혀 주셨다(母夫人朴氏墓識).
퇴계가 인격을 완성하고 학문과 교육을 통해서 병든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부모님의 뜻을 받든 것과 다르지 않다. 모친으로부터 받은 엄한 규율을 몸에 익히고 뜻을 세우면서 성장하여 부친의 유지인 교육사업을 성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 교육의 바른 방향과 학풍을 바로잡는 데까지 확충시켜 놓았다(같은 책: 68). 이렇게 볼 때 부모님은 퇴계의 일생동안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2) 퇴계의 교육활동: 이어서 퇴계의 교육자로서의 행적을 살펴본다. 43세 때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된 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간 적이 있는데, 이때 이미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할 생각을 가졌다. 46세 때 장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병을 얻어 관직에서 해임되고, 고향 마을 산기슭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고향에서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서울을 벗어나자는 의도로 48세 때 외직을 요청하여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임명되었지만, 세 차례 사직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송재소, 2001: 265). 50세 때 고향 토계(兎溪)의 서쪽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寒栖菴)을 지은 후 정습(靜習)이라 이름붙인 독서당에 파묻혀 연찬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를, "내 할 일은 저 높은 벼슬 아니니 / 조용히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리라 / 소원은 착한 사람 많이 만들어 / 천지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이라 했다(하창환·김종석, 2002: 88). 그리고 51세 때 시냇가 동북쪽에 계상서당(溪上書堂 또는 溪堂)을 지어 본격적인 은거생활의 터전을 마련했다. 다음은 이 때의 심경을 잘 나타낸 시이다.
몸이 물러서니 내 분수에 편안하고 / 학문이 뒤늦으니 나이 늙어 걱정이네.
시내 언덕 위에 거처할 곳 정하고 / 흐르는 물가에서 날마다 반성해 보네. <退溪>
한서암(寒栖菴)을 지었을 때(50세) 따르는 선비가 많았다. 학문을 배우려는 학도가 나날이 늘여 강학의 장소가 비좁아지자, 도산(陶山)의 남쪽에 정성을 들여 착공한지 5년 만에(60세) 도산서당(陶山書堂: 도산서원의 전신)을 완성하였다. 퇴계는 도산에 서당과 정사가 완성된 후에도 도산서당에 상주하지 않았다. 일년 가운데 절반가량은 여전히 계당에서 거쳐하였고 임종도 계당에서 맞았다. 계당은 혼자서 사색하고 수양하기에 충분했지만 많은 제자들과 강학하기에는 너무 좁았기에 새로운 강학의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같은 책: 267). 퇴계는 새로 짓게 될 건물의 구조와 규모, 건물의 배치 등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자신이 직접 그린 건물의 도면을 이문량(碧梧)에게 보내면서 조목(月川)과 의논하는 한편 공사를 지휘 감독할 중 법련(法蓮)으로 하여금 도본대로 어김없이 짓을 것을 당부했다. 도산서당을 지어 모여드는 문인(門人)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강학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특별히 힘을 기울여 가르친 것은 『계몽』(啓蒙)과 『심경』(心經)이라 알려지고 있는데, 그의 강학은 별세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학구열 못지않게 교육열 또한 높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만년에 그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후학을 가르치고 사풍(士風)을 크게 일으킨 데 있다. 이 무렵 퇴계는 서원을 통한 교육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극도로 어지러운 정치상황을 몸소 겪었던 그는 정학(正學)을 열어 인심을 맑게 하는 것만이 사회를 바로 잡는 길이라 여겼다. 정학이란 올바른 학문, 구체적으로 참다운 성리학(性理學)을 의미한다. 바른 학문을 통해 사대부의 심성을 바로잡고 이 땅의 정신풍토를 정화시킴으로써 이상사회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이우성, 1997: 526). 기존의 향교와 국학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서원 창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풍기군수 시절에 그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편액과 책을 내려달라는 서장을 쓰고 조정으로부터 사액(紹修書院)과 사서삼경, 성리대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서장인 「상심방백서」(上沈方伯書)는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단서를 여는 글이었다(정순목, 1992: 34). 그 일부를 인용한다.
나라에서 세운 학교나 향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안에 있어서 앞으로는 규칙에 얽매이고 뒤로는 공부 이외의 일에 마음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볼 때, 그 보람과 효과를 어찌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선비가 학문을 하는 경우에 서원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어진 이를 얻기 위해서도 또한 서원이 나라와 지방의 학교보다 나을 것입니다. …… 서적과 편액을 내려주시고 토지와 일할 사람을 딸려 주시어 그 힘을 넉넉하게 하시옵소서. 그러하되 또한 감사와 군수로 하여금 선비 기르는 방책이나 공급하는 물건만 감독하게 하시고 가혹한 법령이나 번거로운 조목에 얽매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서원은 한 고을 한 도의 교육장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교육장소로 될 것입니다. …… 제가 살피건데 지금 나라의 학교는 참으로 어진 선비가 맡고 있으나 지방의 향교 같은 것은 다만 이름만 갖췄을 뿐입니다. 가르치는 방법이 크게 무너져 선비들이 그 곳에서 공부하는 것을 도리어 부끄럽게 여기고 그 병폐가 매우 심하여 구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한심한 상태입니다. 서원의 교육이 힘차게 일어난다면 이제 교육 정책의 부족한 부분을 구제할 기회가 생겨 배우는 사람이 돌아가 몸담을 곳이 있게 되고 선비의 풍조가 크게 좋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 풍습이 날로 아름다워지고 임금의 뜻이 백성들에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니, 임금님의 정치에 작은 보탬만은 아닐 것입니다.
서원교육이 크게 발전한 데는 '환경의 교육성'과 '교육의 자율성' 이외에, 안으로 뛰어난 스승이 있으며 밖으로 서원에 대한 국가의 '보호육성정책'이라는 요인이 있었다. 퇴계에 의해 시작된 사액서원은 비로소 국가공인의 민간교육기관으로 등장하여 서원교육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퇴계년보」를 보면 계당과 도산서당에서 강학을 하면서도 퇴계의 서원교육 진흥을 위한 열정이 남달랐다. 서원기(伊山書院記, 迎鳳書院記, 硏經書院記後 등)를 썼고, 65세 때는 「서원십영」(書院十詠: 竹溪書院-풍기, 臨皐書院-영천, 文憲書院-해주, 迎鳳書院-성주, 丘山書院-강릉, 藍溪書院-함양, 伊山書院-영주, 西岳精舍-경주, 畵巖書院-대구, 總論諸院)을 지었다. 서원십영 총론으로 읊은 글은 다음과 같다: "늙도록 경서연구 도(道)를 듣지 못했더니 / 다행히도 여러 서원 사문(斯文)을 빛내어라 / 어이하여 과거(科擧) 길이 온 바다를 뒤집어서 / 나의 시름 일으키어 구름처럼 가리는고"(이황, 1999: 146-149). 창건에 앞장선 역동서원에서 『심경』을 직접 강론하기도 했다(70세). 만년에 서원 건립운동을 벌여 학풍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정순목(1986: 281-282)의 평가처럼 서원교육운동은 사학을 통한 순수한 진리탐구와 인간적인 진실추구를 위한 초석이며 우리나라 사학정신의 연원적인 등불이 되었다.
퇴계의 교육적 기여는 사학의 진흥에만 그치지 않는다. 계상서당에서 1년을 보낸 뒤 52세 때 퇴계는 명종의 부름을 받고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지만 석 달 근무하고 병으로 사임하였고, 다음해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임금은 학교교육이 황폐하고 해이해짐을 개탄하면서 공부를 권장하는 세부규정을 제정하여 실행하라는 명을 내렸다. 퇴계는 학풍을 쇄신하고자 「유사학사생문」(諭四學師生文)을 발표하여 사부학당(四學)의 스승과 생도들의 각성을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이윤희, 2001:177-180). 이 글은 그 당시와 다른 상황이라 하더라도 오늘날 교사와 학생의 관계와 역할을 반성적으로 점검할 때 참고할 만한 기준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며 솔선수범하는 곳이다. 선비는 예의와 의리를 바르게 지키는 본보기이며, 나라의 원기를 불어넣는 터전이다. 나라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선비를 양성하는 것은 그 뜻이 매우 크다. 선비가 입학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데 어찌 구차스럽게 천박하고 조잡스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마땅히 서로 예의로써 앞장서서 스승은 엄하고 제자는 공경하여 저마다 그 도리를 다해야 한다. 엄하다는 것은 사납게 하는 것이 아니며 공경한다는 것은 굴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가 예의에 바탕을 두고 예를 실행하라는 뜻이다. 예를 행한다는 것은 복장을 단정히 하고 음식을 절도에 맞게 먹으며 인사예절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요즘의 학교실정을 살펴보건대 스승과 제자 모두가 지켜야 할 도리를 잃고 있다. 학칙을 강(講)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학령마저 크게 무너졌다. 스승은 엄하지도 못하고 제자는 공경할 줄 모르고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 국학(國學)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우가 없다 할 수 없으나 사학(四學)이 더욱 심하다. …… 그리고 그 스승들이 만일 고루하여 옛 습관에 빠져 잘못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삼가 부지런히 힘쓰지 않는다면, 나라에서 정한 잘하는 자를 높여주고 잘못하는 자를 벌하는 엄격한 규칙이 있으니, 이는 장관이 일시적으로 사정을 봐 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모두가 노력하고 소홀히 하지 말기 바란다.
2. 제자와 스승 퇴계
(1) 퇴계의 제자: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은 선생으로부터 배운 제자들에 관한 기록(1914년 간행)인데, 1권에서 5권까지 309명에 이르는 문인들에 관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기록 내용은 문인의 성명, 자, 호, 본관, 거주지, 생년, 선생과의 관계, 관력을 비롯한 인적 사항과 사제관계를 뒷받침하는 서(書), 시(詩), 만사(輓詞), 제문(祭文) 등이다(이황, 1999-17: ⅹ-?). 퇴계는 이미 21세 때 스승이 되었고 그 첫 제자는 장수희(果齊)였다. 36세 때 성균관 전적 겸 중학교수가 되어 짧은 기간이나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39세 때 모친상으로 고향에서 상주생활을 하는 동안 15세의 조목(月川)을 문하에 두었다. 40세 때는 임금에게 경서를 강독하는 경연시독관을, 42세 때는 세자에게 독서를 지도하는 시강원문학, 국립대학 부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사성의 직책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지도하게 된 것은 풍기군수를 사임하고 고향에 한서암과 계상서당을 지어 강학을 한 다음이었다. 도산서당을 건축하였을 때는 각처에서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 공부를 했다. 제자들 가운데는 풍기군수 시절 대장장이 배점(裵漸)이 있는가 하면, 정승이 된 사람(10명), 대재학이 된 사람(10명), 시호를 받은 사람(37명) 등 다양한 인물이 있었다. 학문과 정치적 경륜이 높은 제자로는 이이(栗谷), 기대승(高峯), 정철(松江), 윤두수(梧陰), 박순(思庵), 성혼(牛溪), 정구(寒岡), 유성룡(西厓), 김성일(鶴峯), 정탁(藥圃) 등이 있다(신귀현: 37-39). 그리고 퇴계의 학문은 제자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는데, 몇 가지 자료(금장태·고광식, 1984, 이인화, 1993 등)를 참조하여 "퇴계학파의 계보"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교육의 형식으로서 스승과 제자가 되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직접 급문(及門)하여 배움을 청한 것이 대표적인 형식이지만, 다만 서한으로 학문적 가르침(問目)을 받거나,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고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 사숙제자(私淑弟子)도 있다. 퇴계를 사숙한 실학자로 성호(李瀷)을 꼽을 수 있다. 성호는 퇴계를 연구하고 흠모해서 제자인 순암(安鼎福)과 함께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짓고, 그 서문에 퇴계를 '퇴계자(退溪子)', '이자(李子)'라고 불렀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성과 호에다 '자(子)'자를 붙인 최초로 경우이다. 성호의 저술을 보면, 그의 퇴계 선생에 대한 인간적 경모와 학문적 사숙의 염원이 간절하며, 그의 사상적 기반이 퇴계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사실은 놀랄만하다. 한번 맺은 사생(師生)관계는 영원한 것이고 이는 일시적인 이해나 편법에 의하여 바뀌는 것은 아니었음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퇴계와 그의 제자들은 서로 진리와 인간 속에서 만나 우리 민족사에서 거대한 정신 산맥을 이룩하였다. 퇴계의 인격과 학문이 높아질수록 배우고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늘어났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문도들은 대부분 이미 일가를 형성한 기성의 유명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퇴계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일삼지 않았다. 그 가운데는 10대의 초학자들도 있었으나 그들 역시 퇴계의 문하에 입문할 정도이면 수재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교육방법은 교재중심이 아니라 주제중심이었고 강의가 아니라 토론의 형식이었다(정순목, 1993: 135-140).
(2) 퇴계의 교육자상: 퇴계는 한번도 남의 스승이라고 내세운 적이 없었다. 언행록을 보면 정성과 공경으로 후학을 가르쳤으며, 친구처럼 대하여 끝내 스승을 자처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좋은 스승이란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마치 깊은 골짜기(幽谷)에서 남모르게 향기를 풍기는 난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같은 책: 64). 스승으로서 퇴계의 참 모습을 밝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좁은 인식과 주관적 관심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간단히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배움의 즐거움을 누린 스승이었다. 성호는 "우리나라에 퇴계가 있다는 것은 중국에 공자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권오봉, 1988: 348-349). 공자는 겸양의 덕을 실천했지만,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점만은 자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배우는 즐거움으로 식사조차 잊고 늙어가는 근심도 모를 정도였고(『논어』술이 18), 자신 보다 배우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으리라 단정하기도 했다(『논어』공야장 27). 그 누구보다도 배우는 즐거움을 누렸다는 말이다. 그러한 공자이기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얻을 수 있기에 남의 스승이 됨직하다"(『논어』위정 1)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정약용, 1985: 58). 스승으로서 퇴계의 삶 또한 이런 공자와 다르지 않다. 도산서당에서 읊은 다음 시는 글 읽는 경건한 모습과 학문하는 즐거움을 잘 보여준다.
산은 텅 비고 온 집이 고요하여 / 밤이 차가울수록 서리 기운 높으니라
외로운 베게 위에 잠 못 이루니 / 일어나 정좌하고 옷깃을 바루노라.
늙은 눈 비벼 뜨고 가는 글자 보려 하니 / 짧은 등경 촛불 켜고 여러 차례 돋우네.
글이라 그 가운데에 참된 맛 심어 있어 / 살지고 배부름이 고기보다 낫더구나.〈山堂夜起〉
퇴계는 평생 동안 배우는 데 부지런하고 후배나 제자들에게 묻기를 좋아하였다. 더욱이 바른 의견을 들으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견해를 고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26세 연하의 젊은 학자 기대승과 여러 해 동안 사단칠정을 논변하는 과정에서 잘 볼 수 있다. 금장태(1990: 37)자 적절히 지적했듯이, 퇴계는 일생 동안 혼자서만 공부하지 않고 많은 학자들이나 제자들과 교유하고 토론하면서 의견을 나누었기 때문에, 결코 고루하거나 편협한 독단에 빠지지 않고 어느 학자보다도 넓고 깊은 학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퇴계의 배움의 대상은 경전이나 사람에만 그치지 않았다. 자연 또한 스승이자 벗이었다. 회갑 되던 해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節友社)라는 조그만 화단을 만들어 매화·국 화·소나무·대나무 등 꽃과 상록수를 심고 자신과 절의를 함께하는 벗으로 삼아 절개 곧고 향기로운 기상을 기르고자 했다. 그리고 도산 서당 앞에 정우당(淨友塘)이라는 조그만 연못을 파서 연을 심었다. 퇴계는 시에서 그 가운에 "매화가 특히 자신을 사랑한다"(梅君特好我)고 하였고, "솔과 국화는 도연명의 뜰에서 대와 함께 셋이러니 / 매화형은 어이 참가 못했던고(梅兄胡奈不同參)"(금장태, 1998: 28-29), 하여 맑고 그윽한 향기를 지닌 매화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퇴계는 그 가운데 사람의 맑은 성품을 기를 수 있다는 견지에서 자연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산놀이와 뱃놀이 그리고 시를 읊는 일은 그에게 다만 운치 있는 풍류 생활만이 아니다. 다음 인용문(김종석·하창환: 125-126)은 이런 견지에서 각각 산놀이와 독서가 일치됨을 밝힌 시(같은 책: 32)와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논어』옹야 21)"는 구절에 대한 퇴계다운 해석이다.
독서가 산놀이와 비슷하다 하지마는 / 이제 보니 산놀이가 독서와 꼭 같아라.
공력 다할 때는 아래로부터이고 / 얕고 깊음 아는 것도 모두 자기에게 달린 게지.
일어나는 구름 바라보며 오묘한 이치 알아채고 / 물줄기의 근원에 이르러 시초를 깨닫는다네. <讀書如遊山>
나는 생각건대, 이락(二樂: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려고 하면 어진 사람·지혜로운 사람의 기상(氣象)과 마음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진 사람·지혜로운 사람의 기상과 마음을 구하려고 하면, 다른 데서 구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아 그 깊은 곳의 진실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 내 마음에는 어짐과 지혜의 씨앗이 있다. 그것이 마음속에 채워지고 바깥에까지 확산될 때, 자연스럽게 깊이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게 되며, 구하려 하지 않아도 마음에 어진 사람·지혜로운 사람의 즐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어짐과 지혜의 씨앗을 확충하는 것을 힘쓰지 않고서, 오로지 높이 솟은 나무가 무성한 산을 보고 어진 사람의 즐기는 것을 즐긴다고 하고, 거칠게 도도하게 흐르는 냇물을 보고 지혜로운 사람이 즐기는 것을 즐긴다고 하는 것은 심하게 틀린 것이며,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멀어질 것이다.
둘째로, 겸손함과 열린 마음의 스승이었다.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쓴 다산(정약용)은 퇴계의 서간들을 읽는 가운데 퇴계의 사람됨과 학문, 인물에 대한 평가들을 배우며 스스로를 깨치고 살피고자 했다(이광호, 1997: 10-12, 고승제, 1997: 154-161). 이 책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 사건이 터지고 다산이 금정찰방(金井察謗)으로 좌천되었을 때(1795년) 하루 한편씩 서간을 읽고 느낌과 생각을 적은 글이다. 그리고 '사숙'(私淑)이란 말은 직접 배우지는 못하고 단지 선현의 글을 혼자 읽어 모범이 되는 삶을 배운다는 뜻이기에, 글의 제목 가운데 이미 퇴계를 스승으로 받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산은 퇴계를 반드시 '선생'이라고 칭했는데, 그 당시 선생이란 칭호는 학문 세계에서 최고의 존칭어였다. 다산의 극찬이다.
크도다. 선생의 마음이여. 학문을 한다고만 하면 누구나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여 이렇게 길러주니, 가르침을 받기를 즐기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 편지를 읽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춤추고 무릎을 치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온화한 덕성은 마치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놀며 자연의 조화를 이룬듯하다(「도산사숙록」,『여유당전서』 1-22-3).
여기서 다산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한 편지는 남명(조식)이 "학자가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인다"고 하여 넌지시 비판하는데도 답하는 편지에서 퇴계가 자성하는 태도로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는 내용의 편지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준경(李浚慶)에게 보낸 답장을 읽은 다산은 퇴계의 겸손함에 고개 숙이고, 노수신(盧守愼)에게 보낸 두 번째 답서에서 "내가 지난번 매우 잘못 보았으니, 이제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말하는 겸허한 자세와 교육자적 인품에 감복하였다. 또한 중구(李湛)에게 답한 편지에서 "사람들은 항상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고 말하는데 나도 비슷한 탄식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포부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지만, 나는 나의 공소(空疎)함을 알지 못하는 것을 탄식한다"는 글을 보고 다산은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이니 내가 선생이 아니고 누구에게 귀의할 것인가!"라고 감격하였다.
셋째로, 공정함과 평등한 마음의 스승이었다. 다산은 퇴계가 내린 인물평에 대하여 그것은 "지극히 크고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다" 하였고, 우리들에게 감동과 존경을 일으키는 것은 선생의 학문과 삶이 '진지(眞知)'와 '실천'에 기초를 둔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다산은 퇴계의 학문적 태도는 만세 학자의 법도가 되며 천하에 용기 있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극찬하였다(이광호: 441).
학문은 천하에서 공적인 것이다. 도에 배치되는 말이면 대인과 군자에게 나온 말이라도 오히려 존경을 받을 수 없다.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 한 말이야 어떠하겠는가! 이치에 합당한 말이면 비열하고 용렬한 사람이 한 말이라도 오히려 드러내야 하니 하물며 이 보다 나은 사람의 말이야! …… 후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됨이 바르지 않으면 그가 창술한 내용이 堯·舜·周·孔의 말이라도 오히려 버렸다. 그들이 인정하는 사람이면 그들이 신불해·한비자·노자·불교의 말을 인용하더라도 감히 문제 삼지 않았다. 文純公 李夫子만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그의 말만 살폈을 뿐 사람됨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으며, 오직 도를 헤아렸을 뿐 자기의 사심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돈 정민정의 『심경부주』를 취하여 드러내고 존중하고 믿어 학자들에게 만세의 법이 되는 길을 보여주었다. 선생의 마음가짐이 크게 공평하고 지극히 바르지 않겠는가! 마음속으로 너는 그것으로 육상산을 편드는 가치를 세우지만, 나는 주자의 법도를 따르리니, 내가 그에게 무엇을 문제 삼으리. 아 천하의 커다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으리오(「심경발질서」,『여유당전서』1-13-31).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퇴계는 노소귀천의 신분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권오봉, 1996: 23-25). 도산서당을 찾아오는 아이, 노비, 아전, 관리,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방 밖에 나가서 맞이하고, 그렇게 전송하며 어떤 사람이든 꼭 일어서서 절을 하고 만났다. '신분의 차이가 있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퇴계는 "주자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으나, 오늘날은 어른보다 아이가, 배운 사람보다 안 배운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는 낮은 사람이 오히려 예절이 있고 착하니, 나는 착한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공경한다"고 답하였다. 역동서원을 건립한 뒤 향중 사람의 모임에서는 벼슬한 높낮이가 아니라 나이 차례로 낮도록 향좌법(鄕坐法)을 만들어 시행했는데, 이는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자 김근공은 서자(庶子)의 신분이지만 퇴계는 손자 이안도(蒙齊)로 하여금 용수사 절에서 함께 공부하며 그의 학행을 본받게 한 적이 있다. 또한 순흥 고을 대장장이 배순(裵純 또는 裵漸)은 상민(常民)이었지만, 소수서원에서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퇴계가 풍기군수를 떠난 뒤에도 스승의 철상(鐵像)을 만들어 모시고 글공부를 하였고, 퇴계가 별세하자 3년간 복을 입었다. 존비귀천의 질서가 엄격한 전통사회에서도 교육자로서 퇴계의 사람사랑은 이처럼 차등 없이 평등한 것이었다.
Ⅳ. 결 론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 희박해지는 현상은 분명히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교사를 존경한 일은 교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도덕적으로 크게 성장해야 할 학생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풍토의 사회적 조성을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러나 교사가 받는 존경심과 교육적 권위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역사적인 조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교사 스스로의 교육적 삶과 철학에 달린 것이 아닌가! 권위 있고 존경받는 교사의 지위는 그 자신의 삶 속에서 전인격적인 교육을 통해 이룬 성취가 아니겠는가! 그런 성취의 전형을 우리는 퇴계의 교육적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글 가르치는 선생은 만나기 쉽지만, 사람됨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가 어렵다'(經師易遇 人師難逢)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진정으로 교사다운 교사가 드물다는 말이다. 글만 가르치는 선생(경사)과 달리 사람됨을 가르치는 스승(인사)는 스스로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퇴계의 삶은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이었다. 그 길에서 보여준 끊임없는 학문적 정진과 인격적 성취는 민족의 스승으로서 존경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퇴계의 포부는 마음을 맑고 착하게 하고 바른 학문을 여는데(淑人心 開正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이 학문의 근본적 가치임을 확신했다. 퇴계가 벼슬에 나가기를 어려워하고 언제나 물러서고자 한 까닭은 무엇보다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 제도와 사회풍조는 교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그런 교육에 헌신하는 학문적 활동(위기지학)을 경시하고 있다. 교사와 학생은 사회적 출세와 경제적 성공의 가치를 지향하는 공부(위인지학)에 기울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교육적 가치의 불균형 또는 본말전도가 심각하다. 이런 견지에서 스승으로서 존경받는 퇴계의 삶은 학문적 가치와 교육적 방향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 글에서는 스승으로서 퇴계의 존경할 만한 면목을 간단히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했다. 배우는 즐거움, 겸손한 마음, 평등한 마음이 그것인데, 그 각각 교사들에게 주는 시사점을 살펴보자. 첫째로, 교사란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앞서(또는 동시에) 진실로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환기시켜준다. 배우는 것을 즐긴다 함은 나날이 새롭게 성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학문적 예술적 인격적 향상을 위한 배움의 나날은 가르치는 교사 자신을 위한 보람된 일인 동시에 배우는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생활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로, 교사란 진리 앞에 마음을 열고 한없이 겸허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기술적 지적으로 박식한 사람이 되기는 쉬울지 몰라도 언제나 교사 자신의 견해를 허심탄회하게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태도를 지니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학문과 교육에 힘쓰는 교사라면 그 태도만으로도 학생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로, 교사는 제자들에게 공평한 사랑과 관심을 나누어야 함을 새삼 일깨워준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취향과 따라 특정한 학생을 편애(또는 편증)하는 일이 없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차를 존중하되 크고 공정한 마음으로 교육에 임할 때 교사는 진정한 권위와 존엄성이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가 지녀야 할 이와 같은 세 가지 자세는 서로 분리됨 없이 내적으로 상관되어 작용하는 것이다.
물론 퇴계의 교육적 삶에서 시사 받는 이 세 가지 마음은 오늘날 교사의 존경심 회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스승으로서 퇴계의 진면목은 여러 각도에서 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 측면만으로 다 밝힐 수도 없을 것이다. 또한 교사로서 삶의 자세에 초점을 둔 이 글은 교사 자질론적으로만 검토하는데 그치고, 교육방법론적 측면에서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리고 교육목적론적 견지에서 퇴계의 교육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또한 앞으로 다루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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