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나라, 터키(Turkey)
터키인들은 우리나라를 ‘칸카르데쉬(피로 맺어진 형제)’라고 부른다. 터키인들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지칭하는데 대해서 우리는 이들이 한국전쟁 때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물론 한국전쟁 때 참전국이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는 될 수 있다.
터키인의 조상은 훈족과 튀르크족으로, 흉노(匈奴)와 돌궐(突厥)이다.
고대 역사서(歷史書),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군고기(檀君古記) 등에 의하면 동북아시아에서 활약한 흉노, 돌궐, 여진, 말갈, 몽고 등은 유목민인 한단족(桓檀族)의 동일 뿌리를 가진 동일 계열의 같은 민족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터키의 국사교과서에 ‘터키는 고려를 세운 민족과 동일한 유목민족이 이주해서 세운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터키인들은 스스로 조상이 중앙아시아에서 왔다고 말하며 훈족과 돌궐의 후손이라고 한다. 본래 돌궐과 훈족은 인종적으로 아랍족이 아닌 몽골로이드에 속했다. 서쪽으로 이동 후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면서, 아랍인이나, 코카소이드에 속하는 페르시아인과의 혼혈이 생김으로써 현재와 같은 서구적 외형과 인종을 이루었다. 그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거나 복속시키면서 유럽계 제민족과의 혼혈이 급증하여, 오늘날에는 외형상 유럽인과 큰 차이는 없다.
터키인 http://discord.tistory.com/150
터키인의 조상은 고조선 시대부터 이웃에 살던 민족으로 우리나라와 동맹을 맺어 중국의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의 침입에 대항하기도 했으나 싸움에서 패하여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주하여 터키에 자리 잡았다. 또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나는 터키인들과 동유럽 일부민족들은 우리민족과 뿌리가 같은 한단족(桓檀族)의 후예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터키인들은 그들의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아 이러한 근거로 그들이 한국을 ‘형제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 ‘발해를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함께 세운 나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분명히 말갈과 고구려는 동일 민족이었지만, 변방인(邊方人)을 지칭하는 말로 ‘말갈’이라 쓰였지만 같은 혈족이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터키가 한국전쟁 때 참전한 이유 때문에 형제국’이라고 알고 있다.
정말 한심한 한국 역사 교육이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세계적으로 열심히 교육을 시키고 있으면서, 이것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터키(터키공화국 Republic of Turkey)는 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이다.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동,서양의 교차로에 있어 동,서양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나라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심한 변화를 겪었다.
터키의 시작은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6500년경으로, 아나톨리아 중앙부 차탈허유크에 최초의 부락이 발생한데서 비롯된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청동기 문화가 이곳에서 발달하였다.
기원전 1650년경에는 세계 최초의 철기 문화를 가진 히타이트 왕국이 등장하여 번영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에는 프리기아, 우라르투, 러시아, 리디아, 이오니아, 페르시아 등의 왕조가 차례로 등장하였다가 곧 사라졌다.
알렉산더대왕에게 지배를 받았으나 그의 사망 후에 카파도키아, 셀레우코스, 페르가몬 등의 3개 왕국으로 분립, 존재하다가 기원전 2세기 말부터 1세기 초 무렵 로마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로마의 분열이 일어난 395년에는 동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게 된다.
11세기에는 셀주크튀르크족이 강성하여 대부분의 아나톨리아 지역까지 그 세력을 떨쳤으나 14세기 몽골이 침입하면서 멸망한다. 이후 1453년 오스만튀르크족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때의 오스만튀르크의 영토는 서아시아, 동유럽, 북아프리카까지 광범하였다.
16세기의 전성기 후에 오스만튀르크도 19세기 경부터 쇠퇴하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함께 패전하였다.
1923년 10월 29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게 된다. 수도를 앙카라로 정한 터키는 과감히 친서방 개방정책을 펼치고 1952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는 등 발전을 거듭하였다.
터키는 아나톨리아 고원과 그 주변의 여러 산맥과 이들을 둘러싼 해안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고원은 동쪽으로 갈수록 높아져 최고봉인 아라라트산(5,185m)에 이른다. 아라라트산에서 흑해를 따라 폰투스산맥, 지중해를 향해서 남서쪽으로 토로스산맥과 안티토로스산맥이 달리며 아나톨리아 서부에는 서(西)아나톨리아산맥이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다. 아라라트산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이 산 정상에 도착하였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안티토로스산맥 남쪽의 평야는 시리아, 이라크로 이어져 있으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발원한다. 이스켄데룬만(灣)에 면한 아다나평야는 비교적 넓고 세이한, 제이한 양 하천이 안티토로스산맥으로부터 운반해 온 토양을 퇴적하여 매우 비옥하다.
터키는 유라시아판, 아프리카판, 아라비아판이 만나는 '지중해 지진대'에 포함되어 있다.
흑해, 마르마라해, 에게해 연안은 제1급 지진대에, 이스탄불 지방은 제2급 지진대에 속한다. 최근 이들 지역에 여러 차례 강진이 발생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999년 8월 수차례의 강진 발생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
아라라트산
터키 주변의 판(Plate)의 구조
지도상의 선들은 판의 경계선으로, 이렇게 갈라진 경계선에서 화산, 지진활동이 일어난다.
적색 점은 화산, 회녹색 점은 지진 발생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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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기후는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연안부는 더운 여름과 따뜻한 겨울이 특징인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띠며 대체로 많은 강수량을 보인다. 반면에 아나톨리아고원의 내륙 지방은 주변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지중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이로 인해 기후가 건조하며 곳에 따라 반사막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냉대기후인 아르메니아고원 지역은 겨울철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며 눈이 많이 내린다. 동부의 아나톨리아 지역은 여름철이 서늘하며 겨울철 또한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터키는 서남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나라이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농목업에 종사하고 있다.
국민총생산과 수출의 대부분을 농업이 차지한다. 경지가 국토의 34%를 차지하지만 대부분이 소농이며 농업기술, 관개시설이 뒤떨어져 토지 생산성이 낮다. 주요농산물은 밀, 보리, 옥수수 등의 곡물류이다. 특히 밀은 경작면적의 약 90%를 차지한다. 상품작물로 목화와 담배는 주요 수출품이다.
지하자원이 풍부하지만 석탄, 철광석, 크롬광 외에는 조사, 개발이 뒤져 있다. 석유는 동부 시리아와의 국경 근처에 유전리 있지만 국내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여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터키 주민의 대부분은 터키인(약 80% 터키에 거주하거나 터키어를 구사하는 튀르크계 민족)이며, 그 외 소수민족으로 쿠르드인(약 17%),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있다.
공용어는 터키어이며, 그밖에 쿠르드어, 아랍어, 그리스어 등도 사용되된다. 대도시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도 소통된다.
종교는 수니파(派) 이슬람교도가 99.8%를 차지하며, 나머지 0.2%정도가 그리스도교도, 유대교도이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동서양문화가 교류되었기 떄문에 그리스와 로마시대로 부터 오스만튀르크시대까지 수 많은 유물과 유적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우리나라로 부터 먼 거리에 있기 떄문에 사전에 세밀한 여행계획을 세워 장기적으로 머물면서 관광을 해야할 것이다.
여행시기는 9-10월이 적기이다. 춥거나 덥지 않아 여행하기에 적합하다. 6-9월은 고원지대를 관광하기에는 좋으나 그 외의 지역에서는 기온이 높아 여행하기 불편하다.
터키와 우리나라는 사증면제협정이 맺어져 있어 관광의 경우 3개월 동안 비자 없이 체류 가능하다.
치안은 비교적 잘 되어 있어 여행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관광지가 많은 서부는 치안이 비교적 좋아 대체로 안전하다. 반면에 동부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인종과 종교 문제 등으로 치안이 불안하다. 특히 터키 동부 및 동남부 지역, 일부 대도시에서 쿠르드 무장독립단체인 PKK, 알카에다, 최근 IS 등에 의한 테러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특히 국제깡패인 IS가 점거하고 있는 시리아와의 접경지역은 조심해야 한다. 또한,
이스탄불에도 호객꾼들이 많은데 여행자를 가장하여 관광객과 친해진 뒤 음식물에 약물을 섞어 귀금속 등 중요한 물건을 훔쳐가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스탄불(Istanbul)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렀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앙카라로 수도가 이전한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관계로 그리스, 로마,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남아 있는 보물창고이다. 이스탄불에 산재해 있는 많은 유적을 관람하다 보면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니, 사진과 메모를 남기는 것이 효과적이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5XXXXX0000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akka&logNo=220557392114
술탄아흐메드 자미(Sultan Ahmed Mosque)
이스탄불의 랜드마크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슬람 사원이다. 터키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수많은 이슬람 사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아야 소피아 성당과 마주보고 있다. 야간에는 두 곳 모두 조명을 밝혀 이스탄불의 구시가를 더욱 환상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술탄아흐메드 자미는 오스만제국의 14대 술탄인 아흐메드 1세의 명으로 1609년 착공해 1616년 완공되었다. 아흐메드 1세는 술탄아흐메드 자미가 완성된 지 1년 후 세상을 떠나서 이스탄불에서 술탄의 이름을 딴 마지막 자미로 남았다.
술탄아흐메드 자미는 오스만제국 최고의 건축가였던 미마르 시난의 수제자인 마흐메트 아아가 설계를 맡았다. 둥근 천장의 돔과 첨탑(미나레) 6개가 특징이다. 크고 작은 돔이 층층이 겹쳐진 우아한 외관이 인상적인데, 특히 중앙에 위치한 돔은 직경 27.5m, 높이 43m의 거대한 크기가 시선을 압도한다.
술탄아흐메드 자미는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벽과 기둥이 푸른색 이즈니크 타일 2만여 장으로 장식되어 유래한 이름이다. 자미 내부는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푸른색 타일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자미 안쪽 중앙에 설치된 미흐랍(Mihrab, 메카 방향을 향해 있는 벽감)에는 메카에서 옮겨 온 성스러운 돌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세이드 카심 구바리가 타일 위에 쓴 코란의 구절들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터키 최고의 관광지이므로 이른 아침부터 입장을 대기하는 방문객들이 많다. 다른 이슬람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술탄아흐메드 자미에 입장하려면 복장에 주의해야 한다. 엄숙하고 경건한 종교 시설물이므로 피부가 과다하게 노출되는 옷은 피해야 하며 여성은 반드시 머리카락을 가려야 한다. 여성들의 경우, 자미 관리인들이 헤자브 대용으로 하늘색 천을 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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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소피아 성당(Hagia Sophia Museum)
트람바이 술탄아흐메드역에서 하차, 술탄아흐메드 자미 맞은편에 있다.
오늘날 비잔틴미술의 최고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는 아야소피아 성당은 360년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 때 세워졌다. 이후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부터 5년에 걸친 개축 공사로 현재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성당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운반해 온 기둥,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이용해 건설되었다.
아야소피아(Hagia Sophia)는 ‘성스러운 지혜’를 뜻한다.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이었다. 거대한 중앙 돔은 직경 31m, 높이 54m에 달한다. 이곳은 원래 성당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제국에 정복당한 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오스만 정복자들은 성당 건물 주위에 이슬람식 첨탑(미나레)을 세웠고, 내부의 모자이크화는 회벽과 코란의 문자들로 덮였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성당의 흔적과 이슬람 사원의 건축 양식이 혼재되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돔 아래 걸린 직경 7.5m 크기의 검은색 원판에 새겨진 강렬한 금색 글씨는 이슬람의 4대 초대 칼리프의 이름이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성당은 1935년 박물관으로 다시 개조되었다. 현재 이곳의 정식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며 아름다운 모자이크 벽화가 특히 유명하다.
아야소피아는 외부 복도와 내부 복도, 본당 1~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 왼쪽 안에 있는 나선형 통로를 지나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면 금색으로 반짝이는 모자이크화를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다. 모자이크화는 9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의 성상 파괴 이후 그려진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최후의 심판에 임하는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아야소피아 성당의 출구 뒤편에는 비잔틴제국의 황제들이 성모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아야소피아 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나타낸 모자이크화가 있다. 성당 내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눈여겨 찾아 보아야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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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
신시가지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에 있다.
19세기 중엽, 서구화를 통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오스만제국의 부흥을 꾀했던 압둘 메지드 1세가 건설한 궁전이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작은 만을 메우고 정원을 조성해 '가득 찬 정원'을 뜻하는 '돌마바흐체'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해안을 따라 600m가량 길게 뻗어 있어 '바다 위의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재된 돌마바흐체 궁전은 웅장하고 화려하다. 동양적인 형식미가 돋보이는 톱카프 궁전과 대비되는 서양식 궁전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건설되었고 내부 인테리어와 정원도 프랑스식이다. 오스만제국 말기의 술탄들은 톱카프 궁전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도 영빈관으로 이용된다.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 285개, 홀 43개, 발코니와 목욕탕이 각각 6개 있다. 규모는 톱카프 궁전보다 작지만 눈길을 끄는 볼거리가 많다. 궁전 건립에 금 14톤과 은 40톤이 사용되었으며 샹들리에 36개, 크리스털 촛대 58개, 명화 60여 점, 시계 156개, 화병 280개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실내를 장식한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각지에서 수입한 것이다. 바닥에는 최고급 수제 양탄자가 깔려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든 시계가 9시 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춰 있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의 사망 시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는데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 집무 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아타튀르크의 서거일이나 주요 국경일에는 아타튀르크가 머물던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방을 특별히 공개하기도 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내부를 견학할 수 있다.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대기 시간을 포함해 궁전을 전부 둘러보기까지 약 1시간 30분~2시간 소요된다. 관광객이 붐비는 여름 성수기에는 방문 시간을 여유있게 계획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http://blog.daum.net/j68021/13747873
히포드롬 광장(Hippodrome Square)
술탄아흐메드 자미의 서쪽에 있는 3세기 초에 건설된 원형 경기장 터다.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203년 로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검투 경기장으로 만들어 졌으나 그후 10만 명 정도를 수용하는 전차 경기장으로 변모하였으며 비잔틴제국의 중요한 국가행사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인 532년,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니카의 난’이 일어나자 폭도들을 진압하고 처형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스탄불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변신한 히포드롬 광장에서는 유서 깊은 기둥 3개를 볼 수 있다. 광장 북쪽에 있는 기둥은 이집트 카르나크 아몬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집트 오벨리스크’라고 불린다. 이 오벨리스크의 기단에는 경기를 관전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오벨리스크 건립에 관한 비문도 남아 있다. 광장 북쪽 끝에는 19세기 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에게 선물한 분수대가 있다. 오리엔탈 특급 열차로 이스탄불까지 운반되었다고 한다.
광장 한가운데는 큰 뱀들이 서로 엉켜 있는 청동 기둥이 서 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그리스인들이 제작한 전승기념비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광장 남쪽의 오벨리스크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인 4세기에 처음 세워졌으나 제4차 십자군의 침입 당시 파괴되어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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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
보스포루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평지에 위치한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가 건설을 시작해 1467년 메흐메드 2세 때 완공되었다. 톱카프는 ‘대포 문’을 뜻하는데 과거 해협 쪽에 대포가 놓여 있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오스만제국 때 세워진 톱카프 궁전은 단순한 왕족의 거처가 아니라 술탄과 중신들이 회의를 열어 국가 정치를 논하던 장소였다. 당시 궁전에 거주하는 시종과 군사, 관료의 수만 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궁전 내부는 정원 4개와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증, 개축으로 오스만 건축 양식의 변화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볼 수 있다.
제1정원이 가장 넓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차 규모가 작아진다. 각 정원에는 회의실, 알현실, 교회,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고 술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전시실도 갖추어져 있다. 볼거리가 많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아야소피아 성당의 북동쪽에 자리한 황제의 문으로 입장하면 제1정원이 나온다.
정원 왼쪽에 보이는 ‘성 이레네 성당’은 아야소피아 성당이 건설되기 전 세워졌으나 ‘니카의 난’으로 소실되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오스만제국 시대에는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문을 지나 제2정원에 자리한 하렘(Harem)은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만의 공간이었다. 술탄과 거세한 환관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통로로 이어진 하렘에는 약 400개 방이 있었다고 한다. 하렘의 모든 창에는 철창이 달려 있는데, 이는 외부의 침입과 여성 노예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하렘 입장권은 별도이며 가이드 투어로 둘러볼 수 있다.
제2정원 내 오른쪽에 위치한 굴뚝이 늘어선 건물은 요리사 수백 명이 음식을 준비하던 주방이다. 현재 도자기 전시실로 사용된다. 전시된 도자기 수가 무려 1만 2천여 점이나 된다.
제3정원에 위치한 ‘보물관’은 톱카프 궁전 관람의 하이라이트다.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갑옷과 투구, 무기 등 호화로운 보석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가득하다.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이 유명하다.
술탄과 그가 선택한 특정 인물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던 제4정원은 가장 작지만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골든 혼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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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레이마니예 자미(Suleiman Mosque)
이스탄불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으로 골든 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다. 터키에서 아름다운 자미의 하나이다. 특히 해가 질 무렵 붉게 물든 모습이 장관이다.
술레이마니예 자미는 오스만제국의 술탄 술레이만 1세를 위해 건설되어 그의 이름이 붙었다. 자미의 발코니 10개는 술레이만 1세가 오스만제국의 10번째 군주였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의 주도로 1550년부터 7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직경 26.5m, 높이 53m에 달하는 돔과 첨탑(미나레) 4개, 발코니 10개로 구성된 웅장한 외관이 돋보인다. 터키의 많은 건축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훼손되거나 지진 피해를 입어 파괴되었으나, 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이곳은 균열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정원에 나란히 위치한 술레이만 1세와 그의 부인 록세라나(하세키 휴렘)의 영묘도 시난의 작품이다
또한 이슬람 복합 시설을 뜻하는 ‘퀼리예’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사원을 중심으로 자리한 이슬람 신학교 ‘메드레세’와 숙소, 병원, 급식소 등 부속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건축학적 가치가 높다. 여러 부속 건물들 중에서도 ‘술레이마니예 도서관’이 가장 유명하다.
http://cafe.daum.net/7770navy/IvHz/30?q=%BC%FA%B7%B9%C0%CC%B8%B6%B4%CF%BF%B9%20%C0%DA%B9%CC&re=1
예레바탄 지하 궁전(Yerebatan Basilica Cistern)
이스탄불 구시가의 중심인 아야소피아 성당 인근에 있다.
예레바탄 지하 궁전은 6세기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설했다. 궁전으로 불리지만 실제 용도는 지하 저수지였다. 건설에만 무려 7,000여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저수지는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최대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중요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물을 저장해 둘 저수지가 많이 건설되었다. 예레바탄은 그중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수지의 물은 이스탄불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베오그라드 숲에서 끌어와 궁전과 성당 등으로 공급되었다.
저수지로 사용된 이곳이 지하 궁전이라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 때문이다. 저수지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아름다운 기둥 336개는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저마다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들이 지하에 빽빽이 늘어선 모습이 신비롭다.
1885년에 저수지 보수 공사를 거쳐 조명과 음향 시설을 설치하고 관람객을 위한 보도가 조성되었다.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들어서고 때때로 공연도 열려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보수 공사 당시 바닥에 쌓인 진흙을 파던 중 저수지의 기둥 받침대로 추정되는 ‘메두사의 머리’ 조각 2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디에서 운반된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메두사의 머리 하나가 거꾸로 놓인 채 발견된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면 돌이 되어 버린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메두사의 머리는 지하 저수지의 가장 안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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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르 차르쉬(Covered Bazaar, 그랜드 바자르 Grand Bazaar)
아치형 돔 지붕이 있는 대형 시장으로 터키의 전통 특산품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터키어로 '덮여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의 카파르 차르쉬(Kapar Carsi)시장은 아치형 돔 지붕으로 덮인 대형 실내 시장으로, 일반적으로 그랜드 바자르로 알려져 있다.
1455-461년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의 명에 의해서 건축되었으며 16세기 술탄 술레이만 1세(Suleiman I) 통치 시기의 대대적인 확장을 비롯하여 여러 번의 증, 개축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비잔틴 시대부터 동서양의 교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실내 시장으로, 30,700㎡의 면적에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으며 60여 개의 미로같은 통로에 5,000여 개의 상점이 있다. 2개의 주요 통로 끝에 있는 입구 4개를 포함하여 모두 20여 개의 입구가 있다. 시장에는 금,은 세공품을 포함한 각종 보석류, 피혁류, 카펫, 향신료, 도자기, 기념품 등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과 특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하루 최소 25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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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시안 바자르(Egyptian Market)
트람바이 에미노뉴역 건너편 예니 자미의 뒤편에 있다. 1664년 조성된 시장으로 터키어로는 '므스르 차르쉬'라고 부른다.
터키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그랜드 바자르만큼 크지는 않지만 관광객이 많이 찾는 매력적인 곳이다. 외관은 돔 형태로 되어 있고, 상점의 개수는 약 80여 개에 이른다. ‘이집시안 바자'라는 명칭은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 온 허브나 향신료 등을 팔았기 때문에 붙은 것으로, 지금은 향신료 외에 귀금속, 식료품, 토산품 등도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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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
갈라타교 아래에 있는 에미노뉴(Eminonu)부두에서 크루즈선을 이용하여 둘러볼 수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이스탄불의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해협의 동쪽이 아시아, 서쪽이 유럽이다. 유럽 지역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출구인 골든 혼을 기준으로 다시 남쪽의 구시가와 북쪽의 신시가로 나뉜다. 이 해협은 예로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흑해와 지중해,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수로로서 지리적 가치가 높아 중세의 교통로와 무역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냉전 시대에는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남하하던 소련을 막는 마지막 보루였다.
길이 약 30km, 폭이 가장 좁은 지점은 약 600m에 불과한 작은 바다이지만 물살이 매우 거칠고 빨라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아시아와 유럽 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다리가 2개 뿐이다. 차량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바푸르)을 이용한다.
해협의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돌마바흐체 궁전과 루멜리 히사르 요새를 비롯하여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건축물, 고급 주택, 오래된 목조 별장 등이 늘어서 있다. 해변에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도 많아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주변 풍광을 즐기기에 좋다.
해협을 지나면서 이스탄불의 시가지를 둘러보는 '보스포루스 크루즈 투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스탄불의 일몰부터 야경까지 감상할 수 있는 저녁 시간에 맞춰 탑승하는 것이 좋다. 투어의 종류는 다양한데 에미노뉴(Eminonu) 선착장에서 출발해 보스포루스 제2교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에미노뉴에서 흑해 입구로 향하는 크루즈, 오르타쾨이에서 출발하는 왕복 크루즈도 있다.
보스포루스 크루즈선이 드나드는 선착장 주변에 작은 배에서 고등어 케밥을 만들어 내는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에미노뉴 선착장을 이용할 경우, 별미인 '고등어 케밥(발륵 에크멕)'을 별미로 멋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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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Ankara)는 터키의 수도로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앙카라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앙고라로도 불렀다. 소(小)아시아 아나톨리아 고원의 북쪽 기슭에 있으며, 해발고도 800∼1,000m의 사카리아강 상류인 앙카라강 연안에 있다.
아나톨리아 전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통로에 있으므로 도시로서의 기원은 고대 히타이트시대에서부터 비롯된다.BC 25년에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속하고 앙키라라고 불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세워진 신전과 욕탕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 뒤 페르시아, 아라비아, 셀주크투르크, 십자군 등에 의하여 점령, 지배되었고, 14세기 후반부터는 오스만투르크에 속하여 아나톨리아 지방의 대상무역(隊商貿易)의 지방적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터키를 재건하기 위하여 케말 아타튀르크(파샤)가 이끄는 국민군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1923년의 공화국 성립과 더불어 수도인 이스탄불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도로서 발족하였다.
1925년 이후 신시가의 건설과 함께 근대적 도시로서 크게 발전을 하였다.
앙카라는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뉘어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구시가는 북동부의 앙카라 구릉에 있는 오스만시대의 앙카라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좁고 정비되지 않은 통로와 바자르(시장)를 중심으로 가옥이 밀집해 있으며, 시내에는 많은 사원과 히타이트박물관(고고학박물관), 민속박물관이 있고, 부근에는 선사시대와 고대, 또는 비잔틴시대 등의 유적도 풍부하다. 구시가의 남쪽에는 도시계획에 바탕을 둔 정연한 신시가가 자리잡고 있다. 중앙을 관통하는 아타튀르크 거리 연변에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관공서, 은행, 오페라하우스 등 근대적 건축이 이어져 있고, 앙카라대학도 있다. 그 밖에 시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릉에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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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성(Ankara Castle)
앙카라의 상징인 곳으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로마 시대의 성을 모델로 하여 지었으며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 내부 성벽은 아랍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비잔틴 제국이 7세기에 지었고, 외부 성벽은 9세기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앙카라의 전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성 주변에 있는 오래된 민가들은 오스만투르크 양식으로 지어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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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Anatolian Civilizations Museum)
히타이트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대상인의 저택이었으나 15세기에 귀금속 시장으로 쓰였던 건물에 들어서 있다.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비잔틴 시대까지의 유물을 시대별로 전시한다.
특히 히타이트족의 유물이 전시되는데, 히타이트족은 철로 만든 무기를 인류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타이트의 석상과 청동 디스크, 숫사슴과 소 형상, 태양의 원판 등 흥미로운 전시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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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르(Izmir)는 이스탄불 남서쪽 336km, 에게해(海)에 면한 터키 제3의 대도시로 서부 이즈미르주(州)의 주도(州都)이다. 과거에는 스미르나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이며 BC 627년 리디아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BC 3세기에 재건되어 로마시대까지 번영하였다. 중세 비잔틴, 십자군, 아랍, 투르크 간에 쟁탈이 거듭되었으나 그리스 문화의 한 중심으로 그리스상인에 의하여 무역이 성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이 지방에 침입한 그리스군(軍)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리스령이 되었으나 1923년 터키에게 반환되었다.
주변에 곡물, 목화, 올리브, 야채, 잎담배, 과실과, 견직, 양탄자를 생산하는 배후지(背後地)를 끼고 있는데다가 비누, 면직물, 염색공업이 활발하여 상공업 중심지이다. 또한,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2개의 철도역이 있으며 철도종점이 되고 있다. 이스탄불과는 국내항공이 통하고 있으며 아테네로 연장 서비스도 하고 있다.
고대 아고라에서 대리석의 열주(列柱),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像) 등이 발굴되었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장(武將)이 축조한 성새가 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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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스(Efes)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였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페소스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 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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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사(Bursa)는 마르마라해 연안에서 30km 내륙에 있는 울루산(2,543m) 북쪽 산기슭에 있는 부르사주(州)의 주도(州都)이다.
BC 3세기 말 비티니아왕 프루시아스에 의해 건립되어 프루사(Prusa)라 불렀으며, 로마, 비잔틴 시대에 번영하였다. 1326년 오스만 투르크 제2대 군주 요르한 베이가 취득한 후 1361년까지 이 나라 수도였다.
무다니아항과는 철도로 연결된다. 융단, 견직물 등 섬유공업이 활발하며, 온천 요양지로도 알려졌다.
군주의 분묘, 사당 등 역사적 기념물이 많으며 울루 자미, 예스일 자미, 무라디에 자미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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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Cappadocia)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지명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시대 이래 종교 탄압을 피해 바위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신앙 생활을 했던 곳이다.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동맹국이었으나 차차 속국, 속주로 독립성을 잃어갔다. BC 6세기의 문헌에 의하면 당시 카파도키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카파도키아는 BC 190년 로마가 마그네시아에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셀레우스 왕조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이후는 로마에 충성을 바쳤으며 11세기까지 동로마제국의 보루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으로 동서문명의 융합을 도모했던 대상들의 교역로로 크게 융성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로마시대 이래 탄압을 피하여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곳에 몰려와 살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기암에 굴을 뚫어 만든 카파도키아동굴수도원이 남아 있다. 약 3백만년 전 화산폭발과 대규모 지진활동으로 잿빛 응회암이 뒤덮고 있으며, 그 후 오랜 풍화작용을 거쳐 특이한 암석군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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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Hierapolis-Pamukkale)
터키 남부 데니즐리(Denizli)주에 있는 고대 도시 유적으로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로마시대부터 온천으로 유명했던 파묵칼레는 방해석 성분의 물이 식으면서 가루가 되어 칼슘 바위산을 형성한 곳이다.
파묵칼레는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으로 경사면을 흐르는 온천수가 빚어낸 장관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석회성분을 다량 함유한 이곳의 온천수가 수 세기 동안 바위 위를 흐르면서 표면을 탄산칼슘 결정체로 뒤덮어 마치 하얀 목화로 만든 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 온천수는 섭씨 35도로 류머티즘, 피부병, 심장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치료와 휴식을 위해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여러 황제와 고관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하얀 결정체가 대지의 경사면을 온통 뒤덮은 장관을 감상하면서 심신의 치료를 겸할 수 있는 최고의 휴양지였기 때문이다.
히에라폴리스는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도시다.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 왕국에 의해 처음 세워져 로마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번성했다.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은 이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히에로스’는 신성함을 뜻한다.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하였으며,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의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파묵칼레’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배세력의 변천 속에서도 지속적인 번영을 누려왔던 히에라폴리스이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는 폐허가 되었다. 대지진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도시를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이 발견하였고 이후 발굴 및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유적을 동시에 갖춘 이곳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복합)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원형극장은 최대 1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도 있다.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에 하나인 이곳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관들이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채 여기저기 널려 있다. 테르메라고 하는 온천욕장은 온욕실과 냉욕실은 물론 스팀으로 사우나를 할 수 있는 방, 대규모 운동시설, 호텔과 같은 귀빈실, 완벽한 배수로와 환기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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