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인천공항을 이용한 이용객의 수가 4천500만 명을 넘었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사람들이 공항을 통해 외국으로 나가고 또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외국을 오갈 때면 출입국 신고와 함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세관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배나 비행기에 실려 오는 물건도 예외가 아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상품은 세관에서 관세가 부여된다. 지금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이 불과 130여 년 전에는 우리에게 낯선 모습이었다. # 관세자유구역이었던 제물포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ihoilbo.co.kr%2Fnews%2Fphoto%2F201502%2F593979_142638_1352.jpg) | | | | ▲ 개항장 시대 인천항 전경. | | |
1876년 강화도에서 체결됐던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로 조선은 문호를 열었고 1883년 인천, 제물포의 개항이 이뤄졌다. 제물포에는 개항과 함께 일본과 청국, 서구의 무역상들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이들에 의해 쌀과 홍삼 등 조선의 특산물이 수출되고 면직물, 석유, 공산품 등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외국과 오가는 상품에는 관세를 부과해야 하는데 당시 조선정부는 관세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해 개항 초기 제물포는 관세가 없는 ‘자유구역’이 됐다. 조일수호조규 체결 직후 상품에 세금을 받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던 것이다. 뒤늦게 관세의 중요성을 깨달은 조선정부가 1878년 부산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해 관세의 징수를 시도했으나 일본의 무력시위로 실패하기도 했다. 조선의 관세 자주권 회복 노력은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청국·영국·독일 등과의 조약에서 결실을 맺게 되고, 결국 일본의 수출입 화물에도 관세를 부과하게 된다.
# 해관, 관세를 매기다 수출입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이를 수행할 행정기구가 필요한데 조선에는 이러한 제도가 없었다. 때문에 조선정부는 청국의 힘을 얻어 세관을 설치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청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근대적인 통상 외교를 담당할 인물을 요청했는데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추천됐다. 목인덕이라는 우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외교통상 분야의 전문가로 조선의 통리아문 참의, 오늘날 외교통상부의 차관 자리를 맡았고 그에 의해 세관이 창설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세관의 명칭은 해관(海關)이었다. 해관은 세관의 중국식 이름인데 이는 세관을 중국의 제도를 본따 만들었고 그에 따라 명칭도 중국의 것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ihoilbo.co.kr%2Fnews%2Fphoto%2F201502%2F593979_142639_1415.jpg) | | | | ▲ 인천시 중구 해안동에 소재한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모습. | | |
을 따랐기 때문이다. 해관은 1906년 일본식 관세제도에 따라 세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1883년 6월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해관이 설치된다. 뒤를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원산해관이, 11월에는 부산해관이 차례로 창설됐다. 인천해관은 경기·충청·전라·황해·평안도 등 5개 도를 관할했고 1897년 목포와 진남포가 개항됨에 따라 인천해관 지서가 설치됐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는 원산세관이 인천세관의 지서가 되면서 함경도와 강원도도 인천세관의 관할 구역에 포함되며 영향력이 대폭 확대됐다. 초창기 인천해관은 현재 인천 중구에 위치한 파라다이스호텔 동쪽에 청사가 세워졌다가 여러 차례에 걸쳐 청사를 신축하거나 이전했다.
개항 이후 수출입 상품에 매겨졌던 관세율은 물품의 종류에 따라 5~30%까지 다양한데, 일본제 수입품의 경우 가장 낮은 5%를 적용하고 영국의 주요 수입품이었던 면직물의 경우도 낮은 관세를 부과했다. 그나마 관세의 수납업무를 조선이 아니라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에 위탁 형식으로 넘겨줌으로써 한동안 제대로 된 관세 납부는 이뤄지지 못했다. 한편, 국가나 관청과 관련된 상품은 면세특권이 부여되고, 오늘날처럼 아편, 위조 약품, 위조화폐, 음란 서적 등은 수입 금지품목으로 선정됐다.
인천시립박물관에는 수입물품을 인천해관에 신고하는 서류인 인천해관진구보단(仁川海關進口報單) 십수 점이 소장돼 있는데 이 서류에는 함석, 백동과 같은 자재류나 맥주, 생강, 미역, 와사비 등 다양한 식품류들이 수입됐던 것이 기록돼 있어 흥미롭다. # 동북아 해운망의 중요 기항지 우리나라에서 해관이 인천에 가장 먼저 창설됐던 것은 인천항이 그만큼 무역 등에서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1900년께까지 전국 무역액에서 인천항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것은 인천이 서울과 경기 등 대량 소비처가 인접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인천항은 일본과 청국, 구미 각국 무역상들의 결전의 장이 되면서 주요 도시와 정기 항로가 차례로 개설됐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ihoilbo.co.kr%2Fnews%2Fphoto%2F201502%2F593979_142640_1432.jpg) | | | | ▲ 일제강점기 인천세관 전경. | | |
1880년대 인천항과 연결된 대표적 노선은 나가사키와 톈진(天津)을 연결하는 항로였다. 그런데 점차 나가사키 이외에 중국 상하이(上海)와 옌타이(煙臺) 등 중국과 연결되는 해운망의 중요도가 높아졌고, 부산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결되는 노선도 생겨나게 됐다. 이렇게 된 것은 인천항의 무역구조와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은 영국제 면직물을 중계무역으로 조선에 수입해 이익을 취했는데, 서울지역의 면직물 수요가 급증하면서 청국 상인과 구미 무역상이 중국에서 직접 교역을 추진하면서 나가사키 항로보다 인천-중국 노선의 비중이 커지게 된 것이다. # 분주했던 인천항의 흔적 인천과 중국·일본을 연결한 항로는 개항 초기에 이화양행과 세창양행 등 구미 무역회사에 의해 운영됐고, 뒤늦게 청국과 일본의 해운회사도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일본정부는 자국 해운회사의 통합을 유도해 거대 기선회사를 출범시키고 보조금을 지급해 항로를 재편하면서 1880년대 후반 인천항에 입국하는 각국 선박의 톤수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80%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출범된 기선회사가 바로 일본우선회사(日本郵船會社)다. 1883년 우편기선 미쯔비시사와 공동운수회사가 합병해 출범한 일본우선회사는 인천에 출장소가 설치됐다가 1886년 7월 인천지점으로 승격됐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ihoilbo.co.kr%2Fnews%2Fphoto%2F201502%2F593979_142641_1454.jpg) | | | | ▲ 인천시 중구 관동에 위치한 야마토쿠미 사무소 건물. | | |
우선회사는 개항 이후 인천의 해운업을 독점했었고 현재도 일본의 3대 해운회사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인천지점 건물이 남아 있는데, 상량문으로 보아 1888년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현재 인천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다. 한편, 인천항의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화물을 싣고 내리는 부두노동자들이 필요했고, 화물의 운송을 위탁받는 해운 대리점 등도 들어섰다. 인천항에서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여러 개의 용역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야마토쿠미(大和組) 사무소 건물이 카페로 변신해 있고, 해운 사무소인 군회조점(郡廻漕店)도 인천아트플랫폼의 미술공간으로 활용되면서 120여 년 전 인천항의 분주했던 풍경을 잠시나마 상상해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글=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인천해관진구보단(海關進口報單)
상품을 수입할 때 세관에 수입의 내용을 신고하는 수입신고서다. 진구(進口)는 수입을 의미하며, 수출은 출구(出口)라고 표기한다. 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진구보단은 종이에 푸른색 잉크로 서류 양식이 인쇄돼 있고, 수기로 해당 사항을 써 넣는 방식이다. 서류에는 연대와 해당 상품을 들여오는 배 이름과 화주, 화물의 종류와 수량, 가격 그리고 배가 출발한 발선지 등으로 기록한다. 시립박물관 소장 진구보단은 모두 1890년대의 것으로 화물은 대부분 나가사키와 고베에서 수입됐고, 운송 선박은 모두 일본우선회사 소유 선박인 오와리마루(尾張丸)호로 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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