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기도
황금찬
소년은
자정을 기다려
꽃잎을 뿌리며
마주 앉는다.
촛불이 조용하다
어린 영혼의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
바이올린의 G선이
겨울나무 가는 가지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종소리가 멎듯
소년의 기도
하늘문이 열리며
장미꽃을 안은
천사가 비단 날개를 흔들며
날아내려 소년 앞에
앉는다.
장미꽃 한송이를
소년에게 주며
천사는 말이 없다
소년도 말이 없었다.
천사는 하이얀 비단날개를 펴고
소년은 장미꽃을
영혼의 가슴에 안고 있었다.
미루나무 바람소리
최은하
내 고향 들녘 한가운데
미루나무 한 그루
바람 부는 날이어도
별로 흔들림없이 정정하기만 했다.
미루나무엔
내 어렸을 적에 드높이 띄워올리던 연이
지금도 그대로 매달려 펄럭이고 있을지.
비구름장이 지나가고
잔잔히 햇빛 말간 날이면
가차이 무지개가 걸렸고
미루나무는 바람소릴 날리며 서있었다.
멀리 고향 떠나와
쉰 해를 훨씬 스치고 밟혀 넘기며
잊을 건 거의 다 아슬히 잊어버렸는데도
미루나무에 걸치는 바람소린
이날 껏 따라와 스런댄다.
미루나무 바람소리는
타관의 꿈자리에까지 역력히 들려오고
날 보고 언제쯤 돌아올 거냐며
제 자릴 지키고 있겠지.
어제 오늘 내일도
꽃시절
황송문
아버지는 논에 가시고
어머니는 밭에 가시고
각설이패가 지나간 뒤
뻐꾸기 소리에 어머니가 그리워
기다림에 지쳐 꺼익꺼익 울다가
울음에 지쳐 허기에 지쳐
바가지에 담아놓은 보리밥을
토방에서 강아지와 함께 먹었다.
나랑 강아지랑
강아지랑 나랑
바가지에 얼굴을 묻고
보리밥 먹던 토방에는
나막신과 짚신과 고무신……
세월의 증인들도 모여 놀았다.
사 람
-어머니의 고향
김년균
어머니를 고향에 묻길 잘했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눈만 뜨면 고향에 몸을 두며
온종일 명주실처럼 고운 실을 뜨고,
그것이 이언 천 타래도 넘었다.
그 꿈을 다 풀며 즐기시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내야 될까,
어머니에게 다가갈 시간도 나에겐
이만하면 넉넉하리라.
잘했다.
눈만 뜨면 몸을 두던 고향에
어머니를 묻었으니,
그 무덤엔 이제 꽃이 피리라.
그 꽃이 벙글벙글 웃으며 망을을 열면
꽃향기 하늘까지 차 올라,
바람 솔솔 부는 날
이승 저승에 가득 넘치리라.
그 향기, 당신에게도 느껴져 기쁘거든
내 어머니임을 알라.
소나무에게
김가배
나는 그대 곁에서
상록의 악기이고 싶다
물관을 타고 흐르는
향내 나는 초록의 피가
저 바위 속 어둠의 터널을 뚫고
아득히 바닷빛 얼굴로
하늘 바라는
네 당찬 모습
날카로이 잎맥을 흐르는
서늘한 피
그 오만한 몸짓을 사랑한다
벼랑 끝
굳어 옹이진 굽은 생
번접하지 못할 기개
그 의연함으로 우뚝 선
자랑스런 조선의 얼굴이여
그대가 토하는
내 잠든 혼 불러 세우는
청아한 음성
그 써늘한 눈빛을 사랑한다
그대가 일구는 바람의 갈기마다
세우는 자존
시퍼렇게 물들어
일렁이는 서기 어린 숨소리
늘 푸른 그대 그윽한 그림자
나는
그대 서슬 푸른 목소리를 탄주하는
푸른 물 묻어나는
상록의 악기이고 싶다.
가을 간월도
김가배
예까지 밀려와 있었구나
가을은
쫒기다 쫒기다 야윈 모습으로
밀물에 잠겨있는 작은 섬 간월도를
지키고 있는
늙은 느티나무 가지 위에
모여 있었구나
갈매기가 물어온 수척한 잎들은
꽃잎으로 바다 위를 휘날리고
그렇게 여기
갯여인의 한숨소리같이 작은 섬에
밀려와 있었구나
목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씻어내고 있었구나
섬이었다가 육지였다가
마음 정하지 못하고 떠도는 나그네처럼
발목 잡혀있는 있는 바람 속의 작은 섬
알몸 들어낸 저 갯벌은 알고 있으리라
천수만의 소금기 빠진 물들과
풍성했던 천수만 너머 들판의 소낙비소리와
물결이 일구어 낸 금빛햇살들
고깃배 바람에 떠가던 갈숲 속
몸을 숨기던 새들의 노래를
물목마다 가을이 서성이는 섬 자락
내 연인에게 주고 떠날
슬픔의 말 한마디
수평선 어디쯤에 버려야 하는지...
목울음 차오르는 갯벌 가득
노을을 깔아놓고
보내야 하는 저리도 고은 가을의 끝
떠나지도 보내지도 못하는
물에 잠긴 한 폭 수채화
이별은 슬프도록 황홀해야 하나보다.
진달래의 봄
최창일
양떼를 몰고 산을 넘어온다
봄 가뭄으로 메마른 산
겨울을 꿋꿋하게 견디어내고
월경(月經)의 반점 같이 울긋불긋
햇살은 또다시 초록을 만지고
장미의 뜨거운 몸부림은
봄의 고즈녁한 성당의 모퉁이에서
황홀한 미소로 연분홍 미사를 올린다
하얀 고사리 손을 꼼지락거리는
운동장 아이들 기침은
모두가 연분홍 울림으로
하늘높이 나비춤으로 너울너울
깃털하나 떨어뜨리고
제집으로 날아간 비둘기
발가락 실핏줄에도
연분홍으로 물들어 있다.
봄비가 그치고
가슴에 부활의 술잔이 넘치면
그대 촉촉한 검은 눈동자에
어이구 진달래 꽃 한 무더기 피었어라.
목련화의 사랑
최창일
하얀 브라우스를 입은 여인
바람의 둥우리에서
촉촉한 이슬을 머금고
출근길이면 고개를 내밀고
목이 쉬도록 나의 이름을 부르며
언젠가 서로 맞닿기를
그리도 소원하는 눈길로
황홀의 꽃잎으로 피어나고 있어라
웃음은 영롱하게 가슴에 새기고
아침 햇살이 스며난 꽃잎마다
구름 몇 포기 옮겨 심은 뜨락에서
목련화에 부는 바람은 목련화의 바람
해질녁까지 그곳에 앉아 있는 나의 마음
추억속의 빛깔에 눈이 부셔라
너의 향기는 부드럽고 뜨거워라
태어난 첫 순간 거기 있었는가
빛깔보다 은은한 향기는
너의 입술에 묻어나는 추억 깊은 곳.
그날 삼월 초닷새
- 어머니
이오장
그날 삼월 초닷새
처마 밑 제비집 묵은 깃털 날리던 저녁
어머니의 신음은 툇마루 넘어
우물가 향나무에 걸린 어둠을 털었으리.
머슴새 울음 따라 눈물 닦던
산마을 며느리 이야기는
아무도 귀 기울리지 않고
보리방아 찧던 옹이 박힌 손으로
아랫배 부여잡고 별을 불러대는 소리에
설 잠 깬 동네사람들 하늘을 보았으리라.
지게 위에 얹힌 신접살림 따라 넘던 고갯마루에
고이 묻어놓은 아이들*
용마루에 나란히 찾아와 별 헤아렸을까
정안수에 별빛 내리고
삼신할매 웃음결 가득 차오를 때
아버지는 고샅을 향하여 연신 헛기침 하셨으리라.
뒷마당까지 연기자락 자욱히 쌓인 한밤중
초가지붕은 낮보다 환했을까
어머니는 지금도 내 앞길 밝히시려고
장독대 정안수 앞에 두 손 모으고 계시리라.
* 어머니는 여섯의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뒤로 아들만
넷을 두었음.
그대 시간은 몇 시인가
이오장
지금은 몇 시일까
낙엽 쌓인 거리는 햇살 걷히고
시계바늘은 마냥 헛돈다.
걷고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그 누가 어지럽게 돌려대는지
한 가닥 줄 잡지 못했다.
팽팽하게 태엽을 감고
구두끈 질끈 묶고 종소리 기다려도
언제나 한걸음 늦어버리는 출발
등 뒤의 박수소리만 들어야 하는지.
사방으로 뻗은 갈래길에
스쳐가는 걸음들 따라
숨 가쁘게 뛰다가 쉴 곳을 찾는다.
이제 대관절 몇 바퀴나 남았는지
머리끈 동여매도 눈앞은 뿌옇기만 하다.
그대 시간은 지금 몇 시인가
헛도는 내 시계바늘
오늘도 시간은 맞질 않는다.
슬픔엔 모서리가 없다
유회숙
문을 열다,
냉장고 안에 싹을 틔운
가슴 한 켠을 지그시 눌러본다.
조금씩 껍질만 남아가는
겨울 양파
가장 뜨거운 그늘에
어린 봄이 자란다.
바라보면 너무나
작고 여린 것과
스러져 가는 것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돈다
산다는 건 어쩌면
어둠을 사르는 심지 끝에
점점 헐거워지는 모습
쓸쓸하고 따스한
오랜 슬픔의 집
그 집엔 모서리가 없다.
나도 봄
유회숙
봄은
쉼표다
점 점 점
날아오르는
민들레 홀씨 같은 참새소리
하늘과 땅이 가까워지는
, , , , ,
그 속에 나도
봄이다
홍매화
박기동
매화가
꽃눈을 틔운다
못 다한 이야길 나누 듯
서로가 서로를 깨운다.
이른 봄을
한 그루 매화가 데불고 온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 서려 깊고 곱다.
눈(雪)꽃인 듯
슬픔이 잔설처럼
녹아 내린다
자줏빛 붉게 번진다.
봄이 핀다
가난한 햇살을 나누며
지상에, 고만고만한 별을 지핀다.
그대에게 가는 길
박기동
오후 몇시 쯤
안부를 주고 받기엔
그대 목소리
사라져 버린 시간을 찾아
청금정에* 턱 괴고 있습니다.
가야금소리 실린 노을
산등선에 손길주고 있습니다.
숨소리 깊은 고령 고분군
산은 산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너무 순식간에 노을 지는
태양이 서 있던 시간 속에
한 그루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는 자라나 든든하게
그대 생각하는 곳으로 뿌리를 두었습니다
뱃길로도 갈 수 없는 날
생각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오겠지요, 그대에게 가는 길
수천 년 기다려 지켜야할 약속
나를, 그대 속에 두겠습니다.
* 청금정(聽琴亭) : 고령 고령가야 고분군을 품고 있는 주산에
자리잡은 정자 노을이 질때 가야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나(?)
뻐꾸기 울면
이병훈
춘삼월 이산 저 산
뻐꾸기 슬피 우는 것은
말없이 가신 님 누가 볼세라
진달래꽃으로 숨어온다는 기별입니까.
자나 깨나 눈에 밟히도록
꽃에 스며 오시는 당신은
행여 그날처럼
울며불며 매달릴성 싶어
넌지시 보고 가려는 심산입니까.
진달래꽃, 무덤 가에
그리도 곱게 피는 것은
자식들 슬픔에 잠길성 싶어
꽃으로 눈길 돌리라는 속셈인가요.
진달래 불붙는 춘삼월
뻐꾸기 슬피 울면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액자 속 당신이 그리워
피를 뱉는 뻐꾸기…
멸 치
이병훈
끓는 물속에서도
유영(游泳)을 멈추지 못하는 까닭은
바다를 못 잊어함인가.
진한 간장에, 매운 고추장에
마른 몸 버무려질 때 거친 숨소리
들끓는 프라이팬 속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가.
갈증 난 햇살에
삶의 비린내마저 채반에 사로잡히다가
은빛 비늘 온전히 바랜다.
긁어낼 필요 없는
시커멓게 타들어간 내장
허황한 속세를 끓이고 볶으면
골수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맛,
시린 관절은
어머니의 틀림없던 일기예보
골다공증 걸린 뼛속으로
무제한 통행하던 삭신의 바람도
날개 접고 묵상에 든다.
백자 속 산수화
최연숙
한 줌의 흙
도공의 호흡으로 빛을 살리고
천 삼백도 열기를 견디어 나와
비로소 숨결을 내뿜는다.
청아한 향기 품은
마알간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솟구친 산봉우리 청솔가지 뻗으며
가까이 하얀 달을 품는다.
출렁이는 하늘 아래서
최연숙
배넷저고리 지어놓고
어머니는 새벽마다 정한수 떠놓고
두 손 부벼 잘 자라기만 빌고 빌었다.
먹구름 가르고 뇌성 치더니
열병이 마을을 휩쓸고 지난간 후
다시는 바른 자세로 걸을 수 없었고
이때부터 넘어지기 일상으로
하늘이 출렁거렸다.
며칠 전 외출 했다가
성형외과에 들렸더니
멀쩡한 눈 코 광대뼈 지닌 사람들
마주 보며 양손으로 눈을 가린다.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때면
발자국마다 눈물 어리고
굳어가는 근육보다 더 두려운 건
짐짓 외면하는 행인들의 시선이었다.
늪에 빠질 때는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연꽃이 되기를
기도 올린다.
음악정원에 들다
이소연
다복솔이 저도 모르게 흔들리는 까닭은
꽃바람이 소릿줄을 퉁기고 간 까닭이라
갈매바다 잔물결 어룽어룽
일 악장씩 넘기며 콧노래를 부르는 대낮에
앵 앵~ 삐오삐오, 즐거운 소음 들려오는 까닭은
넝쿨장미가 울타리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라
아카시아 꽃보라 번지점프하는
둔덕 너머
감성 악보 푸른 오선지에는
평생을 들어도 다 듣지 못할 곡들이
가지각색 꽃음표로 박혀 있어라
찔레, 수련, 장미, 개망초, 밤꽃...
세상 모든 꿈들은
이렇게 꽃길을 타고왔다 간다고
내 갈비뼈에서 허파에서
이름 모를 꽃들이 깨어나 발성연습을 한다
아, 이, 우, 에, 오,
우~우~우~우~
소래산 뻐꾸기도 목청 가다듬는 시간이었다.
소금꽃 이야기
이소연
여기
염전에 말없이 피는 꽃을 보거든
사랑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햇볕과 바람으로만 피는 꽃
오래 두어도 변하지않는 침묵의 무게를 달아보라
뙤약볕에 졸아드는 파도 알갱이
수차에 몸을 실어 찰싹찰싹 아
픔을 달래더니
소금꽃, 씨앗처럼 여물었다
바닷물 부드러운 출렁임 속에
이렇게 뼈있는 말이 들어있을 줄이야
끝까지 바다이기를 고집하지 않고
때를 알아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물의 환희를 보라
죽음으로 거듭난 보석 한줌,
내일은 또 뉘와 더불어 따뜻한 눈물이 될까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고령지부 시인들
눈(雪)으로 오는 봄
김은영
바람 살짝 비껴만 가도
튀긴 쌀알 같은 꽃 이파리
춘정에 못 이겨 눈(雪)으로 날린다.
흙바닥에 가벼운 몸 얹힐 때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무는
하릴없이 시려오는 가슴
햇볕에 말리고
온다는 연락 받은 지 서너 날
벌써 갈 채비 서두르는가.
가지 끝에 매어 달리는 바람이
못내 서운한 날
녹지도 않을 눈이 자꾸자꾸 내린다.
낮선 방의 기억
김은영
휴지처럼 버려지리라
심연의 밑바닥을 흐르는
동백꽃빛같은 처절한 사랑을
품에 안겨도는 허울
오랫동안 놓지 못해 괴로워하던
가면 같은 유희를
봉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등의 온기를 찾아 붙는 누추한 공간
목까지 당겨 덮는 거적에선
밤을 샌 사람들이 유령처럼 걸어 나온다.
두 켤레의 신발만을 위한
신문지 넓이의 공식을 기도문으로 외우는 밤
고단한 육신을 잠재우는 건
누군가를 망각의 섬으로 데려가는 일
별을 총총이 매달고
아이의 깎은 손톱 하나 하늘에 내걸리면
오늘은 기어이
방문을 열어 기억상실증 앓는 어둠을 맞으리.
잎 새
이근덕
꽃물을 토해내는 벚나무 가지마다
겨우내 시린 한이 촘촘히 묻어난다
골패인 알싸한 아픔 바람결에 실려 가고
차디찬 꽃샘추위 한바탕 휘젓더니
목 타는 가지마다 촉촉이 봄비 내려
부스스 연초록 잎새 봉긋봉긋 솟구치네.
먼동 튼 아침햇살 소슬히 부는 바람
두꺼운 침묵 깨고 살금살금 다가와
참이슬 반짝거리며 꽃망울 터트리네.
첫 눈
이근덕
산새도 날지 않는 고즈넉한 첩첩 산중
적요한 산자락에 설렘이 내리는 밤
벽난로 장작불꽃은 밤새 활활 타오르고
법화경 한 소절이 고운 인연 빚었을까
감잎에 놓인 찻잔 저토록 정겨울까
은은한 설록차향이 몸에 가득 배이는 밤
솔바람 솔솔 불어 애간장을 다 녹이고
촉촉이 젖는 이 마음 하늘마저 아는지
하늘엔 흰 꽃이 피네 범종소리 퍼지네.
포대(砲隊)가 있던 자리
우종율
명아주 망촛대 우거진 고갯마루
선술집 아지매 엉덩이보다 더 큰 철모 쓰고
서슬이 퍼렇던 군인들이 있던 자리
유월 그 날 잊으려고
삼복더위 먹고 취한 아버지
한 나절 땀으로 헉헉대던 자리
포 소리가 끝나고 백기 펄럭이면
백보루 잠바에 녹물들이며 포 껍데기 주워
월남 몽둥이 사탕 휘저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자리
터지지 않은 팔랑개비 곤봉포탄 두드리다
한쪽 팔 잃어버린 선갑이 아재
포효하던 자리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 훈시 노랗게 듣다
스르르 넘어지던 버짐 피던
열 살의 자리
지하철 뚫다 가스폭발 나서 맨발로 쫓아가니
열 다섯 살 학교에 간 아이는 보이지 않고
이름표만 나뒹굴며 자지러지던 자리
쿵 쿵 쿵 쿵 쿵 쿵
오늘 아침 그 자리에 백화점 짓는다고
비켜달라고 비켜달라고
포크레인은 자꾸만 대포를 쏘고 있다.
고령장에 가서
우종율
고령장에 가서
수구레 한 접시에 소주 한 잔 하고
구름 위에 서서 취기가 오르면
자나가는 아무개에게 말 한마디 건네 보게.
십중팔구는
참꽃보다 더 붉은 얼굴로 아는 척을 할 것이네
팔뚝만한 가물치나 대장장이 힘줄은 양념으로 보아도 좋네
삐걱대는 좌판에 걸터앉아
닷새만에 만나서 못 다한 이야기 나누노라면
장꾼들보다 장사꾼들이 더 취해 흔들대는 무리 속에
간 고등어 한 손
홑 자전거에 걸치고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 십리 간다'*를 흥얼거리며
휘어적휘어적 집으로 돌아가는 유년의 아버지를 보고
따라가 잡지 못하고
한참을 소리 죽여 울다 돌아온
오늘은 초아흐레
고령 장날
*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 간다' : 어떤 한 사람이
크게 되면, 친척이나 친구들까지도 그 덕을 입게 된다는 뜻.
황금 황제여!
김민구
진념(塵念)의 화신(化身)인 황금이시여!
그대는
이 시대의
가치요, 꿈이요, 희망의 등불이기에
만인의 종교이며 만인의 황제가 되어 있나이다
만인의 우상이신 황금폐하께옵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신 부처님보다 더한
무소불능(無所不能)의 힘을 이미 다 가지고 있는지라
황금이란 말만 들어도 모든 사람은
주눅부터 들면서 그저 황금 폐하를 우러러
기도하려는 석상이 되고 맙네다
이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불가사의한 일이라
천하만민 너나없이
황금 신(神)을 추앙하는 광신도가 되어
이 전능의 무소불위신(無所不爲神)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모시고자 하는
종교가 된 지 이미 오래 되었기로
온 천지 사방에는
황금교의 교황을 받드는 황금 나라
축복의 백성들로 가득하옵네다.
타 령
김민구
타고난 복대로 주어진 팔자대로
살아야겠다고 해 보지만
어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부자는 맨션에 살고
가난뱅이는 맨손으로 살아간답니다
누구는 사우나에 가서 땀을 빼고
누구는 사우디에 가서
모래판 작업장에서 진땀을 뺀답니다
있는 놈은 돈맛으로 살고
없는 놈은 설움으로 살아갑니다
배운 놈은 잔꾀로 살아가고
못 배운 놈은 온 몸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 살아오면서
이내 인생 다 닳아
이제 신발 한 켤레 바꾸어 신겠습니다.
작은 새
서옥연
석화가 핀 돌담을 돌고 돌아
투명한 가지 사이를 오가며
언제나 목이 쉰 체로
새벽을 깨우는 외로운 작은 새
늘 혼자인 작은 새는
어디서 소식을 물어 왔던가?
사랑 한 잎 물어다가
내방 가까이 찾아와
걸어놓은 창밖 거울 속에
와들작 몸을 던진다
잠시 착시 현상을 느끼는 듯하다
둘이 있어 하나 되는 애처러운
저 눈빛은
번져가는 꽃물을 수놓듯
신비스러움을 토해가며 토닥토닥
사랑은 익어가고
하염없이 절규하는 소리는
사랑에 몸부림친다.
그 겨울에 국화꽃
서옥연
화려한 젊은 날은 가고
철지난 겨울날 빙하 속에서도
실현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
나약하게 피워 올린
하얀 백설의 꽃이여
초롱초롱 눈망울
가냘픈 미소는
기어이 희망의 꿈을 펼치겠다구?
너의 고운 자태와
너의 고운 향기는
수려한 귀품의 양귀비란다
오래도록 내 곁에 두고두고
간직하고픈 백설의 꽃이여
희망의 꽃이여...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니
이용호
내게서도 송진 냄새, 꿀밤 나무 냄새
아카시아 찔레꽃 향기가 났으면 좋겠어
산길같이 정겨운 꼬불꼬불한 길
가슴에서 마을로 이어지고
새소리 가득한 맑은 바람 쉼 없이
내게서 살아 나왔으면 좋겠어
푸른 숲의 속삭임 봄빛으로 자라서
나무가 되고
향기 나는 꽃이 되고
꿈을 키우는 싱싱한 바람이었으면 해
도라지꽃을 피우고
색깔 고운 엉겅퀴를 피우는
산 내음 가득한 물이었으면
살랑 살랑 토끼 꼬리 만한 모가지 흔드는
다래넝쿨 하늘로 오르는 꿈
살폿살폿 볼 붉히며 정들어가는
붉나무 이파리 오배자같은 사랑
다 주고도 마음 넉넉해지는 산 그림자 뒤집어 쓰고
하하 웃음 짓는
할배의 소금 같은 마음이 되고 싶어
자고 나면 가득가득 고이는 옹달샘 같은 마음
한 겨울에도 쏟아지는 감미로운 삶의 향기
다 주고싶어서 그래
월명암 가는 길
이용호
내리실에서 보면 월명암은 하늘에 매달려 있다
대숲바람 사이로
화사한 이승의 벚꽃은 만년설처럼 서려있고
어느 봄날 피어
스님의 빛바랜 소맷자락사이로 스며든
얼레지 부끄러운 향기가
아직은 양지에서 찔레싹을 키우는데
세상으로 향하는 길은 그 곳에서 시작하고
하늘로 오르는 길은 그 곳밖에 없더라
무거운 내 그림자 하나
그대에게 의지하며 풍경소리 품을 때
찻잔 속에 맴돌던 향기는 천도의 꿈이더라
낙산에 품 눈물로 적시며
바람 하나 갖고오는 시주길에
드릴 것 없어
아픈 뒷모습만 남겨두고
버리지 못할 빚만 안고 차마 부처님 속이지 못해
산들이 참배하는 길 초록빛 따라
인연의 단애 한 가닥 사려놓고
부처님 미소 가득 가슴에 담아주던
월명암 그림자 한 조각 베어 물었더니
뚝뚝 떨어지는 헌화 향
눈물 멎게 하더라.
청학동 가는 길
정효영
햇살 가득 따사로운 늦 삼월
병풍으로 둘러친
뱀 등허리 길 따라
휘돌아 돌고 또 돌아가면서
공자 왈 맹자 왈
지리산 지붕 찾아가는 길
하늘 아래 첫동네에
댕기머리 자존심
돌탑쌓는 그 정성 여유로운 세월
속세를 떠나와 댕기를 다시 묶는
일편단심 정신으로 뿌리 내린다 .
사월에 내린 눈
정효영
바람이 광기를 부리는
사월은 혁신의 계절
너와 나의 꿈들이 고샅길 따라
마른 풀 속에서 고개 내밀어
출발선에 서면 ....................
그 겨울에 팔랑팔랑 하얀손 흔들며
어김없이 애정으로 피는 섬진강 언덕
상춘객아 ~~
눈 속에 파 뭍혀라
벚나무 가지마다 폭설이 내려앉고
목련아 내 가지에 함박눈 복실복실
조팝나무 야윈 가지 싸락눈이 내리고
앵두나무 시린 가지에
하얀 청춘남녀 싹 트는 사랑 .
즐거운 아침
김범관
산새 노래하는
오솔길을 따라
산책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아침 햇살은 솔밭 사이로
쏟아져 내리고
여기 저기
봄의 아우성소리가
들려오는
즐거운 아침
누군가 만들어 놓은
나무 그루터기 의자에 앉아
맑은 공기 마시며
하늘 우르르 보고 있는 그대는
진정 행복(幸福)을
꿈꾸는 당신 입니다.
시실리에 가면
김범관
잃어버린
시간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실리에 가면
천년의 세월에도
아직 다 하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흘러가는 계곡물은 하고 있네.
어둠이 내려앉는
시실리에 가면
사랑노래 다 하지 못하고
뒤 돌아와 가슴앓이 하는 소녀의 눈물이
오늘 이 시간
긴 강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네.
사월의 여섯 시는.....
차아란
사월의 여섯 시는 분홍빛이다
매화는 벚꽃에게 새벽을 건네고
분홍향기를 흘려버렸다
사월의 여섯 시는 참으로 좋다
어둡지도 지독히 눈부시지도 않는
진달래빛 여유가 좋다
내 것이 아니라도
내 것이어서 좋다
내 것이라도
내 것이 아니어서 좋다
사월의 여섯 시를 다 가진다고 해도
사월의 여섯 시를 다 준다고 해도
꼭꼭 숨겨둔 회색빛을 버릴 수 없다 해도
꼭꼭 감춰둔 회색빛이 다시 그리워진다 해도
사월의 분홍빛, 그 속에
내가 산다
우리가 산다.
부치지 못한 편지
차아란
제목은 멋드러지게-
가슴은 활짝 열어 제끼고
우물 속 꼭꼭 숨겨놓은
사연 하나하나 건져올려
매화향 살짝 뿌린 편지지에
라일락 보라빛 글씨체로
목련 닮은 한결같은 마음 실어본다
아카시아 꽃잎도
구절초의 소박한 사연도
그리움에 볼 뜨거운 단풍잎 하나
짝사랑처럼 얹혀 놓고
노란 은행잎에 곱게 곱게 포개어
또 다시 겨울을 나기 위해
커다란 독 속에 가둬 버렸다
새파란 추위를 보내고
새순 뽀독뽀독 올라올 즈음
군내나는 사연들
추억 속에서 끄집어 내어
싱그러운 새 봄처럼 웃어 본다.
들풀을 키운 연유
-대가야의 기운은 산야에 남아
서상조
마주한 바위에 피가 돌아
천년 사랑을 나눈들
뉘 있어 그 사연 온전히 전하리요
맹문 없는 사가(史家)의 책갈피는 접어라
빛나던 금관이 바람에 부스러져
허공에 흩어진다 할지라도
눈 감고 볼 수 있는 현자가 있다면
그 가슴에 금관은 다시 일어서리라
기개는 빛을 휘당겨 태양을 잡고
영광은 송화처럼 뜰마다 나렸지마는
마지막 일성에 한 방울 눈물이야
구름을 일구고 뚝뚝 슬픔을 내려
백성처럼 어여삐 들풀을 키웠노니
하얀 제비꽃이 피거든 가슴으로 보아라
긴 세월 울다 빛바랜 구름
그늘로 지나가는 하얀 꽃잎엔
애절히 전하는 유한(遺恨)이 있어
바람 아닌 흐느낌에 떨고 있으리니
겨울 나무
서상조
기도하는 마음은
겨울밤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잎사귀 예쁘게 물들여
하나만이라도 하늘에 매달아
별을 만들어 보려는 기도
하늘로 뻗친 팔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아래로 떨어져버린 잎사귀들이
언 땅 위에서 사그락거리며 부서져가는 소리에
겨울 나무의 기도는 눈물 자국이 됩니다
기도를 그칠 수는 없습니다
야윈 몸에서 피를 뽑아
또 다시 꿈을 짓는 겨울 나무는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목 련
우상혁
잎이
세상살이 두려워 밤새 머뭇거릴 때
철없는 꽃이 먼저
봉오리를 맺었다
절망은 찬란함의 이면(裏面)임을
쉽게 알아버린 꽃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져 추락하고 말았다
이윽고 잎이 슬며시 나왔다
두리번거리던 잎은 꽃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잎은
홀로가 두려운지
꽃을 그리며
왼종일 파르르 떨고있다
4 월
우상혁
고샅 가까이 어느새 길게 뻗은 그림잔
내 기억의 언저리를 슬그머니 맴돌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등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수줍어 몰래 핀 개나리
이름 한번 제대로 불러주기 전에
鋪道위에 나란히 깔리고
난 길을 건너기 위해 짓밟고 가야만 했다
나의 눈길이 미처 머물기도 전에
밤새 나뭇가지는 텅 비어
한 장 한 장 분해된 체
겹겹이 쌓여 있는 목련꽃
저토록 비도록
내겐 떨어지는 고통의 신음소리 한 가닥조차 들리지 않았단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황사 먼지를 뒤집어쓰면서까지
가지끝에 매달려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 추한 삶의 모습을
악물어 외면하고 싶어 했는지도…….
4월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기까지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돌린 눈길에서 부딪힌
찢기우고 상처 난 잔해 속에서
思惟가 잠시 고개를 숙이면
하늘만 쳐다볼 일이다.
세월 속에서
최상무
가을은
현란한 죽음의 극치
삶이란 무엇일까?
알 듯한 막막함
가을 들판
황홀한 모자이크
굽이굽이 흐르는 낙엽
태곳적부터 걸어온 길에서
다시 만난 이웃들아
한 뿌리로 녹아드는 눈길들로
가슴을 덥혀
다음 세상 어느길목에서 또 만나면
반가움으로 두 손 잡는
그런 사랑으로 살자.
보리암에서
최상무
찬 바람 옷깃 여미는 산사를 찾아
늦가을 산사의 고즈넉함과
을씨년스런 풍경소리에 마음 설레어
두 손 모아 합장하는 그대를
쳐다보는 미소는
천만의 고뇌를 함축하고
비바람 모진 세월 속에서도
끊이지 않는 뭇발길들은
오늘도 억눌린 가슴
풀어 놓고자
산사를 찾는다.
매화의 우화(羽化)
진봉길
두고 온 그 마음 가져오라며
꽃샘 추위가
오시는 님에게 트집잡기를 며칠
그래도 님은 고결하여
그 고운 안개색에 더 깊은 향기 주시고
조용히 모습을 거두면서도
새 봄의 초대를 잊지 않으시더니
재촉하는 봄 눈발 속에서
앙증맞은 꽃잎이
나비의 나래짓으로 우화하셨다.
작은 새의 안부
진봉길
서산 노을 끼 엿보이고
거센 들바람이
얼음가루 휘 몰이하는 속으로
옛길 떠나가는 작은 새 한 마리
설익은 이웃과 험한 길가는 곳 어디서
두 날개는 성히 접었을까
온 밤 검게 태우며 안부 기다린다
시린 어깨 뒤척이며 여린 마음 다독여도
가슴 속 파고 든 찬 바람은
잿빛으로 창문에 서성이고
동녘에 따스한 불길 희뿌연 미소 띄울 때
선잠 깬 굴뚝새 나에게 말 건넨다
새 깃 단장하고 청량한 그 웃음 되찾아
간 듯 이내 돌아온다고
고령, 이곳에 오면
설화영
굽이돌아 주산을 안고 금산재를 내려오면
흐르는 회천 강물보다 마음이 먼저 출렁인다.
고령에 오면
볼그레한 딸기 얼굴을 하고
메론의 달콤함이 지친 마음을 녹여내리는곳
한 뿌리밑 주렁주렁 달린 개진감자는
우리네 부모들과 이웃들의
집성촌을 보여주듯
고령에 오면
수박 속에 들어있는 씨알 하나
우주를 키워 낼 햇살 가득하다.
단기 42년부터 대가야라 이름 지은
고령, 이곳에 오면
그 시대에만 볼 수있는 순장무덤이
형이상학적인 모습으로
하늘의 별들처럼 가지런히 누워
어둑한 곳에서 걸어나와
새벽같이 맑은 아침을 기다린다.
선 물
설화영
삼동(三冬)의 혹한(酷寒)을 참아내더니
자연은
뒷동산 한 아름
또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
새로 나온 새순처럼
가지 끝 한 뼘 만큼
생각도 커진 듯
철들어가는 향기도 담아있다
문득 흐드러진 꽃보다 더 아름답게
베풀어 준 은혜로운 사람들
꽃 속에 한송이한송이 담겨있다
이제 곧 낙화(落花)가 서러운 봄 날
이제라도 선물을 해야겠다
감사와 고마움
꽃이 진 그 자리 토실한 열매 하나 매달고
민들레 깃털에 실어 마음까지 전하리.
백일홍 나무를 보면서
여 명
여름날
뙤약볕 사이로 일렁이는 너는
자꾸 내 시선을 끌어간다
내 눈 속의 눈물도 끌어간다
겹겹이 쌓인 네 입술을 보면서
우린 아마 한 삼백 년 전쯤엔
연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 이지러지는 한밤에도
그토록 널 그리워하여
넌 내 안에서 늘 꽃을 피우나니
우리가 만났던 겹겹의 날들
숨겨놓은 수많은 사연들
빠알갛게 토하며
서로의 입술 포개어
오늘 이토록 서로 흠뻑 젖나니
나무와 나뭇잎으로 만났지 우리
고기와 수초로 만났지 우리
해그림자와 달입술로 만났지 그지
아, 곁에 있어도
언제나 그리운 넌
아무래도 내 삼백년 전의
연인이었으리.
수 박
여 명
장마비가 며칠 동안 쉴새없이 내렸다.
땅 속 갈증을 채워주더니
위로 튕겨져 내몰린다
처마 물받침대의 깨어진 사이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일주일 전에 이사 온 수박이
내다보고 있다
2차 성징이 시작되어
달거리를 하고 다 성숙한 수박꽃이
안에서 또 피었다 지고
아, 이러다
지쳐
내 몸 속
뜨거운 피 멈추고 나면
한번 사랑받아 보지도 못하고
단물
다 빠져버리겠네.
목 련(木蓮)
김영식
설한풍이 혹독해도
꽃눈 틔워 삼긴 것은
우수경칩에 뱃길 열리면
임 오신다는 기별 있어
동지섣달 긴긴 밤도
물레로 지새우며
비단금침 고이 펼쳐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
천상의 선녀가
날개를 고이 접어
裸婦로 피는 木蓮
수줍어 다소곳한
우아한 그 자태가
가까이는 눈 부시고
만지면 터질 듯해
멀리서 바라만 봐도
가슴이 설레온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김영식
아이야
동해에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을 보았느냐.
그리고
서산일락의 해지기 전 한참은
노을빛 아름다운
석양의 절경을 보았느냐.
아이야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았느냐.
삼라만상에는 오는 길과
가는 길이 다를 뿐
한번 오면 반드시 가야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야!
아이야
꽃이 진다고 서러워 하지 마라
연년세세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피듯이
우리가 잠시 헤어져 있어도
때가 오면 그 때처럼
기쁨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명시 감상 |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새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천상병 약력
평론가, 시인.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 상대 수학. 중학 5년 재학중 담임 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었다. 1951년 [문예]에 평론을 발표.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고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 쓰러졌다.
이때 행려병자로 병원에 입원되어, 행방을 모르던 친우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고 시집 [새]를 발간하기도 했다.
가난, 무직, 방랑, 주벽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우주의 근원과 죽음의 피안(彼岸),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하여 큰 공명을 불러 일으킨다.
시집에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가 있고, 동화집에[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