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는~ 아니, 다음 주부터는~ 아니, 새 달부터는 공부해야지
허튼 맘을 고쳐 먹고 또 고쳐 먹다 보니 그 내일, 그 다음 주, 그 새 달은 또 다른 내일, 또 다른 다음 주, 또 다른 새 달이 되고 어느 새 시험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토요일 아침부터 시험 당일까지 꼬박 밤샘을 하면서 기출문제 위주로 교과서를 일별하리라 다짐하며 도서관엘 갔습니다. 야무진 마음과는 다르게 느지막하게 10시쯤 시립 산본도서관엘 도착하니 이런~ 석양에 게으른 놈이 앉을 자리는 없습니다그려~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돌아와도 자리는 날 생각이 없고, 허비한 시간을 곱씹어도 때는 늦어, 소주나 한잔 마시고 잠이나 잘까 터덜터덜 바쁠 것도 서둘 것도 없이 천지사방 휘휘 둘러보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시청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도 우러르고 뒷산에 올라 아직 남아 있는 밤늧 냄새에 씨익 웃음을 던져주다가 그래도 아니 하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흉내나 내자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지 않습니다 이놈의 여편네 문단속이나 하고 나다닐 것이지~ 궁시렁거리며 옷을 벗고 시원하게 샤워를 했습니다 목욕재계까지 했으니 참하게 책이나 볼까 의젓하게 폼을 잡다가 안방엘 가니 이런~ 애 엄마는 소파에서 막내 놈은 침대에서 아직 한밤입니다
자고 있는 아내의 뺨을 쓰다듬으니 에구머니나~ 울근불근 춘정이 꿈틀거립니다그려~ 학교 간 두 녀석이 올 시간은 멀었고 막내는 한참 꿈나라를 헤매고 있으니 이것도 밀린 숙제나 하라는 하늘 뜻이니 시험 공부도 중요하지만 부부 사이의 숙제도 그에 못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어찌 이런 호기를 그냥 보내리오~ 앙탈부리는 아내를 욕실로 떠밀고는 빠득뽀득 씻고 오라 했습니다
거한 숙제를 마치고 나니 나른한 잠이 유혹합니다~ 그런데 OCN인가요~ 영화 히트(heat)가 나오고 있습니다 몇 번씩이나 보았는데도 그냥 쏘옥 빠져버렸습니다. 참으로 단순한 감정이여! 시나리오를 쓰는데만 몇 년 걸린 영화라서 그런지 참으로 복잡다기한 얘기를 많이 섞어 넣으면서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숙제 후에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영화를 보다가 잠이 부스스 내리기에 굳건히 맘을 고쳐 먹고 정좌하여 발 킬머,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의 연기 속으로 폭 빠져들었습니다 닐(로버트 드니로)이 호텔에서 웨인그로를 쏴 죽이고 한(알 파치노)에게 쫓기는 장면에서 밤샘을 생각해서 한잠 자야겠다 맘 먹고 눈을 붙였습니다~ (제가 시나리오를 썼다면 주인공이 비행기 불빛에 그림자가 한의 눈에 띄어 총을 맞고 죽지 않고 쫓아오는 한을 유유히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하는 쪽으로 몰아갔을 것이기 때문에 닐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초 안에 털고 일어서지 못할 것은 갖지 마라"는 닐의 말과 살꽂이와 죽음, 그리고 잠의 관계를 생각하다보니 어느 새 아득한 잠나라입니다~
일어나 보니 다섯시~ 게으른 놈이 김맬 밭고랑 센다고 계산을 해봅니다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과목이 세 과목이니까 한 과목에 세시간씩 할애하면 아홉시간이니까 새벽 세시까지 문학비평론, 바른생활과 문법, 현대문학을 일독하고, 다시 한 시간에 한 과목씩 훑어보고, 시험장에 가서는 쉬는 시간에 약한 부분을 훑어보면 되겠다는 아주 깜찍한 생각을 합니다~
현대문학 기출문제를 풀면서 잘 모르는 부분은 교과서를 찾아가면서 읽다가 이용악, 백석 시인의 시에 폭 빠졌습니다~ '여승'과 '전라도 가시내' '낡은 집'에 빠져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장의 일도 해결 못하면서 시험 다음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시험이 끝나면 하루에 한 편씩은 시를 읽으리라, 그 동안 끄적였던 낙서도 손보리라 저 설산의 '야명조'와 같은 다짐을 했습니다~ 에혀
애써 시험공부를 하다보니 '불멸의 이순신'을 한답니다~ 이 또한 안 보면 매국노가 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어 티브이 앞에 정좌했습니다
책상에 앉아서는 아내에게 차 좀 타달라고 했습니다 달리기 시합에서 꼭 화장실 간다고 하는 어린 아이처럼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곡우차를 진하게 우려 마시면서 또 차 맛에 빠져서 다선일여며 시선일여를 생각합니다 에혀 공부는 다 틀렸다 생각하면서 심각하게 갈등합니다 다 집어치고 잠이나 잘까, 아니지 그래도 공부가 좋다고 편입했는데 그럴 수야 없지 내 안의 또 다른 나들이 싸움을 합니다~ 그래, 안 하고 찜찜해 하기보다는 하는데까지 해보자 마음 먹고 다시 책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책상에 앉아 꼬박 밤샘을 하면서 생각만큼은 못했지만 그런 대로 기출문제 위주로 모르는 부분을 찾아가면서 읽다보니 새벽입니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춰지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생각했던 만큼은 보았습니다
곤히 자는 애 엄마를 불러 아침을 달라해서는 맛나게 먹고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요약된 시험자료를 보았습니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도 체크해 놓은 것만 집중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험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번 대충대충 본 내용이라 시험지를 받아들고 보니 그 놈이 그 놈이었습니다 아예 책을 보지 않았다면 가장 긴 번호나 가장 짧은 번호, ~만, ~도가 들어가는 번호를 택하련만 어설프게 공부했기에 까마귀 암놈 수놈 가리는 꼴입니다~ 딱 헤매기 좋게 공부랍시고 해놓고는 시험을 치르는 꼴이 한심스럽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러구러 시험을 치렀습니다 벼락공부도 공부랍시고, 시험도 끝났다고 옆방에서 시험친 황선생님과 식당엘 가서 소주 한잔으로 너스레를 떨고, 술김에 빵을 한 보따리 사서는 집에 들어갔습니다
피곤하다고 한잠 자고 일어나서는 답을 맞춰봅니다~ 그리고는 또 다짐하였습니다 시험 볼 때나, 시험이 끝나면 다짐하는 그런 다짐을 이번에도 하였습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미리미리 공부하리라~
그렇지만 압니다~ 그 다짐은 다짐으로 끝나리란 것을 꿈은 이루어지면 이미 꿈이 아니란 발칙한 생각대로 흘러가리란 것을~ 이렇게 벼락공부라도 해서 얻는 것이 있다면 학교에 다닌 보람이라고 또 자위하리란 것을~ 일이 바쁘다 시간이 없다 핑계를 만들고 그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또 한 학기를 보내리란 것을~
착실히 공부했던 분이나, 저처럼 억지로 벼락치기 했던 분이나, 아예 책을 보지도 못하고 시험장에 들어갔던 분이나, 그것도 부끄러워 아예 시험을 포기했던 분이나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열심해 공부했던 분은 스스로를 이겨내느라 노력했기에, 벼락치기 했던 분은 늦게나마 벌충하려 애썼기에, 제대로 책을 보지도 못하고 시험장에 들어올 용기를 내기도 무척 힘들었기에 아예 시험을 치르지 못한 분은 다음의 권토중래를 다짐하기 어려웠기에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즐거운 여름 방학 보내시고 다음 학기에는 날마다 더욱 좋은 날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개강 때까지는 우리나리 시인과 독자들이 뽑은 5대 시집이나 착실히 읽을랍니다. 저번 출석수업 때 어느 선생님이 말씀하신 정지용, 백석, 서정주, 김수영, 이성복 시인의 시집이나 참하게 읽어볼랍니다~
그리고 출석수업 때 아는 체 좀 해주십시오~ 점심은 대접할 수 있으니까요~
참 제 성적이 궁금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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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참으로 재밌게 잘 쓰셨네요...제 상황과도 많이 비슷...(아내 부분은 빼고요...전 아직 미혼이라..) 시험 후의 학우님들에게의 격려도 적절하게 잘 써주셨네요...뒷부분은 제가 좀 써 볼까 했는데 관두렵니다...그리고 그 좋은 글솜씨 묵히지 마시고 이번 "통문" 응모해보세요^^
*^^*~ 정진용 학우님은 참으로 낭만적이십니다~ㅎ 글을 읽으며 웃음을 참느라 혼자 키득거리는게 저도 이상해 지는것 같았슴다~사람이 긴장 최고치에 다달음 머리가 지끈 가슴 울렁거림 증상에 토하고싶고 안절부절 복합적 불안증세를 나타내던데..그렇게 완벽한 여유뒤의 성적 참 궁금해요~의외로 잘나온건 아닐까요?ㅎㅎ
ㅎㅎㅎ리얼한 기말시험 참가기 잘 읽었습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그래도 가슴에 얻은 게 있습니다. 백석, 이용악, 서정주 등등...시험 후에 식당에서 술잔을 부딪치던 두 분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오늘의 반성이 실천으로 옮겨질 날을 기대하면서...수고 하셨습니다.
하하...크크...종류별로 터져 나오는 웃음이 나른한 오후의 잠을 쫒는 군요...심히 궁금합니다...성적...^^ 갠적으로 이성복시인 저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