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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이 시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철저하게 양심 앞에 정직하고자 했던 한 젊은이의 내부적 번민과 의지를 보여 준다.
앞의 두 행에서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그의 소망을 말한다. 이것은 인생을 오래 살아본 사람의 달관한 말이 아니다.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어 본 나이 지긋한 사람이라면 감히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면서 사람이 부끄럼 없이 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자신 역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많이 저질렀는지를 알 터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불완전하며 갖가지 그늘과 어둠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사리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버리고 세속적 삶에 타협하게 한다. 이 작품의 서두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선언이다. 그것은 젊은이의 순수한 열정과 결백한 신념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욱이 삶 자체가 치욕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식민지의 상황 아래서 그것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윤동주는 이에 대해 날카로운 반성의 언어로서 답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그의 괴로움은 자신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생겨난다. 부끄러움이란 잘못을 저질러서만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도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결백한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란 그의 양심의 뜨거움에 비례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에서조차 괴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시가 보다 높은 경지를 이루는 것은 여기에 다음의 넉 줄이 이어짐으로써이다. 밤 하늘의 맑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겠다는 담담한 결의는, 자칫 무모한 번민에 그칠 수도 있는 양심적 자각을 성숙한 삶의 의지로 거두어 들인다. 그것은 극히 담담하면서도 의연한 결의와 태도를 느끼게 한다.
별도의 연으로 따로 떨어진 마지막 행은 이와 같은 결의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이미지이다.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했을 때, 이 별의 암시적 의미는 어둠과 바람 속에서도 결코 꺼지거나 흐려질 수 없는 외로운 양심에 해당한다. 그것은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젊은 이성의 상징이다. 바로 이 한 줄이 덧붙여짐으로써 양심의 결백함에 대한 그의 외로운 의지는 어두운 밤 하늘과 별, 그리고 바람이라는 사물들의 관계를 통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다. [해설: 김흥규]
▶ 성격 : 성찰적, 고백적, 의지적
▶ 심상 : 별과 바람의 시각적 심상
▶ 경향 : 참여적
▶ 어조 : 고백적 어조와 의지적 어조. 엄숙, 정결한 어조.
▶ 특징 : ① 대조적 심상의 부각 ― (별과 바람)
② 서술과 묘사에 의한 표현
③ 자연적 소재의 상징화
▶ 시상 전개 : 시간의 이동에 따른 전개.
과거(1~4행) → 미래(5~8행) → 현재(9행, 제2연)
▶ 구성 : ① 삶의 부끄러움과 괴로움(1-4행) - 과거
* 부끄럼 없는 삶에 대한 희구(1,2행)
* 현실 상황 속에서의 고뇌(3,4행)
② 미래의 삶에 대한 결의(5-8행) - 미래
* 사랑의 실천과 진실한 삶의 다짐
③ 현재의 상황적 갈등(9행) - 현재
* 시련과 고뇌의 현실 확인
▶ 제재 : 별.(이상의 세계, 순수한 양심)
▶ 주제 :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
윤동주는 1940년대의 식민지 치하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 시인이다. 그는 작품에서 내적으로 끊임없이 갈등하면서, 현실 속의 자아가 절대적인 순수를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강한 부끄러움으로 매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부끄러움은 세계관이나 인생관 같은 문제에는 관계없이 소박한 도덕주의, 신앙, 속죄에 관한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저항 시인으로 생각했던 것은 왜일까?
우선 첫째로, 그의 시와 삶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있지 않았고, 따라서 시인이 무엇 때 문에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36년이라는 긴 식민 치하 기간에 비해 심훈, 이육사, 한용운 외에는 이렇다할 저항시인이 없었으므로 단지 그 부재를 채우기 위해 그를 저항시인의 분류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저항시인으로 불릴 만큼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부딪힘 즉 참여와 비판, 투쟁이 없었고 다만 독특한 시대현실이 그를 저항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즉,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시에 있어선 그의 작품을 ꡒ저항시ꡓ라고 불러도 괜찮겠지만 개인적 행보, 특징과 성격 등이 반영되는 시인의 분류에서 본다면 ꡒ저항시인ꡓ이란 단어를 섣불리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작품과 작가의 특성이 상반되는 특징으로 타 시인의 작품들에 비해 논란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 논란은 그러나 엇갈리기만 하고 함께 합쳐지진 못했다. 그것은 사회, 정신사적 연구가 많은 반면에 작품 자체의 형식에서 윤동주 시가 주는 감동을 찾는 내재적 연구를 소홀히 한 채, 그가 단순히 애국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따지는데 더욱 급급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쪽 면만 빨갛게 익은 사과라고 해서 그것이 맛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익지 않은 반대쪽 면을 강렬한 햇빛 아래로 내놓아야 할 때 인 것이다.
A.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다모아,1990
B. 단행본
권일송편저,윤동주 평전,민예사,1984
이건청,윤동주,건국대학교 출판부,1994
권영민엮음,윤동주 연구,문학사상사,1995
문덕수외 4인,한국 현대 시인연구,푸른 사상,2001
C. 논문
윤동주 시연구, 최명표,전북대학교,1992
윤동주 시 연구 : 자아 의식과 세계 인식을 중심으로, 류찬열 ,중앙대학교, 1998
윤동주 시의 발전과정 연구 : 정지용 시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이경숙, 인하대학교, 1999 윤동주 시의 희생의지와 그 좌절에 대한 연구 , 허정 ,부산대학교, 2001
한용운과 윤동주 시 비교 연구 , 유은하 ,고려대학교, 2003
윤동주 詩에 나타난 실존적 자아인식 , 양금선, 연세대학교, 2003
시인 윤동주는 1917년에 북간도에서 태어나 1945년 2월에 일본 감옥의 차디찬 바닥에서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28세를 일기로 요절한다.
윤동주의 작품은 언제나 지성인으로서 암담했던 조국과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는 민족의 고통을 알면서도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의 성찰 즉, 자기 반성이 지배적 정서를 이룬다.
또한, 시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영혼의 순결함도 엿볼 수 있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반이었던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자작시집을 발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을 염려한 스승의 만류로 출판을 포기한다.
우리가 잘 아는 "서시(序詩)"가 바로 그 시집의 서문에 해당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 윤동주는 서시에서처럼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하고자 괴로워 했으며",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는 소명의식과 결의"로 28세의 짧은 삶을 끝마친다. 이처럼, 서시는 시인으로서, 식민지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윤동주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이 모두 반영되어 있다.
윤동주는 1941년 5월부터 11월까지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또다른 고향 등을 창작하였다.
"별 헤는 밤"에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다"고 말하였는데, 가을은 우수와 명상의 계절로, 당시 우리 민족에게 근심과 걱정의 우울한 계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한다"고 하였는데, 밤이란 어둠이고, 두려움이며, 암담함이다. 바로 우리 민족이 감당해야 했던 길고 긴 어둠의 터널, 일제강점기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시의 화자는 스스로 부끄러워 했다.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보고 남녀노소 만백성이 울분을 감추지 못하건만, 지식인이 되어서 조국과 민족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부끄러워 한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는 후회하고 반성하며 추락하는 시가 아니다. 그의 시 후반부에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다"라고 노래함으로써 확신에 찬 의지와 믿음으로 용솟음치듯 반전을 이룬다. 그렇기에 그의 시가 일제 강점기하의 저항시로 주목을 받는 것이다.
"또다른 고향"에서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라고 노래함으로, 무기력한 자아에 대한 부끄러움과 성찰을 거듭하고 있으며,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라고 말함으로 어둠이 상징하는 일제강점기하에 있는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안타까움에 부끄러워 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괴로웠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피를 흘리겠다"며 화자는 몸부림치며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이처럼 시대적 양심과 반성 그리고 성찰의 시인 윤동주는, 시집 출판이 좌절되자 일제에 대한 자책감과 울분을 격정적인 어조로 표현하였는데, 그 작품이 바로 "간(肝)"이다.
윤동주는 "간"에서 "내가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하고 울부짖으며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라고 시대적 울분을 토로하였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기 앞서 조국 땅에서 마지막으로 쓴 시가 "참회록"이다. 참회록은 말 그대로 자기 생활을 뉘우쳐 고백한 기록을 말한다.
그렇듯이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욕되다" 라고 부끄러워 하며,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하고 자책을 한다.
그러나 화자는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지금의 부끄러운 고백을 참회해야 한다"고 하며 부끄러움은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 부족임을 인식하고, 조국 광복을 확신한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거울을 닦아 보자"고 하며 결의를 다진다.
윤동주는 1942년 일본에 유학하여 "쉽게 쓰여진 시"를 쓴다. "쉽게 쓰여진 시"는 시인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 중 하숙방에서 쓴 시로,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성찰을 통한 미래에의 신념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암울한 상황을 뚫고 찬란히 부활하는 순간에의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표현함으로 하숙방의 비좁기만한 공간을 화자가 처한 역사적 현실 즉, 조국의 식민지 상태를 은유하였다.
또,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라고 노래함으로 화자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상황과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부모님이 어렵게 보내준 학비로 그런 현실과는 동떨어진 학문(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에 좌절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린다"고 말하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쉽게 쓰여진 시는" 시인 윤동주가 쓴 최후의 시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는 그 다음 해인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된다.
이처럼, 시인 윤동주는 스물여덟의 짧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일제에 강점되어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의 아픔에 괴로워했으며,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뭔가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반성 그리고 다짐을 반복하며 별처럼 노래하다 별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은, 시인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하겠다.
(출처 : '시인 윤동주의 작품세계' - 네이버 지식iN)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이 시에는 죽어 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고통 혹은 괴로움! 살아가는 데에 고통이나 괴로움 등으로 죽거나 살거나 모두들 괴롭고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 모두를 한 침대에서 잠을 재우려 하지만 고통에 의해 울고, 이때 젖이 등장하여 이 사람들의 감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있고 새벽이 등장하므로써 완전히 해소되어 희망에 찬 나팔소리를 듣게 된다.
이 시를 시대적으로 보면 일제치하 때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일제 치하 속에서 죽어도 살아도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는 것이고 즉, 죽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동등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또 젖은 한 가닥의 희망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의 새벽이 오는 건 이제까지의 고통은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새벽이 오고 나팔소리가 들림으로서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또한 조국광복이 되는 것이다.
5연에서는 새로운 새벽(기다리는 때)이 밝아오면 나팔소리(깨달음의 소리)가 들려 오면서 가야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길의 모색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한국의 시인
1. 짧고 불행한 생애와 시
윤동주의 시는 아름답고도 투명하고 결곧은 결정체들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내재적 의미는, 시가 쓰여진 시기가 일본 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던 만큼, 역사적 애환과 맞물려 훨씬 더 중충적이고도 풍부한 모습으로 읽힌다. 그것도 해방을 6개월 앞두고 28세의 빛나는 나이로 일본에서 옥사하며 불행하게 마감한 그의 삶이 시에 더한 빛을 던져 준 것이 되고 말았다.
윤동주는 생전에 문단에 발표를 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한 적이 없는 무명의 문학청년이었다. 용정 광명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카톨릭소년」에 동시 몇 편을 발표했고, 조선일보와 연희전문의 문과에서 발행한「문우」에 시 몇 편이 실려 있을 뿐이다. 해방후 1947년 경향일보 2월 3일자에 시인 정지용이 생애를 덧붙여 쓴시「쉽게 씨워진 시-고 윤동주」가 실려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지 시작했다.
그외 대부분의 시는 해방 후에 간행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1.30)에 실려서야 비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일제 암흑기 속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시로 풀어 놓았던 윤동주는 시적 성취의 높이만큼이나 극적이었던 삶을 시와 맞바꾼 것일까?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의 기독교 신앙이 두터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에 기독교 학교인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고, 13세(1930)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새명동」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몇 호 펴냈다. 14세에 대랍자의 중국인 관립학교에 다니다가 용정으로 이사해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초한대」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라는 시 세편이 17세(1934년)에 쓰여진 최초의 시이지만, 이미 습작기의 작품 수준을 웃도는 것을 보아 그 이전에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나 남아 있는 시는 없다. 18세(1935년)에 전학해 간 평양 숭실중학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가하는데 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처하기 전에 자퇴하고 만다.
이 때문에 용정에 돌아온 윤동주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서 졸업을 하는데, 문학을 반대하는 부친과 맞서 단식을 하고 가출까지 하면서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비로소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시는 계속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고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24세(1941년)에 자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했으나 상황의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5세(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겼는데, 1943년 7월에 귀향하려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재판에 회부된 윤동주는 2년형을 선고 받았다. 해방을 여섯달 남겨 놓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름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가 비통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시 '규슈(九州)제국대 생체 해부 사건'과 관련지어 전쟁시에 부족한 혈장 대용으로 식염수를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생체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동주의 죽음도 이 생체 실험의 희생물이라는 의혹에 싸여 있다.
2. 제기된 문제들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1954년에 발표된 고석규의「윤동주의 정신적 소묘」뿐이었다. 1970년대 김윤식.김현이 펴낸「한국문학사」에서 윤동주의 작품을 대표적인 저항시로 꼽은 이래로 그의 시를 두고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논란이 되어 온 것은 그가 과연 저항 시인인가에 대해 제기된 의문이었다.
그를 저항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젊은 나이에 옥사한 사실에 둘 수 있다. 윤동주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직접 비판하고 나서거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끄러움에 대한 강박 관념을 보여 주는 시어들, 사색과 실존 의식에 우러나오는 저항의식 또는 실향의식 까지를 사회적 또는 정신사적 맥락에서 일제 암흑기에 저항하는 태도로 논의해 왔다.
특히 김용직은 그를 보다 적극적인 항일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시를 저항시,민족시로 분류하려는 논의 외에 전통적인 서정시의 계열에서 순수 서정시로 파악하려는 견해들이 있다. 오세영은 윤동주의 옥사사건을 추상적으로 미화시키면 의도적 오류가 발생될 수 있다는 점,식민지 치하에 36년간이나 있으면서도 떳떳하게 항거한 자랑스러운 저항 시인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 윤동주 유고 시집이 간행된 이래로 한국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과 사회구조가 저항 시인을 요청해 온 점 등을 지적했다.
둘째는 윤동주의 문학사적인 위치에 대한 문제이다. 생전에 문단과 전혀 관련하지 않았던 그의 시집이 1941년에 발간됨으로써 시작 시기와 독자층이 시대적으로 엇물려 윤동주의 독자층은 잠재적이라는 것이다. 시는 태어난 그 시기로부터 바로 생명력을 얻으므로 윤동주의 시를 우리시사의 암흑기에 두는 데는 커다란 이견이 없다.
셋째는 윤동주가 20세에서 23세에 집중적으로 쓴 동시 수십 편이 관심을 모았는데 이를 두고 퇴행 현상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퇴행 현상으로 보지 않는 김윤식의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기독교적인 경향에 대한 해석의 논란이 있었다. 윤동주의 시편들에는 비교적 모호한 구석이 많은데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고 이해할 때 많은 해석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3. 작품의 경향과 특성
1)초기 시와 동시에서의 현실과 이상의 거리
윤동주의 작품 활동은 1936년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카톨릭 소년」지에「병아리」(11월호),「빗자루」(12월호)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미 알려져 있듯이 1934년에「초한대」,「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1935년에「거리에서」,「창공」등의 초기 시편들이 먼저 씌어졌다. 그의 초기 시들은 그 수준이 미숙하고 관념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젊은 시인 윤동주가 그 시대를 현실적으로 인식한 고뇌의 편린들을 만날 수 있다.
초한대」에서 '어둠'과 맞서며 깨끗한 제물의 향내를 맡는 의지나 「삶과 죽음」에서 죽음을 삶 속에 수용하는 자를 위인으로 두는 시적 사유는 윤동주가 마감한 삶의 방향성을 시적 출발기에서 이미 예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윤동주는 1936년대 후반기부터 1938년까지 집중적으로 동시를 썼다.「병아리
」,「햇비」,「무얼 먹구 사나」,「굴뚝」,「아침」, 「애기의 새벽」,「해바라기 얼굴」,「산울림」등의 동시들을 대하면 구체적이면서 쉽고 진솔한 시어로 짜여져 있어 순수하고 맑은 동심의 세계를 읽을 수 있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혼자 들었다,
산울림.
-「산울림」전문
「산울림」과 같이 빼어난 동시를 쓰던 그는 1938년 이후에는 더 이상 동시를 쓰지 않았는데 시적 성취가 높은 후반의 시들과 초기 시들 사이에 이 동시의 세계가 끼여 있어 단절감을 줄 정도이다. 시인의 내면에 어두운 당대 현실과는 순도 높게 대비되는 청순성이 동시를 통해 유감없이 표현되었던 서정성의 한 특징을 보여 준 것으로 이해된다.
현실의 모순과 삶의 어둠을 체감하면서 동시에 유년기의 화해로운 세계를 꿈꾸며 노래했던 여유가 마음에 설 자리는 1938년 이후에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일까?
그런데 동시에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감과 감탄을 앞세우며 행복한 자아의 모습을 드러내면서도「해바라기 얼굴」,「오줌싸개 지도」와 같이 이 현실적 삶의 불안으 피해 갈 수 없었던 흔적을 시화하고 있다. 이 부분들에서 후기 시세계로 통하는 시적 자아의 내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있다.
1936년에 쓰여진 시「가슴1」,「가슴 2」에서 답답한 현실에 가슴을 치다가 재만 남는 상황이 절실하게 표현되어 동시의 세계로 담아 낼 수 없는 심정의 한 극단적인 정황이 드러난다. 현실과 이상이 괴리된 상황 속에 처한 시인이 동시 장르와 시 장르 사이를 오가면서 내면적 자아 성찰의 세계로 깊어져 가는 긴장감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2)정체성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과 내면성찰
1930년대 이후의 시인들에게 식민지하의 지식인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정체성에 대한 절실한 의문에서 놓여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더구나 북간도에서 평양,용정, 서울,일본도쿄,후쿠오카로, 마지막 유골이 되어 북간도로 떠돌아다닌 윤동주에게 '나'가 뿌리내릴 고향은 어디였을까? 그의 시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심상중의 하나도'고향','향수'이다.
「별헤는 밤」(1941년),「사랑스런 추억」(1942년)에서 시적 자화는 이상과 현실의 지난한 거리를 부끄러움으로 인식하면서 가난한 이웃들,애착이 가는 물건들,동물들,시인들까지 그리움의 대상을 일일이 확인한다. 뿌리 깊은 고향 상실의 비애는「또 다른 고향」(1941년)에서 절정에 이른다. 밤새워 어둠을 짖는 '지조 높은 개'에 쫒기는 '나'는 비참한 고향의 현실을 뛰어넘어 떳떳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상향,'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꿈꾸는 의지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모순된 현실,삶의 괴로움에 처하는 부끄러운 시적 자아는 사명감과 숙명감을 깨달으며 의지를 보여 주기에 이른다. 대표작「서시」(1941년)를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전문
2년 먼저 쓰여진 시「자화상」(1939년)에서는 우물에 비추인 달을 응시하며 자신을 반성적 거리를 두고 관조하고 다시 자연과 조화되는 자아의 모습에서 반성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서시'에 이르면 자연과 우주의 세계를 주관적인 의식 세계를 통해 노래하던 이전의 시세계에서 과거와 결별하고 사명감과 숙명을 깨닫으며 강하고 새로운 자아의 모습을 추구하는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의지를 보여준다.
자기 내면으로만 응시하던 시적 자아를 외부 세계로 눈을 넓히고 세계와의 관계를 모색하며 새로운 자아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시의 외부 현실이 역샂거으로 참담했던 시기였던 만큼 '나'는 '민족의 역사' 속에 선'나'의 사명감과 관련된 함의를 가진다."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자아성찰에 따른 지순한 절규는 시「무서운 시간」(1941년)에서 역사의 시간에 귀기울여 극한의 위기감을 예감하게 한다.
거 나를 부른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전문
역사가 도전해 오는 소리에 온몸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극적이다. 비극적 상황으로 내몰린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나"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의 귀로길에서 예민한 자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는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지 못하고 살아왔으며"손들어 표할 하늘"도 "어디에 내 한 몸둘 하늘"도 없는 고단한 현실에 깊이 절망하는 화자이 상황 의식은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삶에 대한 에너지는 남아 호흡을 하면서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경험을 의미화하고 "내 죽는 날"인 최후의 나의 모습까지 예감한다. '일'을 마치지 않은 나는 아직은 살아 있다는 강한 자의식으로 자기 실현의 순간,소명을 다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3)인고의 구도,새 시대의 소망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의 '간'과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는 윤동주 시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상징적 매개물이다. 표면적으로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시인의 저항 의식은 시「간」(1941년)과 「십자가」(1941년)에 잘 반영되어 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시름없이
...(중량)...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간」전문
「간」은 전래의 귀토지설의 신화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결합한 풍자적인 상상력이 놀라운 작품이다. 용궁에서 위기에 처하자 슬기롭게 꾀를 내어 자기의 목숨을 지킨 '토끼"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고서도 끝끝내 인고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시인의 실존적 자존심으 대응물이다. 일제 강점기가 극한 상황에 처하던 당시 생명의 핵심인 '간'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자는 살아 있는 정신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인내하고 자책하는 시인의 저항 의식은 기독교적 속죄양 의식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시「십자가」에서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는 숙연한 결단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역경을 기억하며 현실적이 괴로움을 견디려는 시적 화자의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 준 것이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면,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시인의 예감으로 역사적 사실에 한발 앞서 식민지 지식인의 새로운 정체성의 한 면모를 시로써 빚어 놓는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를 무얼 바라
나는 다만,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전문
「쉽게 씌어진 시」(1942년)에서 죽음과 같은 삶 속에서 부활을 믿으며 "시대처럼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는 미래를 향한 강한 기다림의 염원을 품을 수밖에 없다. 비 내리는 어느 날 밤 조국을 빼앗아 간 일본의 "육첩"하숙방에서 쉽게 시를 쓰는 것을 자조하면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의 정신은 끝내 잃지 않고 있다.
화자가 기다리는 아침에는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아침과 우리 민족이 당연히 맞이해야 될 아침이라는 의미가 겹쳐져 있다. 이 시로 연행되어 일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은 이 시가 일본인에게 어떻게 읽혔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며 또한 이 시가 품은 내밀한 뜻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4. 문학사적 의미와 앞으로의 연구과제
윤동주의 대표작들은『문장』과『인문평론』을 위시한 문예지가 폐간당하고 모국어를 전혀 쓸 수 없었던 시기, 많은 지식인이 검거되고 투옥되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문학활동이 전면적으로 불가능해진 시기에 집중적으로 쓰여졌다. 윤동주 시의 대부분은 해방 직후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의 시들은 가장 어두운 역사적 시대 속에서 문학적 사명과 신념을 투명한 대속의 자세로 살아 남은 유물이다.
"일제하 마지막 시인인 동시에 해방 후의 시단과 연결되는 맨 처음의 시인이며,일제하와 해방 후를 잇는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이라는 문학사적 위치는 아직도 낡지 않은 논의로 머문다. 사망 당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보관되어 있었다던 의문의 시편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시가 저항시인가의 여부에 대한 논의보다는 시가 가진 본래의 저항성의 본질과 어떠한 형태로 관련성을 갖는지에 대해 보다 진전된 논의들이 이어져야 한다.
윤동주는 일제 말기 암흑기를 살면서 자아 성찰을 통하여 내면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역사 의식을 표현했다. 시대의 무게에 비하면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암흑기 문단사의 별로서 존재한다. 그 이유는 현실의 어둠을 견뎌 내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고,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참회하고 절망의 극한에 이르러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속적으로 노래했던 그 신념의 빛 때문이다.
(출처 :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세계' - 네이버 지식iN)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걷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은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세계>
1 . 소년시절 체험과 시적 상상력
그의 소년시절은 꿈처럼 키워온 문학에 대한 동경과 깊게 뿌리내린 기독교적 신앙과 민족에 대한 의식 등이 그 주축을 이루고 이것이 초기시의 기반을 형성했다. 소년의 눈만이 발견할 수 있는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진실한 표현, 이런 조화로운 세계는 결코 허망한 공상의 산물이 아닌 자연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예)오줌싸개지도,굴뚝
2 . 현실인식과 자아의 발견(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게 된 후부터)
현실에 대한 폭넓은 인식과 자아에 대한 반성. 개인적 삶에 대한 이해보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인식,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 등으로 확산되었다. 식민지 정책의 고통은 외부적 현실을 향하지 않고 내면화될 뿐이며 그것은 자아에 대한 끈질긴 추구작업으로 나타난다. 예)자화상,십자가,길,또 다른 고향
3 . 자아의식의 심화와 그 미완성의 노래들
1942년 도일하여 동경의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그는 시적 편력 가운데에서 현실적 상황과 자아의 실상을 가장 객관적으로 파악해 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시인 윤동주의 자아에 대한 인식 과정은 그가 초인간적인 것에 의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종교적 영역으로 끝내 몰입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 흰 그림자,사랑스런 추억,쉽게 씌여진 시
<그의 작품세계>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대, 그 말기인 1930년대와 1940년대는 한민족의 수난이 극한에 달했던 암흑기였다. 이 견디기 어려운 시대를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면서 순결의 정신을 간직하고 살았던 무명의 한 조선 시인이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은 너무나도 험하고 고독한 길이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늘,바람,별 같은 자연에의 동경, 그리고 가난한 이웃과 생명 있는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일제말의 암흑기라는 상황 속에서도 이 시인은 현실로부터 한 발자국도 물러서는 일 없이 자신과 시대를 응시하면서 민족의 긍지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왔다. 특히 숱한 문학자, 시인이 일제 통치에 영합하여 민족 말살 정책에 가담했던 당시에 끝까지 민족의 글인 한글로 주옥같은 시를 써냈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의 시의 특성은 고요한 내면 세계에 대한 응시를 순결한 정신성과 준열한 삶의 결의로 발전시킨 데 있다. 초기 동시는 일상생활에 대한 애정어린 관찰과 화해의 세계를 구축하며, 산문을 통해 청년기의 내적 고뇌를 표현한다. 그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소극적이고 자책적이며, 어떤 경우 자기 분열의 상태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음을 가치가 있다. 그의 생애를 마감할 무렵인 일본 유학 시적의 시는 비로소 윤동주의 저항 시인으로서의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의 시는 근본적으로 그의 생애의 흐름과 일치하며 발전한다. 즉 개인적 자아 성찰에서 역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인식을 확대하는 것이다. 민족의 해방을 기다리며 자신의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죽을 때까지 잃지 않은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일제 강점기의 종말에 대한 희생적 예언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시세계의 정신적 기반으로서 기독교적인 원죄 의식과 종말관이 뒷받침되기도 한다.
1940년대 전반기 일제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변절한 시인들이 있는 반면 많은 시인들은 엄청난 일본 군국주의의 압력으로 국어의 사용조차 엄금되고 창씨개명이라는 유례없는 민족말살정책 등으로 민족의 앞날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친일이라는 쉬운 길을 포기하고 소극적인 저항이기는 하나, 붓을 꺾어나 언제 발표할 지 모르는 시를 써 모아두기도 하고 자신의 신념을 담은 시를 쓰기도 했다. 이들의 행위가 소극적이기는 하나 적극적인 친일행위보다는 떳떳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사적 위치>
윤동주의 시적 발상은 그의 초기작품인 동시의 세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대상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 주축을 이룬다. 이것은 1930년대 초기 정지용, 김영랑 등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시적 태도와 연결된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감각은 일상적 체험을 근거로 했으며, 치졸한 공상은 거부했다.
그가 파악한 사물(자연)은 인간의 삶과 연결되었다. 청록파 시인들이 그려낸 자연은 인간 생활과 거리가 있었지만 윤동주는 삶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 이런 경향은 윤동주가 즐겨 읽었던 백석의 시에서도 흔히 확인된다.
그의 시정신은 실천적 의지를 노래한 적극적인 저항의식으로 파악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뼈져린 자기성찰의 자세가 그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이육사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남성적 기질과는 전혀 관계없다.
<윤동주의 생애>
1917년 ( 1세)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과, 독립운동가,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10년에는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게 되는데,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 세례를 받는다. 윤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해환이다. 뒤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윤동주(동주)' 또는 '윤동주(동주)'라는 필명을 쓴 젓이 있다. 윤동주의 형제로는 누이 윤혜원, 동생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윤광주가 있다.
1925년 ( 9세)
4월 4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 명동 소학교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규암서숙을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를 발전시킨 것으로,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는 중학교는 폐교된 상태였다. 당시의 급우로는 함께 옥사한 고종 사촌 송몽규, 문익환, 외사촌 길정우 등이 있다.
1929년 (13세)
송몽규 등의 급우와 함께 벽보 비슷한 '세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이 무렵 썼던 동요, 동시 등의 작품을 발표.
1931년 (15세)
3월 2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 송몽규, 김정우와 명동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도시 대랍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
1932년 (16세)
4월,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은진중학교에 입학.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도 활약.
1934년 (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세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날 이후 모든 자작품에 시를 쓴 날자 명기.
1935년 (19세)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숭실중학 시절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씀.
1936년 (20세)
숭실중학교 폐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간도 연길지방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발표.
1935년 (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25세)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 이 무렵 윤동주의 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기고, 또한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함.
1942년 (26세)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 가을(10월 1일)에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편입.
1943년 (27세)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교토대학에 재학중인 송몽규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7월 14일).
1944년 (28세)
2월 22일 기소되고,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3년 구형)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9세)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윤동주의 옥사 사실을 알려옴.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일춘이 일본으로 건너감.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뒤 23일 만인 3월 10일 옥사. 3월 초, 용정 동산에 안장.
1947년 2월 16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을 갖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1955년 2월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간행.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 앞에 시비 건립.
출처-네이버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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