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좁은 문은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에 놓여진 어떤 사건이나 공간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우리의 일상 속에 늘 놓여진 작디 작은 선택의 길입니다. 우리들이 매 순간 살아내고 감당해야 하는 선택하는 길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걷고 있는 쉬운 길을 우리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좁은 길을 가라합니다. 좁은 길은 무엇입니까?
게으름은 쉽습니다. 하지만 성실함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재미있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편한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일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즐거움을 구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미움은 쉽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분노는 쉽습니다. 하지만 인내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판단과 단죄는 쉽습니다. 하지만 관용과 배려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절망하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이 말들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좁은 길을 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은 우리가 죽는 날 들어가는 대문, 천주교 신자로 살았기 때문에, 혹은 천주교 신부로 살았기 때문에 응당 주어지는 보상이나 상급이 결코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아 끊임없는 좁은 길을 걸어갔던 이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낮추고 꺾어낸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문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좁은 문입니다. 쉬운 것 보다는 어려운 것을 선택하십시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하기 싫은 것을 선택하십시오.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구원이 매일의 일상에 있음을 절감하며 삽니다. 제 아무리 장대한 이상을 가지고 신부 생활을 시작했다 한들, 제가 저의 구원을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매일의 일상 안에서 서성이고 있는 좁은 문들 뿐입니다. 이것을 떠난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매순간, 지금 내 앞에 놓여진 어떤 것이 더 좁은 문인가? 를 정직하게 묻고, 그 답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입니다. 신부 생활 10년에 저는 애시당초 가졌던 거창한 계획과 구호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떻게 사는 사제인가만 중요해졌습니다. 그날 하루가 실패하면 내 인생에 실패한 나날들이 더 많을 것이고, 그날 하루가 성공하면 내 인생에 성공이 나날들이 더 많겠지요. 그런 눈으로 저의 동료요, 형제인 사제들을 봅니다.
인터넷, 광야소리님이 올리신, 연중 21주일 "떠나는 신부에게"에게로 올려진 글입니다.
그중 좁은문 좁은 길만 부분 발췌하여 좁은길 좁은 문이라는 제목을 임의로 붙였음을 밝힙니다.
쉽고 깊은 배움과 교훈의 글입니다. 좋은 묵상글을 인터넷에 올려주신 신부님과 광야소리님께 감사 간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