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悠悠臺
小湖李丈吉浩氏, 置別業于方壺山中, 因堂南古樹圍而築之, 爲眺望之所, 取白雲黃葉共悠悠之語, 名曰悠悠臺.
余嘗以事造焉, 得留連登覽, 將發, 屬以銘, 余謹諾而歸, 則逐逐塵埃, 至再經寒暑. 時念昔日遊賞, 未嘗不慨然興懷.
氏居淸源之里, 旣深且邃, 足稱幽人考槃之樂, 而猶嫌其露也, 乃於亂嶂疊巘, 崎嶇嵁巖之中, 而圖所以自適, 豈不異哉?
今通都大市, 斧斤之聲, 無晝無夜, 興作是事, 屋値日翔, 論千百者絶無, 而動稱屢萬, 唯恐不得, 盖少藉富腴, 則鮮堪寂寞, 斯爲之故也. 使若人者, 試居於斯, 雖白雲黃葉無時無之, 將鬱鬱乎病矣. 安見其有此趣也? 然則凡物態之可悲可樂, 一由乎其人者之異情也夫!
銘曰,
或曰心與物化, 或曰物以心現. 兩論者, 雖莫知其何淺何深, 衷子宰一身而應萬事之爲言, 夫孰得以主物而客心? 彼皇皇焉汲汲焉, 不知其所止者, 盍一往陟乎玆而歸來? 莫將白雲黃葉辨有無, 請試窺主翁靈臺.
辛巳 立秋節 昌山 曺圭喆 撰
安陵 李祺煥 書
번역
소호(小湖) 어른 이길호(李吉浩) 씨가 방호산(方壺山 지리산) 속에 별장을 마련하고는 별장 남쪽에 고목을 빙 둘러 심고 조망하는 곳을 만들었는데, 흰 구름이나 단풍잎 모두 여유롭다는 구절에서 뜻을 취하여 ‘유유대(悠悠臺)’ 라고 이름 지었다.
내 일찍이 사람 만나는 것을 일삼아 하는 터라 객지에 머물다가 이곳에 올랐는데, 떠나려고 할 때 명(銘)을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조심스럽게 허락하고서 돌아왔다. 그런데 속세의 삶에 쫓기다 보니 겨울과 여름이 두 번이나 지나 버렸지만, 때때로 지난날 유람했던 일을 생각하면 감개하여 감회가 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길호 씨가 사는 청원리(淸源里)도 이미 깊고 깊어 충분히 은자(隱者)가 은거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할 만한데도 드러나 있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첩첩 산봉우리 산길 험하고 바위 높은 산속에 유유자적 할 곳을 계획하였으니 이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사통팔달의 도시는 도끼나 자귀로 집 짓는 소리가 밤낮없이 들리고 재건을 일삼아 집값이 날로 치솟아 천이며 백을 논하는 이는 전혀 없고 걸핏하면 수만이라고 하는데도 집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니, 작게 나마 부잣집 기름진 전답에 의지하고 있으면 적막한 함을 견디는 이가 적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험 삼아 유유대에 살면서 어느 때고 흰 구름과 단풍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장차 우울 해져 병이 들게 될 것인데 어디에서 그가 이런 흥취가 있는 것을 보겠는가? 그렇다면 무릇 사물의 형태를 슬프다 즐겁다 하는 것은 한결같이 사람의 특별한 감정에 따른 것일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혹자는 마음이 사물과 함께 변화한다고 하고, 혹자는 사물이 마음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두 가지 논의 중 어느 것이 얕고 어느 것이 심오한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고 온갖 일에 응한다고 말했으니 누가 사물이 주인이고 마음이 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저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거나 마음이 불안하여 멈출 줄을 모르는 사람은 어찌 유유대에 한 번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않겠는가? 한 번 올라보면 흰 구름과 단풍 드는 풍경의 유무를 변별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주인 늙은이의 신령스런 유유대를 한 번 살펴보라.
신사년(1941) 입추절(立秋節)에 창산(昌山) 조규철(曺圭喆)이 짓고
안릉(安陵) 이기환(李祺煥)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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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자료는 [고전번역원]에서 자문번역 해주신 것입니다.
글 중에 방호산(方壺山 지리산의 다른 표현) 이라는 표현은 "방어산" 인데 왜 그렇게 표현된 것인지는 창산 조규철 선생이 알 것인데 이 세상에 없으니 알수가 없슴. 그리고 진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진주금석문총람] 640page에 "유유대"가 소개되어 있는데 비석문 일부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 소호 이길호선생의 外孫壻 홍재호.
*창산(昌山) 조규철(曺圭喆)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명(汝明), 호는 우인(于人)이며, 1906년(고종 43) 1월 14일에 태어났다. 조규철은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의 문인으로 1934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장병린(章炳麟)에게 사사(師事)하여 학식과 덕행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民族文化推進委員會 현 한국고전번역원) 교열위원(校閱委員) 겸 고전국역연수원(古典國譯硏修院)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82년 8월 30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민족문화추진위원회장(民族文化推進委員會葬)으로 장사를 지냈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은 청호 이현학 선생의 < 淸湖李處士墓碣銘 >, < 歲寒亭記 甲子>, < 念修齋記> 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