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105)
하나님을 향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2022.09.22 목)
본문 : 눅 17:5-10
눅 17장에 들어와서, 예수님은
‘제자가 갖추어야 할 신앙의 기본 덕목’
4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앞의 두 가지는
‘형제 사이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1-4)입니다.
첫째,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불가피성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참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둘째, 형제가 범죄하면 온유한 마음으로 경고하고,
그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교훈입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4)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에게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마18)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먼저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오늘은 ‘하나님을 향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5-10)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겨자씨만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난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이 ‘사람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어떻게 한 사람도 실족시키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똑같은 죄를 반복해
짖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더 큰 믿음, 더 많은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 말씀처럼 그렇게 살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성도님들도 같은 생각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표현하니까 .....
마치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고 책망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희랍어 원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해입니다. 희랍어 원문의 의미는....
제자들이 최소한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은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큰 믿음을 구하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을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하나님을 불뱀으로 하여금 그들을 물어
죽게 하였습니다(민 21:4-9).
놀란 그들이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자 하나님은 ....
구리로 만든 뱀을 기둥에 높이 달이 놓도록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렸어도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까?
믿음이 크든 작든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사는 것입니다.
아람 장군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고자 엘리사를
찾아 왔을 때,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명하였습니다(황하 5장).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까? 가서 씻으면 낫는 것입니다.
‘더 많은 믿음’, ‘더 큰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사도들만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회해 오면서 성도님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변명이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더 큰 믿음을 주옵소서.”
그리고 ‘목사님, 제 기도가 응답되면, 더 믿음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큰일을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그 믿음으로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은
‘더 큰 믿음을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준비되고 난 후에, 채워지고 난 후에
충성하겠다는 것은 얄팍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큰일을 해낼 수 있는 큰 믿음이란 애초부터 없습니다.
단지 믿음대로 살아가는 충성이 있을 뿐입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큰일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작은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이지만 생명이 있습니다.
그 어떤 씨보다 더 크게 자라납니다.
하나님이 맡기시는 작은 일에 충성하면
점점 더 큰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히려 쓰면 쓸수록 더욱 커집니다.
믿음의 근육이 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구하지 말고,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을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더 큰 믿음을 하나님께서 채워 주셔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실제로 일단 쓰기 시작하면
불가능한 그런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향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5-10)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겨자씨만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우리는 ‘무익한 종의 의식’을
가져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7-10절>
7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절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은 당시 종의 신분을 예로 들어
하나님 앞에 신앙인의 모습을 비유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인과 종의 수직적 관계’를 사용하여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노예제도를 옹호하거나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결코 사회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교훈으로 주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며.....
제자들에게 필요한 참된 믿음의 자세를
가르쳐 주시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비유는 그 비유의 내용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소재를 채택하지만,....
그 소재 자체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님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어떤 비유가 효과적인 비유일까요? ..
누구나 다 아는 사건이며 매일같이 경험하는
사건이라야 효과적인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사건이나 어떤 특정한
개인만이 경험하는 이야기들은 비유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타난 이 비유 역시 그들의 생활 풍습과
경험 속에서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노예제도를 이용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눅 12장에 나오는 ‘기다리는 종의 비유’와
대조적입니다.
혼인집에서 돌아왔을 때 주인은 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던 종을 보고 감동하여 ...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시중을 들어’(눅12:37)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종들에게 ....
먼저 주인의 식사 자리에 시중을 들라고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두 비유의 목적과
메시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종의 비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그에 비하여 오늘 본문의 ‘종의 의무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믿음의 태도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눅 12장에 나오는
‘기다리는 종의 비유’와 대조적입니다.
혼인집에서 돌아왔을 때 주인은 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던 종을 보고 감동하여....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시중을 들어’(눅12:37)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종들에게 ....
먼저 주인의 식사 자리에 시중을 들라고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익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무엇을 교훈하시려는 것일까요?
예,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의식은 ......
바로 ‘종의 의식’, 그것도 ‘무익한 종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1) 종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그 당시 종에는 소유권(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생명마저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다 주인의 것입니다. 심지어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 되고 맙니다.
조선 시대(17세기)에는 1,200만 인구 중
500만 명 노비였다고 합니다.
조선의 노비가 증가하게 된 것은 태종 때
‘황희의 의견에 따라 성립된 노비종부법’
(아버지가 노비일 경우 자식이 노비가 되는 방식)이
세종과 성종 때 노비종모법
(어미니가 노비일 경우 자식이 노비가 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노비 인구가 폭증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양반 지배층이 자신들이 소유한 여종을
일반인과 결혼시킨 후, 그 자식을 자신의 재산을
만든 것입니다. 조선은 가장 긴 기간 동안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은 유일한 나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맡기신)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좀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한 것일 뿐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벧전4:11a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내가 말씀을 전했다 해도 주님께서
내 입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요,
내가 기적을 나타내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나타내셨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1) 종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2) 종은 주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합니다.
왜 이런 일을 시키느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입니다.
<7-8절>
7절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절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하루 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배도 고프고 피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먹는 동안
수종을 들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다 먹은 후에 먹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더럽고 치사할 때가 어디 있습니까?
먹는 것 가지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러나 종은 이치를 따지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일은 하는 사람은 철저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사람의 말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쿵저러쿵 저렇게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자는 절대 순종의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은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1) 종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2) 종은 주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합니다.
3) 종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9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일을 시킨 일군에게는 그 대가로 삯을 줍니다.
그러나 종에게는 보상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마디 고맙다는 인사도 없습니다.
보상은 없더라도 알아주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종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때로 낙심하는 것은(화가 나는 것은) ....
최선을 다하여 어떤 일을 했는데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보상을 바라는(인정받고자 하는,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받으려는 욕구까지 극복해야 종의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10절)
말하라고 하십니다.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의 자세가 종의 의식입니다.
그럼 왜 ‘무익한 종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깊이 체험하면 할수록
이 ‘종의 의식’은 깊어집니다(정비례).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종의 의식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철저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언제나 편지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종 된 바울”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지만,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스스로 종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노예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존재가 얼마나 비참한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에게도 유혹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파벌이 생겼는데 그중에 ‘바울파’가 생긴 것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고전3:4-7>
4절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로 이런 종의 의식의 있었기에 그는
엄청난 핍박과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또는 엄청난 선교 효과에도 교만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선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눅 17장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갖추어야
할 신앙의 기본 덕목’ 4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앞의 두 가지는 ‘형제 사이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1-4)입니다.
첫째,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둘째, 형제가 범죄하면 온유한 마음으로
경고하고, 그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을 향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5-10)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작다고 핑계대지 마십시오.
둘째, 하나님 앞에 우리는 ‘무익한 종의 의식’을
가져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익한 종의 의식’을 가지고,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참된 주님의 제자의 모습으로
인정받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