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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악기 제작의 1세대, 진창현
(타계한 진창현의 아들 진창숙이 운영)
일본 교과서에 실린 한국인 실화 [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 1부 ]
일본 교과서에 실린 한국인 실화 [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 2부 ]
대학 생활이 1년 남은 3학년 때, Y의 인생을 크게 바꾼 것과 마찬가지 사건이 내게도 일어났다. (...) 강당 앞에,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커다란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강사는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 소장 이토카와 히데오 교수'라고 씌어 있다. (...) 강연은 어디까지나 물리학적인 입장에서 바이올린의 명기로 불리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는 주로 어떤 파장으로 성립되는가 하는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었다. 300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명기에 공통되는 파형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새로운 바이올린의 파형을 비교분석해 보이는 등 매우 흥미있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같은 파형으로 만들기 위해 바이올린 본체의 두께를 바꾸어 보는 등 다양한 시행착오 결과를 소개하면서 이론적으로는 같은 파장이 나온다는 생각에 시도해 보았지만 참담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실제로 연주해 보았더니 음이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전혀 다른 소리였다, 등등.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해명하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이고 신비이며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언젠가 로켓을 만들어 달로 쏘아 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기술을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 이유로서 우선, 300년 전의 것과 같은 재질이 없다. 그리고 과거의 바이올린 명장들은 제자는 물론이고 자기 자식에게조차도 비결을 전수하기 않고 죽었기 때문에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바이올린 제작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분야이며 현대사회에 이것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내 귀에는 이 '불가능'이라는 말이 매우 자극적으로 들렸다. 교사가 되겠다는 길을 단념하고 바이올린 연주자로서도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림을 그려도 먹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오직 파친코 가게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거의 폐쇄 상태에 놓여 있던 내 입장에서 볼 때 이 강연은 마치 벼락처럼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들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다면 제작은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일에 청춘을 걸어볼 가치는 있지 않은가.
"바이올린 안쪽에는 나뭇결이 있지? 이걸 보게. 자, 언뜻 보기에도 좋은 나무 같지 않은가. 바이올린 제작은 재료 선택부터 시작되는 거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바이올린의 재료는 이 부근에서는 에치고의 니가타, 특히 나가노현과 경계를 이루는 에치고 이쓰카마치 정도야. 신슈 쪽이라면 시가 다카하라에서니가타와의 경계 부근에 있는 이와스게야마 기슭의 나무가 유명하지. 영림서에 가면 많이 있어."
나무는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제재를 해보면 나뭇결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단풍나무 중에서도 2,000그루에 한 그루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다. 이런 재료가 바이올린 제작에 사용되는데 이것은 매우 귀중하기 때문에 보통 단풍나무보다 약 30배의 가격이 더 매겨진다.
기소 (후쿠시마의 판잣집)에서 생활하면 바이올린 제작에 필요한 재료와 공구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기소는 재목의 집산지로 앞판에 사용하는 스프루스spruce와 뒷판으로 사용하는 단풍나무가 풍부해서 싼값으로 구입할 수 있다. 도구도 새로운 것이라면 몰라도 중고 도구라면 쉽게 입수할 수 있다. 기소에는 목공소가 만항서 목공 기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물상에 가면 그들이 사용하던 도구들이 널려 있다. 약간 닳기는 햇지만 쇠가 아직 남아 있는 끌은 별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톱도 사용하다 보면 이가 짧아지지만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데는 이가 짧아도 큰 상관이 없다.
또, 바이올린의 독특한 곡선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작은 대패가 필요하다. 그럴 때에는 커다란 대패의 날을 그라인더로 갈아서 작게 만들고 거기에 맞추어 몸통을 만든다. 그것으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대패가 만들어진다. 끌 역시 그라인더를 이용해서 날의 폭을 가공하여 사용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그 정도는 혼자 힘으로 얼마든지 말들 수 있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연구를 하면 된다. 더구나 기소 후쿠시마역 대합실 한 모퉁이에는 스즈키바이올린 제품의 바이올린이 항상 진열되어 있다. 관광객이 오는 역에는 흔히 그 지역의 특산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기소 후쿠시마의 경우에는 명산품이 바이올린이었던 것이다.어린이용 바이올린에서 성인용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10여 개의 제품이 진열되어 있는데 이것은 내 입장에서는 참고서 대용으로 상당한 도움이 되는 교재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계로 제작한 싸구려 바이올린이라 해도 내가 만든 바이올린과 비교하면 역시 세련되어 보였다.
우리는 그런 신혼 생활을 1년 정도 계속하는 한편으로 바이올린도 40개 정도를 완성했다. 하지만 초기에 제작한 바이올린은 내가 보아도 너무 심할 정도로 엉성했다. 어던 기술자라도 초기에 제작한 시작품 중에는 부끄러워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작품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도자기 기술자 같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깨뜨려버린다. 하지만 바이올린 한 개를 제작하려면 막대한 일손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게 부숴버릴 수 없다. 설사 백 엔에라도 구입할 사람이 있다면 팔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해도 역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제품은 팔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런 딜레마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에 해결책을 제시해 준 사람은 원래 장사를 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내였다.
"부수지 말아요. 괜찮은 것만 골라서 도쿄에 가서 팔아 보는 게 어떻겠어요?"
시노자키 선생님이 바이올린을 점검하는 동안, 그 자리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일련의 확인 작업을 마친 선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리가 꽤 좋군."
분명히 칭찬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에 3,000엔으로 괜찮다면 내가 전부 구입하겠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쿄에서 한 개만이라도 팔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단 한 개도 팔 수 없었다. 그런데 시노자키 선생님은 바이올린을 모두 구입하겠다는 것이다. 가격은 당시의 평균가격보다 1,000엔 정도 쌌지만 그보다 내가 직접 제작한 바이올린이 한 개가 아니라 열 개 모두 팔렸다는 데 나는 놀라는 한편으로 너무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시노자키 선생님은 이런 말도 했다.
"자네의 바이올린은 성인용으로는 아직 부족해. 하지만 어린이용 바이올린이라면 얼마든지 구입해 주겠네."
어느 날, 내게 큰 격려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생활을 위해 어린이용 바이올린을 만들었지만 그 사이에 틈이 날 때마다 성인용 바이올린도 제작하고 있었다. 내가 마치다의 창고에서 제작한 불과 3,000엔짜리 바이올린으로 연주하여 도쿄예술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도쿄예술대학은 일본 최고의 예술대학으로 수험생도 많고 경쟁률도 높다. 수험생들은 일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회사의 값비싼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그런데 나의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사람이 합격했다는 것은 나의 바이올린이 유명회사의 제품에 뒤지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 말을 들은 이후 한동안,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나는 약간의 조정만으로 바이올린의 소리를 세 배의 가격이 붙는 바이올린의 소리와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손을 보느냐에 따라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느 이 기술을 스스로의 경험을 통하여 익혔다. 또, 활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세 배에서 네 배 가격에 해당하는 활과 비슷할 정도의 질로 향상시킬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약간의 섬세한 차이가 실제로 소리를 내어보면 엄청난 차이로 나타난다.
명기라고 하면 역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유명하지만 그 밖에도 유명한 바이올린 제작자는 또 있다. 음색, 재질, 제작기술 등 모든 것이 최고조에 이른 것은 17~18세기, 북이탈리아의 크레모나Cremona를 중심으로 제작하고 있던 유명한 기술자들의 손에 의해서다. 그 중에서도 아마티Amati, 구아르네리Guarneri, 과다니니Guadagnini, 그리고 잘 알려진 스트라디바리.
그들이 제작한 바이올린은 세계 최고의 명기로 불리며 4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세계의 바이올리니스트와 바이올린 제작자, 바이올린 브로커, 그리고 관객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나는 이런 명기를 몇 번이나 직접 보고 만져보는 동안에 소리, 조형, 색깔의 조화, 니스의 소재 등 많은 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얻은 것이 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그것은 나의 바이올린 제작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멕시코나 페루의 인디오 마을에서는 바이올린의 니스 염료에 사용하는 천연의 아름다운 식물성 염료를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남미의 국가들에서 생활하는 인디오들이 걸치는 의상은 색채가 정말 아름답다. 거기에 주목한 나는 우선 페루의 수도 리마에 있는 국립박문관으로 가서 담당자와 상담하여 원하는 색깔의 색소를 어디에서 입수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아마존 상류에 있는 정글로 들어가 인디오 마을에 머무르면서 현지인들에게 색소 산지까지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여, 그 곳에서 황색과 적색의 식물염료를 찾아다녔다. 그 결과, 마침내 아름다운 색을 연출하는 염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멕시코 동부의 마야 유적에서도 현지인들로부터 아름다운 적색의 색소를 입수했다. 이 색소들은 순수하게 자연에서 탄생한 염료인 만큼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염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색깔을 연출해 낸다.
나는 니스의 색깔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바이올린의 니스로 이용되는 색소 중에서도 황색과 적색은 특히 중요하다. 하지만 요리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린 제작에도 감추어진 맛이라는 것이 있다. 바이올린의 색깔의 깊이를 내려면 자연에서 채취한 흑색과 식물성인 자색 색소를 빼놓을 수 없다. 자연계에는 흑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흑색에 가까운 색은 있다. 흑색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농도와 질감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나는 한때 흑색만도 20종 이상의 색소를 가지고 있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바탕에 칠해진 황색은 비교적 수수한 황색이지만, 그와 비교할 때 루제로 리치 씨의 악기 구아르네리 델 제수의 바탕에 칠해진 황색은 분자가 반짝이며 빛나는 신선한 색으로 채도가 높다. 또, 다른 꿈속에서 그 황색의 쿠킹 방법을 발견하고 기분이 좋아 즉시 공방으로 달려간 적도 있다. 바이올린의 색깔을 만드는 경우, 쿠킹이나 레시피라는 식으로 요리에 비유하는 말을 사용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험을 시도하고 실패를 되풀이한 결과, 마침내 만족할 만한 황색을 발견했을 땐 잠도 잘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다. 중후하면서 깊이가 있고 투명한 황색을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적색 이상으로 어려운 것이 이 황색이다. 그 이유는, 바탕의 황색이 얼마나 좋은가에 따라 그 위에 덧칠하는 오렌지색이나 적색이 막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더구나 식물성 염료인 경우, 황색의 분자는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어떻게 매염하여 안정시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즉, 바이올린 제작자에게는 화학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나의 베갯머리에는 노트와 연필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꿈 속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그 자리에서 즉시 기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난 뒤에 그것을 힌트 삼아 공방에서 실험을 한다.
어머니를 잃은 나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락의 바닥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1976년은 미국 건국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제2회 미국 국제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가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나도 초대를 받은 것이다. (...)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한 가지 부문이 아니라 여섯 가지 부문 중에서 다섯 가지 부문에서 수상을 하다니. 내가 수상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는데, 정말로 내가 수상을 했다. 졸다가 깨어난 만큼 처음에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옆에 있는 노신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가 안익태 선생이었다. 나는 즉시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1565년의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로, 안쪽 판과 동파넹는 금가루로 귀족의 문장과 이름이 씌어 있고 지금까지 본 명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바이올린이었다. 바이올린 제작의 총본산인 크레모나에서 3대 병기이라고 하면 아마티, 스트라디바리우스, 구아르네리우스다. 안드레아 아마티는 크레모나파를 창시한 제작자로 일설에 의하면 바이올린 제작의 원조라고 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고 안익태 선생이 스페인에서 가져온 두 대의 낡은 바이올린의 수리를 의뢰했다. 다행히 안익태 선생님 내게 좋은 일을 한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 후에도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바이올린 두세 대를 가지고 와서 내게 수리를 맡겼다. (...) 안익태 선생님 지난번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직접 제작한 오케스트라의 악보와 지휘복 등 사적인 물건들이 들어 있는 묵직한 트렁크를 내게 맡겨두었다. 그래서 도쿄에서 연주회가 있을 대마다 나는 늘 초대를 받았다. 안익태 선생은 눈빛이 날카로운 분이셨지만 조용한 인품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무대에 올라 지휘봉을 잡으면 사람이 변한 것처럼 기백과 박력이 흘러 넘쳤다.
한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학 실력이 출중했다. 한국어는 당연하고 일본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미국의 시카고교향악단의 첼로연주자에서 전향하여 독일로 건너가 독일이 낳은 근대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애제자가 되어 연합군이 베를린 대폭격을 감행하는 동안에도 베를린 방송국의 지하실에서 베를린필을 지휘했다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었다.
바이올린은 음악을 표현하는 도구임과 동시에 다른 악기에는 없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하고 있다. 아무리 음색이 아름답다고 해도 외관에 심미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으면 그 바이올린은 연주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바이올린은 '악기의 여왕'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음질, 수려한 외모, 그리고 우아한 음향적 성능을 갖추고 있는 화려한 예술품이다. 고차원의 예술 세계에서는 인간이 인간에게서 배우는 지식이나 기술에는 한계가 있다. 고도의 기술이나 예술은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감성을 연마하고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에 의해 창출된다.
나는 스승을 찾아 대자연의 품 속 깊이 파고들엇고 지구촌 이곳저곳을 유랑하면서 나의 감성과 감각을 연마하고 사고를 심화시켜 시야를 넓혔다. 아름다운 감동이 있는 장소, 바이올린 제작에 필요한 소재가 있는 장소가 있다고 여겨지면 어떤 위험도 감수했다. 예를 들면, 포르투갈의 나자레 해안에서는 대서양 너머로 기울어가는 아름다운 석양을, 파도 사이에 반사되는 빛은 명기 구아르네리 델 제수의 안쪽 판의 니스에 가까운 감동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또,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해안에서 바라본 인도양의 수평선으로 저무는 석양이나 케냐의 암보셀리국립공원에서 본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산의 해돋이는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니스를 상기시키는 색깔이었다. 바이올린 니스의 색소에 사용하는 식물성 염료나 수지를 찾아 남미의 아마존 강 상류의 정그렝서 베네수엘라의 엔젤폭포를 향했을 때는 인디오 안내원과 함게 통나무배를 타고 1주일 동안 강위를 떠다니면서 정글을 탐색했다. 그런 모험여행을 한 끝에 손에 넣은, 인디오가 옛날부터 사용해 온 식물염료나 멕시코의 현지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적색 염료 등은 나의 바이올린에 칠하는 니스의 질감과 색깔을 향상시키는 데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다양한 국가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명기나 명화를 감상, 세계의 유명한 바이올린 상점을 방문해서 그곳에 보존되어 있는 모든 명기를 보는 것으로 나의 안목을 양성하는 일도 유랑여행의 목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방문한 국가는 119개국에 이른다.
"예술에 만족과 체념은 금물이다."
이것이 기술자로서의 나의 신조다.
지식채널e- 90%의 스트라디바리우스
- 『천상의 바이올린Kaikyou wo Wataru Violin』, 진창현, 이정환 옮김, 에이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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