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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웃음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서문을 읽으면서
1966년 여름, 프랑스 지식인계에 일대 소동을 일으키면서 극심한 찬반 논란을 야기했던(대표적으로 자신의 스승격인 알튀세르가 보인 불쾌한 반응은 유명하다. 알튀세르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적극 지지한 바 있었다) <말과 사물>은 오늘날 우리가 이미지화하고 있는‘푸코’의 모습을 일반대중에게 최초로 선보인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지점이 대중을 사로잡은 것일까?
나는 <말과 사물>이라는 텍스트가 지닌 어떤 매혹의 하나로 이 책의 서문과 제 1장을 들고 싶다. 화려하고 방대한 사유의 서문과 그림 한 점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서 책을 시작하는 푸코의 스타일은 충분히 매혹적이다. 이런 스타일은 뒤에 이를 흉내내는 사람이 생길 정도이다. 이를테면 딱딱한 학술논문의 시작을 그림이나 사진 한 점을 분석하면서 시작하는 그런 것. 이런 것은 아마도 푸코 이전에는 상상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잡스런’ 의문을 좀더 밀고가 보자. 그렇다면,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을 본문보다 먼저 썼을까, 아니면 본문의 집필을 다 끝내놓고 자신의 사유를 정리하면서 일종의 후기처럼 썼을까?
<말과 사물>의 서문이 제일 먼저 씌어졌는지 어떤지를 내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이 책의 가장 유명한 제 1장 ‘라스 메니나스’는 적어도 본문을 다 쓰고 나서 마지막에 씌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푸코는 왜 느닷없이(!) 철학적인 용어로 가득찬 책을 그것도 시작을 고전주의 시기 화가의 그림 한점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서 시작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지막에 문득 끼워 넣은 것일까? 나의 가설은 이런 것이다. 푸코는 일단 1장이 제외된 본문을 먼저 썼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이 책의 전체적인 지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서문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것만으로는 무언가 꽉 찬 느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폭 병풍에서 9폭만 보는 느낌. 푸코는 여기서 일종의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 모험이야말로 말하자면 가장 밑바닥의 낱장이 전체 풍경을 뚫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따라서 들뢰즈가 말하는 이른바 ‘철학적 역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적인 사유 바깥에서부터 오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분석을 통해 그리고 서문을 통해, 철학의 경계를 배회하면서 또 침투하면서 그렇게 철학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면서 철학으로부터 벗어나버린 것이다.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푸코는 제도화된 철학을 끊임없이 지독하게 공부하면서도 그것으로 벗어나려 했고 고증적인 역사문헌을 수도 없이 뒤지면서도 또 그것을 때로는 가볍게 생각해 버렸다.‘명백히...분석은 사상사나 학문의 역사에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푸코의 생각은 사실 푸코가 이른바 제도권 학문체계에 입문하면서부터 지녔던 태도였던 것 같다. 푸코에게, 더 나아가 이른바 니체적 공산주의자들,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보이는 문학에 대한 열광, 물론 여기서 문학은 대학 제도로 편입된 그런 문학이 아니다. 대학의 문학이야말로 푸코가 가장 경멸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프랑코 모레티의 최근 사유로 이어진다. 그리고 문자에 대한 회의와 그림,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사유, 맑시즘에 대한 환멸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 등등. 이제 우리는, 낱장들의 맨 위에 ‘우연히’ 놓이게 된 낱장 하나만을 볼 것이 아니다. 아래로 아래로 그래서 다시 위로 위로 뚫고 올라오는 ‘그것’을 살펴 보아야만 한다. 바깥으로부터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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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이상하게도 철학자들이 역사를 바라보면 그들의 역사를 만들어 버리고 문학도 그들의 문학을 만들어 버린다고 말한다. 이건 일종의 신화인 것이다. 때문에 푸코는 자신이 죽이고자 한 역사는 전혀 일반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를 죽인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역사를 죽인 것이다. 그는 정말로 죽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른바 맑시즘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맑시스트들의 푸코에 대한 선정적인 오해를 떠나서 지금껏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푸코가 마르크스를 어떻게 이해했나 하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푸코는 마르크스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이것은 니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더군다나 그나마 언급하고 있는 것들도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것조차도 있다. 이것이 문제일까?
푸코에게 있어서는 사실 그것이 구조주의든 맑시즘이든 헤겔 철학이든 정신분석학이든 뭐든 그것 자체는 아무런 흥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를테면, 푸코는 도그마화된 맑시즘에는 전혀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폐쇄회로일 뿐이다. 그 공간, 그 질서에서는 오직 그것으로만 사유하도록 질서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테면 그것에 대한 비판 조차도 그것이 질서지워진 회로 내에서만 가능하도록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폐쇄회로가 저 밑바닥에서부터 꺼져 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불안, 공포 따위는 이제 존재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가 아니다. 이것은 들뢰즈가 아주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들뢰즈는 우리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현재라고 느끼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현재는 사실 과거에 대한 사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라고 느끼는 그 순간은 매 순간마다 끊엄없이 과거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와 뒤섞인 상태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상태를 사실은 정확히 포착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성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고착시키고 자리잡게 하고 매끈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푸코나 들뢰즈에게 있어서 이성으로 기록되는 동일자의 철학은 사실은 철학이 아니다. 동일자란 무엇인가? 타자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철학, 그러나 그 타자를 언제나 배제하고 억압하는 철학에 다름아닌 것이다.
때문에 푸코에게 있어서는 동일자를 만들어 내는 언어, 문자의 체계 보다는 이미지, 회화가 더욱 의미있고 대학의 문학이 아닌 바깥을 사유하는 문학에 열광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이 먼저 지적되지 않으면 푸코는 9폭 병풍일 뿐이다. 앞에서도 푸코의 이미지에 대한 사고의 우위성이 아주 초기부터 보인다고 말했지만 이를테면, <광기의 역사> 제 1장에서도 우리는 이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문학과 조형의 두 가지 형태로 광기에 대한 체험을 설명하던 푸코는 이 둘이 처음에는 보완관계, 예시관계를 맺으면서 나탄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둘 사이의 통일성이 해체되기 시작하는데, ‘이제 우리는 이미지가 더 이상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그림은 그림이 가진 도형적 가치에 의해 자신을 언어로 부터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푸코가 <말과 사물>의 서문을 초현실주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초현실주의야 말로 이른바 미술과 문학을, 이미지와 언어를 결합시킨 최초의 운동이 아니었나? 그러나 이 서문에서 초현실주의는 말그대로 밑으로 가라앉아 있다. 이것이 푸코가 기대하는 사유의 전개방식이다. 즉, 푸코는 초현실주의를 도그마화하지 않는다. 푸코는 초현실주의를 표면위로 끌어 올려서 다른 낱장들 위를 덮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질서 지워지고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틀 지워진 초현실주의일 뿐일 것이다. 푸코는 초현실주의가 혹은 바깥의 사유가 혹은 타자의 사유가 자신의 위로 덥힌 낱장들을 뚫고 올라오기만을 기대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뚫고 올라옴을 감지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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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마리의 하나로 푸코가 던지는 것이 바로‘웃음’이다. 대단히 짧은 이 서문에서, 푸코는 보르헤스의 글을 읽으면서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세 번이나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웃음은 일종의 ‘당혹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푸코는, 누구나 어이가 없어서 웃지 않을 수가 없는 바로 그 순간, 그러면서도 무언지 모를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언어와 사물의 질서로 자리잡혀있는 우리 인식의 공통의 지반이 붕괴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르헤스의 글을 직접 보도록 하자. 보르헤스가 말하는 것은 중국의 백과사전에 실려있다는 동물 분류표이다.
a) 황제에 속하는 동물 b)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보존된 동물 c) 사육동물 d) 젖을 빠는 돼지 e) 인어 f) 전설상의 동물 g) 주인없는 개 h)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 광포한 동물 j) 셀수 없는 동물 k)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l) 기타 m) 물 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n)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보르헤스,‘존 윌킨스의 분석언어’,<또다른 심문들 1937-52>, 1952)
이것을 과연 ‘분류표’라고 할 수가 있을까? 푸코는 이와 비슷해 보이는 또 다른 기이한 열거를 보여주고 비교하면서 보르헤스의 글이 왜 그토록 인식의 지반을 흔들어 놓는지 설명한다. 이번에는 16세기, 푸코가 전 고전주의라고 부르는 시기의 작품이다.
‘유스테네스가 말하길, 이제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 오늘 하루에 한해서 나는 다음의 것들을 먹지 않을 것이다. 살모사, 쌍두사, 날개미, 뱀, 해룡, 암몬조개, 곡식벌레, 용, 전갈인수, 목사, 뱀눈나비, 거미, 잠자리, 다상충, 도마뱀, 치질... 이다'(프랑소아 라블레, <팡타그뤼엘>, 1532, 제 4권 64장)
과연 이 열거를 보고서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두 열거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유스테네스가‘오늘은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죽 나열하고 있는 것들을‘이런 걸 어떻게 먹지?’하면서 의아해 할 수는 있어도 그것 자체를 문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죽 나열되어 있는 것들이 아무리 희한하고 어이 없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하나의 공통된 인식지반 즉, '유스테네스의 입으로 들어가서 침과 섞인다'는 그 공통의 장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수술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로트레아몽의 싯구)을 생각해 보면 된다. 즉 수술대는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글은 이와는 다르다. 보르헤스의 분류, 열거가 보여주는 각각의 항목을 보면 그 자체로서는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a b c d...로 배열되고 하나의 분류로 작동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말하자면 수술대가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분류라는 어떠한 공통의 지반도 가질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도저히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 괴이한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이 사실은 우리 인식의 질서, 사물의 질서가 순간적이나마 갈라지고 찢어지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라블레의 세계가 유토피아라면(실제로, 아우얼바하는 <미메시스>에서 라블레가 자신의 작품의 거인의 나라를 유토피아라고 말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보르헤스의 세계는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를 만하다고 말한다. 유토피아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물론 그것은 상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상이다 아니다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즉 우리가‘말과 사물들’을 혹은‘말들과 사물’을 구성하는 통사구조가 작동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그렇다면 그러한 통사법이 붕괴된 세계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이 ‘말과 사물’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비록 푸코는 말과 사물 보다는 사물의 질서라는 제목을 더 원했다고 하지만 아무튼 이 제목에는 단지 사물을 지시하는 의미에서뿐만 아닌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푸코의 통찰이 들어 있다.
우리의 인식체계가 얼마나 강력하게 언어로부터 질서지워져 있는지는 프로이트부터 라캉까지 정신분석학이 많이 밝혀 주었다. 푸코의 통찰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통사법의 구조가 작동하는 유토피아는 따라서 우화나 담론이 가능하다. 물론 헤테로토피아는 대화를 고갈시키고 단어를 멈추게 하고 문법은 그 가능성 자체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신화를 해체하고 문장의 서정성을 지워 버린다.
푸코가 보여주는 실어증 환자에 대한 재미있는 실험을 보자. 물론 이것은 로만 야콥슨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킨 라캉의 견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언어로 구조화된 공통의 지반이 무너지면 우리는 사물의 질서에 일대 혼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특정한 언어적 기능을 상실한, 보통 '유사성과 인접성 혼란'이라고 말하는데, 실어증 환자는 사물을 질서짓는 공통의 기반위에 있지 못하므로, 말하자면 여러 개의 실타래를 어떤 질서에 따라서 나누어야 할지를 몰라서 이리저리 혼란을 겪다가 결국에는 불안에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어증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운동신경장애와 동전의 앞뒷면이기 때문이다. 운동신경 장애apraxia와 실어증aphasia은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인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사물의 질서의 일부라도 붕괴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신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정신, 이성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사유체계를 뒤집어서 신체에 대한 사유를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언어를 중심으로 질서지워져 있는 사물의 체계를 우선 아는 것이 필요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푸코는 사물의 체계를 탐색하는 데에 크게 두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먼저, 이른바 순수한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 푸코는 문화의 코드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극단이 있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사물의 질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 자체에 대한 반성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러한 코드화된 질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양극단 사이의 중간지대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순수한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가 앞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바로 이 경험이다. 이 경험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기존의 접근 방식을 거슬러 올라 가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의 어떤 양상이 인지되고 상정되었으며 공간과 시간에 연관되었는가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다. 또 어떤 토대 위에서 인식과 이론이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재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면서 푸코는 인간은, 고전주의 시대가 표상을 포기하면서 등장한 사물의 질서 내의 일종의 균열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곧 다시 사라져 버릴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사물의 질서, 사물의 배치이다. 말하자면 두 번에 걸친 불연속적인 단절, 뒤에 푸코는 이 불연속적인 단절 개념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하게 된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이를테면 고전주의가 끝난 근대의 공간의 질서는 고전주의 시대와 완전히 다른 지반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성이 진보를 했다느니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린네의 분류법이 아직도 유효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의사 연속성)은 표면을 더듬는 것에 불과한 일이 되는 것이다.
첫댓글 일종의 intro이군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푸코는 마르크스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이것은 니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고 하신 건, 특이하면서도 좀 의아스러운데, 흔히 프랑스의 니체주의자로서 제일 먼저 꼽는 인물 중의 하나가 푸코가 아닌지요? 아시다시피, "니체, 계보학, 역사" 도 있고...
사실은 이전에, <말과 사물>을 읽으면서 매 챕터마다 내용을 일종의 노트식으로 정리하려던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인트로만 쓰고 말았습니다. 쩝~ ^^
김상환 교수에 따르면, '니체, 프로이트, 맑스'를 통으로 묶고, 이들을 근대적 사유로 집입해 들어가는 사유의 대가로 언급한 최초의 사람이 푸코와 리쾨르라고 합니다. 즉, 푸코는 니체도, 맑스도, 프로이트도 다 중요한 인물들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좀 특이(?)하다고 본 것은 니체의 경우도 그렇지만, 맑스에 대해서도 그의 저작 전체를 통틀어서 몇 군데 밖에 언급을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특이한 것입니다. 나중에 맑스주의 진영의 학자들이 푸코를 해석하면서 혼란을 느낀 것이 이 부분인데요~
니체에 대해서도 '니체'라는 이름을 직접 거명하는 글이나 책은 몇개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를테면, <광기의 역사>라는 책은 니체, 맑스라는 이름만 나오지 않을 뿐이지 전체가 니체의 영향아래에서 쓰여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만. ^^
이런 것이 푸코의 특이점이라고 해야 할지?~ 결국 푸코가 보다 자세하게 니체, 맑스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이후에 푸코를 읽는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게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니체주의자'라는 명칭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에 반대하는 진영에서 이들을 비꼬기 위해서 갖다 붙인 명칭인데요(형식주의자라는 명칭처럼) 저는 개인적으로 '니체주의자'라는 호칭에 별로 이견이 없습니다마는, 정작 푸코는 니체에 대해서 그다지 적극적인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말과 글>에 혹시 새로운
직접적인 '언급'이 영향관계나 계보를 이해할 때 핵심적인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한 대담에서, 푸코는 자신이 하이데거로부터 받은 감화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하는데, 다만 그것을 언표를 통해서 공식화하지 못했을 뿐이죠. 사실, 하이데거야말로 푸코 문헌에서 정말 찾아보기 힘든데 말입니다...
언급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71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취임하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사람은(이건 물론 의례적인 인사일 수도 있지요) 장 이폴리트이고, 나아가 헤겔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헤겔을 언급한 것은 아마도 스승 이폴리트(그래봐야 고등학교 때 두 어달 배운 것밖에 없는데)와의
관계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 푸코가 하이데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 그러면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푸코는 아주 희한합니다. ^^
제가 주목한 것은, 푸코가 하이데거로부터 영향을 더 받았냐, 니체로부터 영향을 더 받았냐 하는 것에 있기 보다는 그 '직접적인' 언급이었습니다. 이건 좀 더 생각을 해 봐야겠지만, 그가 '쓰고 말한' 기록에 남아 있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푸코는 니체주의자라기보다는 블랑쇼의 영향이 더 커 보입니다.
푸코가 원채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썼기 때문에(<말과 글>이라는 책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푸코에 대해서 알고 있는 그의 글의 분량과 맞먹는 '미발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푸코 전체를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제 글에는 원래 다양한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제가 글을 올리면서 각주들을 다 지웠습니다. 푸코는 각주 쓰는 것에 반대했지요~ 리플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사상사적 영향을 이야기할 때, 직접적인 언급 유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비판(부정)했다고 해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푸코가 마르크스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은 사르트르(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하고 있다는 게 통설입니다. 즉, 문제는 영향 유무가 아니라
영향의 정도와 그 영향이 어떤 식으로(긍정적으로/또는 부정적으로) 해당 사상가의 사상적 발전에 작용했는가죠. 즉, 푸코가 마르크스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푸코 사유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과 글>은 어디까지나 잡문과 인터뷰로 이루어진 글모음입니다. (최근 프랑스에선 이와 비슷하게 들뢰즈 잡문이 편집되어 출판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존 저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도지, 이 글들이 주요저작의 주장을 크게 뒤엎을 정도로 위력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그리고, 각주는 필요합니다. ~
'직접적인' 언급 유무가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지적인 오만입니다. 사르트르의 영향 때문에 맑스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통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견해'만이 있을 뿐입니다. <말과 글>에서 '잡문'이 아주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말과 글>의 내용들이 위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은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할 수 있는 말 아닐까요? 쿤데라 님은 다 읽었나요? 그리고 각주는 필요하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다른 분들이 각주를 일일이 달았다면 저도 물론
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에 지운 것 뿐입니다.
"<말과 글>의 내용들이 위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은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할 수 있는 말 아닐까요?"라고 하신 건 일리가 없지는 않아도 여러 형태로 번안될 수 있는 '경험론적' 오류입니다. "네가 내 인생을 살아봤어? 어떻게 날 이해한다는 소리를 해!" 같은 것이 그 통속적인 버전입니다. 그러한 식의 전면적인
이해는 가능하지도 않고 필수적인 것도 아닙니다. 푸코를 말하기 위해서, 푸코의 전집을 읽어야 한다면, 헤겔과 들뢰즈와 마르크스 등등은 어떻습니까? 보다 원초적으로 원전이 아닌 번역본으로 읽은 것도 '읽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요? '잡문'의 중요성은 그것을 통해서 전혀 다른 '푸코'를 그려보일 때 입증되겠죠..
글쎄요~ ^^ 뭐 그건 입장 차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말과 글>이라는 것에 일정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쿤데라 님은 '거 뭐 별 내용이 있겠어'라는 식의 견해를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푸코를 아직
다 이해되지 않고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서 <말과 글>이라는 책을 우선 읽을 필요가 있다(다른 저작과 동일한 위상으로)는 생각을 피력한 것입니다.
푸코를 말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가능한 범위에서 그의 전집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분적으로 읽었다면 그 범위 내에서 발언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번역 문제는 로쟈 님이 전문가시니까~ ^^(이전에 저는 로쟈 님의 번역의 견해에 동의를 표한 바 있습니다). 번역본이 있다면 번역본을 읽는 것도 물론 존중되어야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나는 번역본을 읽고 이 견해를 말하노라~고 분명히 밝히면 됩니다.
한 국가의 번역 수준은 전체 학문적 위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기가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저는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을 '분명히' 구별해서 좋은 번역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길이 엉터리 번역을 몰아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번역서를 보고 인용을 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제대로 원서를 보지도 않으면서 마치 '나는 번역서는 읽지도 않는다'는 식의 엉터리 같은 태도입니다. 번역서가 나와도 나쁜 번역의 경우 그것을 분명하게 의도적으로 인용하지 않아 버리면 번역 문제가 좀 고쳐지지 않을까요?
기존의 '모든 번역'을 무시하는 태도는 지적인 오만이면서 정직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우리의 사유의 많은 부분은 번역서를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번역의 수준이랄까 뭐 그런 것을 고민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일본학계가 시간이 남아서 번역에 그렇게 공을 들이겠습니까?
'바둑에 대한 수수께끼에서 언급되서는 안되는 말은 무엇인가?'라고 보르헤스가 물었던 작품이 아마 -베르톨루치의 <거미의 계략>의 원작으로 쓰였던-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일 겁니다. 바따이유에 대한 푸꼬의 중요한 글은 누구에게나 헤겔에 뒤덮여있어 보이던 바따이유를 단번에 칸트와 연결시킴으로써
니체가 '인용'되지 않는 자신의 니체적인 글쓰기라는 수수께끼의 답을 의뭉스럽게 제시한 바 있습니다. 기실 푸꼬와 헤겔의 관계는 이뽈리트가 아니라 바따이유를 통해 '변태적으로' 즉,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블랑쇼와 더불어 그를 니체로 이끈 이 역시 바따이유입니다. 후자가 제공해주지 못한 하이데거와의 접점은
블랑쇼가 대신해주었구요. (블랑쇼는 헤겔과 하이데거라는 기이한 짝패의 흉물입니다) 무엇보다 '맑스에 대한 푸꼬의 언급'은 <Remarks on Marx>라는 명백한 제목을 가지고 가장 집요하게 이루어진바 있습니다. 이 중요한 대담집이 다소 덜 알려진 것은 그것이 영어와 프랑스어권 그 어디도 아닌 이탈리아어로 쓰여졌
다가 1991년에야 영역되었기 때문일겁니다. 꼬리말들을 보니 이는 그의 '전저작'에 포함이 안되고 있는 모양인데 (푸꼬의 인터뷰는 그의 사유의 정당한 일부분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얘기한 것은 들뢰즈입니다) 이 책에서 개진되는 푸꼬의 견해에 대한 님들의 입장이 궁금합니다. 저 역시 푸꼬가 다 이해되지 않고 있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데 동의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직 구하기 어려운 <말과 글>을 '우선' 읽을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나와 있는 글들조차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있다면 다시 읽어야 할 것은 그 글들입니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존재를 이집트 역사가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푸꼬의 말은
이를 푸꼬 자신에게 되던져 김현선생이 '스스로' 읽으려 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해 보입니다. (가능하다면 방학 전에 바따이유에 대한 글을 하나 써볼 생각인데, 여기서 언급된 푸꼬와의 연관과 쿤데라님이 올리신 글에서 별 진전없이 반복된 사르트르의 유명한, 즉 고루한 바따이유론을 다룰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