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한 불음각(佛音閣)에는 커다란 범종 하나가 걸려있는데 네면에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조식하여 넣었습니다. 이 범종은 1985년에 조성 되었는데 그 소리가 영롱하여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이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예불 때마다 울리는 긴 종소리의 여운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중생의 귓가를 씻어내고 부처님의 미소 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말씀이 되어 혼탁한 하늘을 밝게 울려주고 있습니다.
절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맞게 됩니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습니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습니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입니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입니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입니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됩니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합니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습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民家)의 건물양식 그대로입니다.
兜率宮中稟大偈 普濟衆生 般若臺上演眞詮 라고 하였습니다. 총면적 86평으로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객실로 사용합니다. 천보루의 2층에는 앞뒤로 난간을 둘렀고 익공계 이익공이 섬세합니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인데 양끝의 처마가 날렵하게 보입니다. -천보루 여기서 특이하게도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안쪽에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있습니다. 밖에서는 천보루, 안에서는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집니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홍제루 현판의 동쪽 종루(從樓) 벽면에는 일제강점기에서 이름있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을 비롯한 30인의 문인묵객들이 당시 강대련 주지를 위해 기념휘호한 글들을 모아 판각해놓은 목판이 걸려있습니다. 창건당시 천보루의 앞뒷면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을 달았었는데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경의황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혼정신성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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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히 교과서대로 오라버니가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넹멋진 모습도그래도 이리라도 소식 남겨 주시니 캄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