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칭/별칭 | 자직(子直),동강(東岡),효헌공(孝憲公) | |
분야 | 역사/전통시대,인물/전통인물 | |
유형 | 인물/전통인물 |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오생리 |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오생리 |
성별 | 남 |
생년 | 1640년 |
몰년 | 1718년 |
본관 | 풍양 |
대표관직 | 좌의정 |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직(子直), 호는 동강(東岡). 예조판서 조형(趙珩)의 아들이며,
할아버지는 승지 조희보(趙希輔)이다.
조상우는 1657년(효종 8)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연천현감(連川縣監)을 지냈다. 1675년(숙종 1)에는 스승인 송준길(宋浚吉)이 삭직을 당하자
홍득우(洪得禹)와 함께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남평(南平)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호조좌랑(戶曹佐郞)·태인현감(泰仁縣監)을 거쳐 43세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이듬해 지평(持平)을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개성유수(開城留守)·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지냈고 1711년(숙종 37)에 좌의정이 되어 세제(稅制)의 폐단을 시정하여
민생의 어려움을 해소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던 학자로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이경석(李景奭)·송준길의 문인으로서, 학자로서 지조와 절개를 갖추었던 문신이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여러 분야의 학문적 소양을 지녔던 인물로 보인다.
조상우는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글씨로 회덕(懷德)에 있는
충현서원(忠賢書院) 사적비(事蹟碑)와 이지걸(李志傑)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며 유배지였던 남평(南平)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