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나라 姓氏考를 대변하는 「韓國人의 族譜大典」의 기록을 보면 咸平李氏 欄에 ‘李光逢은 高麗忠肅王 때 三司使로 벽상삼한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 좌명공신에 훈록되고 함풍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함평이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득관조가 꼭 시조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에서부터 비로소 계차가 확실하고 훈업이 크면 당연히 득관조가 시조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휘 언祖께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신 것처럼 대를 이은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前有彦”으로 남겨두고 시조는 휘 광봉조라고 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필요하면 고현 이주삼가승의 내용을 기록해도 무방하겠지요.
2. 조선조에서 領相을 역임한 鄭澔대감의 유집인 「丈巖集)」에 ‘咸平李氏는 고려 密直司事 李光逢으로부터 示顯되었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일국의 대감인 장암 정호선생께서 잘 못 알고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요?
3.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고려 태조 때나 광종 때에 신무위대장군, 혹은 신호위대장군을 역임했다는 李彦이라는 이름의 인물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다만 高麗말 朝鮮초에 진무장군 李彦이 나오는데 그는 태종에게 역적으로 몰려 복주된 사실이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더불어 신호위대장군이나 신무위대장군은 고려 태종조나 광종조 당시에 없던 벼슬이라고 하였습니다. 李彦祖는 ‘前有彦’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 없던 벼슬을 한, 없던 분을 계속해서 시조로 모셔야겠습니까?
4. 1633년 癸酉草譜 序 맨 앞에 장양공 후손 澐씨가 筆하기를 “咸豊族譜譜咸豊李氏之族也”라 하였으며 ”원본의 표지 역시 “咸豊李氏族譜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도 함평이씨 대종회에서는 무슨 근거로 “함풍이씨로 족보한 사실은 한 번도 없다‘고 하는 것인지요?
5. 우리 성씨 족보상의 4세 휘 順之조의 방주에 ‘官至檢校興威衛大將軍配開州王氏有蔭光君忠翼之女’라 했고, 개성왕씨 종족별기에서 왕충익은 사위가 ‘咸豊人檢校興威衛大將軍順之’라 했으니 동일인임이 틀림없습니다.
개성왕씨 종족별기에 기록된 분들은 대개 조선조에 들어와서 왕씨로 살아남을 수가 없어 성을 바꾼 사람들인데, 바꾼 성을 때어버리고 왕씨의 족보 말미에 '종족별기'로 재록했다고 하였습니다. 개성왕씨 종족별기를 만든 사람들이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면 함평이씨 4세 휘 順之조는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인물이 분명한데 어떻게 고려 충숙왕시대 인물 휘 광봉조의 부친이 될 수 있겠습니까?
6. 1688년 우리성씨 최초의 대동보인 “咸豊李氏族譜(2012년 기성군가에서 발견)” 坤(권지 2) 131면, 諱 孫秀祖의 방주에 “咸平宗人草譜則仁問以光逢爲先代以孫秀爲子而無蘘三言~”라 했으니 그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기성군파, 효우공파, 현령공파, 부사공파, 목사공파, 현감공파 등은 모두 휘 광봉조가 선대입니다. 당시 서슬 퍼런 경파들이 수보청을 장악하고 있는 중에 손수조의 후손이 거짓을 기록해놓았을까요?
‘시조를 언으로 모시고 족보를 하는 대신 이것만은 꼭 방주에 기록하게 하여 반드시 후손들에게 전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특히 전 대종회상임부회장을 역임하셨던 계선종친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7. 1633년 癸酉草譜 序에 장양공 후손 澐씨가 筆하기를 ‘나주에 가니 함평이 가까워 성친들이 많이 살아~’ 라고 하였습니다. 장양공의 직계후손으로서 장양공의 부친 휘 극명조와 조부 휘 자보조의 유택이 있는 나주에 처음 와봤다는 말씀인데 효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시대에 이게 말이 됩니까?
8. 죽음공 후손 눌행재 휘 사직공께서는 함평이씨 족보 상 5세 휘 광봉조를 장양공파들의 회유에 의해 4세 휘 순지조의 아들로 올려 합보하는 것에 대하여 허락한 장본인으로서 ‘이 세대에서는 보고 들은 사람들이 있어서 함평이씨 족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종인들이 있다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게 될 것이니, 후손들이 알 수 있도록 참회하는 심정으로 내가 보고 듣고 직접 겪은 사실만을 기록한다’고 하였습니다. 함평이씨 대종회가 얘기해오고 있는 것처럼 ‘족보사실록’의 기록이 과연 노망난 늙은이의 망언이었을까요?
9. 죽곡집과 족보사실록에 의하면 ‘광봉조의 후손 숙의 아드님에 이르러 형제가 7인(인원. 인관, 인계, 인검, 인문, 인좌, 인형)이다’고 하였습니다. ‘죽곡집에 휘 언조께서 시조라하였다’는 것은 주장하시면서 휘 숙조의 아드님 인자항렬 7형제에 대하여는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지요?
10. 족보사실록을 쓴 눌행재 휘 사직어른을 오랑캐같은 늙은이라 욕하며 부원군손들과는 절대로 족보를 같이하지 말라는 취지의 ‘경중통문’을 읽어보셨습니까? 족보를 할 때마다 족보 위작 사실을 들먹이는 성친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는데도 '함평이씨는 족보할 때마다 아무런 잡음 없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족보하였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11.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국조방목은 원본을 마이크로필름에 담아다가 만든 소위 영인본입니다. 거기에 기성군 휘 긍조의 상계와 함평이씨 족보에 기록된 휘 긍조의 상계가 전혀 다릅니다. 기성군은 인문조의 후손이 아니라 인검조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교공 양근조의 국조방목 기록도 함평이씨 족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세종대왕 당시 국본을 고쳐달라고 하기 위해 중국에 사신으로 가셨던 기성군 휘 긍조께서 자신의 부친과 조부와 증조부도 몰라서 그렇게 기록했을까요? 영인본 국조방목이 틀리고 우리 족보가 맞다고 계속 우기실 건가요? 누가 일부러 한 일이라면 남의 근본을 바꿔치기해놨으니 천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12. 1988년 11월, 이교헌, 이명헌, 이내범, 이기범, 이강수 다섯 분의 이름으로 낸 「함평이씨 족보 변천사」를 아십니까? 거기에 따르면 1633년 계유초보에서부터 1988년 무진보에 이르기까지 두 번의 초보를 포함, 모두 11번 족보를 편찬하였는데 1988년 무진보를 재하고 나머지 10차례를 장양공파가 편찬하였습니다. 대종회장 역시 근래 두어 번을 빼면 모두 장양공파가 역임해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1688년도 최초 대동보는 총 2권인데 그 중 1/3 이상이 장양공파에 대한 기록입니다. 최근에는 장양공파와 참판공파가 “함평군파보”라는 이름으로 세 번에 걸쳐 합보를 펴냈습니다. 이렇게 해온 저의를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13. 함평이씨 족보의 戶口辨疑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1262년으로 되어있던 5세 휘 림조의 호구를 1갑자 끌어올려 1202년으로 하였고 그 아래 휘 자보祖까지 장양공 종생祖에 맞춰 60년씩을 끌어올리다 보니 6세 堯조의 아드님 세분( 인계, 인검, 인문)은 돌아가신 후에 낳은 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조상들의 호구를 어느 한 파의 구미에 맞게 마음대로 올렸다 내렸다 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 지경인데도 함평이씨 족보가 과연 금과옥조라 하시겠습니까?
14. 1989년 10월 31일자로 함성군 휘 극해祖 후손 고 이기범님은 왜 '咸 李 大 同 譜 改 修 請 願’이라는 글을 남기셨을까요? 거기에는 ‘무진보(1988) 편찬기간 중 논쟁 사실’과 ‘시조할아버지 사적 등에 관하여’, ‘호구변의에 관하여’, ‘사산사우의 위패에 관하여’, ‘우봉이씨 입적에 관하여’ 등 함평이씨 족보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15. 1991년 12월에 ‘함평이씨 보계상고위원’(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궁범)명으로 쓴 ‘咸平李氏 譜系 詳考文(함평이씨 보계 상고문)’이란 글을 읽어보셨습니까?
16.2005/6-2013 년 대에 들어와서 이권행씨가 집필하여 세 차례에 걸쳐 再版한 ‘咸豊. 咸平李氏族譜 評考’라는 글을 읽어본 일이 있으십니까?
17. 죽곡공 휘 장영祖의 제자들과 후손들이 1742년에 처음으로 죽곡공의 유집인『죽곡집』을 엮으면서 파평윤씨 윤동준님등 몇 분이 家㧋을 썼는데 그 때는 이미 함평이씨 족보가 나왔었고 그 족보에 언이 시조라고 했으니 家㧋에도 지극히 당연하게 언을 시조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록으로 엮은 「죽곡집 속편」은 후손들이 작성한 죽곡선생의 世系로 ‘시조 이언(황조인이라고 하나 알 수가 없음)祖는 國學典主高州使高麗祲邑咸豊君, 일설에 의하면 고려신무위대장군이라고 한다.’고 했고 이어서 ‘1세부터 4세까지가 290년이니 여차여차 저처저차 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그 글이 시조를 이언이라고 단언하는 글이겠습니까?
18. 2014년 2월 25일에 당시 함평이씨 대종회의 상근부회장 이계선종인과 대종회에서 판관공파 종회장 일을 맡으셨던 이기행종인께서 도로공사 중에 나온 지석 두 점을 박물관에 기증하셨다는데, 1774년에 이석선생의 7대손 이사택이라는 분이 제작한 것으로 도자기에 鐵畵로 [성균생원 이공 휘 석은 관이 함풍이고 고려광종 때에 휘 언이 있어서 신무위대장군이라했고 그 후 충숙왕 때 삼중대광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의 아드님 안저~ 이하 생략]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최초 족보(1688년 무진보)時 이주삼의 가승에 처음 광봉조를 쓰고 그 다음에 “前有彦”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대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 ‘언이라는 분이 있었다더라’는 전설적인 이야기에 다름 아니지 않습니까? //이상
* 함평이씨 대종회에서는 위의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셔서 번호별로 충실한 답변을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권고하고 싶은 것은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구시대에서 어느 한 집안의 들러리가 되어서 거짓과 가식으로 얼룩진 족보를 만들어 온 것으로도 부족하여 계속해서 거기에 동조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서입니다. 역사는 실증적 방법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의문점은 후세에 전해도 되지만, 거짓이나 명백한 잘못은 전해서는 안 됩니다. ‘타 성씨 족보도 다 그렇다’며 뻔히 드러난 거짓을 덮어두고 며느리에게도 보여줘서는 안 되는 부끄러운 족보를 또 다시 그대로 답습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