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청년 롱보라
5월은 감사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겹쳐있기 때문이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교회청년들이 어른들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모두들 어버이 은혜에 감사하며 축하 인사들을 나누고 있다. 우리와 전혀 모습이 다른 청년이 나무그늘 의자에 앉아 부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듯하다.
그는 얼마 전, 우리 교회에 온 깡마른 캄보디아 청년 롱보라이다. 작은 체구,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 움푹 들어간 눈에 슬픔이 서려 있는듯하였다. 그는 프놈펜 로얄대학 컴퓨터 과학과를 졸업하고 배움을 더하기위하여 우리나라에 왔다. 우리교회에서 캄보디아에 파송한 선교사님의 소개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저 허름한 옷차림에 가방 하나들고 맨몸으로 이곳까지 찾아왔다.
캄보디아하면 킬링필드로 유명한 나라이다. 동족들 간의 내전으로 200만 명의 주민이 학살되고 지금도 그 아픈 상처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족이다. 롱보라 고향에는 어머니와 두형제가 있다 하였다. 크메르루지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아버지가 왕실 주치의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한다. 캄보디아 내전 때 도시의 지식인들은 대량 학살되었고, 롱보라의 아버지도 희생 되었다 한다. 거리에 내몰린 식구들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근근이 연명하며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였다.
그는 처음에 언어와 이질적인 문화에 무척 당황한 모습이었다. 말벗이 없는 그는 항상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다. 그를 이곳에서 포근히 안아줄 친구가 필요했다. 우리 가정이 롱보라 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3개월이 지나서면서부터 우리와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청년이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전주에 내려가는 버스 승차 역 몰라 헤맸던 일, 찾아가야 할 사람의 전화번호를 잃어버려 당황했던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더듬거리며 우리나라말을 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가 말 할 수 있는 외국어는 영어, 불어 한국어, 자국어까지 4개 국어이다. 전주 J 대학 도움으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부족한 생활비는 이웃들의 도움과 방학동안 산업현장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여 보충하였다.
어느 날 이었다. 공장에서 받은 인종차별과 인권을 유린하는 한국인들의 학대에 울분을 토하는 그의 말을 듣게 되었다.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일을 잘못하는 바람에 공장장으로부터 심한 욕설과 구타가 행해졌다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청년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지금의 고난이 지나면 유익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핍박과 고난은 너의 장래를 살아가는데 보탬이 될 것이라 말했다. 목표는 미래를 위해 결정하는 것이고 가치는 현재를 위한 것이다. 목표는 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가치는 변할 수 없는 바위와 같은 존재라 말해주었다.
그가 돌아간 후에 오 마이뉴스에서 읽은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네팔인 형제의 가슴 아픈 기사가 떠올랐다.
“한국에서 형은 죽었지만 저라도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산업현장에서 안전사고로 형을 잃은 동생이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그는 살기위한 선택이 바로 떠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외국 노동자들이 들어와서 우리들이 기피하는 3D 업종 일에 종사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편협한 생각과 냉소적인 시각이 그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수많은 외국여성이 농촌총각들과 결혼하여 여러 가지 사회문제로 비화되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진다. 우린 이곳에 와서 고생하는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따뜻한 인정으로 대하고 외로운 그들을 감싸주어야 한다.
롱보라 청년은 전주에서 대학과정을 마치고 대전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이동통신 분야의 석사과정을 공부 하고 있다. 주말이나 쉬는 날이면 자기의 고향처럼 이곳 전주에 내려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정답게 나눈다. 처음한국에 올때 깡마른 얼굴이 포동포동하게 살이붙고 귀공자 모습으로 변했다. 이방인 롱보라 청년의 그늘진 얼굴이 접시꽃처럼환하게 피었고 먼저 농담을 걸어올 정도이다.
“저 결혼식에 참석해주실래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 갈 테니 소식만 줘. 혹시 한국아가씨와 사귀고 있는 것 아니야?”
우리는 허물없는 대화에 배꼽을 쥐어 잡고 크게 웃었다. 청년은 내년이면 학업을 마치고 자기의 조국인 캄보디아로 돌아간다.
우리의 작은 도움이 타국에 와서 힘들어하던 외국인 한사람이 결실을 맺고 있다.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 와서 참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젊음의 열정을 불태우는 청년이 대견하다. 나는 청년과 헤어질 때 마다 그의 작은 손을 뜨겁게 잡아준다. 롱보라 청년의 마음에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좋은 나라로 남겨지면 좋겠다. 진정으로 자신의 꿈과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청년의 앞길에 서광이 비춰지길 소망한다.
첫댓글 윤선생님! 다시 한번 진정으로 존경을 표합니다. 눈물이 나는군요. 롱보라 청년의 아픔이 제 아픔되어 글을 읽는 내내 눈물이 났어요. 그래도 먼 이국에서 꿈을 안고 온 가엾은 청년에게 선생님은 한국인에 대한 분노를 그렇지 않은 찬사도 잇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셨군요. 정말 잘 하셨습니다. 지구촌입니다. 피부색이나 언어가 달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 마음을 열고보면 모두 교감할 수잇는 인간이라구요. 감명깊게 잘 읽었어요. 그 청년에게 꿈을 잃지 말라고 또 저가 안부 전한다고 전해 주세요. ㅎㅎㅎㅎ
봄에 롱보라 프놈펜 집에들렸습니다. 어머니도 뵙구요. 9월초 또그곳을 방문할예정입니다. 이상하게 저는 캄보디아하고 인연이 많은것 같군요.자주 캄보디아에 갈일이생기니....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외국인들이 이제 우리 주위에 흔합니다. 그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 먼 훗날 우리의 자손들이 '친절한 한국인'으로 존경받도록 했으면 합니다. 외교는 국가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개인이 아름답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격려해주셔서고맙습니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캄보디아하고 친해지려합니다. 그곳에가보니 우리가 상상 못할정도로 가난에 고통 받고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군요.
친구를 찾지 말고 먼저 친구가 되어라, 윤 선생님 저도 롱보라가 보고 싶어요. 제 사촌 동생은 캄보디아에 가서 살고 있는데 재작년 그곳 처녀와 결혼했어요. 베트남 간다더니 어찌 된 일인지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까지 갔대요.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어 공원에서 정신을 잃었나봐요. 근데 당간부에게 발견되어 그의 수양자가 되고 그 분의 보살핌으로 지금은 꽤나 탄탄한 사업가가 되었어요. 우린 모두 그앨 도와 살려준 캄보디아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롱보라의 가족과 이웃도 윤선생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조샘의 사촌동생은 캄보디아인의 도움을 받았군요. 세계인은 이렇게 서로도움을 주고 받곤하지요.아마 롱보라가 자기의 조국에 돌아가면 대학교수 또는 정부요직에 고용될것이라하네요. 일전 캄보디아 육군참모총장이 우리나라에 왔을때 롱보라 청년이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감동적입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처우에 가슴이 아픕니다. 어쩔 수 없어 택한 한국행이 그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었으면 합니다. 윤선생님의 애국애, 인간애가 보이는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그 청년에게도 안부 전해주십시요. 좋은 청년이군요.
롱보라가 한국아가씨와 결혼했으면 합니다. 아주 명석한 친구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입니다. 롱보라에게 이 수필 전문을 보내주었습니다. 에세이스트 선생님들의 격려도 잊지않고 전하겠습니다.
윤선생님 롱보라 우리 카페에 가입하라고 해요. 사진도 올리고 함께 신나게 놀게요. 사투리 안 쓰고 표준말로 얘기할께요.
롱보라에게 연락했는데 연구논문과 졸업 논문으로 무척 바쁘다네요. 이번주말에 이곳에 오기로 했습니다.
키아! 버선발 말고 맨발로 달려나가겠습니다.
타국에서 멀리 가족들과 떨어져 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눈물이 나던데...왜 그들을 보듬어 주지 못하고 학대하고 멸시하는지 같은 사람으로서 부끄럽습니다.
정샘의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모처럼 일요일날 음악을 틀어 놓고 하루종일 글을 썼습니다. 남들이 보면 별로 슬프지도 않을 터인데 저는 제 글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마음을 추스리고자 카페에 들어오니 윤샘의 롱보라가 또 저를 울립니다. 부디... 롱보라가 원하는 일들이 다 이루어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정에 약한것이 사람이라 했던가요. 전샘의 눈물을 보면서 다시 한번 사람이 사는 정을 느낍니다. 이번 주말에 롱보라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준것만도 감사했습니다. 내년2월이면 다시 둥지로 돌아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지요.
한 편에서는 인건비가 싼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가 하면 또 한 편에서는 이토록 아름다운 일을 하시는군요. 좋은 사람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분들이 나쁜 사람들 보다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롱보라의 가슴에는 한국에는 윤선생님 같이 좋은 분들도 있다고 각인되었겠지요.
김샘의 칭찬을 받으니 괜히 쑥스럽습니다. 그저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