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민들의
보람
개척자들은 그들의 옷도 손수 만들어 입었다. 윗도리와 신발은 사슴가죽으로
만들었고 이불과 깔개는 곰가죽으로 만들었다. 일부 개척민들은 아마를 심어 그 섬유를 뽑아 아마포를 짜서 셔츠와 드레스를 만들었다.
개간한 땅이 충분해지마 개척민들은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길렀고, 양으로부터 앋은 양털은 부인들이 공을 들여 다듬고 곱게 빗긴 후 물레를 돌려 털실을 뽑은 다음 여러 가지 색깔의 풀로 물을
곱게 들여 옷감과 이불감을 짯다.
예쁜 조각이불을 만들 때는 이웃에 사는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조각천을 하나씩 꿰매면서 시간 까는 줄 모르고 정겨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당시는 신문이나 라디오
등의 매체가 없었으므로 이때가 최든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특히 숲속에 고립되어 살던
개척자들의 부인들에게는 ‘조각이불 만들기 벌떼 (quilting bees)’ 처럼 사교적인 모임을 한
번씩 가지는 것이 꼭 필요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greenwichworkshop.com%2Fimages%2Fgallery%2Fimages%2FPrints%2F135%2FMW00013lg.jpg)
(출처: www.greenwichworkshop.com)
아이들도 농사철에는 농사일을 도와야 했으나, 대부분의 개척민들은 자식들이
일을 도와주는 것보다 점더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 당시의 교육은 소위 ‘3Rs’라 하여 읽기, 쓰기, 셈하기가 전부였다.
정착 초기에는 일반가정을 빌려 수업을 했고, 지역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학교 건물도 이었다. 학교 운영비와 교사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각 가저마다 돈을 각출했고, 교사 월급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좋은 선생님은 드물었다.
초기에 지은 학교는 통나무로 지은 작은 집이었고, 학생들은 선생님을 향해
줄지어 앉았으며, 교실 가운데는 커다란 박스형 날로가 놓여 있었다. 학생들은 등교시 난로에
지필 화목을 가져와서 불을 피우는 일까지 맡아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c2.staticflickr.com%2F8%2F7170%2F6702363701_2bc159459c.jpg)
(출처: www.flickr.com)
학생들이 대부분이 남학생들이었는데, 교육은 매우 엄해 잘못을
저지른 학생은 회초리로 손바닥이나 엉덩이를 맞았으며, 큰 잘못을 저지른 학생은 교장 선생님이 장작더미를 쌓아놓은 헛간으로 데려가 심한 벌을 주었다. 특별리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12살 넘어서까지 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드물었다.
힘들고 고된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캐나다에서 새로운 삶의 처전을 닦는다는 꿈과 희망을 갖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들은 몇 해만 땀흘려 일하면 대부분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 생활에 만족했다. 그뿐만 아니라 몇 해만 주비런히 일하면 삭막했던 부락은 평화로운 농가와 농장으로 변했고, 여기저기 나무 그루터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던 들은 사과나무, 자두나무, 능금나무 들이 탐스럽게 서 있는 과수원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뀌었다.
부락에는 밀을 갈아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소가 생겼고, 농지는 많은 곡물을 생산해닐
수 있도록 계속 개간되었다. 추수한 밀, 귀리, 보리등을 시장에 내다판 개척민들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재소도 생겨 목재를 생산했고, 개척민들은 투박한 통나무
대신 판자와 각목을 이용하여 멋진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일부 돈 많은 정착민들은 돌로 집을 지었는데, 이때 지은 석조건물들은
지금까지도 온타리오, 퀘벡, 노바 스코샤, 뉴브런즈윅 지방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97F94114AC8A4C06F)
(출처: onkyung.tistory.com)
이곳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모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곳은 정직하고 부지런한 기능공과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매우 보람된 곳이었다. 몇 년만 열심히 노력하면
통나무집에다 농토까지 가질 수 있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그들대로 몇 년만 땅 장사를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일을 해보지 않은
가난한 신사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나라였다.
(출처: 최희일, [캐나다 역사 100장면], 도서출판, 2010, 120-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