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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1. 擊壤詩에 云하되 平生에 不作皺眉事면 世上에 應無切齒人이니라 大名
(격양시 운 평생 부작추미사 세상 응무절치인 대명
을 豈有鐫頑石가 路上行人口勝碑니라
기유전완석 노상행인구승비)
격양시에 이르길 “평생에 눈썹 찡그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응당 이를 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큰 이름을 어찌 (감각 없는)무딘 돌에 새길 것인가. 길가는 사람의 입이 비석(碑石) 보다 나으리라.”고 하였다.
⋇ 皺眉(주름 추. 눈썹 미) : 눈썹을 찌푸림.
⋇ 鐫(새길 전. 쪼다) : 새기다 - 刻骨難忘. 雕(5-25 참조). 銘 -
⋇ 頑石(완고할 완, 무딜 완. 석) : 무딘 돌. 완고한 돌. 감각 없는 돌.
⋇ 口勝碑(구승비) : 사람의 입이 비석보다 나음.
(해설)
無骨好人(무골호인)처럼 모든 것을 초월하여 허허 웃고 아무리 험하고 급한 일을 당하여도 당황하지 않고 느긋하게 즐기며 여유롭게 대처한다면 적은 없을지라도 우습게 여기거나 바보로 여길 소지는 다분하다.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우며 까탈 부리지 않고 무덤덤한 아이나 사람에게는 돌부처가 들어앉았다 말하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려워하고 공경하는데 매사에 칼로 물을 베는 식으로 하면 그 반대의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특히나 자존심을 침범하는 일이나 재물과 명리 등이 개입되는 일에 대하여서도 욕심 없거나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조금은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정글의 법칙이니 시장의 원리니 하며 치열한 경쟁 속에 일등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계화시대에 물에 물 탄 듯 어영부영하다가는 어느 놈이 코 베어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낙오되고 금방 잊어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적당한 긴장은 정신건강에도 좋고 일을 시작할 때도 경미한 사고를 예방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한다. 매사에 임할 때 아무런 준비나 섣부른 예측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이완된 긴장을 조금은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자기 얼굴에 금칠한다. 스스로 위신을 세우고 남들이 그를 따라준다면 다행이지만 자신이 행한 결과물이 그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되거나 뒤에서 손가락질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남에게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조그만 공과를 침소봉대하여 떠벌리거나 남이 하는 것을 옆에서 조금 도움주고는 모두 자신이 한 것처럼 가로채는 것들은 하지 못함 보다 더한 결과를 가져온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걸 떠벌리고 광고하여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악수를 범하는 일임을 잠시 망각하거나 태생적으로 그것을 즐기는 성격을 타고났다면 좀 더 신중하고 냉철하게 사태를 분석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사돈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성정을 지녔는데 자기 잘났다 떠벌리는 모양새를 환영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봄이 타당한데, 간혹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여 동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속은 어떠할지 훤하게 보이지 않은가?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듯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입소문을 타고 퍼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개의 경우 당사자만 모르지 주변에 모든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공개된 비밀이란 속성이 “너만 알고 있어”로 시작된다. 듣고서 또 다른 사람에게 똑 같이 너만 알고 남한테는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받고 말하지만 그 또한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니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된다. 옛 성현이나 성인들이 다스리는 나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입소문의 힘 때문이다. 소리 없이 강하고, 소리 없이 멀리 퍼져 나가며, 돈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알려준다. 살아생전에 평가되는 것보다 사후에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史官(사관)을 임금들도 두려워한 이유이며 주위에 어떠한 영향도 배제하고 오직 사실만을 기록하는 정신이 투철하였기 때문이다.
생선 비린내를 감추려 아무리 포장해도 감추기 힘들고, 향기로운 향은 감추려 해도 멀리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사람의 인격이나 의로운 행위는 향기로운 향과 같아 멀리멀리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따르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늘 경계선에 서있는 처절한 심정으로 신중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진정 올바르고 의롭고 남을 위한 길인가를 판단하여 후회 없는 행보를 하여야 한다.
자원입니다.
皺(주름 추)는 芻(꼴 추)와 皮(가죽 피)의 합자. 芻는 勹勹(쌀 포)와 艸(풀 초)가 합한 자로 풀을 싸안고 가는 모양. 皮는 털가죽으로 한 곳으로 쏠리다. 따라서 주름이 지다.
癡呆(치매)
南道(남도)에 “망령타령”이란 민요가 있다. 늙어가면서 심해지는 할매의 망령드는 과정을 해학적으로 읊은 것이다. “우리 할매 쉰 고개, 하신 얘기 또 하시고/ 우리 할매 예순 고개, 손자 이름 바꿔 부른다./ 우리 할매 일흔 고개, 내일이 어제가 되고/ 우리 할매 여든 고개, 단지뚜껑 솥뚜껑 된다.”
망령 또는 노망이라 말하는 치매증은 건망증으로부터 시작된다. 부천 댁을 과천 댁이라 부른다던지 둘째 손자 놈을 셋째 손자 놈 이름으로 부른다든지 하는 것이 초보증상이다. 치매가 심해지면 과거와 미래의 시간과 공간이 혼동되어 내일이 어제가 된다. 보다 심해지면 솥뚜껑인지 단지뚜껑인지 具象(구상)의 가치전도현상이 일어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직업으로부터도 소외당하며 재산-성욕-지위-미래-희망으로부터 차례차례 소외당해 허허벌판에서 벌거벗긴 채 고독이란 외나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상태. 그 고독이 치매를 유발시키는 가장 큰 요인임은 상식화 돼있다.
나치스의 강제수용소에서 독일이 패망하여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이 살아졌을 때 그 순간에 집단치매증이 발생하고 있으며, 꼭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가족 중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직후에 치매증이 발작한 사례들이 정신의학자 프랭클에 의해 채집 보고되고 있다.
톨스토이는 만년에 가출을 일삼았는데 아내 소피아의 구박 때문이 아니라 치매증의 한 증상이라 하여 밖에 나갔다가 길을 못 찾는 망령을 “톨스토이 치매”라 함도 그 때문이다.
치매노인을 둔 문화적 대응도 다양하다. 여진족이나 피지 족처럼 부모가 망령이 들기 시작하면 보쌈을 하여 화살을 쏘거나 생매장하는 것을 효도로 생각하는 흐름이 있고, 아프리카의 반투족처럼 노인이 치매가 생기면 半神半人(반신반인)으로 여기고 신명을 중개하는 司祭(사제)로서 우러러 모시는 흐름도 있다. 우리나라는 高麗葬(고려장)처럼 시한적 생을 부여한 매장방식도 치매처리의 한 흐름이었다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노인을 고독에서 구제하는 이상적인 가족제도가 한국의 전통제도라고 갈파한 것은 마거릿 미드이다. 그 이상이 핵가족제도의 급진전으로 와해되고 치매문제는 무방비공포로 예비노인들을 떨게 하고 있는 것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치매가 그래서 타산지석이다.(이규태 코너 1994년)
絶命詞(절명사) - 金淨(김정) -
投絶國兮作孤魂(투절국혜작고혼) 외딴 섬에 던져져 고혼이 도는구나,
遺慈母兮隔天倫(유자모혜격천륜) 어머니를 두고 가니 천륜이 막혔네.
遺斯世兮殞余命(유사세혜운여명) 이 세상을 버리고 내 목숨 떨어지니
乘雲氣兮歷帝閽(승운기혜역제혼) 구름을 타고 천제의 성문을 지나며
從屈原兮高逍遙(종굴원혜고소요) 굴원을 따라 고상하게 소요나 하리
長夜冥兮何時朝(장야명혜하시조) 긴 밤 어두우니 어느 때 아침이 될까?
炯丹哀兮埋草萊(형단애혜매초래) 빛나던 붉은 마음 풀밭에 묻히었고
堂堂壯志兮中道摧(당당장지혜중도최) 당당한 장한 뜻 중도에 꺾이었네.
嗚呼千秋萬歲兮應我哀(오호천추만세혜응아애) 아아 천년만년 내 슬픔 알아 줄 이 있으리.
⋇ 殞(죽을 운), 閽(문지기 혼), 萊(명아주 래), 摧(꺾을 최)
11-32. 有麝自然香이어늘 何必當風立고
(유사자연향 하필당풍립)
사향(麝香)을 지녔으면 저절로 향기가 날 것이거늘, 어찌 반드시 바람을 맞이하여 설 것인가.
⋇ 麝(사향노루 사) : 사향. 사향노루의 불두덩의 중간에 있는 포피선(包皮腺)을 말린 것. 한약재나 향료(특히 옛 여인들이 몸에 지녀 품위를 나타냄)로 씀.
⋇ 何必(하필) : 어찌 반드시 ~할 것인가.
⋇ 當風立(당풍립) : 바람을 마주하여 섬. 바람받이에 섬.
(해설)
어디까지가 만족할 정도인지를 아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제할 줄 안다. 즉 自足(자족)을 알면 멈추어 설 자리를 알게 되고, 무리한 욕심이나 분에 넘치는 호사와 안일을 피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되도록 피하려 노력한다. 앞에 나사는 것 또한 극히 경계하고 과분한 칭찬이나 추켜세우는 명분을 즐기지도 않는다. 오직 현실에 타당성과 정당성만을 직시하며 너무 앞서지도 뒤떨어지지도 않는 중도를 표방한다. 囊中之錐(낭중지추)라 가만있어도 그의 가치는 때가 되면 빛을 발하며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할수록 그 진면목이 들어난다. 자신을 능력과 가치를 내세우는 P.R을 하지 않더라도.
명예와 세속의 명리에 물들어 자신을 과대 포장하고 권모술수와 얕은꾀를 동원해 일시적인 안일과 영달을 추구하기 보다는 보이는 모습 그대로 자신이 지닌 능력을 그대로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흐르며 만나 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입증된다. 그러나 조급증과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성급함이 빠른 시일 내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여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치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되고, 경험미숙으로 매끄럽지 못한 일처리와 앞뒤 분간 못하고 앞으로 돌진만 하는 무모함을 용기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성급하고 조급한 욕심은 자신을 망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과 이해관계로 엮인 주변인에게도 피해를 주게 된다. 아무리 급해도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거나, 밥도 물이 끓고 뜸이 충분히 들어야 하는데 중간에 다 되었다 뚜껑을 열면 설익은 밥이 되고 말듯이 모든 일은 그만한 시간과 절차를 거쳐야만 완성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생략하고 결과만 얻으려 덤벼든다면 백이면 백 모두 만족한 성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아무리 급해도 천리 길을 한 다름에 갈 수는 없고 아이도 하루아침에 청년이 되지 않듯 충분한 시간과 정성 그리고 노력이 합해져야만 목적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마음이 가는대로 행한다고 하는데 그도 사소한 욕심이나 절차를 무시하거나 지름길을 선택한다고 필요한 부분을 생략하는 어리석음을 배제한 순수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임하는 자세를 말한다. 공과 사의 철저한 구분이 어렵고, 선물이냐 뇌물이냐 경계선이 모호하지만 구분하게 되는 요인이 무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아무런 대가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 것이냐의 차이점으로 어떠한 행위를 평가하는 잣대 또한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객관적 기준에 따라 하였을 때 공정성이 확보된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고 불의가 판치더라도 어둠 속을 환히 비추는 한줄기 햇살처럼 모든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지조 있고 정의로운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이는 있다. 세상에 들어나지 않게 숨어살아도 아무도 없는 첩첩산중이나 무인도라면 몰라도 적어도 사람의 발길이 닫는 곳이라면 때가 되면 그 향기는 멀리멀리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인격이던 도덕성이건 하루아침에 완성되지는 않는다. 끝임 없는 정진과 자기성찰을 통한 각고의 노력과 확고한 의지로 지켜나갈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하게 되며 그 향기와 빛줄기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 어느 곳에 서 있더라도.
여우
요염하고 교태와 추파를 일삼는 호색적인 여인을 여우라 부른다. 여우 가운데서도 백여우가 더 여우요, 백여우보다 불여우가 한 수 위며 불여우보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가 狐中狐(호중호)다.
심청전에서 심봉사를 후리는 뺑덕어멈을 “늑대심보에 여우아양 떤다.”했다. 놀부는 흥부 마누라 얼굴을 연상 “스물 넷 씩이나 낳더니 고년 낯짝이 여우 낯짝이거든”하는 대목도 있다.
여우와 妖女(요녀)의 等式思考(등식사고)에서 가능한 묘사다. 영어로 여우같다(Foxy)하면 요염하며 호색적인 여인을 형용한다.
“出玄中記(출현중기)”란 중국문헌에 보면 여우가 쉰 살이 되면 여자로 둔갑하고 백 살이 되면 사내를 홀리는 미녀가 되며 천 살이 되면 전세와 현세를 오가는 天狐(천호)가 된다고 했다. 우리 옛 이야기에 遁甲美女型(둔갑미녀형)이란 유형이 있다. 미녀로 둔갑해 사나이를 꾀는 여우를 주제로 한다.
둔갑하는 것은 중국, 한국 여우뿐만 아니다. 유렵에서도 마녀나 악마들은 선량한 인간을 유혹할 필요가 있을 때 일단 여우로 변신해 있다가 다시 미녀로 둔갑한다. D. H. 로렌스의 작품에 “여우”라는 게 있는데 여우 한 마리가 미녀와 미남으로 둔갑하여 서로 사랑하는 두 주인공을 이간하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우리 전래 동화나 이솝우화나 퐁테뉴의 우화에서 나오는 여우는 예외 없이 속임수나 쓰고 교활하며 표변하고 꾀만 부리다가 제 꾀에 넘어가기도 하는 못된 짐승으로 나온다. 길가다 여우를 보면 사망난다 하여 죽음을 예언 받고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 온 것으로 백제의 亡兆(망조)를 점쳤듯이 보기만 해도 불길한 짐승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억울한 인식 속에서 여우는 멸종의 길로 가는 숙명을 지녔다 하겠다.(이규태 코너 1992년)
聞子規(문자규) - 端宗(단종) -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통한 새로 궁중을 나와
孤身集影碧山中(고신집영벽산중) 외로운 몸 홀로 된 그림자와 산중에 지내네.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밤마다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해마다 한이 다해도 한은 끝이 없네.
聲斷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새벽 봉우리엔 소쩍새 소리 끊어지고 남은 달빛만 흰데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피 흐르는 듯한 봄 골짜기에는 떨어지는 꽃이 붉네.
天聾尙未聞哀訴(천농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지 아직도 슬픈 환 듣지 못하고
何奈愁人耳獨聰(하내수인이독총) 어찌하여 수심 찬 나의 귀만 홀로 밝혀 놓았는가?
⋇ 寃(원통할 원), 岑(봉우리 잠), 聾(귀머거리 농)
11-33. 有福莫享盡하라 福盡身貧窮이오 有勢莫使盡하라 勢盡寃相逢이니라 福
(유복막향진 복진신빈궁 유세막사진 세진원상봉 복
兮常自惜하고 勢兮常自恭하라 人生驕與侈는 有始多無終이니라
혜상자석 세혜상자공 인생교여치 유시다무종)
복이 있다 다 누리지 마라. 복이 다하면 몸이 빈궁해지느니라. 권세가 있다 해도 다 부리지 말라. 권세가 다하면 원수와 서로 만나느니. 복이 있거든 항상 스스로 아끼고 권세가 있거든 항상 스스로 공손 하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교만과 사치는 처음은 있으나 흔히 끝은 없느니라.
⋇ 莫(저물 막. 말다. 없다) : 금지사(禁止辭)로서 “하지 말라”의 뜻.
⋇ 自惜(자. 아낄 석, 가엾을 석) : 스스로 아낌.
⋇ 驕與侈(교만할 교. 줄 여. 사치할 치) : 교만과 사치
⋇ 多無終(다무종) : 끝이 없는 일이 많음. 흔히 끝은 없음.
(해설)
무한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물질은 쓰다보면 언제인가는 끝이 들어날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화무십일홍에 권불십년이라 하지요. 짧은 청춘을 헛되게 보내지 말고 가치 있고 보람되게 보내라는 말도 있는데, 비전과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갖고 전력투구하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허송세월과 방탕한 생활로 몸을 망가트리는 청년기를 보내고 중장년이 되어 후회하는 이들도 많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살벌하고 삭막하기만 하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무언가 다시 시작하려 해도 막연한 두려움과 체력적인 부담 그리고 실패에 대한 공포가 발목을 잡는다.
세상사 모든 일은 상대적이기에 좋은 일이 있으면 반대로 불행을 겪는 이들이 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다”라는 말을 하지만 언제인가는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사다. 앞날을 위해 저축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베풀며 공동체로서의 질서와 예절을 지켜 밝고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고 그 속에서 함께 누리는 기쁨을 찾아야 한다. 내 것이라는 생각에 함부로 낭비하고 자유라며 남의 권리와 사회질서를 침범하는 개인주의는 혼란과 다툼 그리고 화합을 깨트리며 모든 이들이 피해를 보는 심각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요즘 많이 나타나는 생활에 필요하지만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설치하는 것을 절대 용납 못하는 님비현상도 어떻게 보면 집단 이기주의적 산물이 아닐까?
낮은 곳에 위치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몸부림치고, 가난하면 부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며, 남에게 존경받고 싶은 마음은 커다란 업적을 남기거나 많은 사람을 위한 헌신의 길을 모색하게 만든다. 권력이나 재물 그리고 명예는 달콤한 꿀과 같아서 한번 맛들이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기에 더 큰 것을 향해 무한한 욕망은 달리고 달린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나라의 멸망은 외적의 침입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내부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서로 상잔하는 소모전으로 힘이 약화가 되고 령이 서지 않고 민심이 이반하는데서 비롯됨이 더 큰 요인임을 알 수 있다. 높은 곳에 올라도 거만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부귀하여도 사치와 향락을 멀리하며 늘 겸손하고 검약하여야만 오래 지속되고 남들이 따른다.
시기와 질시 그리고 적대적인 상대를 만드는 것은 재물과 자리에 있기도 하지만 어떤 처신을 하는가에 따라 그 색깔을 달리한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밀림이 아닌 이성과 정의가 우선하는 인간에게는 대화를 통한 타협과 서로를 존중하는 예의가 존재한다. 때론 무의미한 최악의 상황도 연출되지만 최소한의 법칙과 넘어서는 안 되는 도덕률은 지켜진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힘의 논리도 때론 필요하지만 이성과 감성에 호소가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원칙이 지켜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도 자신의 마지막 보루인 양심까지 배반하는 사례는 극히 일부분이며 그를 넘어서 성공하더라도 평생의 짐으로 끊임없는 괴로움에 자괴하는 고통을 당한다.
한번 교만과 사치 향락에 빠지면 뒤돌아서기가 힘들다. 더 큰 자극과 욕망의 충족을 위해 하여서는 안 될 禁域(금역)까지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마약의 중독성 보다 더 강한 유혹으로 인성을 마비시키는 최악의 상태로 까지 진전하는바 그 끝을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그저 달리고 달리니 그 결말은 불을 보듯 하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잘못된 점을 고치고 잘된 점은 더 활성화하는 겸손하고 검약하는 생활습관을 가져야 한다.
자원입니다.
冤(원한 원)은 토끼(兎)를 덮치니(冖) 도망갈 수 없어 점점 움추러 든다. 억울하다. 옴짝달싹 못하고 죄를 뒤집어쓰다.
恭(공손할 공)은 제물을 바치는(共) 마음(㣺)은 삼가서 공손한 것. 共은 두 손(廾 : 들 공)에 음식 그릇을 잡고 조상의 신전에 공손(恭)하게 바치는(供) 모양으로 씨족의 자손이 다 함께 참석하는 제사.
驕(교만할 교)는 말(馬) 위에 높이(喬) 올라타고 우쭐대다. 喬는 처마 끝이 날렵하게(夭) 위로 들린(휜) 이층지붕의 높은(高) 건물을 그린 자. 夭는 몸을 빼서(丿 : 삐칠 별) 날렵하게 달려가는 사람(大).
投書小史(투서소사)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한양에 謗木橋(방목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했다. 바로 그 다릿목에 誹謗木(비방목)을 세워두었기에 얻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비방목이란 임금이나 조정의 曲直(곡직)과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民怨(민원)을 적어 상달하는 投書板(투서판)이다.
북경의 天安門(천안문) 앞이나 주요 관아 앞마다 서있게 마련인 華柱(화주)라는 돌기둥도 周(주)나라 때 제도화돼 있었던 비방목의 흔적인 것이다. 좋은 제도이기는 하나 이미 한나라 때부터 투서내용에 비방 모략 모함이 너무 많아 이를 폐지하고 돌기둥만 남겨 민의상달의 정치적 상징물로 삼아내린 것이다.
당나라 때의 투서제도인 軌函(궤함)도 같은 운명을 걷고 있다. 한 건물의 네 구석에 四方色(사방색)에 따라 붉고, 푸르고, 검고, 흰 궤함을 놓아두고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은 서쪽의 푸른 궤함에, 정사의 잘잘못을 비판하는 諫言(간언)은 남쪽의 붉은 궤함에, 부정부패와 악정을 고발하는 글은 북쪽에 있는 검은 궤함에 투서토록 한 것이다. 한데 억울하게 당하는 봉변을 “軌函之禍(궤함지화)”라 일컬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당나라의 투서제도도 폐해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申聞鼓(신문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용되기보다 악용이 더 많아지자 四件事(사건사)라 하여 父子(부자) 嫡妾(적첩) 良賤(양천) 濫刑(남형)에 관한 일로만 신문고를 칠 수 있게 제한했지만 그래도 모함이 끼어들어 폐지되고 말았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전통투서관행으로 “缿筒法(항통법)”이라는 게 있었다. 항통이란 벙어리 통처럼 오지그릇이나 대나무 통으로 만든 병모양의 그릇으로, 비벼 꼰 종이 요지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 하나가 나 있을 뿐이다. 이 항통을 날을 정해 이 마을 저 마을로 돌려 투서를 받는다. 이렇게 해서 채운 요지통을 현감에게 바쳐 민정을 살피게 하는 제도이다. 운용을 잘하면 좋은 제도이긴 하나 갈고리로 남의 속을 긁고 음해 밀고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으니 군자가 할 짓은 못된다고 정다산(정약용)은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적 상황이나 정신적 정서적 토양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투서는 발붙일 수가 없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고발 밀고가 성행하는 나라에 사느니 차라리 도둑이 성하며 가렴주구를 감내하고 사는 편이 났다고 한 것은 墨子(묵자)다. 아무리 타락하고 瀕死(빈사)지경에 처했더라도 등 뒤에서 총을 쏜 西部(서부)사나이를 본 적이 있던가.
司正(사정)의 계절을 맞아 무척들 음해하는 투서가 난무했던가 보다. 오죽해야 무기명 투서를 무효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문채취로 추적한다 했으니. 고질적인 한국병 치유 차원에서 그러하다(이규태 코너 1993년) ※ 軌(길 궤), 缿(투서함 항), 筒(대롱 통), 瀕(물가 빈).
絶句(절구) - 杜甫(두보) -
遲日江山麗(지일강산려) 긴 해에 강과 산들이 빛나니
春風花草香(춘풍화초향) 봄바람에 꽃과 풀들이 향기롭다
泥融飛燕子(이융비연자) 흙이 녹으니 제비가 날고
沙暖睡鴛鴦(사난수원앙) 모래가 따뜻하니 원앙새가 졸고 있구나
※ 泥(진흙 이), 融(화할 융), 鴛(원앙새 원), 鴦(원앙새 앙).
11-34. 王參政四留銘에 曰 留有餘不盡之巧하여 以還造物하고 留有餘不盡之祿
(왕참정사류명 왈 유유여부진지교 이환조물 유유여부진지록
하여 以還朝廷하고 留有餘不盡之財하여 以還百姓하고 留有餘不盡之福하여 以
이환조정 유유여부진지재 이환백성 유유여부진지복 이
還子孫이니라
환자손)
왕참정 사류명에 이르길 “여유가 있고 다 쓰지 아니한 재주는 남겨두었다가 조물주에게 돌려주고, 여유가 있고 다 쓰지 아니한 녹을 남겨두었다가 조정에 돌려주고, 여유가 있고 다 쓰지 아니한 재물은 남겨두었다가 백성에게 돌려주고, 여유가 있고 다 누리지 아니한 복을 남겨두었다가 자손에게 돌려줄지니라.”고 하였다.
⋇ 王參政(왕참정) : 이름은 단(旦), 자는 자명(子明), 시호는 문정(文正). 중국 북송(北宋) 진종(眞宗) 때의 정치가.
⋇ 四留銘(사류명) : “네 가지 남겨두고 싶은 말”
⋇ 造物(조물) : 조물주.
(해설)
천재는 단명 한다는 속설이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똑 같은 에너지를 부여받고 태어나는데, 일반인이 70 평생을 통하여 쓰는 에너지를 천재는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소모시키기에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의 고갈로 인하여 요절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십대까지는 천재성을 발휘하다가 이십대를 넘어서면서 평범한 凡人(범인)으로 돌아가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어느 한 분야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이는 영재들은 잘못하면 오히려 지진아나 문제아로 낙인찍힐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전 분야에 고른 성적을 올려야 하는 교육시스템에서 한 분야에만 탁월한 재능은 발붙이기가 어렵고, 너무 앞서가기에 질문이나 하는 행동이 벗어나기에 잘못하면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고, 또래들에게는 이해를 못하거나 엉뚱한 짓거리로 매도당하여 소위 왕따 당하기 일 순위가 되는 사태로 진전될 가능성이 높다.
흔히 말하길 아무리 많은 재산과 명예와 권세를 죽을 때 싸가지고 가지는 못하는 것이니 살아생전에 원 없이 다 쓰고 즐기고 나누고 가라한다. 그러나 몸에 익숙해진 습관은 그를 행하는데 어색함과 당혹감 그리고 거부감을 심하게 들어낸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위나 음식 그리고 옷들이 옭아매어 거북하며 뱃속을 휘젓고 남들이 자신만 주시하는 것 같아 당황하게 되니 매사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행동이나 말이나 모든 것이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거북살스러워 한 시가 여삼추 같은 고문의 시간이 된다. 그래서 누에는 뽕을 먹고 살고 송충이는 소나무를 먹어야 산다는 말이 나왔다. 식생활이 바뀌거나 주거환경이 바뀌거나 입는 옷이 바뀌면 그 여파는 몸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육체적인 적응에 시간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압박하여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병과 성인병 등을 유발하여 수명을 단축시키는 요인이 된다.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유독 강한 우리나라는 사회공동체도 한 마을에 국한되는 습성을 보인다. 공동주택의 건립과 공업단지와 댐 건설 그리고 고속도로 등 개발에 따른 고향의 실종과 도시 인구집중으로 많이 희석되었지만 자손에 대한 애정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자식에게 자신의 일을 넘겨주기 보다는 좀 더 발전되고 안정된 직업과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보니 자신이 번 재산에 대한 사회기부보다는 자식에게 상속하는가 하면 높은 교육열과 혼수 등에 많은 돈을 투자하다 보니 정작 자신들의 노후생활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여 노년을 불우하고 외롭고 힘들게 영위한다. 또 한 예로 자식들이 부모가 나이가 들어 부양하기 힘들어지자 여행을 핑계로 외지 공항에 유기하고 도망쳐 버리는데 부모는 자식의 주소와 전화번호 등을 알면서도 자식에게 누가 될까봐 끝까지 숨기고 발설하지 않는다.
쓰고 남은 것은 남겼다 원래대로 돌려보낸다 하였는데 물질적인 면을 강조하는 바가 높지만 정신적인 면도 지나치지 않는 점이 요구되기도 한다. 재주와 복은 계량화시킬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이며, 祿(녹)과 재물은 물질로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과 영화를 맛보기는 어렵다. 평탄하지만은 아니한 것이 일생이요 오죽하면 波瀾萬丈(파란만장)하다 표현할까?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누군가 도와주며 이끌어주거나 밀어주는 사람 그리고 함께 뛰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힘들지 않았을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라 내가 성공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누림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였으니 그 대가로 나누고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자원입니다.
祿(복 록)은 신(示)에게서 떨어진 부스러기(彔 : 새길 록)로 복. 위에서 받는 도움이므로 관리가 위로부터 받는 녹봉.
기러기 아빠
도도(DoDo)라는 새가 있다. 印度海(인도해) 외딴 섬에 살았던 七面鳥科(칠면조과)의 새로 지금은 멸종되고 없는 새다. 17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이 사냥개를 몰고 이 섬에 상륙했을 때 이 도도 새는 도망칠 생각도 않고 무방비로 있었기에 남획되어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외딴 섬이기에 해칠 짐승이나 천적이 없었고 그러기에 천성이 무방비요 비무장의 평화로운 새였던 데서 당한 비극인 것이다. 도도 새가 전멸되자 그 섬의 주된 植生(식생)인 칼바리아 라는 나무도 따라 멸절되고 말았다. 이 나무 열매를 먹은 도도 새의 糞(분) 속에서만 싹이 돋게끔 相生(상생)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명이라는 이름의 흉기가 어느 한 생물을 멸종시킴으로써 상생관계에 있는 생태계를 연쇄 파괴하는 것을 “도도현상”이라고 한다.
자유를 선망할 때 사람들은 새처럼 날고 싶다고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새가 되고 보면 실망하고 마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영국의 조류학자 하워드는 새들은 각기 제 나름의 행동반경을 지니고 그 속에서만 텃세를 부리고 산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국에 흔한 “로빈”이라는 새의 텃세 공간은 겨우 반경 300미터가 상식이라 했다. 그 안에서 평생 살다가 죽어간다.
철새도 반경 100미터 안팎의 통로가 정해져 있어 그 코스에 구속 받으며 나는 것이지 자유분방한 것은 아니다. 어떤 철새는 야간의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정하고 어떤 철새는 체내의 磁氣(자기)와 지구의 자기와의 교감으로 방향을 잡고 또 대열을 지어 날 때 상하전후의 위치도 그 자기의 교감으로 잡아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무변광대하다는 하늘이지만 그 정해진 한계를 벗어나면 일탈해 죽는 무자비한 텃세공간이요 통로공간인 것이다.
수질오염, 공기오염, 그리고 생태계 파괴로 지구상의 鳥類(조류)가 연간 80종 내외씩 멸절하는 “도도현상”은 알려진 사실이다. 한데 世界自然資源保全戰略(세계자연자원보존전략 : WCS)의 최근 백서를 보면 이 오염물질이 새들의 텃세감각이나 방향 및 이동감각을 마비시켜 迷鳥(미조)를 양산하고 있다 하고 어느 한 표본지역에서만 3백23종의 미조가 발생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강남 못가고 월동하는 제비가 늘고 있음도 그 현상일 것이다. 이제 길 잃은 철새는 유행가 속의 감상만은 아니다.
캐나다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철새 기러기 18마리에 떼 지어 나는 훈련을 시킨 다음 엔진을 단 행글라이더로 따스한 남쪽나라로 이동시켜준 사나이가 있었다. 감동적인 기러기 아빠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까지 야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철새의 하이웨이인 우리나라인지라 迷鳥保護所(미조보호소)라도 만들어 길 잃은 철새들의 신고를 받고 이를 보호해 자연으로 돌려주는 환경운동이 기대되는 이유이다.(이규태 코너 1993년)
夜雪(야설) - 白樂天(백낙천) -
已訝衾枕冷(이아금침냉) 벌써 침낭의 차가움을 느낄 수 있다
復見窓戶明(부견창호명) 또 다시 창문이 밝아 옴을 보니
夜深知雪重(야심지설중) 밤이 깊고 눈이 많이 온 것을 알 수 있다
時聞折竹聲(시문절죽성) 때때로 대나무 부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 訝(맞을 아), 衾(이불 금), 枕(베개 침).
11-35. 黃金千兩이 未爲貴로 得人一語가 勝千金이니라
(황금천량 미위귀 득인일어 승천금)
황금 천량이 귀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좋은 말 한 마디 듣는 것이 천금보다 났다.
⋇ 未爲貴(미위귀) : 귀한 것이 되지 못함.
⋇ 勝(이길 승. 낫다. 뛰어나다) : ~보다 나음. ~보다 좋음.
(해설)
재산과 금은보화를 아무리 많이 쌓아 놓은들 무엇 하나? 파도에 부서지는 물거품 같고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와 같은 것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마는 존재인 걸. 진정의 가치는 재물이 아닌 인격과 배움으로 깨달음을 얻어 여러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존경과 우러름을 받게 된다. 깨달음은 어느 한 순간에 오기도 하고 평생을 두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진일보하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몸부림치고 끊임없이 탐구하고 질문하는 열정이 아름답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전진 하는 구도자의 숭고한 의지와 열망이 고되고 힘들며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朝聞道 夕死 可矣(조문도 석사 가의) 공자님의 말씀이다. 말 그대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얼마나 절박하고 순수하게 구도하는 절대적인 정신을 함축하고 있지 아니한가? 절대 선을 추구하고 그를 행동으로 실천하며 한시라도 벗어나지 않고 늘 정진하는 진지하고 탐구적인 자세는 일상에서 저지를 수 있는 조그만 실수와 바늘귀 같은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정말로 치열하고 죽음조차 불사하는 한 가지만 추구하는 곧은 마음과 기원 그리고 실천하는 행동 3박자가 맞아 떨어질 때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겠지만 얻고자 하는 경지나 깨달음은 평생을 두고 하여도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어느 한 순간에 섬광처럼 올 수도 있다. 미래는 준비된 자의 것이다 말하듯이 깨달음이나 大悟覺醒(대오각성)도 그것을 얻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받아 드릴 준비가 된 자만이 잡을 수 있다.
황금이나 보석 같은 재물은 손에 꼭 쥐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라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제인가는 내 손을 떠나게 되거나 닳아 없어지거나 깨지거나 하는 과정을 거쳐 그 값어치가 떨어지고 존재 자체도 사라지는 비운도 맞게 된다. 탈무드에서 가르치는 진리가 고기를 먹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보다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라 하듯이 누군가에게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우려가 있는 재물을 얻는 법보다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에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말 한 마디가 황금보다 더 귀할 수밖에 없다. 허나 당장 눈에 확 들어오는 욕심과 시간이 걸려야 제 가치를 인정받는 지식과 비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금방 효과와 이익이 들어나는 황금을 택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보다는 현재의 확실한 보장이 더 눈에 들어오고 실속이 있다 판단하기 때문에.
불교에서 나오는 구도의 길을 이야기 할 때 나오는 것으로 “수행을 하고 있는 승려의 귀에 들려오는 법문 한 구절에 번쩍이며 깨달음에 한발 접근하였다. 그러나 그 뒤 구절이 이어지지 않자 두리번거리니 흉측한 나찰이 몸을 자신에게 주면 나머지 구절을 들려주겠다고 하자, 한 마디 구절을 듣기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순간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는” 한마디의 위대함과 무게감을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노래방 심리학
대원군 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뉘 프랑스 主敎(주교)는 조선신도들의 신앙 성격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 민중의 성격은 매우 단순하여 깊이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설법을 하면 설법이 다 끝나기 전에 쉬 감동하여 입신하고, 聖敎(성교)의 진리를 설명하면 알아듣지도 못하며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기도문이나 찬송가를 읊는 것만으로 종교적 만족감을 얻으려 하며 그러고서 어떤 희생도 무릅쓰고 태연스레 순교에 임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교리나 진리 이전에 종교적 恍惚(황홀)에 젖으려는 심성과 원망이 별나게 강하다는 사례는 그 밖에도 비일비재하다. 불교이론에 투철했던 元曉大師(원효대사)가 교리를 초월하여 염불에 열중함으로써 종교적 경지에 젖도록 하는 염불불교를 펼치고 자신도 목탁 치며 托鉢(탁발)행각을 했던 이유도 우리 한국인의 신앙을 둔 심성을 잘 파악했기 때문인 것이다. ※ 恍(황홀할 황), 惚(황홀할 홀), 托(밀 탁), 鉢(바리때 발).
한국 토속종교인 巫俗(무속)이 배척받고 구박받고 찢기고 발길질 기백 년을 거듭해 왔으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유도 바로 무당굿을 媒體(매체)로 하여 종교적 황홀경을 도출한 것이 한국인의 심성에 부합하고, 부합했기에 역경을 이기고 살아남은 것 일게다.
한국무속의 뿌리인 샤머니즘이 추구하는 황홀경-곧 엑스터시의 경지에 이르는 수단으로 주문을 되풀이 외우기도 하지만 가장 간편하고 보편적인 수법은 춤과 노래다. 금속성 타악기에 격앙되어 소리 지르고 읊어대며 춤추고 도약함으로써 황홀경에 이르게 된다.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열병처럼 번지는 노래방을 들 수가 있다.
노래방이란 들어주거나 보아주는 사람 없는 폐쇄공간에서 저 혼자서 실컷 읊어대는 자기도취공간이다. 상대적 外向的(외향적)작동이 없는 독자적 內向的(내향적) 몸부림이 보장된 공간이다. 그 몸부림이 무의식중에 갈망하는 것이 바로 그 황홀경인 것이다. 그 황홀경에 젖으면 父權(부권)에 억눌리고 官權(관권)-兩班(양반)-祖上(조상)에 억눌리며 가진 자-아는 자에 시달려 누적되고 팽배돼 있는 恨(한)과 怨(원)이 마비가 되고 중화가 된다. 우리 옛 부녀자들이 혼자 또는 더불어 부르는 민요가 별나게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노래방은 바로 혼자 추구하는 현대판 황홀경인 것이다.
1992년 2월 말에 5백60곳에 불과했던 노래방이 4월말에 2천56군데로 늘고 6월 중순에는 6천여 곳으로 급팽창했다는 것은 한국인의 원시적 심성과 오늘날의 정치-경제-사회-교육-가정-대인관계에서 억눌렸던 불만이 야합했음이요, 그 크기를 대변해 주는 指標(지표)가 되는 노래방이다.(이규태 코너 1992년)
憫農(민농) - 李紳(이신) -
鋤禾日當午(서화일당오) 김매다 해가 정오에 이르니
汗滴田中土(한적전중토) 땀방울이 밭 가운데 떨어지는구나
誰知盤中飱(수지반중손) 누가 소반위에 밥이
粒粒皆辛苦(입입개신고) 낱낱이 모두 신고인 줄 알리오.
※ 憫(민망할 민), 紳(큰 띠 신), 鋤(호미 서), 汗(땀 한), 飱(밥 손).
자료-http://cafe.daum.net/sungho52
박광순선생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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