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 예배후 마눌은 내 대신 결혼식장가고
나는 오늘만은 길흉사에서 벗어나 곧바로 등산복 갈아 입고 혼자 대운산을 올랐습니다
큰골로해서 대운산을 오르는대 무리 무리 칭구들이 내려오는걸 만났습니다
모두가 의아한듯 "혼자가 ?" 물어 왔습니다
얼른 갔다가 빨리 내려와서 만주벌판으로 오느라고 했습니다
가을이 한방중인 오늘 오후만은 철저하게 나혼자이고 싶어 계속 산을 오르니
대운산 정상과 약수터가는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혼자 산행하는것도 오늘처럼 칭구나 지인들의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때로는 성가시구나
우리 돌아가신 할매가 살아 계셨다면
어디 배꺼줄대가 없어 대운산 정상까지 오르느냐고 야단하셨겠지요
할머니 시절엔 배가 꺼진다고 웃음도 제되로 못웃고 참았다는대 ...
배꺼줄라고 산을 오르는 무수한 사람들이 참 신기할겁니다
할머니 시절엔 지게지고 나무하러 대운산 오르는 사람 뿐이였지
배꺼줄라고 오르는 사람은 미친사람 취급을 받았을겁니다
가치관이 시대를 다라 이렇게 변하나 봅니다
내가 혼자 오르는것도
어느 시대가 오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낙옆이 소복히 융단을 깔아놓은 길을 걸어 대운산을 올랐습니다
대운산은 일명 불광산이라고도합니다
지게라도 지고 대운산을 올라서 나무를 해가야 했던 시절
그때가 그립습니다
부뚜막에 가마솥 걸어 놓고 갈비때어 밥해먹고
기명물 덮혔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단풍 사이로 보이는 구름 한점 없이 높고 청명한 하늘
한참을 낙엽위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 보았습니다
같이 나란히 팔벼개하고 누워 하늘을 같이 보고 싶은 여인이 생각났습니다
좋은 경치를 보면 언제나 그녀가 생각납니다 ^^*
맨앞이 우불산이고 그뒤가 정족산 입니다
우불산은 신라때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이라고
하늘에 신라임금이 직접 제사를 올렸던 명산중에 명산입니다
우불산에 이성계가 기도해서 이씨 조선을 건설했다는 기도처가 우불당 뒤에 아직도 있습니다
그래서 경상감사도 함부로 말을 타고 지나치지 못했답니다
아무리 높은지위에 있는 사람도 하마해서 걸어서 지나 갔다네요
정족산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언양 가지산이지요
대운산에서 내려다본 웅촌 입니다
웅촌의 진산 우남산과 그뒤에 남안산과 문수산(청량산)이 보이고
맨 뒤에 치술령이 희미하게 보이네요
영산대학교와 소주공장이 보이네요
우리 고장에 영산대학이 생겼다는건 웅상 웅촌의 축복입니다
11월 16일 저녁 7시에 산학관에서
국내 최고의 성악가들 발표회가 있답니다
누구나 다 감상할수가 있으니
불광산 정상입니다
저골짜기가 내려가면 광천골이 되지요
내광리 외강리 중광리 삼광리등등 ...
백일봉과 고장산 사이로 울산시가지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죽전에서 주남 넘어가는 길위에 음택지가 바로 울 고조부 집터지요
그위에 빼꼼하게 보이는 음택지가 부모님 누워 계시는곳입니다
臥地의 배꼽부분같아보이네요
저산 청룡이 닿는곳이 와지라는 동네랍니다
용이 죽전못에 입을 담그고 편안히 누워있는 지세라고나 할까요
울산 골프장과 검단리 웅촌이 보이네요
검단리에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집터인 환호형 움막터가 발굴되었습니다
우시산국의 서울이라고도 하지요
그 옛날에는 저곳까지 바다였다네요
고연공단과 고연리가 보입니다
산을 깍아놓은곳이 웅촌면 은현리 전원주택단지 조성지
왼쪽편에 산속에 파란지붕이 보이는곳이 운흥동천 운흥사랍니다
고연못과 고연들판 !!!!!!!!!!!!!!!!!!!!!!!
잊을수 없는 첫 사랑이 연꽃처럼 우아하고 향기롭게
고결하고 숭고하게 잠든
언양의 진산이자 영남알프스중 하나인 고헌산입니다
시루산이라고도 하지요 솥 산이라는 말인대
솥이 있으면 발이 있어야하는법
솥발산과 일직선상에 놓고 보면
과연 고헌산이 솥이고 솥발산이 솥발이구나 느껴집니다
그러면 솥뚜껑산도 있어야 겠지요 ?
2주전 시월의 마지막주 일요일은 저 곳 정상에서
문수산과 남안산이 보입니다
남안산은 옥녀 헌화형이지요
옥녀가 꽃을 들고 문수산 문수보살님에게 받치는 형국이랍니다
마의태자 동생 김범공이 남안산 성불암에서 성불이 되었다지요
시명골 뒷산입니다
장山國 건국설화
아득한 옛날부터 고씨들이 장산기슭에 있는 장자벌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고선욱(高仙玉)은 홀어머니와 함께 토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소나기비가 그치자 먼하늘에서 선인이 영롱한 칠색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이곳 마을에 하강하였다. 선인은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분향기에 이끌려 고선옥의 토막집을 찾았다. 선인은 고선옥에게 냉수를 청하자 물그릇에 냉수를 청하여 물그릇에 물을 떠서 주면서 얼굴을 돌려 외면하였다. 선인은 물그릇을 거울삼아 외면한 처녀의 얼굴에 비춰 보았다. 선인은 선녀보다 아름답고 옥처럼 빛나는 고선옥의 모습에 매혹되었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잔치를 베풀었다. 세월이 흐럴 이들 사이에는 아딜 열명과 딸 열명이 출생하여 장성하여서는 모두 20곳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제마다 안씨 정씨 박씨 이씨 김씨 최씨로 창성하여 그 마을을 다스렸다.
선인은 마을에 토성을 쌓아 그 씨족들을 다스리는 대족장이 되었다. 선인은 회혼때(결혼 60년)가 되자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등천하였다. 그때부터 고선옥은 고씨족을 다스리는 고씨할매가 되었다. 고씨할매는 날마다 아들 딸을 순산하였던 제왕반에 제단을 차려 놓고 옥황상제께 선인의 하강을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외거리 절에 가서 불공도 드렸다. 또 산정에 있는 큰 뷔위(영감 할매 바위)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며 선인의 하강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고씨할매는 그 바위 밑에서 선인을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가셨다. 20곳 마을에 살던 아들 딸들은 고씨할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 씨족들을 이끌고 와서 바위를 다듬어 상여를 만들고(상여바위)정상에 큰 묘를 만들어 안장하였다.
지금도 그 제왕반 바위, 상여바위, 영감할매 바위가 있고 그 묘가 있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고씨할매의 넋을 고을의 질병을 막아 주고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모시고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마을의 후손들은 마을 뒷산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정월 보름날에 고당 할머니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 제사는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신망있는 부부를 택해서 제관으로 선택하고 제관은 궂은 일을 보지 않고 당일에는 찬물에 목욕을 하고 제수물은 흥정하지 말고 값대로 치러 마련토록 하였다.
제관은 마을에 살고 있는 각 성씨 이름을 봉송하면서 동태민안을 기원하고 재앙과 질병이 없도록 시주종이를 불살라 비는 풍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은 들에서 식사를 할 때는 반드시 첫숟가락에 밥을 떠서 "고시례"(高氏禮)라고 고씨할매에게 예를 올렸다. 그래야만 식후에 탈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아들이 없는 부인이 제왕반에 가서 촛불켜고 기도한 후 외가리절에 가서 공을 드리면 옥동자를 낳고, 영감할매 바위에 가서 공을 드리면 부부의 정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서 선인이 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장산 넘어 먼 하늘가에서 무술과 지혜가 뛰어난 남자가 왔다는 것을 신격화 하였고 고씨 할매와 그 딸 고선옥은 원시 사회의 제사를 맡은 제관할매와 신딸로서 큰딸(크슬아기=구술아기)의 뜻을 전하고 제왕바위는 신당의 뜻이고, 10남 10녀가 이웃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는 것은 그 선인은 대추장(큰촌장)이 되어 그 씨족들로 하여금 20개 마을을 다스리게하여 씨족공동사회를 형성하였다는 뜻이고 외가리 절은 그당시 이미 금관가야국과 친교하여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다는 뜻이고, 상여바위와 고씨묘는 왕비의 석곽묘를 뜻하고 영감할매 바위는 선인과 고선옥을 수호신으로 숭배하였다는 뜻이고, 고씨례는 고수례의 풍습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전설은 장산국( 山國)의 건국신화로 생각된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동래의 동쪽 십리지점에 장산국의 옛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장산기슭에 있는 재송동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장산국이라는 작은 나라 이름은 이곳에 있는 장산이라는 산 이름과 같고 이산을 상살미, 자류미라는 속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속명은 큰산, 높은산, 동쪽산의 뜻의 옛말로 해석된다.
장산국은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조에서 "옛장산국은 일명 내산국(來山國)으로, 대군을 일으켰는데, 삼십명으로 가야국을 쳤다. 그리고 신라는 이를 쳐서 거칠산군(居柒山國)을 두었다."라고 적혀 있고, 동국사를 살펴보면 신라 4대 탈해왕 23년에 이웃 국경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있어 신라왕은 이 두나라가 걱정이 되어 거도장군을 변관으로 삼아 항상 장토야(기장)에서 말을 모아 달리게 하여 말타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하여 두나라가 여기에 대비가 없도록 해놓고 거도장군이 습격하여 거칠산국을 멸망시켰다. 거칠산국은 아마 장산군의 일명 일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장산국(래산국)은 거칠산국(居柒山國)의 일명으로 보고 있고 거칠산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망미동에 있는 황령산의 옛이름은 거칠뫼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우시산국의 성지 대운산
대운산은 울산시 울주군 온양면 운화리(雲化里)에서 양산시 웅상읍 명곡(椧谷)리 와 삼호리(三湖里)에 걸쳐 있는 높이 742m의 산이다. 이 산은 초명은 여지승람이나 오래된 읍지(邑誌)에는 불광산(佛光山)으로 되어 있었으나 언제인가 대운산(大雲山)으로 변하였다. 불광산 이라고 하는 산 이름에 관한 그 유래를 깊이 고찰할 때 글자가 가지고 있는 뜻 그대로 부처님과 관련 지어서 붙여진 이름인가 하는 의문의 여지를 갖게 한다. 이 불광산의 이름을 규명하는데는 먼저 온양면이 가지고 있는 연혁부터 고찰하여 볼 필요가 있다.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땅에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의 두 나라가 있었는데 신라의 석탈해왕 때에 거도(居道)라는 사람이 마숙(馬叔)의 전법을 써서 두 나라를 정복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정복하였다는 거칠산국은 동래(東萊)이며 우시산국은 그 치소(治所)를 웅촌면 검단리(檢丹里)에 둔것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그러나 온양면이 옛부터 가지고 있는 그 면의 연혁에 의하면 우시산국의 치소를 불광산의 대운산 성지(城地)로 보고 그 대운산성을 우시산국의 왕도(王都) 터라 하고 있다. 그래서 대운산성을 부족국가 시대의 성터로 보고 있으며 대운산에는 큰 고분과 많은 고분군도 있음을 볼 수 있고 또 삼광리(三光里)에도 수많은 고분군이 있어 여기에서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었다.
이러한 온양면의 역사를 배경하여 고찰할 때 불광산(佛光山)이란 불(佛)은 부처를 뜻하는 것보다는 성읍(城邑)이나 도시를 뜻하는 `불'로서 벌(伐) 불(弗) 불(火) 부리(夫里) 비리(卑離)와 같은 것에 대한 음차(音借)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광산의 가진 그 뜻은 `밝은 성읍터 산'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라초기에 서생(西生) 지방에 생서량군(生西良郡)이 있어 웅촌(熊村) 웅상(熊上) 지방인 우화현(于火縣)을 영현(領縣)으로 삼고 있었다. 이 우화현에는 신라가 소사(小祀)로 받들던 우불산이란 영남 4대 명산 중의 한 산이 있다. 그런데 이 우불산(于弗山) 을 문헌비고(文獻備考)가 우불산(于弗山)이라 하여 역시 부처 불(佛)자를 쓴 것을 본다면 불(佛)은「불」에 대한 음차(音借)로 써 왔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우시산국의 왕도터 였다는 긍지에서 불렸던 것이 불광산(佛光山)이었건마는 어느새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의식이 사라지고 한식(漢式)에 의한 대운산으로 변하고 말았다. 대운산의 운(雲)도 높고 큰 산에 많이 붙게 되는 것으로 이것도「??????」 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대운산이란 이름도 불광산(佛光山)과 마찬가지로 광명한 산이란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 울산지명사 『울산문화원 출판』에서 옮김
아홉공주가 쌓은 왕능
장안읍 기룡리 하근마을 기룡천 건너편의 송림속에 옛날 왕릉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왕능을 아홉공주능이라고 전하고 있다. 옛날에는 큰고을마다 왕이 있었다.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에 우시산국이라는 작은 왕국이 있었는데 신라국에 정복되어 왕과 왕자는 포로가 되고 왕비는 아홉공주를 데리고 산속으로 산속으로 피난을 하였다. 산속을 헤매다가 이곳에 당도하였다. 그들은 신분을 숨기고, 평민으로 가장하여 농사꾼으로 품팔이를 하면서 겨우 보리죽으로 연명을 하고 있었다. 신라의 병사들은 이곳까지 와서 왕비와 공주들을 찾고 있었다. 이곳도 거칠산국이라는 작은 왕국이었지만 역시 신라국에 정복되었기 때문에 왕비와 공주들을 알아보고 보호하여 줄곳은 못되었던 것이다. 왕비와 공주들은 넝마옷을 입고 농사꾼 노릇도 하였지만 먹을 것이 없어 걸식도 하면서 움막집에서 살았다. 너무 가난하여 아홉공주는 입을 옷이 없어 옷한벌로 나들이 할 때마다 번갈아 입었다.포로가 되어 끌려간 왕과 왕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생사를 알고싶어 날마다 화철령 고개너머 그 북쪽을 살피면서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왕비는 근심과 걱정이 쌓이고, 몸에 익지 못한 농사일에 끝내 병을 얻어 숨을 걷우었다. 아홉공주들은 어머니의 임종을 하면서 슬피울 뿐 어쩔줄을 몰랐다. 아홉공주들은 정신을 차려 어머니의 시신을 마당에 묻었다. 그리고는 이웃마을에 제각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해마다 철쭉꽃이 붉게 필 부렵의 달밝은 보름날이면 아홉공주가 이곳에서 만났다. 공주들은 왕비였던 어머니의 무덤을 왕릉답게 큰 봉릉으로 만들려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봉분을 쌓았다. 그리고 나서 각자가 장만하여온 화전과 음식을 차려놓고 , 제문을 지어 어머니의 넋을 위로 하였다. 해마다 이처럼 치마폭에 담은 흙으로 쌓은 봉분은 세월이 갈수록 큰 봉분이 되어 왕릉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홉공주의 변함없는 효심과 자매간의 깊은 우애가 알려져 아홉공주가 살고 있던 아홉마을의 부녀들도 그날이 되면 모두 이곳 무덤에 모여 아홉공주의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며 축제를 하게 되었다. 아홉공주의 효심과 우애를 기리는 작문도 하고 작시도 하고 시집살이의 고달픈 사연도 함께 호소하면서 이웃끼리의 정도 두텁게 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풍습은 이곳 이웃마을에서 1,500년이나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하여도 해마다 음력 3월 15일이되면 인근 마을 아녀자들이 이곳에 모여 화전놀이를 벌이고 즐겁게 놀면서 시집살이 고된일과 기쁜일을 작문하여 낭송도 하고 시상도 하였다. 계를 모아 그 돈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였다고 하며 그 당시의 계장부와 작문집도 시집간 어느할머니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좋은 풍습이 계승되지 못하고 전설로만 남게 된 것이 정말 아쉽다.
덕전마을의 탑골사
정관면 덕전마을 뒤에 석탑사가 있는곳을 탑골이라 한다. 옛날 큰절이 있었으나 절은 소실되고 석탑만 남아 있다하여 그 이름이 생겼다. 신라시대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이곳에 와보니 달음산 기슭으로 동해가 훤히 보이고 일출경이 장관이었다. 새벽햇살이 유난히 밝게 비추는 곳을 찾아 갔더니 그곳에서 미륵부처님을 찬탄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삼매에 들어 부처님을 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또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았으나 물이 없었다. 그때 관세음보살이 예쁜아가씨로 화신하여 쪽박에 물을 떠 주는 것을 마시고는 심신이 맑아지고 물맛이 좋아 감로수라 하였다고 한다. 최근에 이곳에 큰절을 세워 탑골사라 하고 있다. 1986. 7. 8. 오후 6시 30분경 대웅전을 중건하고 있는데 동해에서 큰 무지개가 일어나서 무너진 탑 중심부분을 비추었다. 신기하게 생각하여 그곳을 보니 산미역초라는 풀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이 풀을 캐기위해 땅을 파 보았더니 뜻밖에 썩은 나무상자가 있어 열어 보았더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소장되어 있었다. 이 진신사리를 모시는 성대한 봉축제를 올리고 탑골사에 모시고 있다고 한다.
병산리의 베틀바위
정관면 병산리에 있는 마을 뒷산은 동쪽은 큰덤뫼가 있고 북쪽은 연지봉이 있어 그 사이에 錦洞이라는 비단골이 있다. 이 깊은 계곡은 잡목과 송목이 부성하여 인적이 멊는 곳이다. 이 금동계곡 상류에 있는 계곡옆에 배틀바위가 있고 조금더 올라가면 조개보가 있다. 베틀바의는 20척이 넘는 큰 바위가 2개 直立해 있고 그 두 바위 상부에는또 큰 바위가 屋蓋石으로 덮여있고 그 내부는 수십명을 수용할수 있는 동굴로 되어있다. 조개보는 황폐된 田畓이 있고 그 계곡에 보가 있던 흔적이 있다. 선조25년 말경, 임진왜란으로 인근마을은 모두 피란하였고 이 금동아래에 있는 병산마을에도 적병들은 침입하여 분탕질을 하였기 때문에 마을도 없어졌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오갈 데 없는 趙총각과 具처녀가 이곳에 피란을 하였다. 이들은 베틀바위 동굴에 숨어 살다가 정이 들어 부부가 되었다. 정유재란이 끝나는 7년의 긴세월동안 이곳에 숨어살면서 남편은 전답을 개간하고 水洑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 아내는 동굴에 베틀을 놓고 베를 짜며 살았다. 지금도 그 보를 남편성을 따서 趙哥洑라 하고 동굴을 베틀바위라 하고 있다. 임진왜란때의 실화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