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 번역시/번역노트
한국 현대시를 세계어로 읽는다․13
영역 / 라드니 타이슨․홍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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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배한봉
이 열매를 탐욕이라 말한다면
기꺼이 다 떨구고 말겠네
그래서 홀가분해질 수만 있다면
몸 달구는 햇볕도 뿌리치고 겨울을 맞겠네
어디 비바람 겪지 않은 삶이 있겠나
움푹 패인 뿌리야 나뭇잎 털어 덮으면 그만이지
이 가을, 내 영혼이 빛나는 것은
열매 때문이 아니라 가난을 맞이할 준비가 끝난 운명의 무게 때문이라네
내 가지 위 까치 둥지를 달빛이 보살펴주는 것 또한
식구 하나쯤은 건사할 줄 아는
튼튼한 밑둥치가 있기 때문이라네
지금 나는,
시퍼런 창공에 탱글탱글 폭약 같은 홍시 한 알 걸어두고
언제 터트릴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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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ersimmon Tree
Bae Han Bong
If you call this fruit greed
I let it drop willingly
So if I could only feel a load off my mind
I would shake off the sunlight warming my body and greet winter
Is there a life anywhere not exposed to rain and wind?
As for my sunken roots, if covered with shaken-off leaves, that's all
This autumn, the reason my spirit is shining
Is not the fruit but the weight of destiny fully prepared to meet poverty
And that the moonlight looks after the magpie nest in my branches
Is because of the solid base of my trunk
Which is able to support at least one family
Now I,
Hang a ripe and nearly bursting persimmon like an explosive in the deep blue sky
And the moment I will burst it, I am agonizing over that
[번역노트]
탱글탱글한 언어와의 만남
폭약 같은 홍시 한 알
배한봉 시인은 경남 창녕 우포늪 가에 산다. 북적거리는 도시를 떠나 이곳에 정착한 지 삼 년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북적거리기는 우포늪도 마찬가지다. 일억 사천만 년 전 한반도와 함께 태어난 이 늪에는 희귀 식물, 곤충, 조류, 어류 등 천여 종의 생명체들이 더불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곳에서는 생존경쟁이 치열한 도시의 삶과는 달리, 나무와 풀, 곤충과 새, 물고기와 사람이 서로 상생하며 조화로운 생명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시인 또한 이곳의 한 주민으로서 매일처럼 70만 평이 넘는 이 늪지의 오랜 역사를 읽는다. 그 묵은 史書의 갈피 속에서 생명의, 우주의 경이와 신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겸손하게 읽어 내고 있다.
나는 지금 1억 년 전의 사서(史書)를 읽고 있다/빗방울은 대지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돌 속에 북두칠성을 박아놓고 우주의 거리를 잰다(「빗방울 화석」 부분)
해마다 가을이면, 일억 여 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노인 이 늪 가에도 여느 시골처럼 감나무에 홍시들이 주홍빛 꽃처럼 주렁주렁 매달린다. 아니, 실은 우포늪 가에 감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감나무가 그 늪 가에 서 있다고 그렇게 읽고 싶을 뿐이다. 아니, 감나무의 위치는 중요치 않다. 다만 배한봉 시인이 우포늪의 목숨을 가진 것들에게서 생명의 경이와 신비를 읽어내던 방식으로, 그의 시 「감나무」에서 <폭약 같은 홍시 한 알>이 지닌 <운명의 무게>를 읽어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일상 속에 자리한 한 그루의 감나무를 보며 시인은 모든 생명체의 타고난 운명인 소멸과 재생의 과정을 읽는다. 이 운명의 다른 이름은 업에 의한 윤회이다.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려면 가벼워져야 한다. <탐욕>을 비롯한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다 떨구>어야 한다. <몸 달구는 햇볕도 뿌리치고> 한 해 살이의 결실인 열매도 다 떨구어야 한다. 묵묵히 겨울을, 가난을 준비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가벼워지는 과정일 뿐, 일개 생명체가 모든 것을 다 털고 소멸과 재생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지난하다. 하여 무릇 목숨을 지닌 것들의 운명은 무겁다. 그 <운명의 무게>를 <튼튼한 밑둥치>로 버티며 또 한 번의 재생을 위해 소멸을 준비하는 영혼이 가을에, 더욱 빛난다.
6행의 <움푹 패인>을 위해 <sunken>을 썼다. 많이 쓰이는 <가라앉은, 침몰한>의 뜻 외에도 <푹 패인, 움푹 들어간>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행에 <나뭇잎 털어>를 부사구 <with shaken-off leaves>로 처리했고, <그만이지>를 <thats all>로 바꾸었다.
7행의 <맞이할 준비가 끝난>에서 <맞이할>은 <대처하다, 직면하다>라는 뜻의 <meet>를 썼고, <끝난>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prepared> 앞에 <fully>를 덧붙였다. 8행의 <또한>은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이므로 행 앞에 <And>를 써서 처리했다.
2연의 마지막 두 행이 문제였는데, 특히 <탱글탱글>한 <홍시 한 알>이 고민스러웠다. <ripe, ripen, swollen, infflated, soft, mellow, ready-to-burst, nearly bursting> 등의 낱말들을 늘어놓고 타이슨 교수와 두세 차례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ripe and nearly bursting>을 조합하여 사용하기로 했다. 이 표현이 <탱글탱글>이 주는 이미지 즉, 농익어 곧 터질 것 같은 홍시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끝 행의 <언제 터트릴까>는 터트리는 순간에 대한 시점의 고민을 강조하기 위해 <the moment I will burst it>으로 썼다.
1연의 조금은 평탄한 듯한 감나무에 대한 묘사가 생생한 감동으로 바뀌는 것은 2연의 힘이다. 2연에는 <폭약 같은> <탱글탱글>한 <홍시 한 알>이 팽팽한 탄력과 긴장을 내장하고 <시퍼런 창공>에 걸려 있다. 그 주홍빛 <운명의 무게>가 탄성의 한계를 넘을 때 홍시는 중력에 몸을 싣고 낙하할 것이다. 떨어져 온몸이 터질 것이다. 대지의 품에 안겨 서서히 썩어 소멸해가며, 겨울과 가난을 견디고 난 후의 푸른 재생을 꿈꿀 것이다.
◆라드니 타이슨(Rodney E, Tyson)
아리조나 주립대
『코리아타임즈』 한국문학번역상 수상
American University of Sharjah, United Arab Emirates 교수
◆홍은택
한양대 영문과, 동대학원 영문과
1999년 『시안』 신인상 당선
대진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