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유 인 봉
마취에서 깨어난 어머니, 앞이 캄캄했다. 눈두덩이에는 두 눈 모두 두툼한 거즈가 덧입혀 있고 반창코가 두 이(二)자로 붙여져 있었다. 두꺼비 등 같은 손이 상처를 덮고 있는 두툼한 거즈에 닿는 순간 어머니는 가는 신음소리를 냈다. ‘어머니 백내장이 심해서 수술했어요’ ‘한 밤 자고 나면 안대도 벗고 이전보다 더 잘 보일 거라네요’ 짐짓 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듯 아들은 노모의 어깨를 감싸며 낮은 소리로 위로하고 있었다. 병원문을 나선 모자가 택시에 옮겨 타고 요양원으로 돌아갈 때까지 어머니는 “그러냐” 하고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아마도 아들의 마음에 짐을 지우고 싶지 않고 싶어서 하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요양원에 오시기 전 어머니는 장손인 형님 내외와 함께 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셨던 본가에 살았다. 어머니는 다섯 살 적 외할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일찍 재가하는 바람에 당숙 슬하에서 고아로 자랐다. 일제 치하 가난했던 시절 첩첩산중 당숙 댁에서는 밥술 하나 덜어내겠다고 밭 한 뙈기 없는 아버지에게 열여섯 어머니를 출가시켰다. 황무지 같은 가난 속에서 어머니는 쇳덩이 같은 생활력으로 칠 남매를 낳고 남부럽지 않게 가르쳐 자리를 잡게 하셨다. 평생 자식만 바라보고 땅을 일구며 앞만 보고 살아오신 어머니도 환갑줄레 들어서자 칠 남매가 출가하고 나면서부터는 일이 재미가 없다고 했다.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때는 돈을 모으고 일을 해야 할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목표가 없어진 것이다. 거기에 칠 남매를 업고 선 등에 세월의 무게까지 더하다 보니, 무쇠 같은 체력일지라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손가락 마디마다 울퉁불퉁 옹이가 생기고 손가락이 뒤틀리고 무를 관절이 닳아, 앉고 설 때마다 무릎에서는 달그락달그락 마른 소리가 났다. 여든 줄에 접어들면서는 눈물짓는 날 수가 많아졌다. 건너 담 사시는 만수 아저씨가 “너그매 치매가 왔는가 싶다”라며 귀뜸까지 주었다. 해가 더해 가면서 어머니는 다리가 휘고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정도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밖을 나갔다 돌아온 어머니는 종종 오른쪽 얼굴에 생채기를 달고 오셨다. 넘어지면서 길바닥에 얼굴이 씻긴 것이다. 자식들은 ‘관절이 닳고 휘어져 중심을 잃고 넘어지다 보니 얼굴에 상처가 났구나’ 하며 단순하게 생각했고, 오른쪽 무릎이 상태가 심하다 보니 오른쪽 얼굴이겠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우울증이 심해지더니 환청을 앓기 시작했다. 장터에서 꽹맹이 소리가 들린다느니 하기도 하고, 모퉁이에서 누구 부른다고 돌아가 보기도 했다. 자식들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서로가 답답할 일이었다. 어떤 날은 “야들이 나를 바보로 아느냐”며 이런저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환청 환자라고 접어 두면서부터는 그러시냐며 무관심으로 넘어가는 것이 대수였다. 어머니의 환청은 하루 중 해거름 무렵이면 심해지기 시작했다. 친구가 밤 주우러 가자고 부른다느니, 동무가 나물 캐러 가자고 한다느니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무단외출이었다. 어둠이 내려도 돌아오지 않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럴지라면 비상 연락망이 가동되고 저마다 흩어져 야간 수색이 이루어졌다. 어머니의 병세를 아는 마을 사람들이 행선지를 제보해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소재 불명이었다. 어떤 날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외진 농수로에 흙 범벅이 된 어머니를 구출해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기를 십여 차례 반복하다 보니 형님 내외의 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외출이나 농사일을 나가도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야 했다. 급기야 가족회의를 열어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시설로 모시자는 의견이 절대다수였다. 유독, 시집온 이후 여태까지 어머니와 한솥밥을 먹고 살아 온 형수께서만 결사적으로 반대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노년의 어머니도 중요하지만, 남아있는 형님 내외의 삶도 생각해야 한다는 현실적 대안이 결론으로 내려졌다.
어머니의 거처가 정해졌다. 큰 두 고을을 지나 버스 길에서 십 리나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원 백여리, 거기서도 마을 끄트머리에 자리한 요양원이었다. 어머니로서는 요양원 가는 길이 처음 가보는 낯선 길이었다. 직감적으로 눈에 익숙한 본가로 가는 길이 아니다고 여겼는지 “야야, 여기가 어디냐?” “어디로 가는 거냐?”고 어머니는 되묻기 시작했다. ‘어머니 계실 새집으로 가는 중이여요’ ‘방도 따뜻하고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자식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둘러대고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야야, 집으로 가야 한다. 너그 아버지랑 할머니랑 밥도 챙겨줘야 하고 하니 얼릉 집으로 가자”하며 운전대를 다그치고 있었다. ‘ 알았어요, 오늘은 늦었으니 저랑 자고 내일 가시게요’ 자식은 되지도 않은 말을 임시방편으로 둘러대고 있었다.
어머니를 차에서 준비해 둔 방으로 모신 원장님이 “저희가 알아서 잘 추슬러 볼테니 너무 걱정말고 돌아가세요” 하신다. 어머니가 눈치채고 같이 가자며 따라 나선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닫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승용차에 올랐다. 오던 길을 되짚어 달렸다.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을회관을 다녀오시면 자식들이 저그 오매를 시설에 보냈다며 “너그는 나를 절대 고려장에 보내면 안된다.” “ 나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그런데 안간다”며 유언처럼 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다.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요양원 문을 나설 때의 모습이 눈에 밟혀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한 닷새 지나서나 오시지요” 했던 원장님의 당부가 있어 참기로 했다.
어머니는 조금씩 요양원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원장이나 직원들이 “엄마! 엄마!” 하면서 정성껏 돌봐 드리고 있었다. 머릿속 기억도 차츰 희미해지고 있었다. 내가 누구냐 물으면, 머리 희끗한 자식을 아들이 아닌 당숙이라 했다. 치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마흔 살 기억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식들의 근황을 물을 때에도 학창 시절의 기억만 꺼내 들고 있었다.
요양원 거실에는 큼직한 텔레비전이 한 대 놓여 있었다. 어르신들은 식사를 마친 후 삼삼오오 텔레비전 앞에서 무료한 시간을 메웠다. 그런데 유독 어머니만 시청을 안 한다는 것이다. 행동도 어눌해지고 자주 눈을 비비며 허공을 더듬거린다는 것이다. 안과를 한 번 모시고 가면 어떻겠느냐는 원장님 연락을 받았다. 가슴이 뜨끔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마도 오랜 경험을 가진 원장님은 어머니 시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부랴부랴 어머니를 모시고 큰 병원을 찾았다. 이리저리 어머니 눈을 살펴본 의사 선생님께서 “어르신 눈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 두셨냐”며 질책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하지만 단호하였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호통으로 다가왔다. 왼쪽 눈은 실명이 된 지 오래고, 다른 쪽도 백내장이 심해 수술을 해봐야 하겠지만, 실명 직전이라는 선고를 하셨다. 그러나 두 눈 모두 최선을 다해 수술해 보자는 제안을 해 주셨다.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시설에 오기 전 자주 넘어져 한쪽 얼굴에만 났던 상처가 무릎관절이 아닌 시력상실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한쪽 눈으로는 원근을 분간하지 못해 울퉁불퉁한 시골길에서 성할 날이 없었던 얼굴의 상처 원인이 실명된 눈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식이 일곱이래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구 하나 겉으로 보이는 휘어진 관절만 생각했지, 누구도 어머니의 눈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후회가 썰물처럼 밀려왔다. 겉은 번지르하고 남들은 부모에게 모자랄 것 없이 잘한다고 말하지만, 아들은 천하에 불효자였다. 몰라보게 야위고 시들어진 어머니를 하얀 침대보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종잇장처럼 가볍다.
여태껏 남들 다 타 보는 비행기 한 번 타 보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난, 이제는 앙상한 뼈만 남은 한 여자 서러운 생이 누워있다. 적막하고 쓸쓸하다. 어둠 속에서 등불로 길잡이가 되어 주셨고, 허기진 가난 속에서도 자식만을 바라보며 굴곡진 세월을 건너오신 한 여자의 생이 저문 길에서 돌아가야 할 길을 묻고 있다.
첫댓글 눈물 납니다. 참 좋습니다.
선생님의 긴 글을 읽으며 마음이 아픕니다. 돌아가신 시어머님 생각이 납니다. 남편이 결혼 안 한 시누이랑 시골에서 몇 년을 기저귀 수발까지 하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어쩔 수 없이 시설로 모시던 날이 생각나네요. 어쩜 그 날 전 어머님의 치매가 정말 다행이었다는 못된 생각을 했지요.
이유는 어머님은 요양원이 당신 집인 줄 알고 우리집에 손님들이 많이 왔다고 적응하셨으나 어찌 그게 다 였을까요?
선생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저도 90되신 부모님이 계시기에 생각이 많아집니다.끝단락을 읽으니 더더욱 가슴이 먹먹합니다.
선생님 글을 보니 부모님에게 보호받던 저도 부모님을 보호하는 보호자로 입장이 바뀐지 오래됐네요. 항상 멍먹한 가슴이지만 묵묵히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효도라 생각하고 한번 더 웃어 주려고 노력합니다.
허~ .먹먹하네요. 글이 경지에 오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