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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때를 영원히 벗어났기 때문에, 아주 잘 닦이고 빛이 나서 의지의 정[依止定]에 거두어서 지니기 때문에, 거울이 깨끗하고 때가 없어서 중생들의 이익 되고 즐거운 일을 짓기 때문에 광명이 두루하게 비춘다. |
또 원경이 반연하는 본바탕에 의하여 갖가지 영상과 모습이 생기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의 대원경지도 항상 모든 반연에 의하기 때문에 갖가지 지혜의 영상과 모습이 생긴다. |
마치 원경 위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영상이 생기되 그 원경 위에는 모든 영상이 없고 이 원경은 움직임도 없고 지음도 없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의 원경지 위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지혜 영상이 생기되 그 원경지 위에는 모든 지혜 영상이 없고 이 지혜 거울은 움직임도 없고 지음도 없다. |
또 원경과 뭇 영상은 합한 것도 아니고 떨어진 것도 아니요, 쌓여 모이지도 않았고 그 인연을 나타내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여래의 대원경지도 뭇 지혜 영상과 합한 것도 아니고 떨어진 것도 아니요, 쌓여 모이지도 않았고 흩어져 잃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
“만약 이 『���대열반경』을 들어 받으면, 온갖 방등대승경전(方等大乘經典)의 심히 깊은 의미를 모두 골고루 알 수 있다. 마치 남녀가 밝고 깨끗한 거울에서 그의 색상을 똑똑하고 분명하게 보는 것처럼, 『���대열반경』도 그와 같아서 보살이 그를 지니면 대승경전의 매우 심오한 깊은 이치를 모두 분명하게 볼 수 있다”라고 했다. |
또 이르기를 “무엇을 이제목다가경(伊帝目多伽經)이라고 하며, 내지 구나모니불(拘那牟尼佛) 때에 법경(法鏡)이라 했는가?”라고 했으니, 이것으로도 옛 부처님 모두가 이것을 일컬어 거울이라 하셨음을 알겠다. 교법의 만 가지 이치와 진속(眞俗)의 만 가지 인연이 그 안에서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
천태 정존자(天台頂尊者)가 『열반소(涅槃疏)』에서 말하였다. |
“반야(般若)란 바로 위없는 조어(調御)요 일체종지(一切種智)이므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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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의 밝고 깨끗한 거울이라 한다. 이 거울로 한번 비추면 온갖 것이 비추어진다. 중도(中道)를 비추기 때문에 거울이요, 진제를 비추기 때문에 깨끗하며, 속제를 비추기 때문에 이것은 밝다. 밝기 때문에 형상이 밝아져서 거짓이 나타나고 깨끗하기 때문에 티가 다하여 참된 것이 나타나며 거울이기 때문에 바탕이 뚜렷하여 중도가 나타난다. 세 가지 지혜[三智]가 한 마음 속에서 얻어지기 때문에 밝고 깨끗한 거울이라 말하며, 온갖 법을 거두기 때문에 조어라 일컬으며, 부처의 지혜 광이기 때문에 반야의 덕[般若德]이라 한다.” |
이것으로써도 모든 성인이 다 마음을 일컬어 거울이라 하셨음을 알겠으니 미묘함이 그 속에서 극진하다. |
『대승천발경(大乘千鉢經)』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거울을 자세히 살피어 심성을 비추어 보면, 비춤뿐이고 밝음뿐이고 비춤뿐이고 깨끗함뿐이어서 시방의 넓고 두루한 법계를 두루하게 비추리니, 맑고 고요하여 장애가 없다”라고 했으니, 그런 까닭에 선덕이 이르기를 “이 진여의 성품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아서 만 가지 형상이 모두 그 속에서 나타난다”라고 했다. |
또 온갖 만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두가 밝은 거울이 포함한 것과 같은 명료한 성품이 한 마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둘째는 분별되어 나타난 바는 마치 영상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의 이치는 능현(能現)이 되고 나중의 이치는 소현(所現)이 된다. 그러므로 온갖 법이 서로서로 거울과 형상으로 되는 것은 마치 거울이 서로 비추면서도 본래 모양을 깨뜨리지 않는 것과 같다. |
경에서 이르기를 “먼 물건과 가까운 물건이 비록 모두 그림자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림자는 물건을 따라 멀고 가까움이 있지 아니하다”라고 했다. |
이는 또한 강과 샘 속에 보이는 해와 달 같은 것은 바로 능현이 되며, 만약 강과 샘을 소현으로 삼는다면 큰 강과 솟는 샘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 소현의 모양을 내는 것이니, 다락에 올라가 거울을 비추면 황하(黃河)의 일대가 모두 거울 속에 들어가고 천 길[丈]의 폭포도 지척에서 보리라. |
왕 우승(王右丞)의 시에 “창 너머 구름과 안개는 옷 위에서 생기고/휘장 두른 산과 샘은 거울 속으로 든다”라고 했으니, 이는 소현을 밝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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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마음 거울을 높이 달면 법마다 삼키지 아니함이 없음과 같으니, 환히 트인 성품이 공하면 어느 문인들 들지 않겠는가? |
그러므로 당(唐)나라 태종 황제(大宗皇帝)가 이르기를 “짐(朕)이 듣건대, 구리로 된 거울은 의관을 바를 수 있고 예[古]로 된 거울은 흥망 성쇠를 알 수 있고 사람으로 된 거울은 득실(得失)을 알 수 있다 하던데, 이제 마음으로 된 거울은 법계를 비출 수 있구나”라고 했다. |
또 밝은 거울은 그 형상만을 비추고 그 마음은 비추지 못하며, 생멸만을 비추고 무생(無生)은 비추지 못하며, 세간만을 비추고 출세간은 비추지 못하나니, 형상이 있어야 비추고 형상이 없으면 비추지 못한다. |
이는 또한 마음의 거울은 성품 자리를 모두 환히 밝히고 마음의 근원을 꿰뚫어 비추며 무생을 두루 알고 진속(眞俗)을 널리 밝히는 것과 같나니, 있고 없음이 다 같이 자세하고 숨고 드러남이 함께 통하며 낫고 못함이 현격하게 다르고 생각하고 자세함이 견줄 데 없이 다르다. |
『화엄경』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
“그때 바라문이 선재(善財) 동자를 위하여 감로대왕(甘露大王)을 찬탄하며 게송으로 말하였다. |
‘우리 임금 훌륭하고 단정 엄숙하여/성내는 것 징벌하고 모든 욕심 경계한다./마음은 깨끗하고 밝은 거울 같아서/물건들을 비추되 사사로움 없네./ 밝은 거울은 형상만을 비추고/마음에서 생각함은 비추지 못하지만/우리 왕인 마음의 거울은 깨끗하여/마음의 근원을 환히 본다네.’” |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마치 큰 마니보(摩尼寶)의 거울을 공중에 달아 비추면 시방의 색상이 모두 다 단박에 나타나되 이 거울 성품의 깨끗한 광명에는 영상이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의 법신도 그와 같아서 맑고 사무쳐서 영상이 없다”고 했다. |
옛날의 대비(大悲)가 게으르지 않아 중생의 업연(業緣)을 따라 감응(感應)함이 차별되고, 온갖 색신삼매(色身三昧)를 널리 나타내어 중생들이 듣고 보매 이익 받지 않음이 없게 한다. 모든 부처님은 무루 금강(無漏金剛)의 마음으로 몸이 되어 널리 온갖 중생계에 나타냈으므로 번뇌의 습기에 가리움을 받았을 뿐 몸마다 나타내지 아니함이 없나니, 마치 병 속에 깨끗한 등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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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를 이름하여 여래장이라 하고 공덕장(功德藏)이라고도 하며 무진장(無盡藏)이라고도 한다. |
모든 조사가 함께 전한 모든 부처의 청정한 자각성지(自覺聖智)와 진여묘심(眞如妙心)은 세간의 문자와 같은 것으로 얻을 바가 아니다. 왜냐 하면 걸림 없는 해탈은 바로 하나의 참된 법성(法性)이어서 세간이거나 출세간과는 함께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
경에서 이르기를 “견줄 데 없는 이 보리는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만약 이 진실한 법성을 깨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3세의 모든 부처님과 온갖 중생들이 동일한 법계요 본래 평등하여 항상 변하지 않는 줄 깨달아 알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은 온갖 때 안에서 모양을 관찰함[觀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깨끗하면 벌써 모든 선정(禪定)을 건넜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면 외로운 빛이 한 번 비쳐도 만 가지 생각이 전부다 소멸됨이 마치 어두운 방에 등불을 달고 겹구름 속에서 해를 본 것과 같다. 고덕(古德)의 게송에서 “한 생각의 빛을 받는 처소가/억 겁(億劫)의 혼미함이 녹는 때인 줄 어찌 알리”라고 한 것과 같다. |
그러므로 이르기를 “법(法)에는 맞춰 비추는[應照] 능력이 있기 때문에 거울로써 비유하고, 교(敎)에는 전할 만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등불에다 비유했다”라고 했다. 지혜의 달이 품속으로 들어가고 신령한 구슬이 손아귀에 있으니, 법계가 환하게 통하여 비추지 아니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
『재명론(才命論)』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통철하면 보배거울[寶鏡]이다”라고 했고, 그 주(注)에 이르기를 “마음은 모든 물건을 비추되 빠뜨림이 없고 어둡거나 밝은 데를 환히 비추므로, 보배 거울과 같다”고 했으며, 또 장자(莊子)가 이르기를 “지인(至人)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고 했다. |
또 세간의 거울조차도 오히려 사람의 간과 쓸개를 비추거늘, 하물며 영대(靈臺)의 마음 거울로 환히 비추지 못하겠는가? |
옛날 진(秦)나라 궁중에는 옥으로 만든 거울이 있었는데, 관리들의 간과 쓸개며 5장 6부를 비추면 모두 다 나타났다 한다. |
그런 까닭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큰 바다에서 놀지 않으면 대해[沃日]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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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함을 보지 못하며, 큰 산을 우러르지 않으면 간소(干霄)의 형상을 보지 못한다”라고 했다. |
아직 종경(宗鏡)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어찌 제 마음을 알겠는가? 탁 트인 체성은 하늘을 받아들이고 잠잠한 영상은 만상(萬像)을 포함한다. 믿고 들지 못한 이는 높고 깊음을 측량하지 못하리라. |
그러므로 진각(眞覺) 대사가 말하기를 “마음 거울은 밝아서 비춤에 걸림 없고/휑하게 빛나서 항사계(恒沙界)에 두루하다./삼라만상의 영상은 그 속에서 나타나니/한 성품의 원만한 빛 안과 밖이 아닐세”라고 했다. |
그러므로 이 『기신론(起信論)』에서 네 가지 공의 거울[空鏡]의 이치에 의하여 나아가 널리 조사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한 마음임을 나타내면서 종경(宗鏡)을 증명하였다. |
그런 까닭에 논(論)에 이르기를 “법이 있어 능히 마하연(摩訶衍)의 신근(信根)을 일으킨다”고 했다. 법이 있다 함은 한 마음의 법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능히 알면, 반드시 광대한 신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신근이 이미 서면 이내 부처의 길에 들어가고 부처가 되는 길이기 때문에 두 가지 현행(現行)을 여읜다. 무엇을 현행이라 하느냐 하면, 첫째 범부의 현행이니 생사로 잡염(雜染)을 이루는 일이요, 둘째 2승의 현행이니 열반으로 이익과 안락을 잃는 일이다. |
속박과 해탈이 비록 다르나 다 같이 종경에 미혹한 것이다. 이제 부처가 되는 길이 두 가지 현행이 없으면, 한 마음을 원만하게 증득하고 마하연을 갖추며, 큰 지혜이기 때문에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대비이기 때문에 열반에 머무르지 않으리니, 한 가지의 광명을 지어서 만 갈래 길의 나루가 되리라. |
[문] 종경으로 널리 비추면 만가지 법이 같은 데로 돌아가는데, 바로 이것이 거울이라는 이치인가? |
[답] 범부와 성인의 다름을 말하고 같음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거울 속의 영상이다. 이 하나의 거울만이 원만히 시방을 다한 것이어서 거울 밖에 법이 없고 그와 내가 함께 끊어졌다. |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만약 중생의 심성이 모든 부처님의 심성과 같다고 말하면 별교(別敎)이다”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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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圓敎)에서의 심성은, 바로 하나의 고요한 빛이어서 그것도 없고 이것도 없으며 시방 3세의 부처님과 중생의 맨 끝까지 다하여 하나의 큰 원경(圓鏡)을 이룬 것이니, 이것은 한 거울일 뿐이요 동일함과 다름이 없으며 부처와 중생이 한 거울의 영상일 뿐이다. |
[문] 이제 『���종경록』에서 거울로 이치를 삼은 것은 바로 법상종(法相宗)에 의거해서 세운 것인가, 법성종(法性宗)에 의거해서 세운 것인가? |
[답] 만약 인연이 상대적으로 의지한 문에서 보면, 법상종에서는 곧 본식(本識)을 거울로 삼는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말씀하기를 “마치 밝은 거울에서 뭇 색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현식(現識)에서 나타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니라”고 한 것과 같다. 현식은 곧 제8식이다. |
법성종에서는 곧 여래장을 거울로 삼는다.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기를 “각(覺)의 체상에는 네 가지의 큰 이치가 있으며, 허공과도 같고 마치 깨끗한 거울과 같다”고 한 것과 같다. |
또 『점찰선악경(占察善惡經)』에서는 두 가지 관문(觀門)을 세운다.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하여 유심식관(唯心識觀)을 세우고, 근기가 영리한 사람을 위하여 진여실관(眞如實觀)을 세운다. 또 『기신론』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만약 내달아 흩어지면, 이내 거두어 들여서 바른 생각[正念]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 그 바른 생각이란 마음일 뿐 그밖에는 경계가 없고 또 이 마음 역시 제 모양이 없는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생각과 생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만약 유심식관과 바른 생각에 의거하면 마음일 뿐이라는 것은 법상종에 해당하고, 만약 진여실관과 그 마음의 생각과 생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에 의거하면 곧 법성종이다. |
만약 법의 성품이 융통하다는 문에서 보면, 모두가 하나의 취지에 돌아가는 것이요 다시는 분별이 없지만 이제 바로 종(宗)에서 나은 것을 취해서 말하면 법성종에서 본 설명이라 하겠다. |
만약 통틀어 포함시킨다면 마치 바다가 하천 물을 받아들이고 근본으로써 끝을 거두는 것과 같거늘, 어찌 성(性)과 상(相)일 뿐이리오. 버리고서 비출 하나의 법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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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종경(宗鏡)의 안에 어떻게 믿고 들어갈 것인가? |
[답] 한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모든 법에 머무르지 않으며 능소(能所)의 증득이 없고 지해(智解)의 마음이 없으면, 이것은 믿음 없는 믿음이요 들음이 없는 들음이며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두 가지가 공(空)하고 마음과 경계가 쌍으로 고요하다. |
저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 문수사리가 말하기를 “법계에 마음을 두는 것[繫緣法界]이 한 생각의 법계요 움직이지 않는 법계이니, 참된 법계임을 알면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과 같다. |
만약 내가 법계에 들었다 하면 벌써 동요한 법계이다. 능소 두 가지가 없어지고 들어가는 모양조차 고요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법계이며, 이것이 법계에 든 것이다. |
『대승천발대교왕경(大乘千鉢大敎王經)』에서 이르기를 “어떠한 방편으로 무성관(無性觀)에 증득하여 들어가느냐 하면, 보살은 먼저 마음은 본래 성품이 고요하다 함을 비추어 보아 멸진정(滅盡定)에 깨달아 들고 심식(心識)의 성품을 얻으며, 청정하여 맑고 깨끗할 뿐임을 증득하여 보고 거룩한 성품인 제 성품은 여여(如如)한 한 길로서 고요하다 함을 증득하여 보아야 하며, 근본을 깨치고서 청정임을 보되 비치기만 하고 빛나기만 하며 밝기만 하고 깨끗하기만 하며 고요하기만 하고 거룩하기만 하다 함을 반조(返照)하면, 이것을 보살이 동요가 없는 열반의 무성관에 들게 된다고 한다”고 했다. |
그러므로 알라. 만약 능증(能證)이 있다면 인아(人我)가 있고 만약 소증(所證)이 있다면 법아(法我)가 있는 것이 된다. 하나뿐인 참된 법계이기 때문에 마음 밖에는 법이 없으며 법계로써 다시 법계를 증득할 수 없다. |
『무생의경(無生義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
“사리불(舍利佛)이 비구들을 칭찬하며 말하였다. |
‘그대들은 이제 복밭[福田]에 머무셨구려.’ |
그러자 비구들은 말하였다. |
‘큰 스승 세존께서도 오히려 공양을 녹이실 수 없었거늘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큰 스승께서는 풀이하며 말씀하기를 것은 부처로서 부처에 머무르지 않으면 부처도 없고 복밭도 없는지라 공양을 녹일 수 있는 이는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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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복밭 사람이요, 부처로서 만약 부처에 머무르면 부처가 있고 복밭도 있는 것이라 공양을 녹일 수 있는 이는 바로 참된 복밭이 아니니라>라고 하셨습니다.’” |
이와 같아서 신통에 머무르는 지혜는 지혜가 있으므로 이것은 곧 참된 지혜가 아니다. 만약 머무는 바가 없으면 비로소 참으로 지혜가 있는 것이다. |
또 『사익경론(思益經論)』에서 해석하기를 “법계를 여의고서 다시는 공양을 받는 사람이란 없기 때문이니, 그 법계는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이 『���종경록』에서는 부화(浮華)한 것을 깎아 버리고 진실을 말했을 뿐이며, 명자(名字)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마음의 종[心宗]을 나타냈다. |
『보현관경(普賢觀經)』에서 이르기를 “옛날 영산(靈山)에 있으면서 한 진실의 도를 연설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
또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
“비록 교묘한 말이 없더라도/진실한 이치가 있기만 하면/그 법은 받아서 지녀야 하리니/마치 금을 취하고 돌을 버리는 것과 같다./ 미묘한 이치는 순금과 같고/교묘한 말은 기왓장과 같으며/명자에 의하고 이치에 의지 않으면/그 사람은 밝음 없는 소경이니라.” |
만약 친히 성품을 보고 종경(宗鏡) 안에 들어가면 이는 스스로 법문을 믿어 결정코 의혹이 없으리니, 해를 차게 할 수 있고 달을 덥게 할 수 있으며, 비록 천 갈래 길의 다른 설명으로도 끝내 바꿀 수 없으리라. |
마치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교시가(憍尸迦)야, 여래의 제자는 모든 세간 보기를 마치 허깨비와 같이 여기며 의심함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그들은 여래를 믿고 이내 스스로가 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믿고 남을 믿지 않을 뿐이다. 왜냐 하면 만약 세간 사람들이 벌써 자신이 보고 나면 그 사람은 다시는 다른 이의 말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
교시가야, 마치 사람이 벌거숭이로 길을 가고 있을 적에 가령 어느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희유하게도 비단 옷을 몸에 걸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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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라고 한다 하자. 교시가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비록 말을 했다해도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믿겠느냐?’ |
‘믿지 않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눈으로 친히 보았기 때문이옵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교시가야,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모든 제자들도 스스로가 법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이 말을 취하지 않나니, 그 이치 또한 그러하니라.’” |
해석하여 보자. |
만약 스스로가 법을 보았다면 어느 법인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범부거나 성인이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간에 있는 것이면 지적하여 진술하리니, 제 마음의 끝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
이와 같이 믿는 이라야 비로소 법의 근원에 도달하리니, 마치 『입법계체성경(入法界體性經)』에서 말한 바와 같다. |
“부처님께서 다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진실의 끝[實際]을 아느냐?’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진실의 끝을 아옵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문수사리여, 무엇을 진실의 끝이라 하느냐?’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
‘세존이시여, 내 것[我所]의 끝이 있으면 그것이 곧 진실의 끝이며, 모든 범부의 끝이 바로 진실의 끝이며, 업이거나 과보의 온갖 법의 모두가 바로 진실의 끝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렇게 믿는다면 바로 이것이 진실의 믿음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뒤바뀌게 믿으면 바로 이것이 바른 믿음이며, 만약 그릇된 행을 하면 그것이 바로 바른 행이옵니다. 왜냐 하면 바르고 바르지 않다는 것은 말만이 있을 뿐이요, 얻을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
이것으로써도 만약 마음일 뿐이라는 진실한 이치를 믿으면 언어에 끄달리지 않음을 알 것이니, 깊음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얕음을 듣고도 의심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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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아니하며 깊은 것이 아니고 얕은 것이 아님을 듣고도 어리석지 않으리라. |
청량(淸凉)의 『연의(演義)』에서 “깊음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함은 곧 큰 갈래의 깊은 이치이니, 이른바 공(空)이다. 공을 말한 것을 들으면 단멸(斷滅)과 같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두렵게 한다”고 한 것과 같다. |
그러므로 『대품경(大品經)』에서 이르기를 “먼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중 역시 없는 것이 아니요, 제 성품이 항상 공하나니,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
‘얕음을 듣고도 의심하지 않는다’ 함의 얕다 함은 겪는 일을 말한다. 방편의 문이 많으면 의혹되게 되는데, 이제는 알아서 마땅할 대로 하는데 의심할 바가 무엇이겠는가? |
‘깊은 것이 아니고 얕은 것이 아님을 듣는다’ 함은 의거할 바 없음을 말한 것이니, 몸과 마음을 담연하게 하여 알게 하되 깊은 것이 아니면 묘유(妙有)가 되고 얕은 것이 아니면 진공(眞空)이 된다. 몸과 마음의 모양을 여의어야 비로소 용맹하게 되고 이 경지에 나아갈 수 있다. |
또 이 세 구절은 또한 바로 삼관(三觀)이니, 처음은 공이요 다음은 가(假)이며 나중은 중도이다. 세 구절을 한꺼번에 듣고 한 생각에서 모두 회통하면 삼관이 한 마음이거늘 무슨 의심인들 버리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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