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의 지휘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왕비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청년 백범 김구(白凡 金九)가 이 소식을 접할 때의 나이는 20세였다.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활동 중 좀 더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던 김구는 ‘치아포’라 부르는 황해도 지역 대동강가 포구의 한 여관에서 을미사변의 범인들 중 하나라 확신한 일본 헌병을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는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는 국모보수(國母報讐)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金昌洙)"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창수란 이름은 백범 김구로 개명하기 전 이름) 그러나 3개월 뒤 김구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해주옥(獄)을 거쳐 인천감리서로 이감된다.
당시 인천 감옥에서의 생활과 재판에서 보여준 김구의 당당함과 의연함은 서울까지 알려질 정도로 화제였다. 재판을 구경하며 김구의 기개를 알게 된 사람 중에 강화도 출신 노름꾼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바로 김구 석방을 위한 구명활동에 자신의 전재산을 바치면서까지 헌신한 김주경(金周卿)이다.
우선 김주경은 김구 구명운동을 위해 당시 법부대신 한규설(韓圭卨)을 찾아간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이익을 올까 두려웠던 한규설에게서는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선처를 호소하는 청원서와 소장(訴狀)을 연거푸 법부에 제출한다. 그러나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한 말의 뜻은 가상하나, 사건이 중대하여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는 취지의 답변을 받는다.
김주경은 이러한 활동을 7,8개월 동안 지속하다 결국 김구의 석방을 위한 소송비용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이후 자금 마련을 위해 관용선 탈취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하게 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김구 탈옥을 위해 규합했던 당시의 동지들은 나중에 간도와 상해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한다. 그러는 한편 김주경은 지금의 화투장에 해당하는 골패에 자신만이 식별할 수 있는 표식을 한 다음 강화도와 인천 일대에 유통시킨다. 일종의 사기도박으로 투전판에서 큰돈을 벌기도 한다. 김주경은 이때 번 돈으로 백범을 탈옥시키기로 결심하고 인천감리서의 김구를 찾아와 옷 한 벌과 함께 시 한편을 전해 준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脫籠眞好鳥)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물고기가 아니리 (拔扈豈常鱗)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求忠必於孝)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請看依閭人)
시의 내용은 명확히 탈옥을 권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김구는 '한 때 구차스럽게 살기위해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순 없으니 과히 우려하지 말라'는 답장을 보냈다. 결국 형집행을 우려한 김주경은 간수를 매수하여 1898년 3월 김구를 탈출시킨다. 김주경의 여러 도움을 받으며 남한 지역을 전전하며 도피 생활을 하던 김구는 1900년 2월 김두래(金斗來)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강화도의 김주경의 집을 찾았다. 하지만 김주경은 만날 수 없었던 김구는 그를 기다리며 김주경의 아들과 인근 동네의 어린이들을 모아 <동몽선습>, <천자문>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때 김구는 김주경이 자신의 구명과 탈옥을 위해 가산까지 모두 탕진한 후 나중에는 피신까지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3개월 가량을 기다렸으나 결국 김주경을 만나지 못했고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이름을 바꾼다. 또한 강화를 떠난 김주경이 붓 행상을 하다 객사하였다는 말을 듣게 된다.
1946년 11월 강화도 방문 당시 지역 유력 인사들과 찍은 기념사진. 사진 : 경인일보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 임시정부 활동 시절에도 국내 소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한편 김주경의 유족을 탐문했으나 별다른 소식은 얻지 못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김구는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더불어 김주경의 후손을 찾는 신문 보도를 낸다. 하지만 윤봉길의 자제와 이봉창의 질녀를 만났고 이북에 있던 김주경의 아들 김윤태는 만나지 못했으나 그 친딸과 친척 몇명을 만나게 된다.
이듬해 1946년 인천을 시작으로 전국 지방순회에 나서면서 다시 한 번 강화도의 김주경 집을 찾아 합일학교(현 강화합일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김구 선생을 연호하던 강화사람들을 위해 ‘홍익인간’ 휘호를 써서 전달했고 이 액자는 현재까지 합일초등학교에 전해진다.
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 은인으로 알았던 김주경에 관한 이야기는 변변한 사료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직 백범일지(白凡逸志)에만 의존하여 전해지고 있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안위를 물리치면서까지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의사의 연혁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현재 친일파 후손들은 그들의 선대가 누렸던 부귀영화의 대물림으로 안락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경제 사회적으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김주경 선생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흔한 초상 사진하나 없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와 빈약한 독립운동사 연구에 경종을 울리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친일파가 득세하는 이 나라! 독립운동을 하며 재산과 목숨을 바친 애국 조상 뵐 면목이 없다.
국민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또 외세의 지배에 들어갈 수 있다. 특히, 친일 언론이 가장 문제이다.
친일 언론은 보지도, 읽기도, 듣지도 말아야 한다. 교묘하게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출처 : 제물포 구락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