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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의 역사
〔고 대〕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산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석기시대부터 육로 또는 해로로 이곳에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서생면 신암리, 병영동 병영성지, 장현동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이 있고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의 청동기 유적이 있다. 이 밖에 북구 중산동, 온산면 산암리, 언양읍 동부리, 삼동면 둔기리, 온양면 삼광리, 상북면 덕현리, 동구 일산동, 중구 다운동, 삼남면 방기리 등지에서 각종 유적과 유물이 관계 연구기관과 대학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사연댐 상류에 위치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암각화에는 고래·거북·사슴·멧돼지 등의 각종 동물그림이 있고, 두동면 천전리의 각석에는 원·삼각형·마름모 등의 각종 기하학적 무늬들이 있어 울산지방이 고대 인간사회의 유력한 생활터전이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보여 준다.
울산은 삼한시대에는 진한(辰韓)의 소속으로 중구 다운동(茶雲洞)을 중심으로 굴아벌촌(屈阿火村)이라는 읍락을 형성했는데, 신라가 파사왕 때 이곳을 취해 굴아화현(屈阿火縣)을 두고, 남쪽에는 생서랑군(生西良郡), 동쪽에는 동진현(東津縣), 언양지방에는 거지화현(居知火縣)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하곡현(河曲縣, 일명 河西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월성군(月城郡) 외동읍(外東邑) 모화(毛火) 지방에 있던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언양지방은 본래 거지화현인데, 경덕왕 때 헌양현(헌陽縣)으로 개칭해 양주의 영현으로 하였다. 신라시대에 울산지방은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파급되어 태화사 등의 불사(佛事)가 성행하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우시산국(于尸山國)도 울산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이 그 위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신라시대를 통해 울산지방에는 하곡현과 동진현이 임관군의 영현이란 격을 띠고 있었고 남쪽에는 동안군(東安郡)이, 서남쪽에는 우풍현(虞風縣)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태조 때 개지변(皆知邊)을 지배하고 있던 호족 박윤웅(朴允雄)이 930년(태조 13)에 최환(崔奐)을 보내 항복을 청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의 공이 컸으므로 하곡(河曲)·동진(東津)·우풍(虞風)의 3현을 합해 흥례부(興禮府, 또는 興麗府)로 승격함에 따라 임관군의 영현에서 벗어나 비로소 한 고을로서 발전해 오늘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983년(성종 2)에는 고려왕조가 지방제도를 강화해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면서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995년(성종 14) 다시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해 전국을 449현으로 분할, 흥례부를 공화현(恭化縣)으로 낮추고 별호를 ‘학성(鶴聲)’이라 했다가, 1018년(현종 9)에 이르러 공화현·헌양현·기장현·동래현를 합해 울주로 개편하고 방어사(防禦使)·지울주사(知蔚州事)를 두었다.
1143년(인종 21)에 헌양현을 분립시켜 감무(監務)를 두었고, 동래도 현령(縣令)을 두어 분립시켰다. 울산은 바다와 접해 있고,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고려 후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선시대〕
1397년(태조 6) 울주에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다가, 1413년(태종 13) 지방행정 개편에 따라 진을 폐지하고 울산군으로 개칭해 비로소 울산(蔚山)이라는 칭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1417년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慶尙左道兵馬節制使營)을 경주에서 울산 병영동(兵營洞)으로 옮기고, 1418년 염포(염浦)를 개항해 왜관을 설치했으며, 1426년(세종 8)에는 병마절도사영을 폐지하고 다시 진을 두어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가 지군사를 겸하다가 1437년 병영을 다시 설치하였다.
같은 해 1월에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판관을 더 두었다가 8월에 다시 군으로 강등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세종 때 울산군의 호구는 1,058호에 4,161명이었다.
1459년(세조 5)에는 동래에 있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을 개운포(開雲浦)로 옮겼으며, 1510(중종 5)에 삼포왜란으로 염포가 폐쇄되고, 1592년(선조 25)에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이 다시 동래군으로 옮겨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의병이 경주·울산을 수복하고 멀리 대구·창녕·동래까지 나아가 적을 무찌르는 등 큰 전공을 올렸다. 그 공훈으로 당시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건의로 1598년 울산도호부로 승격하고 병마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으며, 이듬해인 1599년에 임진왜란의 피해로 자립할 수 없는 언양현을 울산도호부에 합쳤다가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현으로 복구시켰다.
1616년에는 병마절도가 겸직하던 도호부사직을 전임의 도호부사를 두어 맡도록 하였다. 1681년(숙종 7)에는 하미면(下未面)을 기장현에 이관하고 받기를 되풀이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거의 다 되돌려주었다. 1771년(영조 47) 울산의 호구는 8,670호에 3만2,973명이었다.
〔근 대〕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를 개정해, 도제도를 폐지하고 23개의 부를 새로이 두었는데, 이 때 울산은 도호부를 군으로 개칭하고 언양·양산·동래·기장·거제·경주·영일·홍해군 등과 함께 동래부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06년에는 칙령 제49호의 시행으로 지방행정을 정리해 온남면의 일부와 외남·웅상면을 양산군으로 이속하였다. 1914년 부·군을 정리·폐합하는 지방제도 개편시 언양군을 울산군에 병합했는데, 이 때 태화강 이남의 삼산·달동·신정·옥동지방을 합해 울산면, 하부면과 내상면을 하상면으로 하고 현남면과 현북면을 합해 대현면이라 개칭하였다.
1931년 11월 1일 울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4년 동면을 읍으로 승격시켜 방어진읍(方魚津邑)으로 하고, 1944년 대현면을 울산읍에 편입해 출장소를 두었다가 1946년 다시 대현면으로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병영의 비밀청년회조직이 주도해 일본경찰과 충돌하는 격렬한 시위로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언양·남창·웅촌·온산까지 만세운동이 파급되어 4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현 대〕
해방 이후 울산은 경제개발정책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1962년 2월 1일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전 지역과 청량면 두왕리, 범서면 무거·다운리, 농소면 송정·화봉리를 합해 울산특정공업지구로 지정, 공포하고 같은 해 6월 1일 울산시로 승격시키는 한편, 울산군을 울주군으로 개편하였다.
1963년 3월 12일 울주군 서생면이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양산군의 관할이 되었으나 1983년 2월 15일 다시 울주군으로 복귀하였다. 또 1973년 3월 12일 삼남면의 구수리를 언양면으로 편입시키고, 1973년 7월 1일 두서면에 속했던 소호리를 상북면으로 이속시켰으며, 1975년 10월 1일 온양면의 덕신리와 청량면의 용암·학남리가 온산면으로 편입되었다.
1985년 7월 15일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중·남구가 설치되었고, 1988년 1월 1일 방어진출장소가 동구청으로 승격되어 3구 40개 동이 되었다. 1991년 1월 1일 울주군이 울산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울산시와 울산군이 통합되고, 1996년 12월 31일 〈울산광역시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북구가 신설되고 울주군이 울주군으로 복군되어 4구 1군 체제가 되었다.
이후 1998년 3월 1일 동구 염포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되었고, 2002년 남구 무거동 일부를 울주군 범서읍으로, 울주군 범서읍 일부를 남구 무거동으로 각각 편입하였다.
국보 제147호 울주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선사·역사시대의 조각·바위그림 및 여러 종류의 명문 유적.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71년 2차례에 걸쳐 정식 조사되었다.
각석은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강안 암벽지대에서 있다. 이 지역은 울산과 경주를 잇는 길목지대에 해당되어 울산·언양 일대의 풍부한 물산이 경주로 운반되는 교통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 각석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암질은 적색 셰일이고 크기는 너비 9.5m, 높이 2.7m이다.
상부의 문양은 주로 쪼기〔彫琢〕기법을 썼으며 하부는 긋기〔線刻〕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시대 및 제작집단이 달랐음을 뜻한다.
〔상부〕
〔①기하학적 문양〕상부의 기하학적 문양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름모꼴무늬·굽은무늬·둥근무늬·우렁무늬·십자무늬·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좌·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보다 곡선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아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마름모꼴무늬로 홑무늬·겹무늬 외에 연속문이 있다. 연속문에는 가로·세로로 겹친 것과 한 무늬 내부에 같은 무늬가 두 겹·세 겹 반복되거나 점이나 빗금이 있는 것도 있다.
굽은무늬에는 가로굽은무늬와 세로굽은무늬가 있다. 원시문양에서 이들은 각기 물결과 뱀을 상징한다. 상부 오른쪽 끝의 열매를 꿴 화살모양의 무늬는 암수의 결합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상부의 이와 같은 문양들은 본질적으로 신석기시대 무늬토기의 기하학문양과 연결된다. 표현이 단순, 소박하면서도 명쾌한 무늬토기 문양양식을 이어받아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양은 곡식이나 음식물 등이 항상 풍요롭기를 바라는 청동기시대인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②동물상〕동물상은 대부분 상부 왼편에 있다. 사슴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새 등이 있다. 사슴은 대개 암수 2마리가 서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쌍으로 표현된 사슴 중 수사슴은 뿔이 매우 크고 가지가 무성해 순록의 일종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크기가 작은 사슴들은 신체의 특징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염소나 말 등 다른 동물로 볼 수 있는 것도 여러 마리 있다.
상부 중심부에는 도안화된 얼굴의 한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이는 당시의 어떤 종교의식이나 신앙관념과 관련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들 동물상과 기하학 문양 사이에는 곡식이삭이나 풀뿌리·꽃봉오리를 나타낸 한 문양도 있으나 상징성을 띤 기하학 문양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석각 상부문양 제작집단의 종교신앙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이다.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선사인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되며 반인반수(半人半獸) 관념의 기원과 관련해 중요하게 평가되는 자료이다.그 밖에도 몸체가 긴 2마리의 동물이 교미를 하는 듯 돌아서서 꼬리를 맞댄 채 서있는 모습이 2군데 보인다. 어떤 동물을 나타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부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기 새겨져 있다.
〔③인물상〕인물상은 뚜렷이 파악되는 것이 모두 7군데이다. 얼굴만 묘사된 것과 전신을 나타낸 것 등 두 종류가 있다. 모두 원시암각화 특유의 극도로 단순화된 표현법을 쓰고 있어 사실성이 약하며, 일면 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부〕
석각 하부는 선각화와 명문이 뒤섞여 있다. 대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각화는 인물·기마행렬도를 비롯해 환상적인 동물들과 자연계의 동물, 크고 작은 배가 항해하는 모습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명문에는 영랑(永郎)·금랑(金郎)·정광랑(貞光郎) 등 신라 화랑의 명칭을 비롯해 관명·직명·인명 등이 여럿 새겨져 있어 신라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①선각화〕인물·기마행렬도는 3군데 보인다. 이 중 하부 중앙 제2행렬도의 한 기마인물은 눈·코·입을 점으로 찍어 표현하고 얼굴 윤곽을 마름모꼴로 처리한 것이 신라의 토용(土俑)이나 토기선각화 중 인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과 흡사해 주목된다.
상부 왼편 제3행렬도의 말은 질주하는 순간의 모습이 간략한 몇 개의 선만으로 잘 표현되어 제작자의 빼어난 표현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환상적인 동물로는 용으로 보이는 것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특히, 하부 오른편 끝에 새겨진 용은 머리를 쳐들고 왼편을 향해 허공을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체의 지느러미와 비늘, S자형으로 휘며 뒤로 뻗은 꼬리부분 등이 세심하게 처리되어 있어 언뜻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보이는 청룡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자연계의 동물로는 말이 홀로, 혹은 군마(群馬)의 형태로 묘사되었고, 새도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그 밖에 큰 돛을 단 범선과 사람이 노를 젓고 있는 용머리의 배는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이다.
〔②명문〕명문 중 확인된 글자는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인다. 원명이 새겨진 기사년은 신라 법흥왕 12년(525), 추명에 새겨진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된다.
뒤의 추명은 왕과 왕비가 이 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 곳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탁부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뜻한다. 이 곳은 사탁부의 고유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제명에는 여러 화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 곳을 찾아 도량(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는 신라 6부체제의 발전·변화과정과 내용을 규명해나가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국보 제285호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蔚山大谷里盤龜臺岩刻畵)
1971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200여 점을 웃도는 사람과 짐승, 각종 생활장면 그림의 출토로 발견 초기부터 역사학계와 고고학계, 미술사학계 등으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의 중심하천인 태화강의 지류, 대곡천 중류 계곡 오른쪽 절벽의 강물에 잇닿는 부분에 새겨졌다.
〔표현범위〕
암각화는 너비 6.5m, 높이 3m 가량의 주암면에 집중적으로 새겨졌으며, 주암면 좌우의 크고 작은 암면에도 표현되었다. 암각화가 새겨진 면은 주(主)암면을 포함해 모두 10개에 이른다.
〔표현기법〕
암각화는 표현대상의 내부를 모두 쪼아낸 면쪼으기[面刻, 일명 모두쪼으기]기법과 윤곽만을 쪼아낸 선쪼으기[線刻]기법으로 새겨졌다.
〔표현내용〕
암각화의 내용은 크게 바다짐승과 뭍짐승, 사람, 도구, 기타로 나눌 수 있다. 바다짐승으로는 고래, 물개, 바다거북 등이 발견되며, 뭍짐승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개 등이 다수 보인다.
사람은 얼굴만 그려진 경우(가면으로 해석)와 정면상 및 측면상, 배에 탄 모습이 보인다. 측면상의 경우 성기를 돌출시킨 점이 특징적이다. 도구로는 배, 울타리, 그물, 작살, 방패, 노(弩)와 유사한 물건 등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다수의 그림이 암벽 곳곳에 흩어져 있다.
〔연대〕
표현기법과 암각내용에 의거해 암각화의 제작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초기철기시대에 걸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격〕
보물 제173호 망해사지석조부도(望海寺址石造浮屠)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망해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2기. 높이 동부도 3.4m, 서부도 3.3m.
망해사 법당 북쪽에 남향하여 장대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널찍한 대지를 마련하여 동서로 부도를 세웠다. 일찍이 파손되었던 것을 1960년 복원하여 원형을 보이게 되었다. 두 부도는 건조양식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으며, 전체규모에 있어서도 같은 크기를 보이고 있다. 다만 서쪽 부도에 비하여 동쪽 부도는 손상이 많다.
이 부도는 전형적인 신라부도의 양식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따르고 있으며, 여러 장의 큼직한 장방형 판석을 마련하여 그 위에 기단부를 형성하였다. 기단부는 평면 8각이며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상대·중대는 1매씩이나 하대만은 2매를 겹쳐놓았다.
즉 하대는 밑에 8각의 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대석(蓮華臺石)을 올려놓았는데, 8각 대석의 측면에는 8면마다 하단에 얕은 각형의 굽을 새기고 상단에는 갑석형(甲石形)을 새겼으며 그 중간에는 전면에 꽉 차도록 안상(眼象)을 1구씩 얕게 조각하였다.
연화대석은 8각을 아래의 안상석 8각에 맞추어놓고 8판(八瓣)의 복련(覆蓮)을 조각하였는데, 복련의 안쪽에는 고사리문,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이 조식되어 있다. 그리고 복련대 상면의 중앙에는 8각형으로 1단의 높직한 각형 굄을 새기고 그 위에 낮은 3단의 각형 굄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8면에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모각되었을 뿐 아무런 조식이 없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대칭적으로 8각형의 각형 받침단을 조각하였는데, 상단의 높은 받침 1단은 하대석 하단 굄과 대칭이나, 그 밑의 낮은 받침단은 2단뿐으로 하대석 굄 3단보다 1단이 적다.
상대 측면에는 단엽(單葉)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는데 아래 위에 16판씩 이중으로 조각하여 화사한 연화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상대석 상면에는 4분원의 굄을 모각하여 그 위에 8각의 탑신 굄석을 올려 놓았다.
탑신은 각 면에 양쪽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고 상면에는 창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문비형(門扉形)은 4면에만 모각되어 있다.옥개석(屋蓋石)은 평면 8각으로 그 밑의 각 부재와 같은 평면이어서 이 부도가 8각원당형의 기본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마와 추녀는 수평으로 넓은 편이며, 각 전각(轉刻)에 약간 반전(反轉)이 표현되었으며 전각의 상하에 2개, 그 좌우에 2개씩, 전각마다 모두 6개씩의 작은 원공(圓孔)이 마련되어 풍경을 달았던 흔적으로 보인다.
보물 제369호 석남사부도(石南寺浮屠)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석남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높이 3.53m.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부도로서,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를 놓았다.
기단부의 하대석(下臺石)도 8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하단으로 되어 있다. 하단에는 4구의 사자 (獅子)를 돋을새김하였는데, 각 면의 사자는 각기 다른 형태의 동작을 취하고 있다. 하단석 윗면은 곱게 다듬었고 호형(弧形)에 가까운 1단의 굄을 조각하여 상단석을 받치고 있다.
상단석의 아랫면에도 1단의 받침이 각출(刻出)되어 하단의 윗면에 있는 굄과 대칭을 이루었다. 상단석은 8각의 각 모서리와 모든 옆면에 권운문(卷雲文)을 양각하고 윗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얕게 각형(角形) 굄을 새겨 넣었다. 그 위에는 높은 호형과 낮은 각형 굄을 각출하여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8각을 이루고 있으나 고복형(鼓腹形)으로 조성하여 아래위가 좁아졌다. 각 면에는 좌우 상하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1구씩 오목새김하였으며, 각 안상 안에는 중앙에 4엽화문(四葉花文)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8각 앙련(仰蓮)이 조식(彫飾)되었는데, 아랫면에 1단의 각형받침이 있다. 옆면에는 각 모서리에 1판씩 단엽앙련(單葉仰蓮)을 조각하고 그 사이사이에도 겹치게 앙련을 1판씩 배치하였다. 상연(上椽)은 갑석(甲石) 모양이며, 윗면에는 8각으로 된 1단의 각형굄을 마련하여 8각 탑신석을 받았다.
옥개석은 추녀가 짧고 아랫면에 2단의 각형 받침이 조각되었는데 추녀 끝을 향해서 면마다 각형의 연목(椽木:서까래)이 모각되었다. 옥개석 윗면은 낙수면이 평박하고 8면의 합각(合角)마다 우동(隅棟 : 옥개석의 귀마루)이 있는 가운데 기왓골을 표현하였다.
각 우동의 전각부(轉角部)에는 작은 귀꽃을 조각하였다. 상륜부(相輪部)에는 현재 앙화(仰花)·보개(寶蓋)·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이 부도는 1962년 해체 수리하였을 때 기단부 중대석인 고복석 윗면 중앙에서 장방형의 사리공(舍利孔)이 확인되었다.
보물 제370호 간월사지석조여래좌상(澗月寺址石造如來坐像)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의 고승 자장(慈藏)이 지은 사찰로, 당시에는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차츰 퇴락하여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 의해 파괴되어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뒤 조선시대인 1634년(인조 12)에 명언(明彦)이 다시 지었으나 1836년(헌종 2) 큰 흉작이 들어 다시 폐사되었다.
1984년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와 석탑 2기, 축대, 주춧돌, 장대석 등이 발견되어 통일신라시대의 유구(遺構)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청동여래입상, 청동보살입상, 기왓조각, 질그릇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석탑 2기는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미루어볼 때 후대에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산지형 양탑일당식(兩塔一堂式) 가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지금은 법당을 지어 봉안하고 있으나, 오랫동안 노천에 방치되어 있어서 광배가 파손되었고 대좌도 완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신체는 어깨가 좁고 가슴 또한 빈약한데, 이처럼 위축된 불신이기는 하지만 인체의 형태를 세련되고 깔끔하게 처리하였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어 아래를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으며, 왼손은 다리 위에 얹어 손바닥은 위를 향하고 있다. 단정한 얼굴과 신체에 비해, 두 손은 크고 형식화되어 약간 어색해 보인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몸에 밀착되어 신체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며, 얇게 빚은 듯이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凸형의 평행 계단식 옷주름은 단정한 불신과 잘 조화되고 있다.
대좌는 상대의 앙련(仰蓮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과 하대의 팔각복련(八角覆蓮) 안상석(眼象石), 그리고 맨 아래에는 안상이 새겨진 팔각대석이 놓여 있다. 즉, 중대는 없고 대신 중대의 위치에 완전한 하대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 하대석은 현재 법당 앞에 놓아둔 다른 두 석불상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앞으로 좀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재현한 듯한 풍만하고 사실적인 얼굴이라든가, 약간 위축되었으나 인체를 방불하게 하는 불신 등은 8세기 말에서 9세기경의 불상 양식이다. 즉,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 동국대학교 소장 법주사석불좌상 등의 전형적인 사실주의 양식과 공통되는 것으로서, 이 불상의 연대도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교통안내
서울산IC →양산방면 →1㎞ →우측 →작천정계곡 → 간월사지
현지교통
1) 언양터미널에서 등억온천단지 방면 버스를 타고 간월마을 입구에서 하차한 후 도보 로 30분 정도 걸어야 함.
2) 울산 공항에서 402, 422번 타고 신복로토리에서 1703,1723번으로 갈아타고 언양 하 차, 다시 323번으로 갈아타고 간월마을 입구 하차
3) 울산역에서 337,327,807번을 타고 언양에서 하차하여 323번으로 갈아타고 간월마을 입구 하차
4)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03,1713,1723번을 타고 언양에서 하차하여 323번으로 갈아타 고 간월마을 입구에서 하차
보물 제441호 태화사지12지상부도(太和寺址十二支像浮屠)(중구)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부도. 높이 1.3m.
수습 즉시 부산의 경상남도 도청 마당에 옮겨졌으나 현재는 울산시내의 학성동공원에 옮겨져 보존되어 있다. 이 부도가 발견된 태화리 일대는 신라 선덕여왕대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태화사지(太和寺址)로서 동리이름도 절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 부도의 구성은 장방형 대석과 그 중앙에 안치된 종형(鐘形) 탑신부의 각 1석으로 아주 간단하다. 전 부재가 화강암이며 각 면의 돌다듬기는 부드러운 편이다.
대석 앞면에 3구의 안상을 조각하고 좌·우 측면에 2구씩을 배치하였으며, 뒷면에는 안상이 없는데 안상의 형태는 가늘고 긴 편이며 대석 상면은 평평할 뿐 굄대 등 아무런 시설이 없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은 전체높이 110㎝, 밑지름 90㎝로서 최하단에 이르러 약간 좁아졌을 뿐 거의 수직의 탑신부를 이루었으며, 중간 이하 부분의 표면에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중간부 이상은 차츰 굽어지면서 반구형을 이루고 정상에는 작은 꼭지를 남기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마치 보주형 광배의 상부 곡선과도 같다.
탑신 중앙 상부에 감실(龕室)이 개설되어 거의 방형에 가까운데 그 상연(上椽)은 곡선을 이루었고 내면은 다소 안으로 경사되었다. 감실 입구의 바깥쪽 둘레에 한 줄의 홈을 파놓았는데, 이것은 배수를 위한 배려라 하겠다. 이 감실의 위치는 표면 하부에 돌려진 12지상과 함께 이 부도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 부도 명칭을 십이지상부도라 부른 것은 바로 이 십이지상들이 조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도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한국 석종형부도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특히 당시 신라의 문호였던 울산 태화강 하류의 태화사지에서 발견되어 주목된다.
울산광역시의 추천답사코스
당일코스
1) 울산시내 → 간절곶 → 개운포와 처용암 → 활어회
2) 울산시내 → 신불산 억새평원 → 신불산 자연휴양림 → 한우불고기단지
3) 울산시내 → 장생포해양공원 → 장생포고래박물관 → 장생포고래고기 → 진하해수욕장 → 간절곶 등대
1박2일코스
1) 울산시내 → 석남사 및 운문령 → 귀바위 → 쌀바위 → 가지산 → 쌀바위 → 귀바위 → 석남사
2) 울산시내 → 간월산장 → 홍류폭포 → 간월재 → 신불산 → 공룡능선 → 간월산장 → 등억온천
2박3일코스
울산시내 → 박제상유적지 → 반구대 암각화 , 천전리각석 → 석남사 → 간월사지 → 작천정
연 락 처 : 울산광역시청 관광과 052-229-3861~3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설화
울주군에는 신라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설화가 많이 전해오고 있으며, 사찰연기설화·장자못계전설 등을 비롯한 지명전설이 많이 전승되고 있다. 〈치술령 망부석전설 ?述嶺望夫石傳說〉은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과 그 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제상이 일본으로 가서 이미 볼모로 와 있던 미해왕자를 본국으로 빼돌리고 자신은 처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은 치술령에 올라가 죽어 망부석이 되고, 함께 죽은 두 딸도 바위가 되었다.
세 모녀의 넋은 새가 되어 날다가 바위틈으로 숨어 버렸다. 세 모녀의 넋이 새가 되어 날아간 마을은 ‘비조(飛鳥)’라고 불리게 되었고, 새가 숨은 바위는 ‘은을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이 고장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령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원효대사와 천성산(千聖山) 전설〉을 소개하면, 원효가 별을 보고 중국의 한 법당에 변고가 일어날 것을 예견해 부엌문을 그 쪽으로 날려 보냈다. 중국의 승려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나는 판자를 보려고 나왔더니 뒷산이 무너져 법당을 덮쳤다. 이에 생명을 구하게 된 승려들이 떨어진 판자에 ‘海東新羅國沙彌元曉千僧救濟(해동신라국사미원효천승구제)’라 쓰인 것을 보고 신라의 원효를 찾아왔다. 이 때 찾아오는 수많은 승려들을 수용하기 위해 원적산에 운흥사를 창건하였다.
부엌문을 던졌던 암자를 ‘척판암(擲板庵)’이라고 하고, 원적산에 1,000명의 승려가 수도했다고 해 ‘천성산’이라고도 부른다. 길을 가다가 칡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도술을 부렸더니, 그 뒤로 천성산의 칡은 길을 가로질러 자라지 않는다는 등 많은 설화가 있다.
상북면 천전리에는 〈천전석불전설〉이 있는데, 전쟁이 나서 군포(軍布)를 어린이, 심지어 석불에까지 부과하였다. 억울한 마을사람들이 석불을 보고 탄식했더니, 부처의 두 어깨에 옷감 수십 필이 걸쳐졌다는 전설이다.
그리고 상북면 길천리의 〈동뫼산전설〉은 마고할미가 언양성을 쌓는 일을 도우려고 밀양에서 산을 하나 뽑아 가져오다가, 성을 다 쌓았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 두어 산이 되어서 일명 밀양산(密陽山)이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보물 제382호 청송사지삼층석탑(靑松寺址三層石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청송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높이 5.5m. 2층기단 위에 세워진 신라 전형양식의 방형 3층석탑이다. 하층 기단은 매우 빈약한 편으로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을 한데 붙여 만든 석재로 결구하였으며, 각 면에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 2주씩을 모각(模刻)하였다.
갑석(甲石)은 몇 개의 얇은 판석을 덮고 그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굄돌을 끼워서 상층 기단을 받치게 한 것이 특이한 수법이다. 상층 기단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 1주씩을 모각하였고, 위에 두툼하고 처마가 짧은 갑석을 얹었다. 갑석에는 밑에 부연이 있고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굄이 있어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별개의 석재로 조성하였는데, 1층옥신이 특히 장대하고, 2층은 높이가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어 균형이 좋은 편이 못 된다. 옥개석에는 각 층 5단의 받침과 위에 1단의 굄이 있으며, 처마 끝은 수평을 이루었으나 처마 길이가 짧아서 지붕이 짧고 좁은 느낌을 면하지 못하였다.
상륜부(相輪部)는 사각형의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탑은 기단의 결구가 정제하지 못하고 1층탑신이 지나치게 크며, 옥개가 좁은 것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석탑의 일례로 주목할 만하다.
1962년 보수공사 때에 상층 기단에서 청동제사리합(靑銅製舍利盒)과 그 안에 봉안된 청동여래입상 1, 유리구슬 16, 수정곡옥(水晶曲玉) 1, 관옥(管玉) 1 등 30여점이 발견되었다.
청송사에 대하여는 ≪동국여지승람≫에 “망해사·청송사는 문수산에 있다 (望海寺靑松寺俱在文殊山).”로 보일 뿐이나 현재의 청송마을 전체가 절터라고 전하고 있는 만큼 원래는 상당히 큰 사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어물동마애여래좌상(於勿洞磨崖如來坐像)
울산광역시 북구 어물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본존불상 높이 5m, 너비 3.5m, 좌우협시보살상 높이 3.5m, 너비 1m.
커다란 자연의 암벽 면을 이용하여 본존좌상과 좌우로 2구의 협시보살입상을 높은 부조〔高浮彫〕하였다. 암벽의 재질이 견고하지 못한 사암제(砂岩製)여서 전면에 손상이 심하다. 얼굴 모습이나 옷주름 등의 세부 표현도 그 형상이 분명하지 않다.
중앙의 본존상은 결가부좌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는 크고 얼굴은 네모반듯한 모습이다. 마멸이 심하여 잘 알아볼 수 없으나 도톰한 볼과 입술에는 약간의 미소가 느껴진다. 머리칼은 나발로 여겨지며, 양 귀가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닿았다. 목에는 희미하게나마 삼도가 보인다.딱 바라진 듯 당당한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가 걸쳐 있으나 세부의 옷주름 선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른손은 들어 가슴 앞에 붙이고, 배 앞에 댄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올려놓아 이 불상이 약사불임을 알 수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입상이면서도 본존상보다 그 크기가 훨씬 작아졌고, 특히 얼굴이 몸체에 비하여 매우 크게 표현되었다. 머리에는 보관을 썼으며 보관 위로는 원형의 보주형 장식이 있다. 이 보주형 장식 안에 일상(日像)과 월상(月像)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이 두 보살상이 약사불의 협시로 등장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본존상과 달리 갸름한 편이며, 양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얼굴 이하의 몸체는 특히 마모가 심하여 그 형상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 손은 가슴 앞에 대고 다른 한 손은 배 앞으로 내린 것 같다. 특히 이 두 협시보살상의 신부(身部) 표현은 본존상에 비하여 매우 섬약하고 도식화된 느낌이 든다.
이와 같이 약사삼존을 조각한 마애불로서는 801년 명의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의 방어산마애불(防禦山磨崖佛, 보물 제159호)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지역적으로 인접한 점에 주목된다.
본존상에서 느껴지듯 삼국시대 불상과 같은 고식(古式)을 띠고 있다. 그러나 머리와 가슴까지의 상부에만 치중하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섬약해지고 형식적으로 얕게 부조하는 방법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마애불 형식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제작 시기 역시 통일신라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약사삼존 가운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한 도상(圖像)이 분명한 점에서 매우 귀중한 예라 할 수 있다
유형문화재 제1호 울산동헌및내아(蔚山東軒및內衙)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선조 32년(1599)에 울산이 부로 승격된 후 숙종 7년(1681)에 부사 김수오가 지었으며, 숙종 21년에 김수오의 아들 김호가 ‘일학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뒤 영조 39년(1763)에 부사 홍익대가 다시 지어서 현판을 ‘반학헌’이라 고쳐 달았다고 하나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영조 36년에 다시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헌의 규모는 앞면 6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또한 관청의 안채인 내아는 앞면 6칸·옆면 1칸의 ㄱ자형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울산 동헌은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관청·수군절도사가 머물던 관청과 더불어 울산의 대표적인 관청이었으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유형문화재 제2호 상천리국장생석표(象川里國長생石標)
상천리 국장생 석표는 통도사(通度寺)에서 동북쪽으로 4㎞ 지점에 있으며, 통도사를 중심으로 한 4만7천보(步)의 사역(寺域) 12곳에 세운 장생표(長생標)의 하나로, 사찰의 경계(境界), 풍수(風水), 방액(防厄)을 위한 장생석표이다. 전면의 명문(銘文)은 자경(字徑)이 약5∼9㎝의 음각(陰刻)된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어 있고, 형태는 거친 자연석의 전면을 막다듬하여 곧추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 글자가 있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장생의 세워진 위치와 국가에서 통첩을 내려 세운 것으로서 사원의 경계표지와 세운 일자가 나타나 있다. 제작 연대는 통도사 국장생과 함께 고려(高麗) 선종(宣宗) 2년(1085)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120㎝, 너비는 62㎝이다.
앞면에는 글자의 크기가 5∼9㎝인 명문(銘文)이 이두문으로 새겨져 있는데, 마멸되어서 전체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장생을 세운 위치, 국가에서 통첩을 내려서 세운 일, 사원의 경계표지 및 건립일자 등이 확인된다. 제작연대는 통도사(通度寺) 국장생과 더불어 1085년(선종 2)으로 짐작된다.
유형문화재 제3호 청송사지부도(靑松寺址浮屠)
이 부도는 조선왕조(朝鮮王朝) 시대의 석조물(石造物)로서 인접한 청송사의 덕망(德望)있는 스님의 사리(舍利)를 안치(安置)한 부도탑(浮屠塔)이라고도 한다. 청송사지에서 남서쪽으로 3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종모양으로 밑부분인 대석(臺石)에는 연꽃잎과 신장(神將)이 조각(彫刻)되어 있고 "서응당진흡대사(瑞應堂眞洽大師)"라는 명문이 있다. 일부 도괴 되어 있던 것을 1982년에 보수하였다.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대석(基臺石)을 얹었는데 이 기대석의 앞면에는 신장상(神將像)의 머리부분만을 양각(陽刻)하였고 뒷면에는 수신상(獸身像)을 음각하고 양측면에는 화문(花文)을 음각하였다.
이 기대석 위에 복엽복련화대(復葉覆蓮花臺)를 얹고 그 위에 다시 단엽앙련화좌대(單葉仰蓮花座臺)를 받쳐 탑신을 안치하였다. 탑신의 밑부분에는 고사리의 문양을 새기고 상단에는 연꽃 봉오리를 새겼으며 이 봉오리 밑의 탑신에는 복련이 새겨져 있다.
또, 이 부도의 오른편에는 약간 작은, 같은 형의 부도가 있는데 탑신의 아래 부위에 고사리 문양이 있을 뿐 ‘瑞應堂眞治大師(서응당진치대사)’라고 음각되어 주목되나 진치대사가 어느 시대의 승려인지 분명하지 않다. 기대석의 사면에는 각 3구식(三軀式)의 화문을 음각하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4호 운흥사지부도(雲興寺址浮屠)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운흥사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부도. 2기.
운흥사터에는 모두 7기의 부도가 있는데,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금당터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2기의 부도이다.
크기만 서로 다를 뿐 거의 양식이 같아서, 바닥돌 위로 2단의 기단(基壇)을 놓고 그 위로 종모양의 탑몸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각각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옆면에 새겼으며, 위층 기단은 밑면에 굵은 연꽃무늬를 둘러놓았다. 탑몸돌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조그맣게 돌출되어 있다. 그 중 1기에는 탑신의 밑에 굵은 띠를 둘러 종 모양을 간략하게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유형문화재 제5호 석남사삼층석탑(石南寺三層石塔)
하층기단의 일부가 땅에 묻혀 있어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의 수를 확인할 수 없으나, 갑석(甲石)의 상면에 호각형(弧角形)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양 우주와 1개의 탱주가 정연히 새겨져 있다.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상층기단 갑석의 상면은 평박하게 조성하였는데,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副椽)이, 상면에는 각형 4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초층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정연히 새겨졌는데, 상층으로 이를수록 정연한 체감비(遞減比)를 느낄 수 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매층 각형 4단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었고, 상면에는 각호각형(角弧角形) 3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석을 받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7호 울산향교(蔚山鄕校)
향교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울산향교는 조선(朝鮮) 선조(宣祖)시 학성동(鶴城洞) 북쪽인 반구동 구교마을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어 효종 3년(1652) 현 장소로 옮겨 중창(重創)하였으며, 광복후에는 한때 명륜중학교로 사용하였었다. 향교는 각 지방에 있는 문묘(文廟)와 이에 부속된 옛날의 향교를 통칭하는 말이다. 경내에는 공자와 4성, 송조(宋朝) 2현,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을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유생들이 강학(講學)하던 명륜당(明倫堂) 및 동·서재(東·西齋), 동·서무(東·西無), 전사청(典祠廳), 전교실(典校室), 고직사(庫直舍), 청원루(淸遠樓) 등이 있다.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학문을 연마하던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무와 서무, 동재와 서재, 청원루, 전사청, 전교실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서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30명의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한문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동축사는 『삼국유사』의 황룡사 장륙조에 의하면, 인도의 아육왕이 인연 있는 국가에서 장륙존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여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분을 배에 실어 띄울 때 함께 보냈다는 1불과 2보살의 상을 모시기 위하여 신라 진흥왕 34년(573)에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그 후 경순왕 8년(934), 고려 정종 때, 조선 세조 3년(1457), 1931년, 1975년,2005년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동축사 삼층석탑은 신라의 전통양식인 중층기단 삼층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된 이 탑의 기단은 면석이 모두 없어져 원래의 정확한 높이를 알 수 없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퉁이에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지붕돌의 받침은 1·2층은 5단이나 3층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개만 얹혀 있는데, 돌의 재질이 탑신부와 다른 사암계통이어서 이 석탑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2005년 현 위치로 옮겨 기단부의 일부 부재를 첨가하여 복원 하였다
유형문화재 제15호 문수사석조아미타여래좌상(文殊寺 石造 阿彌陀如來坐像)
얼굴은 턱 쪽으로 약간 각이 져 있으나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불상의 법의(法衣)는 가슴에 승기지(僧祇支)를 입고, 양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에 오른쪽 어깨를 가린 편삼(偏衫)을 걸치고 있다. 두꺼운 법의 때문에 신체의 윤곽선은 감추어진 모습이다. 오른손은 촉지인(觸地印)을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무릎 위에 두었다.
불상에서 나온 복장(腹藏) 유물에는 조성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명한 화사(畵師)였던 지연(指演) 스님이 1787년(정조 11) 세상을 떠난 부모와 스승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조성하여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제작 연대가 명확하여, 조선 후기 불교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16호 문수사탱화(文殊寺 幀畵 )
ㅇ석가모니 후불탱화[조선후기 제작, 크기 178㎝×180㎝]
조선시대 후기(1861년) 제작된 것으로 면본채색으로 1폭의 면 바탕위에 그렸으며, 키형광배를 배경으로 정면향(正面向)한 설법인의 석가여래를 크게 묘사하고 있는데, 탁의를 덮은 방향대좌 아래 좌우에는 연화(蓮華)를 들고 있는 문수와 보현보살이 좌우협시로 배치되어 있음.
ㅇ지장탱화 [1893년 제작, 크기 154㎝×114.5㎝]
조선후기 제작된 것으로 면본채색으로 1폭의 면 바탕 위에 그렸으며, 탁의로 덮은 방형대좌와 연화좌 위에 정면향하여 한손에 보배를 들고 결가부좌한 지장보살을 크게 묘사하였고, 탁의 아래 정면에는 손에 각각 석장과 정병을 들고 선 동자를 배치하고 좌우에는 협시인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좌우로는 십대왕과 상단에 판관 및 녹사, 사자, 천동천녀 등이 배열되어 있음. 채색은 적색과 청색이 대비를 이루며, 문양이나 필선 등이 매우 섬세함.
ㅇ칠성탱화[1855년 제작, 크기 136.5㎝×102.5㎝]
조선후기 제작된 것으로 견본채색으로 4폭 비단을 연결하여 그렸으며, 그 화면은 중앙 거신광을 배경으로 치성광여래삼존을 중심으로 상·중·하 삼단의 좌우대칭 구도를 이루고, 상단 칠성여래로부터 중단 성군, 하단 삼태육성과 28숙 등 54위의 존상이 묘사되어 있음.
ㅇ3점의 문수사 소유 탱화는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화기(畵記)가 남아 있는 등 불교 문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울산지역에 남아 있는 탱화로서는 희소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되 문수사 탱화로 일괄 지정함
이 탱화는 울산 인성암 대웅전 우측면에 봉안되어있는 것으로 가로 105cm, 세로 106.5cm 크기이다. 1폭의 면 바탕위에 화면의 왼쪽에는 보관을 쓰고 연꽃을 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금강권보살(金剛眷菩薩)과 일궁천자(日宮天子)가 왼쪽에서, 금강삭보살(金剛索菩薩)과 월궁천자(月宮天子)가 오른쪽에서 시립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긴 창을 들고 있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을 주조신(主竈神), 주산신(主山神), 호계대신(護戒大神), 복덕대신(福德大神), 도장신(道場神), 가람신(伽藍神)이 에워싸고 있다. 화면의 상단부 병풍 앞에는 7위의 천동(天童)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 처용암(處容岩)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에 있는 바위.
울산광역시 세죽마을 해변에서 약 150m 떨어진 울산만 가운데 있는 186평 규모의 바위섬으로 되어 있다.
처용암에 관한 유래전설은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용암은 처용랑과 개운포의 설화와 관계가 있는 바위이다.
신라 헌강왕이 이곳 개운포에 놀이를 와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운무가 가려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바다 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왕은 즉시 영을 내려 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현 울주군 청량면 망해사) 그러자 운무는 씻은 듯이 걷히고 해가 나서, 이곳을 개운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동해 용왕이 크게 기뻐하여 바다에서 일곱 왕자를 거느리고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 중 처용이 왕을 따라 서울(경주)로 가서 미모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급간이란 벼슬을 얻어 정사를 도왔다고 한다. 이 때 처용은 바위 밑에서 나왔는데, 이를 처용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신비롭고 영험이 있는 바위로 여겨져 온 처용암은 흑색 화강암 바위와 그 사이를 비집고 자라난 관목 몇 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헌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의병장 등이 처용암에 모여 기풍제(祈風祭)을 지낸 효험으로 왜적선 13척을 침몰시킨 바 있다고 하였다.
1985년 울산문화원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공동주최하여 세죽마을 바닷가 처용암 입구에 〈처용가〉를 음각한 처용가비를 세웠으며, 울산광역시에서는 처용문화제를 열어 처용무를 비롯한 처용놀이 등의 행사를 하고 있다.
울산광역시 남구 성암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터. 행정구역상 성암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성암동성지(城巖洞城址)’라고도 한다. 성벽의 길이 4,229척, 성내의 면적이 4만8363평방미터나 되는 큰 규모의 성곽이다.
1407년(태종7) 7월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강사덕(姜思德)이 개운포(開雲浦)에 병선(兵船)을 배치할 것을 건의하였다고 한 사실에서 이곳이 포구(浦口)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부터 군사시설이 있었던 지는 알 수 없다.
세종 때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으며 병선 12척과 군사 420명으로 지키게 하였다고 하는데, 1458년(세조 3)에 이를 한동안 폐지하였다고 한다. 1460년에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을 두었고 1483년(성종14)에는 수영(水營)을 두었으나 1592년에 동래(東萊)로 옮겨갔다.
이후에는 1656년(효종7)에 도산(島山)에 있었던 선소(船所)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도 선소마을이라고 한다. 석축은 큼직한 바위같은 돌을 이용하여 기초부분을 쌓고, 위로 가면서 점차 작은 돌로 쌓았는데 임진왜란때 왜성을 축성하면서 왜군에 의해 해체되어 대부분 옮겨가고 지금은 기초부분만 남아 있다.
인성암 석조보살좌상은 대웅전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보살상으로 높이 35cm, 어깨너비 16cm, 머리높이 17cm(보관 포함), 무릎너비 23cm이며, 표면에 개금이 되어 있는 상태로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눈썹, 눈의 표현, 콧수염, 턱수염과 입술에 채색하여 세부표현을 하였다. 보살좌상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등을 곧게 편 상태로 양손을 무릎 위에 얹고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옷은 편삼위에 대의를 살짝 걸친 형식이다.
보살좌상은 방형의 얼굴에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로 내려다 보고 있다. 코는 오똑한 편이며, 인중과 윗입술을 도드라지게 표현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삼도는 음각을 하여 나타내었고 머리부분은 무늬가 없는 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 아래로 흘려 내린 머리카락이 귀를 타고 어깨위로 두 줄 흘러내리고 있다.
한국의 람사르 등록습지 ⑦ 울주 무제치늪
6천년 태고의 신비 간직한 '산중(山中) 스펀지'
비 조금만 와도 진창"… 희귀동식물 257종 분포
멸종 위기에 처한 꼬마잠자리 산란처도 확인돼
울산=김학찬 기자[조선일보]
지난 2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조일리 정족산 무제치늪. 얼기설기 군락을 이룬 진퍼리새(중부이남 습지에만 서식하는 벼과 식물)가 정족산 머리 끝에 걸린 석양을 배경으로 가을 바람에 길쭉한 몸 줄기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진퍼리새 사이로는 가을에 피는 하얀 물매화가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늪지 안내소에서 걸어서 5분 정도 떨어진 무제치 제1늪에선 지난 여름 자주색 꽃을 피웠던 식충식물 '이삭귀개(쌍떡잎식물 통발과)'가 타원형 꽃받침에 싸여 둥근 열매로 익어가고 있었다. 간혹 눈에 띄는 미세한 물웅덩이 속엔 어린 아이 손톱 크기만한 수서곤충 '땅콩물방개'가 숨은 듯 납작 엎드려 있었다.
◆가을 가뭄에 바짝 타들어간 산지습원
무제치늪은 산속의 습원(濕原)이다. 웅촌 덕현마을쪽에서 오르는 데 1시간30분 걸린다. 몇 갈래 다른 마을 길도 있지만, 어느 길로 오르거나 1시간은 넘게 긴 임도(林道)를 걸어야만 6000년 넘게 간직해왔다는 그 속살을 만날 수 있다. 정족산 정상 아래, 빗물로 습지를 유지하는 곳이다.
이번 가을 혹심한 가뭄에 무제치늪은 억새 사이에서 마른 땅거죽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영락없이 마른 초원처럼 보이지만, 세심하게 살펴보면 바닥에 미세한 수로가 많은 분지형 습지다.
◆가장 오래된 산지습지
끈끈이주걱 꼬마잠자리
무제치늪은 6000년 전에 생성된 18만4000㎡(5만6000평) 규모 산지습지로, 해발 749.1m인 정족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국내 산지습지 가운데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1~4늪까지 네 개의 늪으로 이뤄져 있는데, 제1늪은 해발 510m에, 제2늪은 해발 558m에 있고, 거의 붙어 있는 제3늪과 제4늪은 해발 630m에 각각 위치해 있다.
무제치늪이 형성된 것은 심층풍화(지하수면 밑에서 이뤄지는 풍화작용)와 차별침식(지역에 따라 지표면의 단단한 정도가 달라서 서로 다르게 침식하는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정이다. 또 늪의 두터운 심층풍화층 밑에 형성된 화강암 기반암이 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습지 밑바닥에는 미세한 수로가 많이 형성돼 있다. 항상 일정량의 수분과 물이 고여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할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희귀동식물 보고
무제치늪 주변 정족산 일대에는 습지식물 50여종을 포함한 257종의 희귀 동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끈끈이주걱과 이삭귀개 및 땅귀개, 큰방울새란, 진퍼리새 등 희귀 습지식물류가 55종이다. 또 멸종위기종(2급)인 꼬마잠자리와 큰물자라, 메추리장구애비, 애기물방개 등 수서곤충과 벌호랑하늘소, 왕거위벌레, 흰줄표범나비 등 곤충류가 197종이고, 무당개구리, 산개구리 등 양서·파충류가 5종이다. 특히 최근 일본 특산종으로 알려졌던 좀조개풀이 국내 최초로 보고됐고, 멸종위기에 처한 꼬마잠자리의 산란처가 확인됐다.
무제치늪은 이 같은 보존가치가 인정돼 1999년 8월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고, 지난해 12월에는 충남 태안군 두웅습지와 함께 제1늪과 2늪이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최근 찾는 발길 늘어
최근 2~3년 사이 습지 내에 관찰 데크가 설치되는 등 정비사업이 진행되면서 가족단위로 찾는 발길이 다소 늘었다. 하지만 산지 늪인 데다 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임도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관광객이 접근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 보였다.
울산생명의숲 윤석 사무국장은 "무제치가 가진 가치에 비해 주목 받지 못한 것 같아 많이 서운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점이 태고의 신비를 잘 간직할 수 있었던 이점이라는 의견도 있다.윤 국장은 "무제치늪 인근에는 10여 개의 습지가 산재해 있고, 정족산과 인접한 천성산 자락에도 대성큰늪, 밀밭늪 등 13개 습지가 있다"며 "무제치늪을 개별화해 보호하기보다는 주변 지역 전체를 폭넓게 보호지역으로 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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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에 바로 스크랩이나 복사를 해서 올리니 글자가 퍼져서 모양새가 엉망이 되더라구요.
좋은 방법 없을까요 ??
파일을 열어서 파일받기를 하시면 되는데..
아 하 ㅎㅎㅎ 알겠습니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