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우는 바람소리’는 가수‘이정옥’의 데뷔작이다. 이정옥은 1993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이 노래로 대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나는 우연히 이 노래를 듣다가, 가수의 뛰어난 노래솜씨도 좋지만 특히 그 노랫말의 특이함에 매료되었다. 까닭을 이제 밝힌다.
사실, '숨어 우는 바람소리'의 노랫말은 부분적으로는 식상한 표현이 많았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이라든지 ‘통나무집 창가’라든지 ‘길 떠난 소녀’라든지‘하얗게 밤을 새우네’라든지‘차 한 잔’이라든지‘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이라든지‘길 잃은 사슴처럼’ 등등이 그렇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식상한 표현들이 서로 결합되는 순간 뛰어난 다른 표현으로 재탄생하던 것이다.
참으로 절묘한 표현기법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핀다.
1.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라는 표현에서는, 평지의 통나무집이 아니라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에 있는 통나무집임을 드러냄으로써 순간 대단한 시각적 이미지를 획득했다. 넓은 갈대밭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길 수 있는 전제가 마련된 것이다.
2. ‘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라는 표현에서는, 가슴 아픈 일로 잠을 못 이루는 소녀의 불면의 밤이 역력하다. 밤을 단색으로 나타낸다면 검은 색일 텐데, 불면은 그런 검은 색의 밤을 하얀 색으로 지새우는 현상이다.
3. ‘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소리’라는 표현에서는, 가을바람에 흩날리며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는 갈대밭에서 헤어진 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청각적 이미지를 획득했다. 나는 이 부분이 이 노래 노랫말의 백미라고 평가한다. 왜냐면 여기서 숨어 우는 바람소리는‘그 사람’의 것으로 표현됐지만 어쩌면 서정적 자아(소녀)의 심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갈대밭의 바람소리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데 굳이‘숨어 우는’으로 표현한 데서 그 단서를 찾는다. 그냥 우는 것도 아닌, 숨어 우는 소녀. 남모를 가슴 아픔의 애절함이 극에 달했다.
4. ‘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이라는 표현에서는, 뒷부분의 ‘달은 지는데’가 구절 전체를 한 폭의 그림처럼 승화시켜 주었다. 둘이 갈대밭 길을 걸었던 달밤을 추억하는 장면으로써 시각적 이미지가 뛰어났다. ‘달’이 뜨는 게 아니라 지고 있음으로써 그 사람과의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쓸쓸한 과거지사가 됐음을 암시했다.
5. ‘길 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이라는 표현에서는, 평범한 직유법이 의외로 절묘하게 쓰였음을 깨닫게 했다. ‘길 잃은 사슴’은 정처 없는 서정적 자아의 마음일 텐데 ‘길 잃은 사슴= 그리움’이란 등위를 통해서 마음이란 관념의 것을 사슴이란 구체적 형상의 것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결론: 1.이 노래의 노랫말은 ‘식상할 수 있는 표현들을 절묘하게 이어서 남다른 성과를 거둔’ 특이한 경우다.
2. 이 노래의 노랫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각적 이미지가 청각적 이미지로 바뀌는 독특한 이미지 전환법’을 구사한 경우다. 동시(同時)적인 것이 아니라서 공감각(共感覺)이라 할 수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종(異種) 감각들의 어울림이다.
‘숨어 우는 바람소리’ <작사::김지평>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
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소리.
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
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
아- 아- 길 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
쓸쓸한 갈대숲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