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그날이 오면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가장 가련하고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을 꼽자면, 첫 번째로 꼽을 사람들은 바로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사제로부터 나병 확진을 받는 순간, 그들은 성밖으로 강제 추방 당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만 해도 억울한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부정을 탄 사람이니만큼 성 밖에 나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혹시라도 인기척이라도 나면 사람들에게 주의하라는 표시로 이렇게 큰 소리로 두 번 외쳐야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으로 한 나병 환자가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 나병 환자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다는 그 자체가 위법이었습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나병 환자라는 표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멀쩡한 옷도 찢어 입어야 했습니다.
머리도 풀어 산발을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윗수염도 가려야 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마치 성 밖 토굴 속이나 무덤가에서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더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그였습니다. 인생의 막장 앞에 선 그였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최후의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모든 법적 장벽과 인간이 정한 규정을 무시하고 인간 세상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더 이상 그의 머릿속에는 율법이고 전통이고 필요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만을 믿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음으로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 사제들 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도망갔을 것입니다. 좀 나은 사제라면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겠죠.
“이러면 안 되지. 자네 이거 불법인 거 잘 알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면 서로가 좋을 일 하나도 없네. 힘들겠지만 꾸준히 약 먹고 치료에 전념하게. 그리고 나중에 병이 진정되면 그때 한번 만나세.”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상처와 진물투성이인 그의 몸에 다정하게 손을 얹습니다. 그리고 위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건강하고 순결한 예수님과 병들고 불결한 인간이 만납니다. 고상하고 맑은 정신의 예수님과 좌절과 원망뿐인 한 인간이 만납니다. 위엄으로 가득 찬 영광의 예수님과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린 한 사람이 만납니다.
빛과 어둠의 만납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입니다.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 결과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피부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과 대면할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순간은 참으로 축복된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지은 모든 죄와 허물, 어둠과 상처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과 마주치는 순간 화로 위에 던져진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늘도 원하게 할 수만 있다면>
복음: 마태오 8,1-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나병 환자가 어떻게 끝까지 믿고 희망하며 주님 앞에까지 나아왔는지 묵상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치유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그리스도께서도 원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언가 좋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도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못 할 게 없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가 더는 로마에서 박해 받지 않게 하였습니다. 바로 통일 전쟁에서 막센티우스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임박하자 콘스탄티누스는 태양 위에서 십자가 표징을 보았고 꿈에 이 표시를 하면 승리할 것이란 계시를 받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군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양을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였습니다.
희망을 북돋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북돋아 주시는 희망에는 성취의 믿음도 포함됩니다. 이때 그러한 희망을 품는 이들은 가슴이 뜁니다.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것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어린 농부 소녀였던 잔 다르크도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도록 하느님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믿었습니다. 천사에 의해 계시 받았다고 믿는 그녀에게 프랑스 왕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하느님께서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성취될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허물어진 다미아노 성당에서 “내 교회를 재건하여라!”라는 목소리가 십자가에서 들려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돌을 모아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났고 그렇게 가난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의 창설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에 취해있던 교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탁발수도회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교황은 꿈에 라떼라노 대성전을 성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받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회의 회칙을 승인합니다. 이렇게 나중에야 예수님께서 하신 교회를 재건하라는 목소리는 작은 다미아노 성당이 아니라 물질주의로 허물어져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넣어주는 꿈은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꿈을 꾸는 이는 정말로 성취될 그 기대감에 취해서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켈리 최는 10억이 넘는 빚을 진 노처녀였습니다. 이때 ‘시크릿’이란 책을 60번 읽었습니다. 이 책은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동안 성공한 모든 사람의 주장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때 켈리 최는 꿈을 정하되 가슴이 뛰는 꿈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 것이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면 하늘로부터 오는 꿈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27년간 옥살이하였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게 나온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난 견뎌낸 게 아니라 준비한 거라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믿고 있었습니다. 그 꿈이 하늘에 준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하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게 된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게 되어 그 꿈으로 벌써 가슴이 떨려야 합니다. 가슴이 떨리는 꿈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8,1-4: 한센병 환자의 치유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2절) 한센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이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 자신이 치유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은 예수께 달렸다. 치유의 권한은 주님께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3절) 하시며 치유해주신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며 한센인의 추정을 확인해 주신다. 이 치유 사화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계시는 분이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4절) 환자가 깨끗이 나으면 그 사실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지 말고 사제에게 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다. 사제가 그것을 확인하면 깨끗한 삶이 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의 품으로 갈 수 있었다. 사제에게 그런 확인을 받는 것이 당신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당신이 행하셨지만, 그에 대한 사실 확인을 사제에게 맡겨 당신이 행한 기적을 판단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 환자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많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간으로 받아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 대한 이러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강요도 하지 않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이 한센병 환자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러한 은총을 체험할 것이다. 몸이 썩어가는 한센병이 아니라, 우리 전 인간을 모두 썩게 하는 무서운 죄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한센병 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어렵고 무서운 분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정립하고 그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떤 형제님께서 제 강의를 듣고 배우자인 아내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기로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여보,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아내의 반응은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나 몰래 뭐 잘못했어? 그것도 아니면 뭐 잘못 먹었어? 무섭게 왜 그래?”
이런 아내의 반응에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진심 어린 자기의 사랑 고백을 이렇게 받아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남편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 따뜻한 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말을 아끼지 않고 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말하는 것에 돈이 드는 것도 또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말을 하면 자기에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좋은 말은 아끼고 나쁜 말은 과감하게 토해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모습이 사람과의 간격을 더 멀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간격도 좋은 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평불만, 원망의 말만 하면서 과연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미사 때 이루어지는 응답에 전혀 진심을 담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제 마음 다 아시죠?’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나요?
주님과의 기도 내용에 따라 주님과의 관계도 쉽게 파악됩니다. 전혀 믿음 없이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또 급할 때만 주님을 찾으면서 바치는 기도,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시면 자기도 무엇을 하겠다는 협상의 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기는 의인이라면서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협박의 기도 등등…. 모두 믿음 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오늘 나병 환자의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 앞에 다가간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 환자는 일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자기 뜻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 앞에 나아오고, 그리고 자기 뜻보다 주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병 환자의 용기 있고 주님의 뜻을 먼저 따를 수 있는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다(미치 앨봄).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8,4)
주님의 치유법은
세상의 의사들과는
사뭇 달라서
함부로 말하기가
조심스럽다네.
다만
사제에게 부여하신
분별력으로
주님의 영광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세상에 드러나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우리가 나병환자처럼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고백하고 믿음을 보여 드린다면
그분께서는 나의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낫게 해주실 것입니다.
내가 깨끗해지고, 거룩해지고, 순수해지는 건
오로지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한 건
내가 예수님께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병을 직면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쓸데없는 아집과 고집 때문에,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는 교만 때문에
내 마음의 병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져주시도록 우리를 맡깁시다.
그분은 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하시는,
주고 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병원에서는 자신의 몸을 잘도 맡기면서
우리는 왜 주님께는 우리의 마음을 맡기지 못하는 걸까요?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유다 백성은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갔다(25,21ㄴ).>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5,1-12
1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치드키야 통치 제구년 열째 달 초열흘날에,
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와서 그곳을 향하여 진을 치고
사방으로 공격 축대를 쌓았다.
2 이렇게 도성은 치드키야 임금 제십일년까지 포위당하였다.
3 그달 초아흐렛날, 도성에 기근이 심해지고 나라 백성에게 양식이 떨어졌다.
4 드디어 성벽이 뚫렸다.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칼데아인들이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밤을 틈타서 임금의 정원 곁에 있는
두 성벽 사이 대문을 통하여 아라바 쪽으로 갔다.
5 칼데아인들의 군대가 임금을 뒤쫓아 예리코의 들판에서 그를 따라잡자,
그의 모든 군대는 그를 버리고 흩어졌다.
6 그들이 임금을 사로잡은 다음, 리블라에 있는 바빌론 임금에게 데리고 올라가니,
바빌론 임금이 그에게 판결을 내렸다.
7 그는 치드키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가운데 살해하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청동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8 다섯째 달 초이렛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제십구년에
바빌론 임금의 신하인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9 그는 주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태웠다.
이렇게 그는 큰 집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10 또한 친위대장이 이끄는 칼데아인들의 모든 군대는
예루살렘 성벽을 돌아가며 허물었다.
11 느부자르아단 친위대장은 또 도성에 남아 있던 나머지 백성과
바빌론 임금에게 넘어간 자들,
그리고 그 밖의 남은 무리를 끌고 갔다.
12 그러나 친위대장은 그 나라의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4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