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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 사랑이 있나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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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이 있나요?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와서 보시오.”
나타나엘의 말대로 나자렛에서는 나올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는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예루사람에서도 나올 좋은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자렛에서도 나올 좋은 것이 있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머드팩하기에 좋은 진흙이 나올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메시아는 거기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메시아는 하늘에서만 오시는 것인데
하늘로부터 찾아오신 것을 성탄이요 육화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타나엘의 말이 맞긴 맞습니다.
그래서 나타나엘이 거짓이 없는 사람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나자렛 사람인 것도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메시아가 근본적으로는 하늘에서 오셨지만
경과적으로는 나자렛에서 온 것입니다.
메시아는 본래 그런 분이십니다.
하늘에 딱 버티고 앉아 계실 분,
하늘을 지키고 계실 분이 아니라 이 땅을 찾아오실 분이시고,
이 땅에 오셔서도 나자렛 한 곳에 죽치고 앉아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이나 이곳 우리게까지 찾아오시기에 경과적이십니다.
경과적이라고 할 때 經자도 過자도 다 지나감의 뜻이 있기에
메시아는 우리를 찾아오시기도 하지만 지나가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주님을 자기 고장에 붙잡아두려고 하자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시며 떠나시잖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찾아오실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찾아가야 하고 만나 뵈어야 하지요.
이번 주 요한복음을 보면 이것의 연속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안드레아에게 메시아를 가리키며 찾아뵙게 했고,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가리키며 찾아뵙게 했고,
필립보에게 메시아가 나타나셔서 제자로 삼으시자
필립보는 오늘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가리키며 찾아뵙게 합니다.
이때 중요한 행위가 두 가지입니다.
곧 ‘찾아가는 것’과 ‘뵙는 것’입니다.
찾아가는 것은 열성 또는 열망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땅까지 오신 거리를 생각할 때
베틀레헴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동방박사들이 찾아뵙는 것이나
자기 동네에 찾아오신 주님을 중풍 병자와 동료들이 지붕을 뚫고서라도
찾아뵙는 것처럼 우리도 그 정도의 열성과 열망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뵙는 것인데
뵙는 것은 갈망입니다.
사실 뵙고 싶은 갈망 때문에 찾아가는 열성도 우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불원천리는 보고 싶은 것에 비하며 천 리도 멀지 않고,
보고 싶은 갈망 때문에 천 리도 멀지 않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우리의 사랑은 두 가지입니다.
갈망과 열성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어떠한 갈망도 없고 열성도 없다면
아무런 사랑도 없다는 뜻이고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있나요?
갈망과 열성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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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어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안드레아의 증언을 들었는데, 오늘은 필립보의 증언과 나타나엘의 증언을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 그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었을 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하며 핀잔을 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와서 보시오”(요한 1,46)라는 필립보의 확신에 찬 초대에 따라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두렵고 떨리는 ‘만남의 순간’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예수님의 신적인 전지함, 곧 ‘거짓이 없음을 보는 거짓이 없는 눈’, ‘진실을 보는 눈’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하고, 당혹할 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는 예수님께서 그를 “보았다. 알았다”는 예지적인 면만이 아니라, ‘내가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랑의 측면을 말해줍니다.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 ‘진실을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 그것은 사랑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지고, 마침내 믿음과 감격이 샘솟았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비로소 메시아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뵙는다면,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바로 이 분이 나를 온전히 아시는 나의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이를 오늘 <독서>에서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9-20)
비로소 나타나엘은 눈이 맑아지고 환해져 깨달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입술을 타고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한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대역전이 생긴 것입니다. ‘진리’가 그를 전복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가 주님을 만난 까닭입니다. 동시에 주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심연으로부터 만난 까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믿음을 불러오게 되었고 그를 전환시켰습니다. 그리고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니고,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주님,
땅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이 열리는 자리가 되고
우리 일상의 삶이, 하늘이 열리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주님, 우리 안에 계신 당신을 보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가 만나는 이들과 하는 일 안에서
하늘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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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중에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습니다. 오래오래 기왕이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족 요르단강 하구에 위치하며, 그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입니다. 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났고 안드레아가 형제 시몬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5,1). 많은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발길을 옮길 때 먼저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 왔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셈입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심쩍어하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을 지니고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에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3절 이하를 보면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선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살기 바랍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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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0년 전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주교님이 되셨지만 그때는 사목국장 신부님께서 제게 ‘그리스도론’강의를 맡아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당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교육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 중에는 ‘성사론, 마리아론, 그리스도론, 교회사’가 있었습니다. 친절하신 신부님은 제게 그동안 하였던 ‘강의록’을 보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록을 참조해서 강의를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배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저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론 강의를 준비하였습니다. 어제는 안드레아가 형인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필립보는 그리스도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타나엘은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예전에 강의했던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론은 2천 년 전의 인물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분이 인류의 구세주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구세주라고 번역되는 서양말은 그리스도(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입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글자 그대로 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요? 그렇데 된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남북 왕조(이스라엘, 유다)로 갈려서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약 50년 후에 유배가 끝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면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야훼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왕과 사제, 예언자은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서 그 직무에 임명을 받았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의 백성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자기 조상들이 기다려왔던 그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성과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란 인물이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해주는 문헌은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서 외에 예수님은 대해 언급한 세속 문헌이 소수 있기는 하지만,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현대에 나온 이런저런 소설(‘다빈치 코드’, ‘최후의 유혹’)은 그야말로 소설일 뿐입니다. 신약성서는 4복음서와 서간문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복음사가들과 서간문의 저자들은 철저히 객관적인 역사서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신학적 관점을 갖고서 각자의 사목적 상황에 맞추어 각자의 방식대로 나자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기록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외모나 성장 배경 등과 같은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 운명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론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위해서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다양한 존칭들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에게 적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존칭들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고 서로 합성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존칭의 적용 기준은 존칭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역할과 신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처음으로 도입된 개념은 ‘메시아’입니다. 메시아 개념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위기를 겪으면서 과거의 다윗 왕조를 이상적인 시대로 상상하고 다윗 왕조의 복구를 갈망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이런 갈망과 함께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희망이 형성되었는데, 그 구원자는 왕이나 대사제 혹은 예언자일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왕, 대사제 그리고 예언자는 자신의 직무를 맡기 위해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녔고, 그래서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Messiah)’, 희랍어로는 ‘그리스토스(Christos)’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메시아를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구원자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승리의 메시아 개념을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부적합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지혜서 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고통을 받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고 고양된 의인의 모습을 메시아 개념과 합성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께 대한 또 다른 지존칭호로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에게 적용되었지만, 실상 이 칭호는 부활 이전 예수의 선포와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아빠’라는 신칭(神稱)에서 드러나듯이 유일무이하게 독특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하느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부활 이전에 드러났던 예수와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부활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되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활 이후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간택과 전권 위임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치에서 하느님 대신 하느님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하느님 아들 칭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느 칭호보다 나자렛 예수가 얼마나 밀접하게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 편이며, 공동체와 세계 앞에서 아버지 외에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분임을 뚜렷이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하느님의 아들 칭호에서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표현합니다. 즉 아버지 하느님과의 구분(복종, 종속),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의 동일성(그분과의 일치, 神性)을 포함합니다.” 내일은 교회의 역사에서 교부들과 공의회가 선포하고 고백했던 그리스도론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의 진정한 목적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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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나타나엘을 보시고 하신 첫 마디는 이것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처음에는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사람은 거짓이 없고 다른 나라 사람은 거짓이 있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으므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만약 저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거짓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제 제가 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셨는지 주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주님 앞에 앉아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이 표현 안에는 아마도 이런 뜻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한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하늘나라 안에 있는 사람’, ‘늘 항상 하느님을 바라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이런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거짓이 없다는 자명한 도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나타나엘이 주님께 그렇게 불렸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인’ 즉 ‘하늘나라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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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고
공부와 수련을 마치고
함께 사제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각자의 길을 걷다가
한 친구가 이곳을 떠나기로 정했습니다.
다른 친구를 허공에 대고 묻습니다.
수십 년 후에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 허공의 질문이 제 마음에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후에도 그래왔듯이 우리가 친구일 수 있을까?
사제로 살던지, 다른 삶을 살던지 말입니다.
사제를 잃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친구를 잃는 것이 더 슬펐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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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보았습니다.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처음 본 낯선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조용히 혼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더 즐겁게 기차 여행을 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나쁜 경험이 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억지로라도 대화를 나누라는 지시를 내렸고, 실험자들은 지시에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 결과 처음 생각과 달리 긍정적인 경험을 했다고 답변했으며, 이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즐거웠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실험은 우리 인간이 정서 예측에 미숙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실제로 자신의 어려움은 모두 인간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 때문에 삶이 어려워졌다고 밝힐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관계 안에서 우리는 긍정의 마음과 만족스러운 결과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많은 이가 고독을 즐기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른 사람과 연결되었을 때 빚어질 잠재적 혼란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본인의 더 큰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가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신 이유, 또 이 사랑의 힘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긍정적 마음과 더불어 만족스러운 결과는 사랑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모범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굳이 필요 없을 텐데도 제자들을 하나둘 모아서 제자단을 형성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요한과 안드레아 그리고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단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 늘어나는 숫자에 우리의 이름도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말했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와서 보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 안에 하나를 이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더 큰 기쁨과 행복 안에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몇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그 기쁨은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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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행복이란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요슈타인 가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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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주님과 만남의 여정
-참나의 발견-
“형제를 사랑하라”
제가 강론을 쓰기전이든 쓴후든 항상 생각하는 것은 제목입니다. 예전에는 한 줄이었다가 몇 년전부터는 두줄, 또 때로는 세줄일 때도 있습니다. 오늘은 “더불어(together) 주님과 만남의 여정-참나의 발견-형제를 사랑하라”세줄입니다. 또 제가 2014년,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가장 선호한 제목은 “-여정”입니다. 피정 강의 때도 참 많이 나눈 주제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화두처럼 던지는 두 물음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여러분의 일생을 하루로 압축할 때 오전, 오후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일년사계(一年四季), 여러분의 일생을 일년으로 압축할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이렇게 성찰할 때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사랑을 살 수 있겠습니다. 저로 말하면 수도원 설립 다음해인 1988년 늦여름의 나이 40에 와서 올해 76세가 됐으니 하루로 하면 오후 4:30분, 사계로 하면 초겨울의 시점에 들어서지 않았나 싶습니다. 엊그제 피정팀 강의시 맨처음 포문을 연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2024년 새해들어 오늘 최고의 선택을 하셨으니 이 또한 은총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성탄시기,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나러 오셨으니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삶의 여정에, 삶의 행복에 하루하루 날마다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작년 2023년 한해를 마감하며 한해의 사자성어로 대학교수들은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꼽았습니다. 논어 헌문편에는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뜻의 “견리사의(見利思義)” 와는 정반대입니다. “견리망의(見利忘義)”, 직설적으로 말해 “돈을 보자 하느님을 잊다”가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재앙중의 재앙은, 비극중의 비극은, 불행중의 불행은 희망이자 길이자 빛이신 하느님을 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희망을, 길을, 빛을 잃을 때 사람은 저절로 죄짓고 병들기 마련입니다. 새벽에 눈길을 끈 책 제목에다 <공동선1-2월> 특집에 나온 몇몇 사제들의 글 제목들이었습니다.
“오늘도 나아가는 중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습니다”
“더 세상안으로, 덜 세상적으로”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길동무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영원한 현역으로 사랑의 여정을 살겠다는 결의를 다짐한 제목들입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 “사랑의 전사”로, 졸업이 없는 영원한 학생의 주님 “사랑의 학인”으로 살겠다는 결의입니다. 2009년, 그러니 15년전 우리 피델리스 수사가 마르코 수사의 지도하에 심은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장관입니다. 전지가 끝나니 하늘 높이 키도 훌쩍 커진 듯 합니다. 즉시 떠오른 묵상글입니다.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 그리움이
저리도 반듯하게, 하늘 높이, 크게, 자라게 했나보다.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
흡사 주님 안에서 사랑의 여정중에 더불어(together) 성장, 성숙해가는 우리 수도공동체의 형제들의 사랑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사랑한다”라는 명시적 고백없어도 이렇게 함께 살아감이 사랑입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의 여정중에 있는 공동체 도반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중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장수했던 분으로 기억력이 쇠퇴했던 노년에는 늘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에 제자들이 불평했다는 일화도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들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며 그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새삼 사랑과 진리는 함께 감을 깨닫습니다. 어제도 나눴다시피 구체적 형제 사랑은 형제를 주님께 인도함으로 실현됨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형제 사랑의 모범입니다. 주님께 불림받은 필립보는 그의 절친인 나타나엘을 집요하게 주님께로 인도하니 이 또한 형제 사랑의 표현입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강권하자 그는 예수님을 향했고 마침내 두분의 감격적 만남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최고의 격찬이자 찬사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발견한 나타나엘입니다. 나타나엘보다 더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안 주님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 사랑의 여정을 통해 참나의 발견이자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나타나엘의 조건반사적 고백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하는 나타나엘입니다. 정말 참사람과 참사람의 운명적 만남입니다. 나타나엘이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의 여정이 시작됐음을 봅니다. 어찌 이 순간을 잊을 수 있을런지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나타나엘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인생들 어떻게 전개됐을까요?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우연이 아닌 하느님 사랑의 섭리였음을 깨닫습니다. 한두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여정이 아니라 주님과의 계속적인 만남을 통해 주님을 닮아감으로 역설적으로 참나의 실현입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사랑의 여정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고 더불어의 구원뿐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72장 마지막 감동적 구절도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뿐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내려 오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올라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하느님과 우리 사이 사다리같은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새삼 파스카 예수님은 우리의 더불어의 사랑의 여정에 유일한 “하늘문”이자 “하늘길”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하늘길 사랑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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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만나니 참 좋습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1, 43)
“와서 보시오.”(요한 1, 46)
“내가 보았다.”(요한 1, 48)
“보게 될 것이다.”(요한 1, 50)
만나니 참 좋습니다
눈길과 눈길이 만나
서로에 대한
믿음이 싹틉니다
만나니 참 좋습니다
손길과 손길이 만나
서로가 품은
희망이 자랍니다
만나니 참 좋습니다
발길과 발길이 만나
서로가 이루는
사랑이 영급니다
만나니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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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요한 1,43-45)
가장 나쁜 장소에서 뽑힌 가장 훌륭한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를 뽑으신 다음, 다른 이들을 더 부르러 나가셔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당신께 끌어당기십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온 시리아 전역에 퍼져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나타나엘이 그분께 온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마태 4,24 참조).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 필립보의 경우는 정말 놀랍습니다.
그들은 기적들을 보고서 믿은 것이 아니라, ‘예언자가 나오지도 않고’,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없는’ 갈릴래아에 있을 때부터 믿었습니다. 갈릴래아인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서 어딘가 촌스럽고 둔감한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힘을 드러내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에서 가장 훌륭한 제자들을 뽑으신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주님쩨서 손을 내미셨다”(예례 1,9)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주님의 손은 성령을 뜻합니다. 그는 또한 “주째서 나의 입을 건드리셨다”(예례 1,9)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영혼의 입은 영혼의 가장 높은 지체입니다. 앞에 인용한 말씀은 “그분께서 자신의 말을 나의 입에 넣어주셨다." (예레 1,9)는 뜻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입맞춤입니다. 입과 입이 맞추어지는 영혼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영혼은 말씀을 듣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너를 뽑아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세웠다”(예레 1,10). 하느님은 “오늘” 우리를 뽑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오늘”이 영원을 위해 있을 것입니다. “나는 너를 뭇 민족 위에 세웠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내가 너를 온 세계 위에 세웠으니, 너는 만물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 “뭇 나라들 위에”라는 말은 하나보다 많은 모든 것, 즉 여러분에게 지나치게 많이 있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만물을 가지겠다고 안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면, 만물은 다시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아멘.(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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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 성인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진실합니까?
진실은 진리와 같다. 진실은 하느님의 축복이다. 진실한 사람은 언제나 모든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다. 진실한 사람은 힘이 있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라. 속이지 말라. 만일 진실을 말해서 어떤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차라리 침묵하라. 자신에게 솔직하라. 자신에게 솔직하고, 솔직하게 타인에게 표현하라. 물론 표현하는 방법은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어떤 당황스런 상황을 면하기 위해 합리화하는 자아 방어 수단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에 대하여 깨어 있고, 솔직함의 훈련을 쌓아왔다면 그런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대를 받게 된다. 성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단순성 즉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성이라는 것을 잊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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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240109 --------------------
김명겸요한 2024.01.05 10:27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모세5경을 대표하고
예언자들은 예언서를 기록한 이들이라고 볼 때
이 말은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이야기하는 분
곧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나타나엘은 그 말에 흥미로워하지만
자신이 배운 것과 다르기에
조금은 실망합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는
다윗 고을인 유다에서 탄생할 것인데
필립보가 말한 메시아는
나자렛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직접 만나볼 것을 제안합니다.
이에 나타나엘은 필립보를 따라갑니다.
나타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다고 표현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했습니다.
즉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찾았던 메시아를
이제 그는 직접 눈으로 보게 됩니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그도 알아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꿈 이야기를 하시면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야곱의 꿈에서 천사들은 하늘을 향해 오르내립니다.
즉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천사들은 사람의 아들을 향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즉 하느님이심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찾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잘 알기 어렵고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인간처럼 볼 수도 없는 존재이고
그래서 우리의 감각이 소용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여정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지켜 보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가 당신께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보이지 않기에
더욱이 나타나엘이 생각한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기에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필립보를 통해 나타나엘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 삶에서 초대의 손길을 보내 주십니다.
필립보의 '와서 보시오'라는 초대의 말을
우리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의심이 들지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시도가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의
거기에 덧붙인 초대의 응답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구유에 누워계신
지극히 약한 아기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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