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두 번째 근거: 하박국 2장 4절
2. 신약의 인용: 로마서 1장 17절
(4) 일취월장 청산유수 일사천리
4) 알쏭달쏭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정확한 의미!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저는 이 구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문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오랫동안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하나님의 의"가 오로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법정적인 의라는 것을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가 어떤 뜻이겠습니까? 법정적인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믿음뿐이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 외에 다른 뜻일 수가 없습니다.
또한, "기록된 바"는 "이콜"(=)이라는 뜻입니다. 그 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가 나옵니다. 이 구절은 이신칭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는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뜻의 윤곽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런데 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굳이 몰라도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의 오랜 궁금증이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그 후, 저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정확한 뜻을 별로 궁금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좋으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누기 전에 설명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에 제가 '오직 믿음'을 다룰 때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 있었는데, 그때는 설명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최근에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먼저 그것을 나누고 이 문구의 정확한 뜻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이 문구의 의미는 오직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존 스토트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 대해 이렇게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의 탁월성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 그 표현은 순전히 수사학적인 것이며, 이를 테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의해'(NIV) 혹은 '철두철미하게 믿음에 의해'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의 뉘앙스가 강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설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문구를 아예 '오직 믿음'으로 번역한 역본들까지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공동번역 로마서 1:17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직 믿음'이 성경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어에 '오직'이라는 단어가 없고, 의역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보셨겠지만, 지난 3월 12일 다문화TV에서 저의 인터뷰를 내보냈습니다. 그때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처녀작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비롯해 1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셨는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은 무엇이며 어떤 책인지 궁금합니다."
제 대표작은 더 좋은 책이 나오면 바뀝니다. 현재 저의 대표작은 『당신의 복음은 바울의 복음인가?』입니다. 이것은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과 칼빈이 주장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비성경적인 것임을 폭로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 저는 그 두 가지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방송에서는 충분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오해하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정성껏 답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하는 당일, 잠에서 깨자마자 하나님께서 더 적절하고 지혜로운 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급히 다시 써서 답변했는데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저는 학식이 많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127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중 『당신의 복음은 바울의 복음인가?』가 저의 대표작입니다.
그 책의 내용은, 첫째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은 오역입니다. 원어에는 '오직'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원어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문맥상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적인 프레임에 맞춘 무책임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오직 믿음'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가 다룬 이슈는 오직 믿음이냐 회개와 믿음이냐가 아니었습니다. 또, 오직 믿음이냐 제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와 믿음이냐 혹은 오직 믿음이냐 믿음과 믿음에 따라야 하는 행함이냐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이 친히 강조하신 것들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것들로 초대교회 시대에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슈가 아니었고, 믿음과 함께 이 세 가지를 언급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들을 쓸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느냐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받느냐가 이슈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믿음에 대해서만 말한 이유입니다.
이로 보건대, '오직'이 제한하는 것은 단지 율법의 행위와 선행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이 '초등학문'이라는 표현을 통해 유대교와 이방종교를 함께 묶어서 본 것에 의거하더라도 타종교까지가 전체 범위입니다. 오직 믿음은 이 세 가지를 제한합니다. 결코 '회개'나 '제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나 '믿음에 따라야 할 행함'을 제한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을 통해 선행이나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고 정확히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인데 왜 행함 있는 믿음이 있는 자만 천국에 간다고 하느냐?'고 하는 목사와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통합의 한 이대위원장은 오직 믿음이니 회개를 주장해도 이단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정말 귀를 의심케 하는 경악할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물론 12사도와 바울까지 이단이기 때문입니다(마4:17, 막1:15, 행2:38-39, 17:30-31, 20:21, 26:19-20, 히6:1, 벧후3:8-9). 참으로 어이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성경의 원어에 없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이제 그만 두고, 성경 그대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믿음은 회개를 수반한 것이고, 참믿음은 행함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행함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간다(마7:21, 약2:14).'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대답이지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저는 원어에는 '오직'이라는 단어가 없고, 학자들도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문맥상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교리적인 프레임에 맞춘 무책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세계적인 신학자들을 비롯해서 모두들 그렇게 말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교리적인 프레임에 맞춘 무책임한 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모든 신학자와 모든 설교자를 합한 것보다 더 큰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은 성경이다!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면 절대로 오직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직 믿음은 오역이긴 하나 바울서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예수님의 종이고,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울을 불러 사도로 삼으시면서 오직 믿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6:16-18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하리라 하더이다."
분명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라고 하셨고, 이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탕자의 비유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누가복음 15:18-20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바울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를 회개로 이해했습니다.
사도행전 26:19-20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이것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오직 믿음을 강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서 2:4-5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당신의 복음은 바울의 복음인가?』에서 자세히 설명해드린 것처럼 로마서 2장 전체가 회개를 강조한 회개장입니다.
그런데 17절에 "유대인"이 나타납니다. 때문에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그랬듯이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한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그들이 타락해서 회개하라고 외친 것일 뿐, 이방인들에게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 도시인 아덴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여기서 바울은 31절에서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으니 믿기만 하면 됩니까? 오직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그 전 30절에서 바울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오직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0장 21절에 더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목숨 걸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23-24절)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고별인사를 하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사역을 요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17-21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18절에 보면 "첫날부터 지금까지 ... 항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어떻게 했습니까? 21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회개하고 믿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회개와 믿음을 촉구했습니다. 오직 믿음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직 믿음"으로 번역한 것이 옳은 것일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이 옳은 것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믿음은 성경적인 참 진리가 아닙니다.
최근에 제가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2023. 6. 15.), 갑자기 오직 믿음이 비진리라는 것을 간단명료하게 증명할 수 있는 선명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서 다른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고 믿음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왜 성경에 회개하라고 기록해놓았을까요? 성경에는 분명히 회개나 제자가 지불해야 될 대가와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오직 믿음이니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과연 이것이 정상일까요? 그리고 옳은 일일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그러므로 오직 믿음은 성경적인 참 진리가 아닙니다. 또, 당연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도 오직 믿음이라는 뜻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문구에 대한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의 번역은 명백한 오역이고 잘못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