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꿈
주말농장 손바닥만 한 밭뙈기면 어떤가. 함께 우줄우줄 어우러지니 어느 왕국 부럽지 않아. 저 넓은 초원에 무리 지어 핀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햇물처럼 둥그런 황금색 꽃 속에 밀밀하게 씨를 박을 때는 설렘이 두 배야. 박힌 씨를 귀히 여기는 늡늡한 사람들이 있으니 정말 보람차.
고대 잉카 제국에서는 나를 태양처럼 숭배했어. 그리고 나는 해와 사랑에 빠졌어. 바닷물은 달을 따라 움직이지만, 나는 해를 따라 움직이지. 비가 온 뒤 풀들이 소곳소곳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나도 규칙적으로 운동하니 좀처럼 고개 부러지지 않아. 해님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 점점 하늘이 붉어지면 땡볕 한 줌 움켜쥐고 잉카제국으로 달려가 볼까. 거긴 아직도 태양의 신인 해바라기를 건국 신화로 받들고 있다니까. 이런 대단한 나를 꽃과 잎의 모양이 비슷하다고 뚱딴지와 혼동하는 이가 더러 있어. 마님이 그랬어. 열두어 그루 모두 나라고 입이 귀에 걸렸었는데 예닐곱 뿌리가 땅속에서 엉뚱한 모의에 빠졌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그 예닐곱 그루가 뚱딴지였던 거야. 마님의 실망하는 표정이라니….
그런데 그 뚱딴지가 천연 인슐린인 이눌린이 풍부하다고 해. 혈당을 조절하여 당뇨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학설을 듣고는, 나와 버금가는 대우를 해 주었지. 더구나 변비와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하니, 돼지감자라고 부르면서 감자보다 더 상전 대우를 하는 거야. 내가 뚱딴지를 깔보고 구박해댔다면 큰일 날 뻔했지. 겉치레만 보고 섣부르게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부류가 있는가 봐. 그건 정말 못난 짓이라고 생각해. 뚱딴지와 나는 쟁반같이 큰 잎사귀를 너울거리면서 사이좋게 버티고 서 있어. 마님은 우리를 볼 때마다 흐뭇해했지. 누구든지 사이좋게 지내면 보는 사람이 더 즐거운 법이야. 잡초를 뽑는 마님의 맑은 이마 위에 봄볕이 머물 때면 내가 부채질을 해 주었지. 인간 세상에만 주고받는 정이 있는 게 아니거든.
마님은 내 꽃을 털어서 씨를 받으면 밥이나 빵에 섞기도 해. 각종 견과류와 같이 건강식품이라고 귀히 여기지. 마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내년에는 씨를 더 촘촘하게 박을 거야. 그리고 내가 행운을 부르고 복을 불러온다는 설이 있어. 풍수 인테리어에서 가장 대표적인 ‘돈을 부르는 그림’이 바로 내 그림이라는 거야. 그래서 내 그림을 집 안에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어. 집들이 갈 때나 개업 선물로 내 그림을 많이 사 가기도 하지. 마님은 그림 솜씨가 좋은 손녀를 데리고 와서 우리를 그리라고 했어. 그 그림이 전교에서 최우수상을 탔다고 하더라고. 잣바듬히 몸을 젖히고 일렁이던 우리도 큰 손뼉을 마주치며 그의 수상을 축하해 줬어.
빈센트 반 고흐는 해만 좋아해서 나에게 반해버렸다고나 할까. 고흐가 그린 ‘꽃병에 꽂힌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는 지금 도쿄의 토고세이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이 그림에서는 그의 영혼과 신기가 느껴졌어. 반 고흐가 나에 대한 그림을 너무 열심히 그리는 걸 본 고갱이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 이 그림은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해. 정말 난 자부심으로 어깨 힘이 어느 누마루보다 더 높이 올라가 있어.
그런 나도 고민이 생겼어. 내년에는 주말농장 임대료가 올라서 마님이 농장을 포기한다나 봐. 어떤 주인이 나타날지 두려워. 나를 잡초라고 뽑아 내동댕이칠 수도 있으니까. 혼불을 쓴 최명희 소설가는 ‘동정 귀 어긋난 년, 버선 수눅 틀어진 년, 가리마 비뚤어진 년, 낭자머리 꼭뒤에 머리카락 삐친 년은 사람으로 치지 않았다.’라고 썼대. 이처럼 새 주인이 우리를 잡초라고 꽃으로 취급하지 않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경계도 있듯이, 부동산 인상이 엉뚱한 결과로 나타나기도 해.
인간들 최저임금이 올라서 아르바이트생들 일자리 잃을까 봐 걱정이래. 인건비 부담을 느끼면 아르바이트생을 줄이는 게 너무나 당연한 절차래. 편의점 업주들 인건비 부담에 아르바이트생 줄이고 심야 영업 포기하고 무인점포 늘어날 것이래. 한 편의점 점주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으로 폐업을 고려한다나 봐. 우리 마님이 주말농장 포기하는 것처럼….
정신 차려야겠어. 아름아름 망설이다 기회를 놓쳐 잡초 취급당하기 전에 여명부터 땅거미까지 쉴 틈 없이 해바라기해서 튼실해져야겠어. 건강하고 쓸모가 있으면 마님이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일자리 걱정, 해고 걱정, 폐업 걱정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 우리 모두의 꿈이거든.
물론 나도 꿈이 있어.
모두가 나를 해바라기 하는 꿈…. (*)
하루키의 팬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 되었다. 그를 구성하는 문화적 코드는 마라톤, 여행, 독서, 고양이, 그리고 재즈다. 작가 하루키는 미국이나 일본이나 공간적인 장소나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의 문학적 근원을 향해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하루키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걸어가는 우리 시대의 건강한 작가다.
단골 도서관에서 몽땅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빌려왔다. 에세이집은 거의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이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1994년 봄부터 1995년 가을에 걸쳐 《SINRA》 라는 예쁜 잡지에 다달이 연재했던 글이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는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에 일 년 구 개월에 걸쳐 연재했던 칼럼을 묶어놓은 것이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 하나 못 받아서 무말랭이 조림을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언제나 젊고 지칠 줄 모르는 하루키 일상이다. 고양이와 마라톤 그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 그것은 글쓰기의 틈새에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하는 하루키만의 여백의 삶이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는 잡지 《앙앙 Anan》의 연재 에세이 「무라카미 라디오」에 쓴 글이다. 일 년 동안 연재한 약 오십 편을 모아서 한 권의 책이 탄생한 것이다. 특별한 수사법(Rhetoric)이 없어도 살갑게 다가오는 그의 일상을 내비침이 매력적이다. 『하루키 씨를 조심 하세요』라는 책은 우치타 타츠루 씨가 십 년이나 넘게 매체에 하루키에 대한 에세이를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이 글을 옮긴 김경원 씨는 이렇게 썼다. ‘이 책은 하루키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을 던져 준다. 내 생각이 얕았다! 내 경험이 짧았다! 내 앎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 세계가 좁았다! 하는 깨달음을 덤으로 얹어 준다고 했다.’
그는 특히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보통 새벽 6시에 기상하여 글을 쓰다가 간단히 아침을 먹고 10시까지 글을 쓰고, 낮에는 수영과 달리기를 하고 밤 10시에 잠자리에 든다고 고백한다. 저녁에는 소설을 쓰지 않고 독서나 에세이를 쓴다는 원칙을 세워서 꼭 시간을 지킨다고 한다. 나는 아침 6시만 되면 윗집에서 붐~ 붐~ 하는 알람 소리에 잠을 깨며 혀를 찼었는데, 이젠 그 알람에 맞춰서 6시에 기상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얼마나 좋은 시스템인가. 내가 알람을 급히 제지할 필요도 없고 저절로 들리는 자동 머신이니 금상첨화다. 모든 일이 생각하기에 따라 이렇게 호불호가 갈리니 마음에 새길 일이다.
바람이 불어도
고향 집 뒷산에 수령 칠백 년으로 추정되는 반송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용의 모습으로 휘감은 수형이 경이로워 샤머니즘적 기운마저 감돌았던 나무다. 반송은 줄기가 밑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바깥 모습이 둥그스름하고 부챗살 모양이다. 문중의 정자인 〈침류정〉을 옮긴 터에 심겨줘서, 터를 가득 메울 정도로 넓게 자리 잡았다. 몸통의 넓이가 친구 서넛 걸터앉아 놀기도 좋고 누워서 책 읽기도 마침맞았다. 유년에 걸핏하면 『학클베리 핀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등 동화책을 들고 올라가서 해가 기우도록 내려올 줄 몰랐다. 그 반송 나무가 안동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나, 여러 해 전 큰바람이 불어서 폐사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바람의 힘을 어찌하랴. 유난히 바람이 많았던 해는 대추가 풍년이다. 굳이 벌 나비가 암술과 수술의 가려운 곳을 긁지 않아도, 나무초리를 흔들어서 열매가 열리는 요술을 부린다. 이 모두 느꺼운 바람의 힘이다.
선바람에 솔숲을 걸어도 바람이 일 때는 설렘으로 솔깃하다. 바람 일어 좋은 날은 정녕 연분홍 꽃잎 사연이 있을 때만의 일이던가. 바람길 따라 걷다 보면, 고샅길을 지나 에움길이 나타난다. 모퉁이에 한 모라기 바람이 불어 부도난 가게의 셔터를 흔든다. 흔들리지 말고 신바람 나게 열리는 날은 언제일까. 봄날 바람결에 내리는 꽃비도 좋지만, 역병의 된바람이 후미진 골목까지 찾아드니 바람이 인다는 것은 정녕 고슴도치 딜레마와 같은 것일까.
바람의 꼬리가 다 지날 때까지 파도처럼 출렁이는 보리밭 이랑의 춤사위는 또 어떤가. 파도가 거품을 무는 일도 바람이 일어야 가능하다. 바람이 일면, 몽돌 해변의 끝자락에서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대글대글하다. 완도 몽돌 해변에서 몇 음계일지도 모르는 소리를 각자의 곡선대로 젖어 들던 그 아릿한 추억도 바람 일어 좋은 날이어서 가능하다. 그 어떤 바람 이는 소리도 이처럼 저며 들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바람이 든다면, 일단 가을무가 생각난다. 바람 든 무는 쓰임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게 된다. 혹시라도 포장에 틈이 생겨 바람이 발자국을 남기게 되면 골다공증에 걸려 허벅허벅 해진다. 누가 그랬든가. 신문지에 돌돌 싸서 한 번 더 비닐로 바람을 차단하고 박스에 세워서 그늘에 보관하면 결이 쫀쫀하게 살아 있다고…. 그 무는 새봄이 올 때까지 무나물이나 소고기뭇국을 끓일 때 요긴하게 쓴다. 아무리 요요한 사람도 흰소리나 해대며 바람이 든 자는 인정받지 못한다. 진중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하여 객쩍은 헛바람만 잔뜩 든 사람의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대선 판에서는 바람 타는 자 수도권 선점한다는 활자가 크다. 누구는 동남풍, 누구는 서남풍이라는 활자는 컬러로 요란하다. 요즘 같은 선거철에 병풍이니 북풍이니 하는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것도 헛바람이다. 가장 세차게 부는 바람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카더라 통신이다. 이 모든 게 국민 수준을 낮추는 형이하학적인 바람이다. 이런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체로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멋진 정책을 발표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존중하는 형이상학적인 바람은 진정 불기 힘든 일일까. 과장된 선거 바람이 불면, 손톱 밑에 거스러미조차도 크나큰 혹으로 부풀려진다. 과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어떤 바람이 불어야 좋을까. 달을 따라 바닷물이 움직이고 해를 따라 꽃이 움직이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바람이 가장 바람직하다.
뭇 사내들이 만약 바람이라면, 메릴린 먼로의 치마 밑에서 불고 싶겠지. 지구의 반을 차지하는 그들은 그리스나 로마 유적지보다 먼로의 치마 속 유적지가 더 궁금할 터. 어쩌나, 섹슈얼한 먼로 이야기가 나오니 또 남녀상열지사가 생각나네. 하룻밤 자고 만리장성 쌓으러 가지 말고 자중할 일이다. 사람의 관계가 어찌 에롬시롬이 없으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아름답고 성스러운 일인데,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깨지는 원인이다. 어리석은 우리네 삶의 남루다. 느닷없는 회오리바람이 불어도 다시 태양은 떠오르니, 역시 바람은 지나가는 것이리라.
폐사된 반송 나무를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다시는 싹쓸바람이 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그저 해 뜰 참에 살그미 부는 명지바람만 오기를….
부네 탈
입술이 샐쭉하다. 봉긋한 두 볼에 갈색 연지가 설핏 웃음을 부른다. 이마에는 볼연지보다 더 큰 곤지가 태극 문양처럼 도도하다. 아래로 살포시 내리깐 실눈이 조신하고, 정수리에 얹힌 여섯 타래의 머리가 정갈하다.
큰아들 결혼 때 태평양을 건너온 아들 친구 두 명에게 선물할 하회탈 산 것 중 남은 하나다. 이 탈을 어디에 걸까 한참 망설이다가 안방 침대 맞은편에 걸기로 했다. 입 옆에 근육이 선 것으로 보아 좀 억센 듯해서 쳐다보다 머쓱해지기도 한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넣어 주면 특유의 나무 냄새가 난다. 불현듯 남편과 뒷산을 산책하던 날의 풀 냄새가 소환되니 느껍다. 우북한 옥잠화 잎들이 투덕투덕 흩뿌리는 비를 맞아 너울거리고, 덩달아 연보랏빛 꽃들이 통통 춤을 추던 날이다. 예쁘기도 하지만 냄새가 풋풋하여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행복하거나 기분이 좋을 때 하는 짓이다. 그 아릿한 장면을 기억하게 하는 탈이니 더욱 애착이 간다.
그렇게 산책을 좋아하던 남편이 주방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로 입원했을 때다. 잠시 방심한 사이 잘못된 주사 처방으로 의료사고가 났다. 왈칵왈칵 구토하다가 기도로 넘어가니, 결국 집중치료실로 옮겨 기도삽관을 하고 말았다. 달소수 잠만 자는 그를 보는 충격으로 돌 심장이라고 자신하던 내 시스템도 퓨즈가 끊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온갖 의료기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처참함은 형용사 한두 개로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차라리 말을 못 하는 게 잘된 일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은 손안의 지폐는 검불에 지나지 않았고 내가 쓴 글 나부랭이 따위는 부질없었다. 곤히 잠든 그의 옆에 퍼질러 누웠다가 갑자기 숨결이 조용해지면 실눈을 뜨고 훔쳐본다. 그의 관자놀이가 여리게 움직인다. 옳거니! 내 옆에서 숨만 쉬어줘도 애오라지 이렇게 고마운 것을. 지금은 상 남자가 대세라지만, 젊은 날 약주 한잔 걸치고 코를 골기 시작하면 이마를 찡그리며 상스럽다고 마뜩찮게 여긴 일이 얼마나 사치한 응석이었는가. 고열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슴은 쩍쩍 빗각을 그으며 터진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 아들아이에게 맡기고 어슬녘에 집에 들어와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다.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환청처럼 조곤조곤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불을 밝히니 부네 탈이 피로에 지쳐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홍콩 도교 사원 관상가는 내가 산통에서 뽑은 숫자가 good라며 엄지를 치켜들고 변죽을 울렸는데, 빗금 진 마음결 하나 메우지 못하는 걸 보면 다 헛것인가 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심술로 애꿎은 탈을 툭 치니, 방바닥에 헤딩하며 나를 발칙하게 노려본다. 목각은 유난히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와 보였다. 눈 꼬리는 댓 자나 내려와 있고 콧구멍도 없는 답답한 모습이 영락없는 지금의 내 모습이다. 언제 하회탈 제작자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제발 코에 구멍 좀 내 달라고 사정하고 싶을 지경이다.
결국,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두어 달을 병원에서 보낸 뒤 퇴원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남편은 천사 표 나이팅게일을 원한다. 늘 갈색 톤을 즐기는 내가 알록달록 밝은 색 홈웨어를 사들였다. 내가 지치지 않고 우울감에 빠지지 않으려는 최면 요법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할 수 있다. 아자~ ” 하면서 야무진 다짐을 해 보지만, 허한 마음속에 헤적이는 스산한 바람 앞에서는 번번이 휘뚝거리게 된다.
내팽개친 탈을 다시 걸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잔잔한 미소를 띠며 겨울 눈밭의 나무처럼 초연하다.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라던 초수이의 하이쿠 한 줄이 떠오른다. 탈의 표정이 시시때때로 변한 건 내 마음의 눈이 변덕을 부린 거다. 내 주관적인 견해로 사물을 바라보니 그럴 수밖에. 아직은 시시포스(Sisyphos)의 노동처럼 나의 손길을 끝없이 요구하지만, 때가 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비가 온 뒤 아름다운 무지개가 서듯이 나의 인생 이모작에도 쨍하고 해 뜰 날이 기다릴 것이다.
물색없는 주부는 부네 탈 옆에 볼품없는 편액 하나 내다 건다.
‘나는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다.’라는.
자색(紫色)
이숙진
고려 가사나 향가신해석 등에서는, 노인 헌화가*의 자紫포布를 보랏빛 바위나 자짓빛 바위 또는 ‘붉은’으로 해석했다. 현대 사전적 해석은 ‘자줏빛’이지만 자주색과는 조금 다르다. 자색은 청색과 적색의 혼합에서 생기는 색이다. 흔히 바이올렛(violet)이나 제비꽃을 자색이라고 하는 걸 보면 애오라지 보랏빛에 더 가깝다. 자색은 어두운 청색에 가까운 자색과 짙고 선명한 적색이 있다. 밝은 톤일수록 우아하고 여성스럽다. 어두운 톤에 가까워질수록 차분하며 격조 높은 이미지가 깔밋하다. 푸른빛이 많은 자색은 고급스럽고 붉은빛이 많은 자색은 요염하고 매력적이다. 라벤더색은 친절하고 달콤하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3000년에 걸쳐 강력하고 부유한 계급의 복색으로 자색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이외에 자색을 착용하는 것을 금했다고도 한다. 오늘 이프랜드(ifland)에 런던 핵심 랜드 마크 길잡이의 설명도 보라색은 제왕의 색이란다. 레바논이나 시리아 지방의 뿔소라 점액을 햇볕과 산화작용을 일으킨 염료가 보라색의 원조라고 하니, 그 희소가치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생량머리에 드는 건들마로 풀쐐기처럼 목덜미를 쏘아대던 햇살이 잦아들 즈음이면 소나무 그늘에서 도토리 키 재기하던 맥문동이 소리 없는 합창으로 기지개를 켠다. 소나무가 그림자를 토해내면 자색과 어상반한 꽃대가 보랏빛을 토해내며 곤댓짓해댄다. 보랏빛 수련과 나팔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슴벅슴벅 아장거리다 해넘이가 되면 쭈그렁밤송이 신세다. 비비 틀면서 핀다는 비비추꽃과 습기가 자박자박 있는 곳에 자라나는 물봉숭아도 보랏빛이다. 흔들리는 체에서 가루 날리듯 바람 따라 흔들리는 싸리꽃을 눈에 담고 온 가을날은, 모데라토 리듬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니 산모롱이 돌아눕는 햇살도 보랏빛 꿈에 젖는다. 가을꽃은 암수가 한 몸에 있는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아스라함이 있는 보라색 꽃이 많은 까닭은 요란한 색깔로 나비를 유혹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일까. 아니면 무지갯빛 가운데 파장이 가장 짧은 보라의 앙짜일까.
이즈음에는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며 소가 뜸베질하듯 참살이 식품을 찾아 흘근번쩍하게 된다. 천성이 게으른 나로서는 어차피 고자누룩해지고 말 일이지만, 세월의 회초리 앞에서 뒤늦게 건강 정보에 안테나를 곧추세운다. 그중에서도 안토시아닌이 듬뿍 들어있어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킨다는 자색 양파와 항산화 작용을 해 준다는 자색 감자가 관심을 끈다. 보랏빛 두 가지를 주문했더니 여느 장정 주먹만 한 실한 것들이 배송되었다. 비 오락 개락, 흐릴락 말락 어느 날이든 이 자색 채소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 양파는 가장자리는 자색이고 속으로 들어갈수록 흰빛이 선명하니 나비잠을 자는 아이처럼 신비스럽고, 해바라기하는 옥양목보다 더 눈부시다.
맛으로 느껴도 맵지도 않고 달큼하면서 알싸하다. 쌈장에 쿡 찍는 순간 담숙하여 누가 딴죽이라도 걸라치면 옷고름도 못 여민 채 퉁바리가 나올 만하다. 감자는 껍질을 까면 노란 속살이 일반 감자보다 훨씬 깊은 맛을 낸다. 이 자색 양파와 감자를 섞어서 볶으면 그 색감의 조화로움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겉 볼 안이라고 속으로 들어갈수록 흰빛이 깨끗하고 깊은 맛이 나는 양파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않을까.
보랏빛과 흰빛의 대비는 새뜻하다. 내가 즐겨 입는 옷의 배색(color combination)이어서 더 익숙하다. 올여름 패션은 퍼플과 화이트의 앙상블을 구현할 듯이 아름답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복 저고리도 자색으로 해 입었고 자색 코트와 자색 원피스도 즐겨 입는다. 멋있다는 부러움을 분에 넘치게 받았다. 그런 날은 기분이 좋아 자색이 살굿빛 착시를 가져올 만큼 따뜻해진다. 자색이 가장 개인적인 색이며 자유분방하고 약간은 허영이 깃든 색이기도 하지만, 자색은 우리의 삶에 매혹적으로 파고든다.
* 노인헌화가 참고 문헌
紫布(자짓빛)에 대한 견해
[향가신해석(鄕歌新解釋)]의 의문
특히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에 대하여 - (下)
<자지바회끗히 잡 오손 암소 노흐이시고 날 아닌디 붓글 이사든 꽃을 꺽어드리오리다.>
(자짓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를 노코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드리오리다.)
紫曰質背(자왈질배) 계림유사의 “자왈질배”에서 찾아본다.
이 “질(質)”의 현음(現音)이 “질”이다. 이 “질”의 고형(古形)은 “딜”일 것이니 “자왈질배”의 “質”은 “디”음을 借(차)한 것이요, “背”의 訓은 “등”이니 “자왈질배”의 “배(背)”는 “ㄷ”음을 借하였음에 틀림없다. “질(質)”의 음에서 “디”를 借하고 “背”의 訓에서 “ㄷ”을 借하여서 “O”이란 한 개의 말을 이루었으니 이 “딛”이 곧 “紫”의 색소(色素)를 말함이다. “지(芝)” “지치”라 하고 이것을 다시 한자로는“紫草(자초)”라고 쓴다. 또는 “紫色”을 “지칫빛”이라고 씀을 보아(경상도 방언) “자紫”의 훈이 “딛”임을 알 수 있다. (중략)
(1940. 3. 8. 동아일보 게재된 경파(鯨波) 이상인(李相寅)선생의 글 일부 발췌)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활동)>
이숙진 수필의 독후감
김광한
성숙한 시각으로 보는 사물에 대한 애정
타인이 쓴 글에 대해 객관적인 눈으로 그 작품을 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우선 객관의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이다.평석자의 객관이란 것은 주관과 맞물려있기 때문에 결코 객관적이 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