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대만 손들어!!!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대만 손들어! 이야기◎ 스크랩 정재문 전 의원이 말하는 한국-대만 외교 비사
베르베르 추천 0 조회 414 10.07.24 08:2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정재문 전 의원이 말하는 한국-대만 외교 비사

 

 

정재문(鄭在文) 한나라당 상임고문(5선의원, 전 국회 통일외무위원장)은 1992년 단교 이후 한국-대만의 '비공식 관계' 복원의 주역이다.
 
1992년 단교 이후 악화된 두 나라를 오가면서, '실질관계' 복원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9년 12월 3일 대만 외교부가 수여하는 친선 외교 포장을 3일 오후 타이베이(臺北)에서 수상하기도 하였다. 
 
미국 버클리대를 졸업한 그는 탁월한 국제 감각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 국회 통일외무우원장의 신분으로 대(對) 소련, 대(對)대만 외교 현장의 '밀사'로 활약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그는 2009년 4월호 한국 <월간중앙> 지면을 통하여 1992녀 8월 단교 이후, 한국-대만의 비공식 관계 복원 과정의 비사를 증언하였다. 아래는 <월간중앙> 2009년 4월호 내용이다.

by Chang-geun Choi (최창근 崔彰根)
 
 
“이범석 장군 아들의 깜짝 출현에 대만 측 노기 누그러뜨려”
한·대만 경제외교 복원의 비밀

한·대만 우호 증진과 경제교류를 위해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해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국회의장)과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재문 국회 외무통일위원장, 김영삼 전 대통령, 왕진핑 대만 입법원장.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함으로써 자유중국과 단교해야만 했던 1992년 8월24일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대만(자유중국)의 장관급 각료가 2005년 11월 부산에서 개최된 제13회 아태경제협력체(APEC) 총회에 각국의 정상과 정부 대표 등이 참석하는 회의기간 공식적으로 초청됐다.

이는 한·중 수교와 동시에 형제지국(兄弟之國) 이상의 우방국가로 81년간 외교관계를 유지했던 대만에 외교관계를 청산한다고 했을 때 태극기를 불사르고 한국대사관을 향해 오물을 투척하는 등 대만 국민이 보여주었던 극렬하고 분노에 찼던 분위기와 비교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큰 사건이었다.

바로 그러한 격변의 결과를 만들어낸 외교적 연출의 중심에는 숨은 인물이 있었다. 대만과 단교하기 전까지 정계에서는 사실상 대(對)대만 외교의 대표적 창구였던 정재문 당시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이었다. 그리고 막후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의 은밀하고도 치밀한 정치적 행보가 정 위원장을 뒷받침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1988년도에 등장한 노태우 대통령이 최대 치적으로 내세운 이른바 ‘북방외교’의 실천적 가능성을 가늠하는 두 개의 축은 한·소 수교(한·러 수교)와 한·중 수교였다.

공산권을 대표하는 소련·중국과의 수교는 한국의 안보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구조 정착과 특히 한반도 주변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북한의 극단적 행동을 막고, 핵 문제와 심각한 인권문제를 안고 있는 북한을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행동하고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외교적 과제였다.

그러한 과제 중 최대 핵심 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던 한·소 수교의 신작로(新作路)를 개척하고 마침내 양국이 수교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도 정재문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이었다. 수교 후 소련이 러시아로 국명이 바뀌었지만, 러시아의 푸틴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 중 한국을 방문해 러시아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할 수 있는 최고훈장을 정 위원장에게 수여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 국회의원으로는 유일하게 국제의원연맹(IPU) 이사이기도 했던 정 위원장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평소 “극진하게 환영하겠다”고 했지만 북한 의원들은 물론 동구 공산권 국가 의원들도 성사시키지 못한 IPU 총회를 결국 평양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막후에서 지원해 성사시킨 뒤 김일성 주석이 직접 총회에 참석해 치사하도록 했을 만큼 그의 국제 외교력은 돋보였다. 결국 이러한 정 위원장의 지속적이고 다양한 외교가 있었기에 한·대만 간 경제외교 복원도 가능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대만과 단교

정해영 전 국회부의장의 아들이면서 12~16대 국회까지 5선 국회의원으로서 두 번의 국회 외무통일위원장, 국제민주연합(IDU) 부의장, 당 국제위원장을 역임했던 정재문(한나라당 상임고문) 해석장학회 이사장을 만나 한·대만 경제외교 복원의 내막을 중심으로 인터뷰한 것은 지난 2월24일이었다.

1992년 8월24일,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의 1국2체제 불용 방침에 밀려 저항도 할 수 없이 대만과 단교를 선언하던 날, 외교가의 움직임 못지않게 국회는 소란스러웠다. 일부 대만과 친교를 나누던 의원들은 날벼락을 맞은 것 같다며 침통해 했다. 이 무렵 화급히 정재문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찾던 이는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었다.

1990년 1월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과 제2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민주당), 제3야당이었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이후 차기 대권 0순위로 예상되던 YS였지만, 한·중 수교가 극비에 진행되고 한·대만 단교 역시 기습적으로 단행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지 정 위원장이 대표최고위원실로 들어섰을 때는 약간의 분기가 올라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정 의원은 소위 YS사단의 외교 핵심 참모로서 YS에게는 국제문제의 신뢰할 수 있는 자문역이기도 했다. YS가 합당하기 전 미국의 민주당과 당 대 당 자매결연을 맺도록 한 것도 정 의원을 통해서였고, 앞에서 언급했지만 철저히 한국을 외면했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대문을 열게 했던 것도 정 의원의 외교력을 믿고서였다.

그런 YS였기 때문에 합당 직후 민주계에 위원장 3자리밖에 주지 않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맞대놓고’ 싫은 소리를 해가면서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정 의원이 맡도록 배려할 만큼 그를 신임했다.

그러나 정작 YS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모든 언론이 외무장관 1순위라고 기사화했던 정 의원을 불러 안기부장을 맡으라고 해서 정 의원을 헷갈리게 하기도 했으나 신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에피소드지만 정 의원에게 안기부장을 맡으라고 했을 때 YS의 일성(一聲)은 이것이었다.

“정 위원장, 버클리대 출신이라서 그런지 내가 대통령 당선되고 찾아오는 대사부터 미 중앙정보국(CIA) 책임자까지, 미국상공회의소 소장까지, 우째된 긴지 전부 정 의원을 젤 좋아하고 믿을 수 있겠다고 그라네? 연애도 그렇지만, 좋아하고 사랑해야 정보를 주더라도 줄 거 아니가? 믿어야 될지 안 믿어야 될지 ‘아리까리’하면 누가 속을 열어 보이겠노? 그러고 평양에도 가서 수고 좀 하고 와야 될 거 아니가? 김일성이도 정 의원이면 좋겠다고 그럴 긴데, 안기부장 맡아라.”

“아이고 총재님, 저는 국회에 있는 기 제일 좋습니다. 스파이 두목은 원래 소질이 없습니다. 총재님이 대통령 되셨는데 정부에 있으나 국회에 있으나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통일이 돼서 평양지사로 가라고 그러시면 그건 하겠습니다.”

“통일을 시키고 나서 지사 하겠다 그래!”

두 사람은 웃었다지만 어쨌든 대표최고위원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고, 대만과의 단교를 보는 YS의 시각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것 같더라고 했다.

- 대만 단교가 선언됐을 때 YS가 대표최고위원이었지만 사실상 당대표나 다름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사전에 청와대나 외무부로부터 보고받은 내용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까?

YS의 사절단 구성 지시

“없었던 모양입니다. 총재께서 불러 들어갔더니 상당히 침통해 계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정 위원장은 이런 식으로 단교되는 줄 알고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 표정으로 봐서 총재께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맞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중국과 수교할 것 같고, 그래 되면 대만과 단교는 시간문제 아니겠나, 그런 생각은 했지만 이래 급작스럽게 비밀리에 해치울 줄은 몰랐다’고 말씀드리면서, 총재님은 알고 계셨느냐고 물었죠.

대답은 없고 잠시 생각하십디다. 그러더니 ‘이제 우째면 좋겠느냐’고 그러십디다. 평소 총재님 스타일로 봐서 단독으로 나를 부르실 때는 외교적 의견을 구하겠다는 것이니 ‘당에서 사절단이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고 했어요. 단교됐으니 정부의 사절단도 안 되고, 국회차원의 사절단도 안 되거든요. 외교가 단절됐는데 대한민국 국회 사절단이 될 수는 없잖아요?

결국 방법이 있다면 대만에도 국민당이 있고, 국민당이 정부나 다름없는 집권당이니 당 차원의 사절단밖에 다른 길이 없지만 그건 또 대만에서 받아줘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 문제가 있는데 그건 교섭해봐야 할 문제이고, 현재로서는 당 사절단밖에 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총재께서 ‘정 위원장은 역시 다르네’ 이래요.

그게 좋겠다는 뜻이지요. 그러시면서 사절단 단장은 누가 좋겠느냐고 또 물어요. 말씀은 드려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바로 직전에 국회의장을 하셨던 김재순 의장님이 어떻겠느냐고 했지요. YS께서도 고민을 하셨던지 대번에 그게 좋겠다고 그러십디다. 그때 사실 나는 총재께서 직접 김재순 의장님한테 단장으로 나서달라고 부탁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부터 빨리 정 위원장이 나서서 김 의장도 만나고 팀도 구성하고 알아서 추진하라’고 그러잖습니까, 허허허…. 그게 단교 후 한·대만 통상외교랄까, 경제외교 복원으로 가는 첫 시작이었습니다.”


정재문 당시 국회 외무위원장.

YS는 참 편리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각만 던지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할 것으로 믿는 셈이었다. 정 의원도 웃으면서 “원래 그 어른이 믿는 사람한테는 몇 마디 하시지 않는다”고 했다.

- 대만과 단교가 선언됐을 때 외무부가 작성한 단교의 불가피성은 어떻게 설명돼 있었습니까?
“그게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는 문제가 좀 있고 국회에서도 논란이 좀 되고 그랬는데, 외교라는 것은 상대가 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단교라는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는 무엇보다 일반 국민부터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거든요. 그런 점에서 보면 외무부의 설명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요. 중국과 수교를 정당화하는 데 논리를 맞추다 보니 대만과 단교의 불가피성에는 설명도 객관성도 좀 미흡했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주장했고, 모든 국가가 중국과 수교할 때 중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예외 없이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도 대만과 단교가 불가피했다, 이게 뭡니까?

그러면 대만이나 전통적으로 대만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우리 국민 입장에서는 즉각 의문이 생기지 않겠어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안보·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중국을 선택하고 대만과 단교한다면 동북아와 한반도 평화를 내세우기 이전에 6·25 때 북한을 도와 남한에서 수많은 피해와 희생자를 내게 했던 중국은 뭐냐,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선조들을 도운 대만에는 단교가 보답이냐,

중국이 유일합법정부이기 때문에 대만과 단교해야 한다면 중국도 유일합법정부인 한국과 수교할 때 북한과 단교해야 할 텐데 중국은 왜 안 하느냐, 문화교류와 경제협력 문제를 지적했지만 단교 시점에서는 중국보다 대만과의 교역이 월등히 높았고 국민소득도 우리가 1만 달러 남짓한데 대만은 2만 달러가 넘고 중국은 비교할 수도 없지 않느냐, 소비는 소득이 하는 것이지 인구가 하느냐, 예측할 수도 없는 미래를 누가 장담할 수 있다는 거냐, 뭐 여러 가지 지적할 수 있는 논리나 객관성 결여가 상당히 나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물론 외무부 입장에서는 중국이 북한과 단교하지 않는 건 그 시점에서 북한도 유엔에 가입한 국가로 돼있다든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 112개국이 된다든가, 그런 여러 이유를 내세웠지요. 어찌됐든 단교가 됐지만 앞으로 어떻게 대만을 위로하고 어떤 방향으로 선린우호관계를 지속할 것인가, 그게 그 시점에서는 중요한 과제였어요.”

사실 수적으로만 본다면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무역의 수치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미래는 모르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이 동서로 분열될 조짐을 보이고 재정 상태가 좋은 독일·프랑스까지 이웃 동유럽 국가들의 경제위기를 외면하는 판국에, 그리고 미국이 세계 무역질서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세계무역기구(WTO)를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도록 만들고 있던 상황까지 감안한다면 대중 수교의 장밋빛 수치도 내일을 모르는 단순 수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대만 단교 시점과 오늘날을 비교할 때, 양국 간 경제외교가 복원된 영향이겠지만, 16만여 명이던 양국 국민의 왕래가 60여 만 명으로 늘었고, 교역도 20억 달러에서 250억 달러로 10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이 더 장밋빛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한국이 전 세계에서 무역흑자를 내는 나라가 4~5개국밖에 되지 않는 가운데 대만과는 단교 후 지금까지 계속 흑자를 내고 있다.

단장은 김재순 전 국회의장

여하튼 정 위원장은 사절단 구성을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김재순 전 의장을 찾아갔다. ‘토사구팽’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며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는 소회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한 원로였지만 대만에 대한 애정은 남달리 진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 위원장이 사절단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단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역시 거물답게 응대했다.

“참 잘 생각했다. 정 의원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집권당에 몇이나 있느냐? 청와대에는 있더냐? 기꺼이 가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고, 대만까지 가는 길이 너무 험난했다고 할 만큼 그 원인은 국내에 있었다. 여기서 많은 비화가 나온다.


‘비밀외교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정재문 전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오른쪽)이 한·소 수교의 신작로를 낸 직후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에게 국회를 가리키며 이야기하고 있다.

“김재순 의장과 대충 사절단을 구성하기로 했어요. 그런 다음 노태우 대통령한테도 보고했으니 대만대사관과 의견을 조율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때 서울에 나와 있던 진수지(金樹基) 대사는 단교 선언이 나오는 날 바로 본국으로 가버렸고, 왕가이(王凱) 공사 한 사람만 있었어요. 그래서 왕 공사한테 내가 전화해서 나 좀 보자, 이랬어요.

사태가 이렇게 됐으니 위로도 할 겸 고급 음식점으로 나오라고 해서 우리 뜻을 전했지요. ‘이게 우리 국민의 의사와 다르게 돼버렸으니 표현하기 어렵지만 사과 사절단을 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정부도 안 되고 국회도 안 되고, 당 차원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본부에 뜻을 전해달라’고 하자 갑자기 왕 공사가 내 손을 잡고 막 울어요. 엉엉 울었어요.

고맙다면서…. 참 안됐어요. 그러면서 우리 뜻을 정부에 전하고 다음 절차를 알려 주겠다고 합디다. 그러면서 대만 본부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왕 공사와 내가 절차를 협의합니다. 절차라는 게 말은 쉽지만 굉장히 복잡하고 까다롭잖아요? 더구나 초청이 아니고 사절단으로 가니까…. 인원, 비행 스케줄, 숙소, 숙소도 원로가 있으니 몇 등급 호텔이냐, 대만에서 이동할 때 차량 제공 여부, 경호….

무엇보다 대만에서 오라고 할 것인지, 뭐 여간 복잡한 게 아니지요. 하여간 그러고 있는데 난데없이 청와대에서 민관식 씨를 사절단장으로 보낸다는 방송이 나오는 겁니다, 뉴스를 듣는데. 뭐 이런 일이 있나 싶고 기분이 굉장히 상해요. 그래가지고 그걸 다 뒤집어엎고 ‘노태우 대통령이 정 의원 하자는 대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연락을 받고 예정대로 김재순 의장으로 했지요.”

- 곧바로 출발하신 겁니까?
“그게 또 아니에요. 김재순 의장을 다시 만나 ‘변경은 없습니다. 단장님으로 가셔야 한다’면서 나웅배·조부영·옥만호, 옥만호 의원은 그때 현역은 아니었지만 자유중국대사를 지내셨단 말이죠. 그렇게 사절단을 정했는데 마침 JP(김종필)께서 불러요. 가니까 사절단 잘 생각했다고, 그러시면서 반공운동 많이 한 김영광 의원을 데려가라는 겁니다.

대만이 반공국가이니까…. 알겠다고. 그래서 일단 6명이 결정됐어요. 나중에 정찬수 보좌관과 이세진 특보, 이현주 외무부 서기관과 기자 2명을 제외하고도 통역까지 8명인가 됐는데, 통역은 대만대에서 강의도 하고 <휠체어를 타는 퍼스트레이디>인가?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부인에 대해 책을 쓴 강명상 경남대 교수가 맡기로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당장 내일이라도 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왕 공사가 난감해하는 겁니다. 국민당 지도부에서 답변이 안 온다 이거죠. 사절단이니 오라고 하지 않으면 못 가는 것 아닙니까? 그랬는데 여기서 참…. 지혜라는 게 뭔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김재순 의장이 나보고 자기는 물론 단장으로 가겠지만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자면 정일권 총리를 고문으로 모시고 같이 가야 한다.

그러니 연락해봐라’ 이러시는 겁니다. 대만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원로가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가 나오지만 정 총리의 경륜과 지혜가 큰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 정 총리가 건강 때문에 하와이에서 입원 중이라. 그래서 외무부를 통해 겨우 연락드리자 그분도 단교 소식을 들으셨다면서 흔쾌히 알겠다고. 그래서 약속을 받고 정 총리한테는 하와이에서 타이베이(臺北)로 직항이 있으니 그걸로 들어가시면 편하실 것 같다고 했어요.

하여간 그래 놓고 있는데 어느 날 왕 공사가 날짜 받았다고, 준비해 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대한항공에 그 날짜로 예약해 달라고 전화했지요. 그때는 정해진 요일별로 비행기가 뜨는데 월요일인가? 그 비행기로 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월요일 비행 스케줄이 나와 있었던 걸 대만에서 싹 취소해버린 겁니다.

단교했는데 너희가 사절단으로 온다면서 너희 비행기를 타고 와? 타이베이항공 타고 오라는 거였지요, 허허허. 타이베이항공은 금방 잡힙니까? 그것 때문에 또 20여 일을 끌었어요.”

천수이볜 총통 초청으로 대만을 국빈방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맨 왼쪽)이 마잉주 당시 타이베이 시장(오른쪽)과 환담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마 시장에게 ‘첫 번째 도전에서 성공해야 지치지 않는다’고 훈수했다. 마 시장은 첫 번째 도전에서 총통에 당선된다.

- 참 어렵고 깊은 갈등이 얽혀 있었군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자 하와이에서 타이베이로 직접 들어 가시려던 정 총리께서 서울로 들어오셨어요. 그래서 하얏트 호텔에 묵으시는데 김재순 의장, 정일권 총리, 나 이렇게 셋이 저녁을 하던 중 정 총리께서 갑자기 ‘정 위원장, 내가 몸이 안 좋아 비서 하나 데려가야겠다’고, 김 의장이 사절단으로 가니 기분 좋은 대접도 못 받을 텐데 그냥 가자고 하는데도 ‘아니야. 데려가야 돼’ 이러시는 겁니다.

참 미칠 일이지요. 이미 왕 공사하고 인원·숙소·차량·항공편, 뭐 다 짜놨는데 갑자기 그게 됩니까? 그래가지고 또 며칠 지연돼요. 결국 어렵게 해결했지만, 아까 원로의 지혜가 무섭다고 했던 말이 그 비서 때문에 나온 겁니다. 정 총리가 비서로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나중에 대만에 도착해 우리가 허바이춘(?柏村) 행정원장한테 심하게 혼날 때, 우리를 굉장히 야단쳤어요.

나중에는 돌아가라고, 생각할수록 분하다고. 그렇게까지 막 야단치는데, 그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게 해준 사람이 비서예요. 이인종 씨라고, 철기 이범석 장군의 유일한 아들입니다. 우리는 전혀 몰랐지요. 그 사람이 하와이에 있는 것도 아니고, LA에 있었는데 정 총리가 일부러 비서라면서 불러온 겁니다.

대만의 홀대

허 행정원장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항일운동 할 때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야단치는데, 정 총리가 여기에 철기 장군의 아들이 와 있다고 하자 허 원장이 순간 눈빛이 멈춰요. 허 행정원장과 철기 장군은 좁은 지하 동굴에서 그야말로 생사를 같이하면서 항일운동을 했고, 그 아들은 일곱 살까지 같이 있다 해방되면서 헤어졌답니다.

그런데 철기 장군 아들을 대만에서 만났으니 그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끌어안고 ‘네가 바로 인종이냐? 철기 장군의 유일한 혈육인데 네가 이렇게 장성했느냐’면서 울고…. 그러니 뭐 조금 전까지 단교하면서 어찌 의논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것이냐고 막 호통치던 어른이, 야단이고 뭐고 점심이나 먹자고, 허허허….

그러면서 아우들, 잘해보자고, 사절단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그렇게 됐거든요. 정 총리가 이범석 장군의 아들을 데려갔기 때문에 격노하던 대만 측이 그만 누그러진 거지요. 그래서 역시 경륜은 무섭다, 큰일을 할 때는 경륜이 꼭 필요하구나, 지혜와 지식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지혜는 경륜이 아니면 나올 수 없어요. 지금 국회에 경륜 있는 원로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만날 싸우는 겁니다. 하여간 국내에서 별 일을 다 겪고 9월15일 대한항공은 못 타고 CX 421편으로 들어갔어요.”

9월15일부터 3박4일 동안 시작된 대만 방문은 도착 첫날부터 예상했던 대로 홀대였다. 사절단은 현역 국회의원이 대부분이고, 전직 총리와 국회의장이었지만 VIP 출구로 안내하는 것도 아니고 일반 승객들과 똑같이 입국 절차를 밟으며 몰려든 기자들에게 시달림까지 당했다. 물론 저녁식사도 대접받지 못했고 일행끼리 해야 했다.

그럼에도 공항에서부터 사절단의 도착성명은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었다. “김재순 의장이 도착해서 성명서를 읽는데, 김 의장답더라고요. ‘우리는 중국으로부터도 ‘토사구팽’당할지 모른다. 우리가 사절단으로 왔으니 채찍으로 얼마든지 때려 달라.’ 때리라는 용어를 썼어요. 그러니 리덩후이 총통부터 TV를 통해 다 봤을 거 아닙니까?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음날 국민당으로 들어가 허바이춘 행정원장을 예방하는 자리에서부터 배석했던 부총재, 당고문 등의 원로들이 호통을 쳤다. 물론 다음 날 첸푸(錢復) 외교부 장관과 연이어 예방한 류쑹판(劉松藩) 입법원장, 류궈화(劉國華) 총통부 자정(資政;퇴임 후 총통 고문 역할을 하는 행정원장 출신 등의 고위급 전직 인사) 등도 유쾌한 표정으로 맞이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요구들은 다 했다. 특히 허 행정원장은 단호한 원칙을 주문했다.

“중대한 변화의 시기, 어려운 시기에 사절단이 방문해 주어 감사하다. 노태우 정부는 한국 국민에게 역사적 죄인이 됐다. 공산당 정부는 한때 25개국이 있었으나 오늘날 단 4개국뿐이다. 중공·북한·베트남·쿠바밖에 더 있는가? 공산당은 반드시 멸망한다. 귀국이 ‘하나의 중국’ 때문에 우리와 정을 끊으려는 선택을 했지만 우리가 1971년 유엔을 탈퇴한 것은 공산국가(중국)와 같이할 수 없다는 국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두고 보라. 중공은 남북의 통일을 절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4개항을 요구한다. ①노 정부의 잘못을 확인해야 한다. ②중화민국의 존엄과 명예를 재확인해야 한다. ③양국 국민은 우호협력을 유지해야 한다. ④반드시 성과를 내는 대화가 있어야 한다.”

이러면서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허 원장은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는지 다시 호통을 치며 분위기를 돌변시켰다. 단교의 아픔은 그처럼 컸던 모양이었다. 정재문 위원장도 숙연한 분위기를 바꿀 수 없더라고 했다. 그런데 역시 원로는 달랐다. 정일권 총리가 다시 나서주더라는 것이다.

“그때 참 모험을 했는데, 막 화를 내면서 야단을 치니까 정 총리가 결국 나서더라고요. ‘원장님, 너무 야단치지 마십시오. 내가 병이 들어 하루라도 더 살려고 하와이에서 병원에 있는데 어느 날 뉴스를 보니 우리 동지들을 버리고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나옵디다. 중화민국 국기가 내려오는 걸 보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김재순 동지가 여러분들한테 사과하자고 해서 이러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사과하러 가야지, 내 이 병든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야단치지 마십시오’ 이랬어요. 그러니까 또 금방 조용해져요. 바람 쐬라, 병든 몸 조심하라, 그러고 말이지요. 허허허…. 그런데 사실 그 전날 서울에 계실 때 하얏트에서 위스키도 같이 마시고 그랬거든요? 근데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병든 몸이라고 하니 웃음이 나오잖아요, 허허허…. 그러고 나서 첸푸 장관 예방하러 외교부로 간 겁니다.”

결국 첸푸 외교부 장관을 만났을 때 사절단이 방문한 목적은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그는 외교의 수장답게 원로들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실무적 문제에서는 역시 구체적 조건을 담아 노련미를 보였다.

“북방정책, 교류… 모두 이해한다. 그러나 왜 수교 과정을 그처럼 비밀로 했는가? 어떻게 지금도 7~8월의 교섭과정을 알려주지 못하는가? 중화민국이 한국에 대해 무엇을 잘못했나? 귀국 정부가 중공과 수교하는 과정에서 계속 비밀로 하고, 외무장관은 진전이 있을 때 사전에 알려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음에도 이렇게 만든 것은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사절단은 개인 자격인가, 정부 파견인가? 권한을 위임받고 왔는가? 만일 아니라면 방문 효과가 없다. 시간 낭비다.”

‘주한국대북대표부’ 탄생

여기서 김재순 단장이 나섰다.

“정부 대표라면 전권특명대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정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김영삼 총재가 사절단을 임명했고, 리덩후이(李登輝) 총통께 보내는 김 총재의 친서를 휴대한 것이 우리의 신분(Status)을 말해주는 것 아니냐? 첸 부장 같이 한국친구가 많았던 사람일수록 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자유중국의 친구이고, 앞으로도 친구로 남을 것이다. 불행한 일이 있을 때 같이 격할 수도 있지만, 주인은 책임을 진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우리 국민은 자유중국을 잊지 않는다. 새 친구를 얻으려고 옛 친구를 버린 것은 실수다. 상가를 찾아와 목청 놓아 우는 사람들, 장례만 끝나면 다 간다. 상주는 가지 않는다.

자유중국만 상가가 아니다. 한국도 자유중국의 국기를 내린 상가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서 떠나지 말자.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우리는 이제부터 어떻게 잘 해나갈 것인가를 의논해야 한다. 부부 간에도 좋을 때는 사랑을 잘 모른다. 역경 속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 어려운 고비를 전화위복으로 삼기를 기대한다.

외무부 대사와 실무적 이야기를 하겠으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말해주면 그 실현을 위해 정치생명을 걸고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때부터 첸푸 장관의 표정은 달라졌고 “김 단장의 말씀을 듣고 감명받았다. 믿고 한번 다시 모험을 할까 한다”는 인사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는 준비했던 제안을 꺼내놓았다. 그러나 모두 사절단이 결정할 수 없는 사항들이었고, 대만이 내놓은 제안을 그나마 우리 정부와 상의하고 협의해야 하는 것은 외무통일위원장인 정재문 의원의 몫이었다.

대만이 내놓은 제안은 10개 항이 넘는 것 같았다. 정 의원은 각오를 하고 왔지만 돌아가 정부에 내놓았을 때 얼마나 수용될지, 매우 진통이 뒤따를 것 같은 사안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지금 기억해봐도 마치 새로운 국가와 수교하는 것 같이 엄청나고 까다로운 문제들이었어요. 어찌 보면 오히려 소련이나 중국과 처음 수교하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힘든 거였지요. 내용은 많았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을 보면 ①자유중국의 존엄을 인정하고 대사관 기능과 같은 새로운 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새로운 기구는 정식 국호가 사용되어야 한다. ②국기를 게양할 수 있고, 대사급 교환은 아그레망을 전제로 한다. 화교협회· 화교학교의 국기 게양도 허용해야 한다. ③외교특권·면죄권, 그리고 직원들의 외교관 신분증, 외교관 번호판, 외교 인명록 기재 등을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수준으로 해야 한다.

④기본조약과 협정, 우호조약은 계속 유지돼야 한다. 미국과도 똑같이 공동방위조약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⑤비외교 재산은 반드시 보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월24일 한국이 중공과 수교와 동시에 명동 대사관과 부산 영사관을 중공에 넘겨주겠다는 결정에 가장 엄중한 항의를 하고자 한다. 비외교 재산은 계속 우리가 보유해야 하며, 한국정부가 임의로 처리할 수 없다.

중화민국의 재산이다. 명동 대사관 토지와 모든 비외교 자산을 합해 9필지, 부산 영사관 부지, 연희동 화교학교 9개 필지 등은 절대 제3자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⑥교민의 권익 보호. 대충 이렇게 6개항으로 되어 있었는데, 교민은 1,200명 정도이지만 만약 한국정부가 대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대만의 한국교민들에게도 거류증과 공작증을 내줄 수 없다고 나와요.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 상당히 민감한 문제들로 되어 있는데 그걸 체류하는 동안 답을 달라는 겁니까?
“첸 장관은 그 자리에서 답을 달라고 그랬지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것 때문에 가령 김 단장이 국명은 자유중국이 어떠냐고 하니까 첸 장관이 절대 안 된다면서 ‘중화민국’을 고집하는 겁니다.

사실 자유중국은 그 시점에서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는데도 16개국과 정식 국호를 사용하고 있었어요. 그러기에 내가 제동을 걸었지요. ‘장관의 뜻을 전해 들었으니 귀국해서 답을 주겠다. 우리는 당의 사절단이다. 정부의 답변을 원하는 것 아니냐? 사절단의 답변으로 만족하겠다면 여기서 하겠다’ 그랬더니 첸 장관도 대답을 못합디다.

그러자 정 총리께서 최종적으로 정리를 하는 겁니다. 그때도 역시 경륜이 나와요. ‘내가 16개국을 특명대사로 돌아다녔다. 국기와 국호 문제를 본국과 협의하지 않고 결정한 일은 한 번도 없다. 사절단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 이러니까 조용해지는 겁니다. 사실상 그것으로 방문 목적은 다 끝난 것이지요. 왕가이 공사가 서울에 있으니 내가 수시로 협의하겠다 했고. 그래가지고 나머지 일정은 있었지만 대동소이한 내용이고 예정대로 귀국했어요.”

그 후 한국정부와 대만 측의 직접협상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한국 외무부의 중국 눈치 살피기 때문에 여간 힘든 과정을 겪는 게 아니었다. 만남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대만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 의원이 중개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은 “패고 싶을 정도로 피곤하고 힘들었다”고 했다.

“싫든 좋든 만나야 이야기가 될 것 아닙니까? 되든 안 되든, 대만의 요구가 타당하든 하지 않든,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 결론이 나올 텐데, 우리 외무부 장관부터 만남 자체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한승주 외무장관을 직접 찾아갔어요. 무엇보다 사무실을 여는 조건부터 논의하고 국명도 협의해야 하고, 대만에서는 협상하기 위해 찾아오겠다는데 우리 외무부에서 중국 눈치 보느라 만나지 않겠다고 하니 좀 대승적 자세를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첫마디가 ‘만나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와…. 내가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이지만 정말 외무부 다시 봤어요. 하여간 그러던 중에 장관이 해외 출장을 가고 없어서 홍순영 차관을 다시 만났어요. 설명했지요. 한국에서 만나는 것이 정 어렵다면 일본에서 만나자, 도쿄에는 눈이 많아 곤란하다면 오사카에서 만나면 되지 않느냐, 새삼스럽게 다시 수교하자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비정치적 문제가 있지 않느냐, 그랬더니 홍 차관이 참 고맙더라고요. 가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홍 차관이 몰래 오사카로 갑니다. 그러니까 한국 외무차관과 대만에서 날아온 대표가 오사카에서 첫 비밀회담을 엽니다. 거기서 홍 차관이 대표부 이름은 정하지 못하고 대표부 개설에 대해서는 합의합니다.”

사절단을 만들어 방문했던 것이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정 의원은 오사카에서 자고, 최대의 난제였던 대표부 명칭 문제 때문에 자신이 직접 타이베이로 날아가 여러 명칭을 놓고 협의하고, 돌아와 다시 외무부와 접촉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왕 공사와 또 협의하고, 그러기를 십 수 차례, 보다 못한 리덩후이 총통이 사절단이 갔을 때도 만나주지 않더니 정 의원을 불러 그의 고독한 행보를 위로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결국 매듭을 지은 것이 지금 사용하는 ‘주한국대북대표부(駐韓國台北代表部·Taipei Mission in Korea)’라는 공식 명칭이었다. 그러나 명칭을 결정하는 것이 경제외교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명칭을 정하는 것 이상으로 양국 국민을 위해서는 남아있는 통상문제 해결이 현실적으로 더 중요했다.

정 의원은 당대표였던 김영삼 총재가 그 사이에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에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남은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으로 믿고 기대했다. 하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그토록 대만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김 대통령이 대만에 관심을 보이는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한·중 수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대만의 심기를 뒤틀어놓았던 당시 김석우 아주국장을 청와대 의전수석으로 임명해 노태우 정부와 다를 것이라고 기대에 부풀어 있던 대만의 기분을 영 엉망으로 만들었다.

“김석우 수석이야 정부의 명을 받고 은밀히 수교 작업을 했던 사람이니 대단하게 평가해야지 탓할 일은 아니지만, 지금도 YS 그 어른께서 왜 대만을 무심하게 넘기셨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뒤늦게 물어볼 수도 없고. 결국 YS께서도 퇴임하시고 리덩후이 총통도 물러나고 천수이볜 총통이 집권하면서 다시 사절단으로 갔을 때 제기됐던 문제들이 부상하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아주 난감하게 됐잖습니까? 대만과 교류하자면, 다시 말해 민간외교를 복원하자면 대만 쪽에서 요구했던 항공·해운협정·농산물 문제, 이런 통상 문제들인데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DJ 정권이 들어섰으니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그걸 해결하자니 정말 힘들었어요.”

- 결국 통상문제, 경제외교를 복원하셨는데, 제일 어려운 문제가 직항로 개설 아니었습니까? 어떤 과정으로 성사시켰습니까?
“사실 나로서도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천수이볜 총통이 퇴임한 YS 그 어른을 국빈으로 초청하면서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된 겁니다. 그 내용은 별도로 해야 할 만큼 많은데, YS께서 퇴임 후 대만 공식방문은 세 번입니다만, 1차 때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하던 첫 대만 방문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거지요. 그

것도 모험했어요. 서울에 있는 중국대사관의 고위 관계자가 나한테 연락해서 YS가 대통령 재임 중 장쩌민(江澤民) 주석도 만났고 줄곧 친분을 지켜왔는데 퇴임하시고 여행하신다면 중국부터 하셔야지 대만이 뭐냐고, 우리가 극진히 모실 테니 당장 대만 방문을 취소하라는 겁니다.”

- 그런데도 강행하셨다는 겁니까?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대만과 약속했던 문제들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었습니다. 정치인의 생명은 약속입니다. 또 YS께서도 당시 두 가지 명분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천수이볜 총통이 YS 어른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면서 본인이 서울에 와서 인사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니 대만에 오시면 정치적 스승으로 모시고 동북아의 평화 안정에 대해 자문하고 싶다고 저한테 전해왔던 것이 있었고요.

둘째는 우리 국민을 생각해서 가시겠다고 한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천 총통의 초청이 왔다는 말씀을 드리자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어요. ‘정 위원장, 내가 중국에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장쩌민 주석이라든가 중국정부의 많은 분들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대만에 갈 수 있겠노’ 이랬어요. 그러시더니 ‘아, 정 위원장이 대만을 잘 알지?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그래요. 그때 내가 ‘직항 항공편이 없어지면서 무엇보다 우리 국민이 대만을 방문할 때 대단한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하자 YS께서 반사적으로 ‘우리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내가 어디인들 못 가겠느냐’ 이러시는 겁니다. 역시 대통령을 지낸 분이라 다르더군요. 결국 대만 직항노선 재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방문하게 된 동기가 됐지요. 그게 2001년 7월입니다.”

- 시점으로 보면 2003년부터 전세편이 운항되고 2004년 9월 정기노선을 재개하고 항공협정을 체결해 2005년 3월부터 정식으로 대만 국적 항공기가 취항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 아닙니까?
“그게 1차 방문 때 이미 우리 정부당국과 합의까지 했는데도 DJ가 틀어서 안 된 겁니다. 물론 그 후에도 굽이굽이 난제가 튀어나오고, 상대가 있고, 참 생각처럼 쉽지 않아 숱한 고비를 넘겼지요.

그걸 말로 다 할 수도 없고, 맨 처음 천 총통하고 두 분이 빨리 복항하자고 합의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부정기 편으로 전세 비행기가 뜨기 시작했어요. 그런 다음 그걸 정기 편으로 바로 돌리려고 하자 대만 쪽에서 제동을 걸어요. 항공에 한해서는 승객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과는 다르다,

항공회사들끼리만 합의해서 되는 게 아니고 국교가 없더라도 외무부 차관이나 국장 정도에서 문서 교환이 있어야 한다 이래요. 그래서 내가 1일주일에 몇 번 뜬다든가, 비행기가 왔을 때 비행장에서 어떻게 한다든가 하는 구체적 사항에 대해 합의가 있어야 하는 건 맞는데, 그걸 자꾸 정부가 나서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각하(YS)께서도 나와 계시고 총통과 약속도 있었고 하니 일단 우리 손 대표(대만 주재 한국대표부 대사)와 이 대표(한국 주재 대만대표부 대사)가 합의하고 그 다음에 점차적으로 기술적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래가지고 대만 측에서 수용했어요. 그런데 문서에 서명하려고 하자 우리 외무부에서 보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잖아요.”

직항로 재개

- DJ정부가 틀었다는 게 그거군요. 왜 그랬을까요?
“중국도 의식했겠지만 무엇보다 YS께서 그런 역할을 하신다는 게 그렇게 좋게 보였겠습니까? 참…. 그때가 DJ께서 대통령을 그만두시는 해라고요. 그런데도 제동을 걸어버려요.”

- 결국 정기 편은 합의를 못 본 겁니까?
“YS께서 화가 나시고 나도 상당히 불편하고. 그래가지고 한·중 수교를 할 때 중국에서도 ‘하나의 중국’은 정치적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지 경제 문제는 예외라고 분명히 언급했는데, 민간인들이 오가는 복항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중국도 하나의 중국을 천명했기 때문에 대만 국민을 자국민이라고 생각할 거다 말이지,

하여간 외무부가 들먹거릴 정도로 됐어요. 그래서 DJ 물러나고 시간이 좀 걸렸지만 2004년 9월부터 대표회의를 다시 가졌는데, 그게 또 늦어져요. 이번에는 아시아나가 끼어드는 겁니다. 단교 전에는 대한항공 단일노선이었는데, 그 사이에 아시아나가 들어섰다 이 말이죠. 그러니 건설교통부에서 조정이 안 돼요. 지금은 대한항공이 7편, 아시아나가 7편, 1주일에 14편. 2편은 항공화물. 총 16편이 되나요? 그렇게 되지만 건교부에서 또 진통이라. 아이구….”

- 대만과 경제외교가 복원되는 것은 복항이 이루어진 다음입니까?
“그렇지요. 결국 항공협정을 체결하고 복항돼서 그걸 기념한다고 대만정부가 YS 어른과 저를 초청했어요. 그게 YS께서 타이베이 2차 방문입니다. 물론 2005년 10월 3차 방문하실 때도 대만 최대 사립대학인 중국문화대학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고 대대적 환영을 받았죠.

지금은 총통이지만 그때는 타이베이 시장이었던 마잉주(馬英九) 시장까지 우리를 영접했는데, 그분은 참 인상적인 일이 있어요. 우리가 방문하기 약 두 달 전 국민당 총재가 됐어요. 야당 총재가 된 거죠. 그런데 우리가 도착해 보니 마 시장의 부친이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계시는데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시장실에서 영접하더라고요.

어쨌든 복항도 됐고 했으니 이제는 경제교류 확대가 최종적인 문제지요. 대만과 우리가 친선뿐 아니라 남아있는 문화·통상, 이런 교류를 확대하자 해서 YS께서도 천 총통과 몇 차례 회의를 하셨지만 결국 복항이 가장 큰 과제였지,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풀 수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사절단으로 갔을 때 나온 문제 중 중국과 예민하게 얽혀있는 재산권 문제라든가 정치·외교적 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해소한 겁니다.

사실상 경제외교 복원을 해결한 것이죠. 진수지 대사와 왕자이 공사도 고생을 많이 했지만, 2006년도에 본국으로 귀임했는데 당시 서울에 있던 타이베이대표부 리자이방(李在方) 대사가 수고를 많이 했어요.”

직항로가 재개됐다는 것은 정치·외교적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경제외교 복원을 상징한다. 항공기는 민항이든 국적항공이든 해당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래서 항공기 내에서 태어나는 아기의 국적도 항공기가 소속된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인데, 함선과 여객선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국제 관례다.

그런 점에서 인적·물적 교류가 제한받지 않게 된 직항로 재개와 경제외교 복원은 향후 한·대만 간 새로운 발전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검색
댓글
  • 10.07.26 02:53

    첫댓글 그래서 두 나라는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런건가요? 아니면, 미래는 장차 어떻게 되는건가요?

  • 16.02.10 13:06

    두 나라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힘쓰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고생 많으셨네요.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