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亂世)일수록 불타는 애욕(愛慾) [壬 辰 倭 亂] - 亂世에 흐르는 愛情 이때까지 육지에서는 연전연패라기보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만 가는 싸움이 었다. 그런 중에 오직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수로를 끼고 적의 서진(西進)을 잘 막아내었으므로 그래도 대국(大局)은 아주 무 너지지 않고 있었다. *이순신장군(난중일기)에 대해선 너무 잘 알려져 있기에 세세한 기술은 생 략하기로 함. 임금이 의주에 자리를 잡자, 할 일 없는 신하들은 또다시 지나간 일을 가 지고 서로 논했다. "이홍로(李弘老), 홍여순, 유영길(柳永吉) 등은 이산해의 부하로서 뇌물과 아첨으로 나라를 망친 자들이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피난살이를 하게 된 것이 누구의 소생이요." 이것은 서인들이 이산해나 유성룡의 부하들이 다시 정권을 잡을 것을 두려 워해서 동인의 잔당을 몰아내고자 하는 소리였다. 그러면 동인측에서도 지지 않고 "정철은 서인의 거두로서 나라일을 돌보지 않고 술과 글로만 세월을 보냈 소. 이런 자를 다시 소환하여 정승의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은 불가하고, 그리고 윤두수는 아무런 일도 못하면서 일찍이 평양을 고수한다고 하였 소." 하고 공격했다. 피난길에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지 내쫓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임금은 잠시 조용해졌던 붕당 싸움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심중에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 친히 글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었는데, 그 글은 이러했다. - 諸臣今日後 忍復名西東 - (여러 신하들이어, 이제부터는 동이니 서니 제발 다투지 말라.) 임금도 당파 싸움에는 이제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임금은 골치가 아프고 시끄러우면 으레 후궁에 있는 인빈 김씨를 찾았다. 이곳만이 고요하게 마 음 놓고 온 종일 쉴 만한 아늑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인빈도 이제는 한창 무르녹아 익는 여인의 나이로 전보다 훨씬 피부에 기 름이 올라, 흰 살결이 더욱 희고 밝은 창을 대하는 듯한 눈은 정염을 뿜었 다. 임금은 영빈을 보고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너만 있으면 적적한 것을 모르겠구나." 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자 인빈은 임금에게 조용히 물었다. "상감, 장차 적병이 쳐들어 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적병은 무슨 적병, 명 나라 원군이 들어온 이상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될 텐데." "정말이오니까?" "내년 정월은 서울서 지내게 될걸." "아이구 좋아라.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빈은 어린애 모양으로 눈을 반짝이며 임금을 쳐다 보았다. 과연, 다음 해(癸巳年) 사월 왜병이 남해안으로 밀려난 가운데 화의(和議) 가 진행되자 임금은 시월에 의주로부터 서울로 환도했다. 이동안 유성룡은 명장 이여송의 접반관(接伴官) 노릇을 잘 하였으므로 다 시 임금의 신용을 회복하여 서울 환도 후에는 윤두수가 밀려 나고 그 뒤를 이어서 유성룡이 영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인들이 정권을 잡고 정철은 환도한 다음 해인 갑오년(甲午年)에 세상을 떠났다. 서인(西人)의 장로격인 정철이 없어지자 동인(東人)의 기세는 놀랍게 일어 났다. 정철이 떠난지 수일 후에 벌써 남인과 북인의 책동은 시작되어 수 년 전에 정여립(鄭汝立) 역옥(逆獄)에 빗걸려 들어 죽은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과 추증(追贈) 문제가 일어났다. 삼사에서는 연하여 상소를 올렸다. <정철은 간물(奸物)로서, 이전 최영경이 자기를 욕한 것에 원한을 품고 기축역옥(己丑逆獄) 사건에 자기가 위관(委官)이 된 것을 다행히 여기고 최영경을 잡아오게 꾸미고, 겉으로만 구하는 체하면서 뒤로 얽어넣어서 종 내 영경을 죽여버렸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최영경의 원통함을 통촉하시 고 정철을 추죄(追罪)하셔야 하실 것입니다.> 갑오년 오월에서 시작하여 그해 십일월까지 하루도 건느지 않고 조정에서 는 두파로 나뉘어 임금께 말로써 혹은 글월로써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었 다. 때는 바야흐로 난리는 조금 뜸해졌다 하지만 전후(戰後)의 수습이며 정돈 은 아직 그냥이었고 또다시 언제 왜병이 쳐들어 올는지 알 수 없는 무시무 시한 시절이건만 모든 신하들은 그쪽은 둘째 문제로 삼고, 이미 죽은 정철 의 관직 깎기에만 급급하였다. 임금도 너무 지긋지긋하여 "지금은 군신이 다만 창을 메고 군사를 훈련하여 적을 칠 일을 생각할 때 요. 그밖의 다른 일은 도외시해야 할 것이니, 이런 소요는 스스로 짐작하 여 덮어둠이 옳지 않은가?" 하면 사류(士類)들은 도리어 "국시(國是)를 바로 잡는 일은 하루가 늦으면 하루가 늦을수록 그만큼 더 나라가 위태로와 지는 일이오니 소요하다하여 어찌 가만 있으리까." 하여 죽은 정철의 관직 깎는 것을 고집하였다. 이 주장의 중심인물은 김우 옹(金宇 ), 기자헌(奇自獻), 이기(李 ) 등이니 이때 김우옹은 대사헌이요, 이기는 대사간이오, 기자헌은 장령(掌令)이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십일월 에 죽은 정철의 관직은 삭탈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서인(西人)은 몰락을 당했다. 정승에서부터 한낱 녹사에 이르기 까지 벼슬자리는 모두 동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인이 없어지 고 동인의 독무대가 되자 다시 동인 자체내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의 대립이 벌어졌다. 북인의 거두 이산해는 쫓겨나기는 했으나, 임금은 인빈 김씨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 이산해를 종시 잊지 못했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정탁(鄭 琢)은 기회를 엿보아 "정철의 관직이 삭탈된 이때 억울하게 쫓겨난 이산해를 다시 부르시옵소 서." 하고 임금에게 청했다. 이때 대사헌 김우옹이 정탁을 나무라고 파면시키 니, 북인들은 이것을 보고 "유성룡이 이산해가 다시 나오면 자기를 누를까 겁내서 김우옹을 시켜 정 탁을 쫓아낸 것이다." 라고 비난했다. 이런 일로 해서 북인은 더욱 유성룡을 미워하던 차 마침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리 나라에 나와 있는 명장 양호(楊鎬)가 무고당한 것을 변명할 일 이 생겼다. 이것은 양호의 중군(中軍) 팽우덕(彭友德)이 우리 나라 접반사 이덕형(李 德馨)에게 "큰일이 생겼소. 본국에서 나온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이십여개 죄목 으로 양호 를 모함하는 보고서를 써 갔소. 그런데 그 중에는 귀국에 대한 것도 몇 가 지 들어있다 하오." 하고 말한테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이때는 전진도 가라 앉은 무술을(戊戌年)이었다. 이덕형은 즉시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지금 명나라가 구원해 주는 이 마당에 명나라 황제의 의심을 살만한 일이 있게 되는 것은 불리한 노릇이므로 임금은 곧 유성룡 을 보고 "일이 중대하니 경이 명나라에 들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일이 변명해 주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유성룡은 병이 있다하고 사양하므로 임금은 이것을 매우 괘씸 하게 여겼다. 이것을 가지고 지평(持平) 이이첨(李爾瞻)과 대사헌 이헌국 (李憲國)은 서로 공박했다. 먼저 이헌국이 "국가 다난한 이때 영의정 자리를 비게 되는 것은 좋지 못하오. 다른 사 람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오." 하면 이이첨은 "중요한 때일수록 영의정이 직접 전말을 설명하는 것이 좋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명을 받고 가지 못하겠다는 말은 임금을 속이는 것이오." 하고 대들었다. 임금은 마침내 이이첨의 말을 옳게 여기고 이헌국을 파면 시켰다. 이에 남이공(南以恭)의 무리들은 임금이 유성룡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유성룡은 오랫동안 우성전(禹性傳), 이성중(李誠中) 등 심복의 사수를 받 아 국정을 농단하고 사류를 해치었소. 그리고 또 성룡은 왜적과 화의를 주장해서 나라를 그릇친 자이니 물러나게 해야 하오." 하고 공박했다. 이때부터 남인 유성룡을 내쫓으라는 상소가 연일 잇달아 들어왔다. 임금도 이러한 상소질에는 더 견딜 수가 없었던지 끝내 유성룡 을 내보내고 말았다. 유성룡을 몰아낸 후 북인은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이산해와 홍여순을 중 심으로 한 자들은 대북(大北), 남이공과 김신국(金藎國)을 중심으로 한 자 들은 소북이라하여 서로 싸우다가 그해로 김신국과 남이공이 물러나고 이 산해의 대북이 세력을 잡았다. 이러던 중 이원익(李元翼)이 상소로 유성 룡의 청백한 것과 충성스러움을 말하고 홍여순, 임국로(任國老) 등을 탄핵 하다가 도리어 대사간 최철견(崔鐵堅)에게 쫓겨나 다시 이산해가 영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산해와 홍여순이 정권을 잡은 후 이들이 또다시 서로 싸우므로 이산해의 당을 육북(肉北)이라하고 홍여순의 당을 골북(骨北)이라 하였다. 이때 이산해 편에 가담한 이이첨이 상소로 홍여순을 논박하며 몰아내고자 하여 다시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임금은 이 두 사람을 다 내쫓고 다시 서인 (西人)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서인의 한 사람 으로서 이귀(李貴)가 조정에 들어와 대북 정인홍(鄭仁弘)의 행동을 비판하 였다. 이에 정인홍은 "신이 성혼(成渾), 정철과 사이가 좋지 못하고 또 유성룡과도 서로 가깝지 못하였더니 지금 와서 그 무리들이 신을 이렇게 미워합니다." 하고 전에 성혼이 정철과 함께 공연히 죄없는 최영경을 죽였다는 것을 트 집잡아 서인 전체를 공박하였다. 대사헌 황신(黃愼)이 이 말을 듣고 이귀와 성혼을 위하여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자 임금은 도리어 황신의 벼슬을 바꾸고 간혼독철(奸渾毒澈)이란 전 교까지 내려 조정에 있는 서인들을 다시 내쫓았다. 그후 소북 유영경(柳永 慶)으로 이조판서를 삼고, 대북 정인홍(鄭仁弘)으로 대사헌을 삼았으므로 이제부터 또 이들이 서로 싸울 차례다. 50 - 51세의 임금과 19살 새왕비의 춘정 19살의 새신부 - 인목왕비(仁穆王妃) 소북 유영경이 정권을 잡은 후 얼마 안 가서 왕비 박씨가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나이가 이미 오십이 넘었으나 다시 재혼할 생각을 가졌다. 이때 후 궁에는 인빈, 순빈(順嬪), 정빈(靜嬪), 정빈(貞嬪), 온빈(溫嬪) 등 아이를 낳은 빈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실(正室)이 없으니 새로 왕비를 또 맞이하려는 것이었다. 의인왕비(懿仁王妃) 박씨의 장사를 치른 뒤 임금은 임인년(壬寅年=선조 삼 십오년)에 이조좌랑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했다. 이때 임 금의 나이는 오십하나요, 새 왕비(仁穆王妃)의 나이는 십구세였다. 첫날밤, 중전궁은 밤새도록 촛불이 휘황했다. 어린 왕비는 여러 시녀에게 둘러싸여 임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꽤 깊은 뒤 임금이 중전궁으 로 들어섰다. 어린 왕비는 조용히 일어나 임금을 맞이하고 다른 시녀들은 모두 옆 방으로 물러났다. 때는 칠월이라 방안은 몹시 무더웠다. 임금은 친히 부채질을 하면서 좌정 한 뒤 중전을 바라보았다. 중전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앉았는데 그 약간 홍조를 띤 두 볼은 바야흐로 피어나려는 한떨기 꽃봉오리 같았다. 임금은 슬며시 손을 잡아끌며 "자, 이리 가까이 오오." 하며 이리저리 처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중전은 아무 반항 없이 임금이 하 는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나이 보다는 꽤 숙성하곤 그래. 지금 궁중에는 아직도 정실 아들이 없으 니 중궁이 아들을 하나 낳아야지." 임금은 처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중전은 부끄러운 듯 또다 시 얼굴에 홍조가 물들었다. 임금은 팔에 힘을 주어 처녀의 가는 허리를 이끌어 당기자 처녀의 숨소리는 가쁘다 못해 가늘게 떨렸다. "누가 보옵니다." 중전은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며 임금의 용포 소매 속에다 얼굴을 파묻었 다. "어허, 보긴 누가 보나. 너와 나 단 둘 뿐이 아닌가." 임금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더욱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지극히 행복스런 유열(愉悅) 속에 첫날밤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게 흘러갔다. 얼마 후 왕비의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임금은 이번에야말로 정실에서 아 들이 생긴다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어느날 임금은 오래간만에 인빈의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인빈은 언제나처 럼 반가이 맞았다. "상감, 우러러뵈온지 퍽 오래옵니다. 신정(新情) 재미가 매우 좋으신 게지 요?" "그래,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정말 시시때때로 네 생 각이 나서 그리웠다." "희롱의 말씀이오이다. 시시때때로 그리워졌다면 그토록 오래 아니 찾으셨 겠습니까? 듣자온데 중궁께서 태중이라 하옵시니 반갑나이다." "글쎄.. 왕자를 낳을지 몰라." "첫아들 낳으실 것이옵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야." 그날 밤 임금은 풍염하고 능란한 인빈의 처소에서 구정을 흡족이 누리었 다. 다음 날 이침 인빈은 전부터 마음 먹고 있던 말을 임금에게 했다. "상감, 이번에 중궁께서 아들을 낳으시면 그 태자로 세자를 정하십시오." "세자는 벌써 광해군으로 세우지 않았는가?" "그러시지만 이번에 태어날 태자는 정실 소생이 아니옵니까? 벌써 세상에 서도 그렇게 될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사실 임금도 새로 태어나는 정실 소생으로 세자를 삼고 싶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때부터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긴 했으나 명나라에서는 큰 아들 임해군을 안 세우고, 둘째 아들을 세운다고 아직까지도 응하지 않고 있는 판이다. 임금의 마음은 저으기 흔들렸다. 더우기 세상에서도 응당 그렇게 될 것으 로 알고 있다는 말에 임금도 어느덧 새로 태어나는 원자(元子)로 세자를 삼으리라 마음 먹었다. 원자(元子)로 세자를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인빈 뿐만 아니라 유영경도 역 시 마찬가지였다. 유영경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휘옹주(貞徽翁主)의 부마 유정량(柳廷亮) 의 조부로서 인빈과의 사이고 가깝고 미묘한 궁중 사정에도 환한 터였으므 로 인빈이 전에 자기 소생으로 세자가 못된 것을 늘 불만히 여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새로 태어나는 원자로 세자를 삼아야겠다는 것이 또한 유영경의 생각인 것이다. 이때부터 인빈은 대북의 이산해보다 소북의 유영경을 더 신임하여, 유영경 이 칠년 동안 득세할 동안 대북 일파는 조정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 다. 젊은 궁궐의 안주인 인목왕후(仁穆王后)는 그 후 첫아기를 낳았다. 그러나 그 아기는 아들이 아니라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였다. 임금의 첫 번째 꿈 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정실 소생의 원자는 아마 내 팔자에 없나보다." 임금은 이렇게 자탄해 보기도 했다. 어느덧 일년은 또 지나갔다. 임금은 인빈 김씨의 처소를 찾은 뒤에는 반드 시 인목왕비도 찾았다. 일년이 채 못가서 어린 왕비는 또다시 태기가 있었 다. 임금은 또 한 번 희망을 걸었다. 임금은 어린 왕비를 극진히 대하고 약방에 명하여 날마다 지황과 녹용을 다려다 바치도록 했다. 한해 후에는 과연 기다리던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났다. 임금으 로서는 정실(正室)에서 처음 낳은 아들이라고 기뻐하는 정도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영경은 이것을 보자 임금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때마침 임금이 재위 사십년이 되므로 "성성께서 재위 사십년에 중전이 처음으로 원자를 낳으셨으니, 사십년 축 하식과 아울러 크게 경축하옵소서." 하며 축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 축하식에서 유영경은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영창대군 만세까지 부르게 했다. 그 광경은 마치 세자가 영창대군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임금도 늙으막에 생긴 적자(嫡子)라 조신(朝臣)들이 세자를 제쳐 놓고 영창대군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별로 탓하지 않고 그저 만족한 미소로 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바라보는 광해군의 마음은 여간 쓰리고 아프지가 않았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임금의 몸에는 자주 병이 나기 시작하더니, 정미년(丁未年) 시월서부터는 그 증세가 매우 위태로와졌다. 광해군은 세 자로서 매일 임금에게 문안하러 들어갔는데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어가서 임금의 용태를 살폈다. 광해군이 이렇게 정성으로 부왕의 문병을 하는 까닭은 그때 항간에 유영경 일파가 세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새로 세자에 봉하려 한다는 소문 이 자자한 까닭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도 은근히 다음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말까지 들렸다. 임해군은 자기가 세자에 오르지 못한 것을 늘 불평 으로 지내다가 최근에 와서는 부왕이 병중에 있는 틈을 타서 실력으로 정 권을 잡아보려고 무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으로서는 잠시 도 마음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라에서는 매일 임금의 병을 낫게 한다고 산천에 기도를 했다. 그러나 임 금의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금은 하루바삐 전위(傳 位)를 하고 죽을 생각만 했다. 그런데 지금 전위를 하자면 아무래도 광해군 밖에는 없을듯했다. 인빈과 유영경 등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라고 하지만 영창대군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역시 광해군에게 전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임금은 하루 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許頊), 우의정 한응인 (韓應寅) 등을 불러 "벌써 일년 가까이 누워 있어도 별로 차도가 없소. 이제는 며칠을 더 살것 같지도 않고 또 아무래도 벅찬 나라일을 감당키 어려우니, 세자 광해군에 게 전위할까 하오. 세자도 이제 나이가 많아졌으니 그렇게 해보도록 하 오." 임금은 진정으로 전위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세 정승들은 "전하, 아직 전위하실 때가 아닙니다. 섭양만 잘 하시면 다시 일어나시게 됩니다." 하고 반대했다. 하지만 임금의 전위할 뜻은 굳었다. 대신들이 물러간 뒤 임금은 다시 전교 를 내려 원로대신들과 의논해서 세자에게 전위하도록 하라고 독촉을 했다. 한데 유영경은 임금의 이런 전교를 받들고도 당분간 더 좀 두고 본다고 원 로들에게 이것을 알리지도 않았다. 당시의 원로대신들은 이항복, 이원익, 이덕형, 이산해, 기자헌 등이었다. 후에 이 사실이 대북 일파에게 알려지자 이이첨과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 (李慶全) 등은 그때 영남에 내려가 있는 정인홍(鄭仁弘)에게 사람을 보내 어 유영경이 세자를 위태하도록 꾀한다는 진상을 알리고 어서 상소하라고 권했다. 이때는 벌써 이산해, 이이첨 등 대북 일파가 세자 광해군에게 붙어 세자빈 (世子嬪)의 오라버니 되는 유희분(柳希奮)과 밤낮으로 모여, 유영경을 몰 아낼 의논을 하고 있을 때인 것이다. 정인홍은 원래가 경골한(硬骨漢)으로서 두려운 것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 라, 남을 공격할 때는 언제나 선봉 노릇을 잘 했다. 그는 시골서 상소를 올리기를 《유영경이 임금의 명령을 비밀히 하고 여러 원로 대신들을 부르지도 않으 니 무슨 무서운 흉계가 있기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나이다. 나라의 일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옵니다. 옛부터 임금의 유고(有故)한 때는 세자 가 그 대리를 하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유영경은 혼자서만 비밀 히 처리하려 하니, 이는 세자를 위태롭게 하는 수작이옵니다.》 하고 정면으로 유영경을 공박했다. 그러나 임금은 아직도 유영경을 크게 신임하고 있어서 정인홍의 상소문을 보자 몹시 노하였다. "정인홍은 세자로 하여금 빨리 전위 받게 하려고 하니, 소위 신하된 자가 임금을 퇴위시키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다." 하고 꾸짖었다. 이후 대북과 소북은 서로 반박하며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소북 은 다시의 집권당이었다. 임금은 결국 유영경과 인빈의 주장대로 정인홍을 영해(領海)로, 이이첨은 갑산(甲山)으로, 이경전은 강계(江界)로 각각 귀 양 보내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세자 광해군이 문안을 드릴려고 하면 "네가 무슨 놈의 세자냐? 명나라에서 인준해 주지 않는 세자가 무슨 놈의 세자냐? 당장 물러 가거라!" 하고 호통을 쳤던 것이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목에서 피를 한 대야씩 토하고 밤과 낮으로 가슴을 주 먹으로 두드렸다. 그 후 대북의 거두들이 귀양을 떠난 지 며칠 안 되어 선 조는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등극하게 되었다. 이때 선조의 나이 는 오십칠세요, 재위(在位)는 사십일년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