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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글방 스크랩 기획,테마 초보산꾼 강 이야기 : 청계천 세번째 이야기 - 그리고 응봉산 해넘이
도덕산 추천 0 조회 140 13.03.07 20:17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초보산꾼 강 이야기 : 청계천 세번째 이야기

                         

언제 :  계사년 물오름달 사흘 해날

어딜 :  동대문 오간수교 - 안암천 합수점 - 정릉천 합수점 - 중량천 합수점 - 응봉 - 달맞이 공원

 

아침일을 보고 나니 오후 남는 시간...

무얼 할까 하다가 청계천을 걷고, 한강과 중령천이 합수하는 응봉산의 해넘이를 보기 위해 집을 출발한다.

 

청계천 걸어 간 길  -  네이버 지도

 

우리가 만나고 있는 청계천의 다리들은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어디에도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에 다리가 약속과 모임, 때로는 쉼터의 역활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얘기를 담은 동네이름이 다리이름이 되고, 때론 다리이름을 동네 이름으로 붙이기도 했을 것이고..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나라에서 관리한 만큼 크고 넓었을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의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초보산꾼의 청계천 마지막 이야기를 위해 동대문으로 떠나 본다.

 

2구간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오간수교(청계6가) - 종로구 창신동∼중구 흥인동

오간수문: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 (水門)으로 이것이 다섯개 있었으므로 오간수문이라고 하였다.

다만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하였다.

1908년 일제에 의해 아예 성벽을 걷어내고 다리를 새로 놓았고 , 이때부터 五間水橋라고 불렀다 

 

오간수문의 형태를 갖추어 놓았다.

도성안의 다섯 물줄기인 백운동천 옥류동천 삼청동천 쌍계동천 청학동천의 모든 물들은 청계천으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가서

다섯 개의 홍예 모양으로 물길을 낸 수문인 오간수문(五間水門)을 통하여 도성을 빠져나간다.
1926년 6월엔 순종황제의 국장 행렬이 이곳을 지나갔다

임꺽정이 옥에 갇힌 가족을 구한 뒤 오간수문의 쇠창살을 부수고 탈출했다는 전설이 있다.

 

오간수교 벽면에 각자해 놓은 준천가(濬川歌)

준천가는 조선시대에 청계천 바닥을 치워내는 과정과 모습을 역사의 고사와 곁들여 지은 채제공(蔡濟恭)의 문집《樊巖先生集ㆍ詩ㆍ伊州錄ㆍ濬川歌》에 기록된 내용으로

조선조 영조 임금 년간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느낀 감회를 적은 시문이다.

 

맑은내다리 - 종로구 창신동∼중구 흥인동,   청계천을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의 보도교

 

청계천에 끝없이 늘어 짓고 살았던 판자촌 사진이 붙어 있다 (1961)

 

다산교 茶山橋 - 종로구 숭인동∼중구 황학동

조선 후기 실학의 정점에 섰던 다산 정약용의 호를 따서 붙인 다산로로 이어지는  차도교
17년간의 유배속에서 만들어진 그의 실학정신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긴 세월을 묵묵히 견뎌내면서 얻은 ‘사리’와 같은 것이다.

다산은 신유박해에 연류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그 후 만덕산 중턱 초당에서 머물며 실학을 꽃피웠다.

 

청계천 제5경인 빨래터가 천안의 능수버들과 함께 어우려져 있다.

 

영도교 - 종로구 숭인동∼중구 황학동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아내 송비와 이별한 장소이며,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고종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50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진 다리인 영도교는 이들이 헤어진 뒤 다시 만나지 못해 ‘영영 이별 다리’, ‘영영 건너간 다리’ 등으로 불린 데서 유래했다.

자세한 내용은 초보산꾼 강 이야기 '안암천'편 '정순왕후 길 따라가기'편에서 자세히 만납니다.

 

이제부터 청계천은 단종의 아픔을 아는지 곡선을 이루며 흐르고 있다

영미교라는 이름의 나무다리였으나 성종이 살곶이다리와 함께 돌로 가설하면서 영원히 건너버린 다리,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永渡橋)라 이름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살곶이다리와 영도교의 석재를 뜯어 사용하여 영도교는 다시 나무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영도교를 다시 한 번 뒤 돌아 본다.

 

봄의 전령사 버들 강아지 풀?

 

황학이 날아왔다는 논밭 인근에 위치한 황학동의 이름을 딴 황학교 - 동대문구 신설동∼성동구 왕십리동

 

풍물시장으로 가는 이정표를 지나면

 

돌하르방이 있는 우측으로 건너 본다

 

바로 소망의 벽을 만난다

서울 시민 2만 명이 직접 쓰고 그린 타일로 꾸며 놓은 소망의 벽이 제6경이라고 한다.

소망의 벽’은 2만여 명의 시민들이 조그만 소망과 바람들을 가로, 세로 10cm의 정사각형 타일에 표현하여, 이를 길게 이어 붙여 하나의 큰 벽으로 만든 조형물이다.

 

‘소망의 벽’의 재미는 바로 시민들의 다양한 소망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소망들을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를 만큼 흠뻑 빠질 수 있다.

소망의 벽’은 단순히 2만여 개의 타일을 모아놓은 작품이 아니다. 바로 서민들이 바라는 소박하고 귀중한 꿈이 담겨 있는 것이다.

 

비우당교 - 동대문구 신설동∼성동구 왕십리동

세종 때 청백리인 하정 하정夏亭 유관柳寬이 살던 집 비우당(庇雨堂)에서 이름을 딴 차도교
조선 세종 때 청백리로 유명한 하정 유관 선생이 살던 집인‘비우당’을 본 떠 이름을 정했다.

비우당도 역시 초보산꾼 강 이야기 '안암천'편 '정순왕후 길 따라가기'편에서 자세히 만납니다

 

다음에 초보산꾼이 걷게 될 성북천(안암천) 합수점

 

존치교각을 보기위해 차도로 올라 본다

철거된 청계고가도로의 교각 세 개를 기념으로 남겨 놓은 존치교각과 터널 분수가 제7경이다.

1971년 완공한 청계 고가도로는 서울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5.65km 4차선 도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도로로 1970~80년대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청계천의 역사성이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이끈 윗세대에게 받치는 존경의 표시며, 그네들의 땀방울이다. 그렇기에 청계천 최고의 풍경으로 존치교각을 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청계천의 막바지에서 만나게 되는 의미 있는 교훈이다.

 

무학로와 연결되는 무학교 無學橋 - 동대문구 신설동∼성동구 왕십리동

조선시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지리를 살피던 중 왕십리지역까지 왔으므로 도로명을 무학로라 하였고,

여기서 다리 이름이 유래되었다

 

두물다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청계천, 사람이 적은 만큼 개울 다운 멋을 간직하고 있다.

 

두물다리에 있는 청혼의 벽

 

많은 열쇠가 달려 있다

 

 

두물다리 - 동대문구 신설동∼성동구 마장동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세워졌다고 해서 이름 붙은 보도교로 화합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두물다리 아래 부분

두물이 하나로 이렇게 만나 듯

청혼의 벽에서 두사람이 하나로 되어 이렇게 화합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듯하다.

 

맑은내다리에서 보았던 청계천의 판자촌의 모습이 보인다.

 

정릉천교(정릉천貞陵川.합수점)

성북구 정릉동 삼각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하월곡동에서 월곡촌을 만나 동대문구 신설동과 용두동 사이를 통과하여 청계천으로 흘러 든다.

 

다리로 올라 오면 청계천 문화관이 보인다.

청계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복원 전.후의 모든 과정을 볼 수 있어 청계천을 둘러 보지 않아도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영상과 입체적으로 전시 되어 있고 무료로 개방되고 있어 한 번쯤 둘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삼일교에서 보았던 수표교의 水標를 이 곳에서 볼 수 있었다. - 다리 앞에 놓여 있다.

 

二尺 ~ 十尺으로 표시 되어 있다.

 

다리 건너에는 아래에서 보았던 판자촌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고산자교(버들습지) - 동대문구 용두동∼성동구 마장동


고산자교엔 조선시대 30여년 동안 방방곡곡을 걸어다니며 실측조사로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리학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인근에 살았다는 역사적 숨결이 담겼다

청계천 복원 구간 제일 끝의 버들습지가 제8경으로 수생식물을 심어 놓은 자연생태 공간이다.

 

고산자교에 있는 곳 부터가 살곶이 길이다.- 살곶이 다리에서 유래를 알아본다.

 

청계천 생태습지

 

이제 내부순환로를 따라 계속 이어간다

 

중량천과의 합수점에 漁路 시설도 보인다.

 

중량천 합수점

 

이제 중량천을 따라간다. 앞에 보이는 다리가 성동교

 

보물로 지정된 살곶이 다리

지금으로부터 약600여년 전 태조 이성계는 틈날 때마다 사냥을 즐겼다.

당시 이성계가 사냥을 하던 곳은 현재 뚝섬 인근으로 활을 쏘아 화살을 맞은 새가 떨어진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자, 군사력을 좌우하는 군마(軍馬)를 기르던 목장인 살곶이벌(箭串坪),

지금 성동·광진·중랑구 등 한강에 맞닿아 있는 서울 동쪽 평야지대는 조선시대 군사 요충지였다.

 

지금의 전곶(箭串·살곶이)교, 마장(馬場)동, 면목(面牧)동 등 남아 있는 지명에서 이런 흔적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새 도로명 주소 사업으로 살곶이길, 마조로 등 길 이름이 다시 생겨난 덕에 옛 흔적이 조금이나마 더 복원된 셈이다.

자료 :  http://서울신문.kr/news/newsView.php?id=20120613021002

 

이제 한참 공사 중인 응봉교와 응봉산이 보인다

 

응봉산에 가기 위해서는 응봉역을 건너야 한다.

 

응봉역을 건너 오면 응봉산이 보인다.

 

우측으로 가야만 응봉산에 오를 수 있다.

 

응봉산 정상

 

마침 남산 아래 매봉산으로 해넘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겨보면

 

증거사진 하나는 남겨야지

 

광진구 방향으로 한강

 

응봉역과 중량천

 

중량천과 한강이 합수되는 한강을 보면서 내려가는 아름다운 하산 길

강변북로를 차로 달릴 때 본 응봉산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막상 응봉에서 본 한강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높지 않은 탓에 내려가는 길도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어 최대한 천천히 내려 왔다.

아침 해돋이도 좋고, 해넘이도 좋고, 달맞이도 좋고...

응봉역에서 20분정도면 오를 수 있고 달맞이 공원과 옥수역까지해도 3~40분이면 아름다운 한강과 서울을 조망할 수 있다.

 

응봉산을 내려와 뚝섬길을 걷다보면 달맞이 공원봉이 나온다. 두물이 만난다는 뜻의 두무개길을 오르면

 

전망명소에서 옥수역 방향으로 한강 야경

 

중량천 합수점으로 이어지는 한강의 야경

 

옥수역으로 내려와 오늘의 일정을 마감한다.

 

 

초보산꾼의 청계천 마지막 이야기

 

청계천을 걸으며 옛 선조들의 청계천에 대한 애착을 느껴 보았다.

현대인에게 맞게 청계천이 복원되어 누구나 걷고 싶은  길이 되고,

외국인들에게도 많은 관광의 대상이 된 것도 하나의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옛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가 걷고 싶으면 되는 것이다.

 

굳이 환경론자 들의 청계천 복원의 방식에 대한 아쉬움도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만족하고 걸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청계천 초입에 있는 팔석담(八石潭)처럼 8도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의미를 더해주고

광통교처럼 옛 것에 나름 충실하려 했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단종과 정순왕후의 돌아 올 수 없는 다리인 영도교에서 이별이 아닌

언젠간 어린 단종이 다시 우리 곁에 돌아 오리라는 희망을 나는 얘기 하고 싶었다.

멀쩡한 돌다리를 경북궁을 복원한답시고 뜯어 쓰는 바람에 나무다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살곶이 다리가 이제는 전설을 얘기하고

청계천에 기대어 질긴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당시 판자촌의 옛 그림에서

지금도 결코 나아지지 않고 있는 우리 서민들의 질곡된 삶의 무게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에

옛 추억을 얘기하기에는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먼 옛날의 예기가 아니고 불과 수십년전의 청계천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청계천의 얘기도 말없이 오늘도 흐르고 있었다.

 

초보산꾼의 강이야기는 '안암천'편 '정순왕후의 길 따라 걷기'에서 뵙겠습니다.

 

그리고 청계천 두번째 이야기에서 던졌던 질문, 청계천의 물을 어디서 끌어다 쓸까요? 아래글에서 만납니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도     덕  산

-----  아래 -----  필요한 분만 보세요

 

청계천에는 잠실대교 인근 자양취수장에서 퍼올린 9만 8000t의 한강물(2급수)과 12개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지하수(1급수) 2만 2000t을 합쳐 하루 12만t 정도가 흐르게 된다.
취수장에서 퍼올린 물은 6㎞의 관로를 따라 뚝도 정수장으로 흘러 정수, 소독 등의 처리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이 끝나면 다시 11㎞의 관로를 따라 청계광장, 삼각동, 동대문, 성북천 하류 등 4개 지점으로 나눠져 흘러든다.

이들 지점에서 폭포, 분수, 터널 등을 통해 청계천으로 유입된다.

한강과 지하철역에서 하루 12만t의 물을 끌어올리려면 엄청난 전력이 필요하다. 자양취수장과 뚝도정수장에는 각각 150마력짜리 모터펌프 4대와 대형 변압기가 일년 내내 가동된다.
이에 필요한 전기료는 연간 8억 7000여만원, 하루 238만원이다. 가구당 1년에 40여만원의 전기료를 낸다고 치면,2000여가구의 아파트 단지가 쓸 전력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다 청계광장 ‘슈터 분수’와 하류 쪽 ‘리듬 분수’ 등 각종 수경시설과 분수도 20여개에 이른다. 군데군데 바닥조명도 설치돼 밤을 빛낸다.

청계천을 유지하는 비용은 전기료와 인건비를 합쳐 연간 18억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수자원공사가 한강물을 끌어다 쓰는 비용을 내라고 하지만 서울시는 “다시 한강으로 흘려보내는 물이니 돈을 내면 되돌려받는 것이냐.”며 물값을 내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물값을 낸다면 유지비용과 맞먹는 18억원쯤 될 것으로 보인다

 

자료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5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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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08 12:53

    첫댓글 이 좋은 길을 혼자서만 가셨다니~~~ 안타깝네요.. 도덕산님~~
    이 좋은 길 같이 가고픈 분들도 많으실텐데~~ 미리 예정공지방에 올려 주셔서 같이가요??

  • 작성자 13.03.08 22:34

    항상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서울에도 조금 만 관심을 가지면 너무도 좋은 곳이 많이 있습니다.
    열심히 찾아서 한번 떠나 보겠습니다.

  • 13.03.08 18:14

    나름 의미있는 ... 발걸음. 잘 봤어용^^

  • 작성자 13.03.08 22:35

    오전에 일이 있어 한강기맥 같이 하지 못했네요.
    명성지맥에서 뵙겠습니다.

  • 13.03.11 10:36

    봉이김선달ㅋㅋㅋ 물값내라는 수자원공사나.. 안내고 버팅기는 서울시나..
    긍데 공사비는 그렀다치고.. 연간 18억원의 효과가 있겠지요? 시민의 건강과 관광..

  • 작성자 13.03.12 00:21

    공작산님 뵌지가 너무 오래되어 정말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댓글로 나마 보게 되어 반갑네요.
    겨울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 걸었는데, 사계절 청계천의 모습을 기대하게 합니다.
    지금도 열심히 산중에 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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