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計와 時間의 貯蓄
둘러 짧은 한 때를 내 것으로!
■時計가 없을 때나 흔할 때나—.
한 세기 전만 해도 국내에는 집 안에 시계 걸린 문화 주택이 거의 없었다.
아직 라디오도 보급되지 않아 시간을 알려면 큰 거리 번화가에 나가 공공건물 첨탑에 장식된 대형 시계를 보기 일 수였다.
純宗 隆熙4년 우리나라가‘일진회의 책동’으로 한일 조약이 조인된 2년 후
우리국민에게는 차라리 시계를 몰라 편했다. 시시각각 돌발하는 치욕적인 불상사를 알지 못 했으며 시간 가는 줄을 알려 하지 않았다.
나라 잃고 문화를 수탈당한 지옥에서 듣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얼마나 목숨을 조일 것인가를 생각하면 뿔 빠진 황소같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실에 모두는 다분히 시계 없는 불편함을 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은 어떤가? 웬만한 집에는 내실과 거실, 식당, 주방, 물치장, 화장실에까지 기둥시계, 탁상시계요, 가족들도 유치원 아이까지 패션 감각에 뛰어나 외제 팔뚝시계로 눈부시다. +5
있는 집 어린이들은 시계가 달린 싸인 펜이나, 값비싼 스마트폰으로 시계 투성이 일 때, 그 부모는 외출복에 맞는 로우렉스, 오메가… 등 몇 개인지 모를 만큼 너무너무 사치스럽다.
이 시대는 시계가 일종의 사치성 액세서리지 시간에 대한 애착은 무관하다. 아니, 현대인은 시간관념이 지극히 희박한 상태다.
■時間, 아무도 征服할 수 없다—.
영국 런던의 대표적 관광명소 ‘웨스트민스터 톰’이라는 대형 시계탑 ‘빅 벤(Big Ben)’이 ‘엘리자베스 타워’로 개명된다.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60주년을 맞아 여기서도 ‘대 시계탑’에 대한 의미가 희박해졌다. A. S. 그리보에도프는 “행복한 사람은 시계에 관심이 없다“ 고 했다. 그리고 P. N. 오비디우스는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키고 만다.“고 밝혔다. 시간은 생명이다. 생명이 시간이며 인생이 시간이다.
이 시간은 아무도 정복할 수 없다. 언제나 노동의 현장은 어떻게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된다. 진리의 발견을 위해서다. 이는 시간의 소비 아닌 활용이다. 이의 활용 방법이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로 이어진다.
나의 정원에서 생각하는 L. N. 톨스토이 백작ㅡ. 사람은 자기 행복을 위해 투쟁하듯 산다. 산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행복을 바라며 이를 얻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따라서 행복이란 만족이나 고통을 통해 모두 행복에의 노력이다. 사람은 인생을 자기 개인의 생활에서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바라는 행복은 오직 자기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만 진실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생활은 자기 것과 같지 않고, 다만 자기 생활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참 人生의 意味란 무엇인가—?
L. N. 톨스토이 백작의 `인생론’은, 그렇듯 최초의 부분에 있어 죽음의 불가피와 육체적 개인생활의 행복의 불가능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을 갖는다. 그에 의해 인생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는 ‘시간은 한 순간도 쉬는 일이 없는 무한의 움직임‘이라고 했다. 인생의 의미란 어떤 것인가? 이 의문은 일체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극히 간단한 의문이다.
“오늘 내가 하려고 하는 것에서 무엇이 생길까? 내일은 무엇을 할까? 나의 생애는 장차 무엇을 생성하게 될까?”
“무엇을 하기 위해 나는 살아야 되는가? 무엇을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바라며 무엇인가를 위해 무언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불가피한 힘으로 눈앞에 닥쳐오는 죽음을 멸망시킬 수 없는 인생의 의미는 과연 있을 수 있는가?”
모든 의문의 의미는 하나일 뿐이다ㅡ. 옛 사람의 지식은 앞서의 의문에 대해 두 방향에서 답변을 내 놓았다. 하나는 부정적이며, 하나는 긍정적이다. 부정적인 쪽에서는 이 의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간을 얻는 이는 일체를 얻는다. 이 의문을 우리는 덮어놓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인생을 진지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경험적인 지식이 그렇고 그 극단에 서는 것이 수학(數學)이다.
긍정적인 쪽에서는 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에 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순리적 지식일 뿐, 그 극단에 서는 것이 형이상학이다.
■自然이 보여준 나의 모비 딕—.
나는 그렇게 기다리며, 바라며ㅡ, 또한 모색한다. 나의 베란다 네모진 유리창 밖으로 햇볕에 반짝이는 한 마리 백경, 모비 딕을 보면서 ground work를 위해ㅡ.
나의 캔버스는 네 겹의 숲이다. 세 개의 골짜기로 특색을 이룬 작은 산은 나의 알프스다. 주택들이 서 있는 앞자락은 소나무와 수풀의 예쁜 언덕, 그 뒤로 고개를 내민 부분은 환한 은색이다
. 앞 켠의 푸르름에 염색된 꿈 빛과 달리 두 번째 자락은 별 빛이다. 백양 숲이 옛 신전에 임립한 주랑(柱廊)이거나 여인의 실크 로브다. 그 뒤에 늘어선 떡갈나무들….
그리고 맨 뒤에 산의 능선을 형성한 잡목 숲의 푸른 성곽이 더욱 신뢰감을 보인다. 이렇게 개개의 전형을 잃지 않은 심벌리즘은 내 앞에 늘 감각적 사중주로 인광(燐光)을 태운다.
나의 백경(白鯨)은ㅡ 한 폭의 풍경화로, 유화적 수채화 적 산수화적 혼돈과 조화로 괴롭고 추한 빈사의 모습을 햇볕에 반사해 빛과 그늘로 저항적인 시간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한다.
창밖 나의 캔버스는, 六月에 더욱 가식 없는 체형으로 미와 사랑과 조화를 30〬 의 또렷한 윤곽에 담아 이즐(畵架)을 장식한다.
■廣闊하고 豊饒로운 生命力—.
도시의 소란과 군중의 잡음에 시달리지 않으려는 눈에는 하지(夏至)가 오는 시간 위에 느끼는 빛의 약동, 색채의 환희, 자연에 대한 감격으로 코스모스를 의식하게 할만하다. 영혼의 힘이다….
화폭 안 작품은 원뢰(遠雷)와 소나기에도, 그린 실크 로브를 걸친 고전적인 풍만한 몸으로 나를 애무하는 온유와 희망을 심벌리스트의 충실한 자유에서 느낀다.
내일 운명을 다할지라도 교착에서 해방된 광활하고 풍요로운 생명력을 통해 그 조용함과 미를 기리기 위한 나의 글에 그를 우러르는 동상과 비문으로 화려하게 머문다.
하늘 높이 견본주택의 분양광고 애드벌룬처럼 뻗어나는 광명사상의 욕구가 늘 신선해서다. 언제 어느 때나 달려가도 신비와, 자유의 생명력, 그리고 감싸는 기교의 힘으로 숲의 시간은 나를 맞아 진리를 발견하게 한다.
그 신선한 숲 향기는 창조와 사랑으로 융화된 하나의 평화를 시사한다. 그리고 거기 나는 하나 뿐인 흰 고래의 생명 있는 언어를 즐겨 듣는다...
반짝이는 eazsel 위의 세 의지ㅡ. 그렇게 나의 모비 딕(白鯨)은 번쩍이는 비늘과 청신함과 또 웅혼한 생명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내가 보는 나의 고래는 빈사의 눈빛에서 피로를 감추지 못한다.
■商業主義의 拜金 崇拜思想—.
자연의 깊은 고요, 그리고 그 안에 유유히 울리는 리듬과 농도 짙은 채색의 프리즘으로 환상에 물든 우주의 화석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원에 대한 불가사이한 신비의 빛과 힘이다.
폭풍우가 잠잠할 때, 모비 딕이 나타나자 포경선 피코트호의 선원들은 절반 미쳐 있었다. 네 척의 작은 쪽배로 달려가 고래 등에 던지는 무자비한 작살의 창, 창, 창…. 모비 딕은 한꺼번에 분노가 치민다...
백양나무의 집중 서식으로 그렇게 내가 부르는 [모비 딕]은 작살 아닌 도저에 할퀸 거대한 빈사의 짐승이다. 아파트와 학교 일반 건물들이 산자락을 털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주의 배금 숭배사상이 경관(景觀)을 파괴해 커먼즈(共有地)의 비극을 충동한다. 다들 비웃겠지만 내게는 나의 문학의 거점인 융프라우요, 몽블랑이요, 피레네가 아니겠는가….
로맨티시즘 문학에 의해 유럽 알프스의 산악들이 알려졌어도 나의 이름 없는 캔버스의 모비 딕은 나를 황홀하게 할 뿐 시적 정조를 한 입 머금은 이 숲의 진가에 다들 어둡다.
토양열화, 사막화 현상의 경제적 메커니즘을 왜 모르는가ㅡ? 시간은 지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資源 破壞를 보는 地球 危機ㅡ
자원(資源) 파괴가 자행되는 지구의 위기ㅡ 왜 우리 둘레와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에서 심각한가? 풍식(風食)과 수식(水食)에 직면해 있다. 철저히 서식지를 잃어 가는 식생(植生)의 수난! 나지(裸地)로 전락하는 불모의 지표...
우리 또한, 나의 캔버스부터 무섭게 형질이 달라지고 있다. 국토 개발이란 이름으로 황폐화되고 있는 내 창 밖의 한 점 풍경화! 물질문명의 풍요로운 지표(指標)에 따라 또한 화학물질로 오염되는 빈사의 흰 고래는 말이 없다.
이에 나는 그렇게 기다리며, 바라며ㅡ 모색한다. 모비 딕의 내일을 위하여…. 소설가 허먼 멜빌의 격조 높은 해양문학 [모비 딕(白鯨)]ㅡ. 환경(生態系) 보전의 고전적 지침서다.
포경선 선원들의 광적인 작살 공격에 흰 고래는 역린(逆鱗)을 견디지 못했다. 분노에 치우쳐 모비 딕은 보트들을 날리고 거대한 포경선 피코트 호에 돌진해 단숨에 부수고 만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아무도 없는 바다……. 다만 이스마엘 혼자 남아 퀴퀘그의 관을 타고 한 주일에 걸쳐 표류를 계속한다. 이를 보더라도 지구환경 보전을 위해 생태계를 더 위협해서는 안 된다.
ground work 사업을 펴지 않겠는가! 우리의 자발적인 코디네이트로 지역 활동을 강화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ground work 運動의 勞力을—.
나의 희망 모비 딕의 심벌리즘이 보이는 아름다운 사중주ㅡ.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내 마음의 행복을 의식할 수 있는 내 베란다 밖에 걸린 한 폭의 수채화 캔버스는 지금 비에 젖어 있다.
나를 향해 빈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큰 바다의 백경은 스스로 온유한 life style을 지향(志向)한다. 그 의지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져 이해와 인식을 깊게 하는 영혼의 생명이 아니겠는가!
자연을 위해 정보, 지식의 습득, 실천에 묶이는 학습기회가 이와 함께 제공돼야겠다. 그 같은 ground work 운동의 노력 없이 주위의 아름다움을 보전하기 어렵다.
경험적 지식에서 사람은 천체의 화학적 조직을 알며 천체 운행의 이치를 알고, 인류의 기원을 알고, 무한소의 미세포의 꼴을 안다. 이 방면의 지식이 인생의 의미 여하라는 의문에 답하려는 것의 하나다.
J. 스위프트는 “시간만큼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듣는 설교사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계를 사랑해야 한다. 빛처럼 공기처럼—. 그래야 시간 안에 부단히 울리는 설교사의 절규에 귀기우릴 수 있다
‘영혼의 생명’에 대한 잃어버린 시간은 곧 죽음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