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5주차도 모두 끝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6주차를 맞이했다. 6주차는 퇴소를 준비하는 기간이라서 힘든 훈련은 없었다. 이 때 주로 있었던 건 1, 2주차 때 주로 했던 영내 교육과 우리 다음에 들어올 훈련병들이 이 곳을 사용할 수 있도록 물품 정비와 대청소, 그리고 작업이었다.
11월 1일에는 훈련소 창설기념 체육대회가 있어서 교육이 없었다. 그 날 훈련소 전 병력들이 종합 연병장에 모여서 체육대회를 준비했고, 일부 병력들은 체육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나머지 병력들은 구경하며 응원을 했다. 나야 체육대회에 누가 무엇을 하는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응원석에 앉아서 노래나 따라 부르거나 혼자 멍하니 있었다. 울 동기들 중에 엽기적인 테크노춤으로 인기를 모았던 놈들(2명)이 이 날에도 유감없이 그들만의 춤 솜씨를 발휘했다. 그들이 나섬으로써 훈련병들이 한명 한명 테크노 춤을 추기 시작했고, 연병장은 테크노의 열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훈련소장을 처음 볼 수 있었던 것도 이 날이었다. 얼굴은 자세히 못 봤지만, 체육대회 축사를 하거나 시상식이 있을 때, 저 사람이 소장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훈련소장 계급이 소장(별 두개)인데, 어떤 조교는 군생활 2년 2개월 동안 별 구경하기 정말 힘들거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그렇기야 하겠지만, 나는 자대 가서 사단장과 같은 건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육군 훈련소장은 내가 있던 부대의 사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분이었다.
다음날에 우리 중대 훈련병들은 대민 지원을 나갔다. 그 날 우리가 밖에 나가서 한 일은 벼를 베고 그것을 묶는 일이었다. 11월초라서 날씨가 쌀쌀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벼를 베기 위해 전투화를 벗고 바지를 걷으며, 논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진흙을 밟는 순간 발이 너무나 시려웠다.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주를 편하게 지내길 기대했던 우리들은 난데없는 대민지원으로 생고생(?)을 해야 했다. 대민지원을 나가면, 먹을 걸 많이 준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 날은 해당사항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그 날 먹을 수 있었던 건 달랑 박카스 한 병뿐이었다. 마치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듯한 기분이었다. 젠장... 돌아오는 길에 다른 연대 훈련병들이 1주차 경계교육을 받고 돌아가는 걸 보았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내가 너희들이라면 자살한다.'는 식으로 우리들끼리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 날 저녁 우리들은 전투모, 전투복, 그리고 야상에 이등병 계급장을 실로 달았다. 이제 우리들도 훈련병이 아닌 이등병이 된다는 마음에 모두들 기쁜 하루를 보냈다.
목요일에 퇴소식이 있었고, 금요일은 다른 부대로 배출되는 날이었다. 이상하게도 우리 소대 중 내가 속해있던 2분대가 그 날 취사지원을 나가는 바람에 나는 퇴소식 대신 열심히 취사장에서 작업을 했다. 얼어붙은 고등어 떼어내랴, 튀긴 돈까스 개수 세랴, 쌀 가마니 트럭에 옮기랴, 바닥 청소하랴...... 일은 힘든 편이었지만, 재미는 있었다. 두번째 나가는 취사지원으로 취사병들이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 때는 가을이 가고 겨울이 시작되려는 시점의 11월 초였다.
그날 밤, 우리들이 어디로 간다는 구체적인 얘기는 없었지만, 훈련소에 남아서 2주 동안의 박격포 교육을 받는 훈련병들의 명단이 공개되었다. 이에 포함된 훈련병들은 또 논산에 남아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박격포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60mm, 81mm, 4.2인치 박격포와 90mm, 106mm 무반동총 등이 있었다. 60mm로 배정받은 애들은 그저 그랬고, 81mm 나 90mm로 걸린 애들은 이제 죽었다는 울상을 지었으며, 4.2인치나 106mm로 가는 애들은 그래도 그 중에서 제일 편한 곳으로 간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다행히도 나는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외에 기차타고 갈 병력과 버스타고 갈 병력들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어느 부대로 간다는 내용은 우리들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그 대신 알 수 없는 코드가 우리들에게 발표되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는 걸로 되어 있었다.
금요일. 드디어 다른 부대로 배출되는 날이 왔다. 그 날 오후에 연무대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는데, 마치 여행을 가는 기분이었다. 어떤 간부가 말하기를 내가 속해 있는 코드를 가진 훈련병들은 경남 창원으로 간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경남 창원. 우리가 정말로 그리로 갈까?
기차가 연무대역을 출발하여 대전역에 도착했고, 우리들은 내려서 마산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다. 갈아탄 열차에는 사제 열차라서 민간인들이 많이 있었고, 음료수나 과자도 팔았다. 우리를 통제하던 호송병은 음료수만 마시라고 했다. 음료수가 어디냐? 나는 기차에 있는 동안 너무나 마시고 싶던 음료수를 사서 마음껏 마셨다.
그 때 내가 마셨던 음료수는 포도맛 봉봉이었다. 군입대한 이후로 처음으로 내 돈으로 직접 사먹는 순간이었고, 너무나 달고 맛있었다. 만약에 과자도 같이 살 수 있었다면, 아마 이등병들은 잔치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은 호송병들에게 통제를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음료수로 만족했다.
기차 안에 전화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등병들은 어떻게든 가족 또는 애인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다. 그들은 호송병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자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몰래 왔다갔다 하곤 했다. 어떤 이등병은 아버지뻘 되는 분에게 휴대폰으로 전화 한통 해도 되냐고 묻기도 했다. 그 당시 아저씨께서는 흔쾌히 전화기를 빌려주셨다. 나도 집으로 전화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창원역에 도착해서 내리게 되었다. 훈련병에서 이등병이 된 우리들은 이로써 논산 육군훈련소 소속에서 다른 부대로 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