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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헌종택의 외부 모습 |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580-2번지 에 위치한 묵헌종택 .
1991년 문화재자료 제245호로 지정된 이 종택은 묵헌 이만운이 죽은 뒤 유림의 뜻에 따라 조선 순조 20년(1820)에 세운 건물이다.
묵헌 이만운(1736∼1820)은 퇴계, 한강, 문익공을 잇는 정통 성리학자로 우리 국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증보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한 인물이다.
원래 이 집은 대문채와 방앗간채도 있었으나 지금은 사랑채와 정침, 사당이 남아 있다. 정침과 사랑채는 문익공 이원정의 아들인 이한명(1651∼1681)이 조선 현종11년(1670)에 세웠고, 사당은 순조 20년(1820)에 유림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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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헌종택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적힌 표지판 |
사랑채는 앞면 10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가운데 중문이 없이 10칸이 연이어 있는 매우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정침은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로 U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배치형태가 개방적이고, 지역적인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묵헌종택은 현재 광주이씨 종중 소유로 1996년 건립된 3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으로 대문채를 들어서면 'ㅡ'자형의 사랑채와 '凹'자형의 정침이 '튼□'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의 우측 후면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3량가로 세워 마룻대를 받는 간결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나지막하게 조성한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전라도 임피에서 칠곡으로 이주한 한 광주이씨는 부근의 유력 가문과 혼맥을 맺었다.
선산지방의 신천강씨·선산김씨, 성주지방의 벽진이씨, 대구의 인천채씨 등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나아가 매원·석전 등지로 거주 범위를 확산시키면서 기반을 다져갔다. 재지적 기반을 굳게 다진 광주이씨 칠곡파는 17세기 들어 석전파에서 3명의 과거 합격자가 배출됨으로써 명문의 반열에 올라섰다.
학문적 연원은 크게 한강 정구-석담 이윤우-낙촌 이도장-귀암 이원정-정재 이담명-묵헌 이만운으로 이어지는 가학의 흐름과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제산 김성탁-구사당 김낙행으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계승했다.
석전파는 17세기 들어 이도장·이원정·이담명 3대에 걸쳐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
광주이씨는 생원 이당을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 둔촌 이집은 고려 말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문장이 훌륭하고 지조가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 관직에 진출했는데, 이색·정몽주·이숭인 등과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광주이씨는 이집의 아들 대에 이르러 가세가 급격하게 신장됐다. 아들 지직은 태종대에 청백리로 선정됐고 벼슬은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이지직의 아들은 장손·인손·예손이었고, 손자로는 극배·극감·극증·극돈·극균 및 예손의 아들 극기·극견이 있었다.
이지직의 아들 세 명과 손자 가운데 극견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지직의 동생 지강과 지유가 문과에 급제했고, 지유의 아들 중원과 정원 역시 문과 급제하였다. 조선초 광주이씨가의 연이은 과거급제에 대해 소위 '삼자팔손구문과'란 말이 회자됐다.
광주이씨 칠곡파의 선조는 경기도 광주의 이족이었다.
그들은 고려말 선초에 사족으로 성장했다. 그 뒤 이극견의 아들 이지가 경상도 팔거현 상지촌에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던 최 하의 사위가 되고, 뒤이어 처향이 있는 남으로 내려가면서 칠곡과 인연을 맺게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입향조는 이 지다. 칠곡에서 정착한 이후 지의 아들 덕부, 그 아들 준경, 준경의 세 아들 명복·희복·광복으로 이어졌고, 광복의아들인 석담 이윤우로 이어진다.
칠곡에 정착한 가문이 발전한 것과 관련해서 이극견의 처가인 전라도 임피에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이극견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처가인 창녕성씨가 있는 전라도 옥구군 임피로 피하였다가 그곳에서 죽는다. 때문에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에 그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첫째 아들 반, 손자 영부의 묘소도 그 곳에 있다.
이곳은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극견의 장인이 돌아가셨을 때 이 자리에 묘를 쓰려고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장하기 바로 전날 밤 극견의 부인이 밤에 몰래 가서 광중에 물을 채워두었다고 한다.
다음날 사람들이 묘를 쓰려고 가보니 그 자리에 물이 차 있어 쓰지 못하고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뒤에 성씨부인은 남편이 죽자 그 곳에 장례를 지냈고, 후에 칠곡으로 이주한 후손들이 번창한 것은 성씨부인의 지혜 때문이라고 한다.
묵헌종택은 이만운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현재 종가를 지키는 사람은 종녀 이계주씨(37년 생). 이계주씨는 4대 한림을 배출한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계주의 아버지는 딸만 셋을 남기고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이계주의 어머니는 의성 산운 영천이씨로 2001년 88세로 작고앴다. 이계주씨는 종녀로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 9년 전 오랜 서울 생활을 접고 낙향해 현재 이 종가를 지키고 있다.
이계주씨의 아버지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고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지금도 이계주씨는 아버지의 생사를 모르기 때문에 사망신고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요즘도 종녀는 새벽미사, 저녁미사를 다니며 집에서도 기도하는 생활이 일상화 됐다. 하지만 앞으로 자신을 대신해 묵헌종택을 지켜줄 적합한 양자를 맞고싶은 바람이 있다.
"종가를 지키는 것이 조상님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계주씨는 요즘도 교수들이 종택을 방문해 묵헌 할아버지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들려준다고 한다. 특히 교수들이 묵헌이 그 시대에 아동학을 연구했으니 대단한 학자라고 평가하는데 대해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비록 남겨진 자료는 없지만 종가를 지키는 일과 할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자랑스럽기만 하다는 종녀.
기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묵묵히 묵헌 종택을 10년째 지키고 있는 그의 생활을 보면 종가를 지키는 현재 삶이 어떠한지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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